우아한 연인
에이모 토울스 지음, 김승욱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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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적 분위기와 개인의 삶은 불가분의 관계다. 암울한 시대에 홀로 빛나는 삶은 없다. 겉으로는 그렇게 보일지라도 그것은 어느 정도의 기만을 품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IMF가 오기 전 청춘을 경험한 90년대 학번이 90년새들보다 더 진보적이라는 얘기에는 설득력이 있다. 경제적 부흥과 청춘이 만나 만들어지는 서사는 빛난다. 


미국의 대공황기가 끝난 1930년대 후반의 부유한 청춘들에 대한 얘기는 그래서 유독 눈길을 끈다. 이미 피츠제럴드가 기민하고 화려하게 여러번 이야기했지만 그 시대를 직접 경험하지 않은 전직 투자전문가인 에이모 토울스가 데뷔작으로 비슷한 주인공들을 불어내어 그럼에도 전혀 식상하지 않은 <우아한 연인>을 썼다는 사실이 경이롭다. 시대의 흥청대는 분위기와 통통 튀는 젊고 아름다운 인물들의 욕망,좌절, 사랑, 배신에 대한 묘사가 놀랍도록 섬세하고 생생해서 마치 그 시대 안으로 저도 모르게 초대된 듯한 느낌이다. 


주인공이자 화자인 케이티 콘텐트는 그 자신이 물론 서사의 한가운데에 있긴 하지만 <위대한 개츠비>의 닉 캐러웨이 같은 명민한 시대의 관찰자이자 증언자의 역할을 기꺼이 맡는다. 그녀의 시선을 통과한 그 시대는 처절할 정도로 아름답기도 하고 그 자본주의와 온갖 겉치레의 사다리에 기어올라가려는 적나라한 욕망의 오점들로 오염되어 있기도 하다. 특히나 이런 이율배반적인 모습은 마치 개츠비의 형제처럼 보이는 팅커 그레이라는 인물을 통해 극적으로 형상화된다. 케이티와 룸메이트 이브는 팅커 그레이와 우연히 만나 친구이자 묘한 삼각 관계에 얽혀들며 이 수수께끼 같은 청년이 속한 맨하튼 상류 사회의 화려한 사교계와 그 안의 내밀한 모습을 경험하게 된다. 작가는 시종일관 결국 이 팅커 그레이라는 인물이 구현해 낸 그 복합적인 삶의 기만을 통해 우리가 진실로 원하는 것과 필요한 것을 종종 혼동하는 과정에서 놓치는 본질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했던 느낌이다.  계층의 사다리의 상부에 비교적 쉽게 올라가고자 하는 마음이 타인의 필요와 맞아 떨어질 때 어떤 비극을 연출하게 되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사실 낯선 것이 아니다. 에이모 토울스의 미덕은 그 골조를 통해 완성해 낸 건물 자체의 수려한 경관일 것이다. 진부할 수 있는 테마가 전혀 식상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 또한 그의 이러한 능력에서 나왔을 것이다. 


놀라운 점은 사십 대 후반의 남성 작가가 20대 중반의 여성의 마음을 완벽하게 대변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나 우연히 부잣집 친구들과 어울리며 그들의 파티에 참가했을 때의 케이티의 그 시린 마음을 여러 다양한 경로로 경험한 기억이 있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의 어리석은 치기에 완벽하게 몰입할 수도 없었다는 사실은 남은 중년의 삶에 유일한 위로가 될까? 에이모 토울스는 그 어리석지만 찬란한 아둔함의 정서가 반드시 청춘과 만나야 함을 정확하게 알아차린다. 실수하고 넘어지고 남용했던 시간들은 반드시 그때였기에 가능한 지점이 있다. 망각했던 시간은 진저리나는 그리움으로 돌아온다. 그래서 '중년의 끝자락'에 무사히 안착한 케이티가 회고하는 이십 대의 느낌은 공감을 얻을 수밖에 없다. 이십 대에서 사십 대로 선형적으로 진행하는 이야기가 가지지 못하는 어떤 회고적 시선은 작가가 가질 수 있는 최선의 것이었을 것이다.


눈물겹도록 무의미하지만 아름다운 장면이 많다. 특히 케이티의 남자친구가 이웃이 치는 피아노 소리에 이끌려 신청곡을 적어 끊임없이 종이 비행기를 그쪽으로 날려 보내려는 무용한 시도에 대한 장면, 셋이 본격적인 삼각 관계에 돌입하기 전 연말을 마무리하고 나란히 새해를 맞이하며 함께 노래 부르고 눈싸움을 하는 정경이 참 예뻐서 기억해 두고 싶다. <위대한 개츠비>처럼 읽고 나면 왠지 마음이 저릿해지는 청춘의 이야기다. 뒤돌아보고나서야 깨달을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찰나의 이야기는 언제나 이처럼 공명한다.  


금박의 제목이 빛나는 우아한 분홍색의 표지와 핑크빛 가름끈은 책의 형식이 아니라 이야기의 본질인 것처럼 보일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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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3-16 11: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크- 블랑카님, 이 좋은 소설을 이제야! 드디어! 읽으셨군요.
저는 케이티를 우연히 만난 팅커가 케이티에게 ‘그래, 여기에요?‘ 라고 묻는 장면을 너무 좋아해요. 케이티가 찾아가는 비밀 장소가 있다는 말을 일전에 했던 걸 기억하고 말이지요.

에이모 토울스는 이 작품 후의 작품 [모스크바의 신사]도 매우 좋아요, 블랑카님. 이 책을 이렇게나 좋게 읽으셨다면, 모스크바의 신사도 매우 좋아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blanca 2020-03-16 17:02   좋아요 0 | URL
아, 안 그래도 냉큼 샀어요. 이 작가 대체 뭐죠? 사십 대 후반에 이런 작품을 데뷔작으로 쓸 수 있다니... 안 그래도 <모스크바의 신사>도 냉큼 샀어요. 이 작가 대체 뭐죠? 사십 대 후반에 이런 작품을 데뷔작으로 쓸 수 있다니... 그리고 왜 이렇게 전형적으로 멋있는 남자들이 많이 나오고 또 다 여주인공 좋아하고. 이렇게 쓰면 되게 유치한 것 같은데 전혀 그런 분위기도 안 풍기고. 좋은 작가는 정말 차고 넘치는군요.

비연 2020-03-16 12: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모스크바의 신사>를 읽고.. 이 책을 냉큼 주문했었는데 아직 못 읽고 있네요. 다들 호평이신데.. 얼른 읽어야겠다는.
에이모 토울스의 글은, 우아하면서도 두리뭉실하지 않아 좋은 것 같아요. 아름답지만 슬픔이 담겨 있는 장면들을 우아하게 묘사한다는 느낌이랄까. 아 읽을 책이 너무 많습니다.. 흐미.

blanca 2020-03-16 17:03   좋아요 0 | URL
아. 비연님은 <모스크바의 신사>를 먼저 읽으셨군요! 저는 지금 받아서 며칠 후에 시작하려 해요. 이 책과 어떻게 다를지, 기대됩니다. 진짜 정확한 표현입니다. 우아하면서도 섬세하죠. 이 작가의 팬이 될 것 같은 느낌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일상이 마비됐다. 아이들의 입학식, 졸업식은 나란히 취소되었다. 어쩌면 시기에 맞게 해야 할 통과의례까지, 사람들 간의 만남조차도 이젠 사치처럼 되어버렸다. 라디오 뉴스를 듣다 코로나로 죽은 마흔 살 직장인의 얘기에 마음이 시렸다. 죽기 전날까지 야근해야 했던 사람, 홀로 맞아야 했던 죽음에 나까지 덩달아 서러워졌다. 대남병원 폐쇄병동 안 침대도 아닌 매트에 촘촘히 무기력하게 수십 년 동안 누워 있는 정신질환 환자들의 모습도 떠올랐다. 이러한 신종 바이러스 전염병은 가장 취약한 계층에 있는 사람들을 더 가혹하게 공격한다. 차마 마주하기 힘든 불편한 진실이다. 


















책의 색감, 만듦새가 너무 예뻐 한참 어루만지게 되는 책. 하필 그 안의 '너머'라는 단편을 제일 먼저 읽게 된 것이 다행이다. 병가를 낸 교사를 대신해 기간제 계약직 교사로 부임하게 된 N의 이야기는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다층적인 시선과 차별을 촘촘하게 엮어내고 있다. 학교라는 공간과 N의 어머니가 누워 있는 요양병원은 그 안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받는 차별과 또 그들이 제2의 가해자가 되는 구조적 모순과 생존을 둘러싼 인간의 이기심을 핍진성 있게 다루고 있다. 특히나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된 조리종사원들, 수시로 바뀌는 요양병원의 간병인들이 때로 더 취약한 처지의 타인에게 저도 모르게 행사하게 되는 또다른 종류의 수동적 폭력에 대한 묘사는 그것에 어떤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자신이 처한 취약한 입지 때문에 어쩌지 못하는 N의 딜레마를 생생하게 형상화해내 읽는 이들 모두가 그 무기력함에 가슴이 답답해져 오는 느낌을 가지게 할 정도다. 생존을 딛고 쉽게 과감해질 수도 용감해질 수도 이상주의적 도덕주의자가 될 수도 없는 그 패배감의 잔영이 짙다. 무기력하게 말라가고 간병인에게 무언의 학대와 방임을 당하게 되는 N의 어머니는 N의 절망적 미래와 겹쳐진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늙고 결국 무기력해져 죽는다. 그럼에도 이 단순한 명제가 눈 앞 풍경으로 펼쳐질 때 우리는 담담해질 수 없다. 


N은 툭 뱉어내듯, 순식간이야, 하고 말했다. 그 말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튀어나온 말 같았다.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면서 다만 그 말이 마음에 들어 견딜 수 없다는 듯, 모든 게 순식간이야, 순식간에 끝난다고, 순식간에, 하고 N은 주문처럼 중얼거렸다. 가슴 한쪽에선 잔혹한 마음이 불처럼 일어나고 다른 한쪽에선 두려운 마음이 돌처럼 가라앉았다. 순식간에 끝나......



그녀의 절망이 허구가 아니라 지금 도처에서 일어나는 진짜라는 것을 깨닫는 지점에서 마음이 가라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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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27 16: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2-28 1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쓰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들
제임스 설터 지음, 최민우 옮김 / 마음산책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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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푸르트로 가는 열차 안에서 그는 <마드모아젤> 잡지를 펴들었다.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특집 기사에는 웨일스 시인 딜런 토머스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그는 딜런 토머스의 시를 읽으며 '이런 걸 하고 싶다'는 갈망이 솟아오름을 느꼈다. 1954년 겨울, 한국전쟁에서 살아남은 제임스 설터는 작가가 되기 위해서 전역했다. 



그건 내 인생에서 가장 힘겨운 행동이었다. 생각건대 내 안에는 글쓰기가 다른 일보다 훌륭한 일이라는 믿음이 늘 잠복해 있었던 것 같다.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결국에는 글쓰기가 더 훌륭하다는 게 입증되리라는 믿음이. 미망이라 해도 상관없지만, 나의 내면에는 리가 했던 모든 것이, 그러니까 우리 입 밖으로 나온 말들, 맞이한 새벽들, 지냈던 도시들, 살았던 삶들 모두가 한데 끌려들어가 책의 페이지로 만들어져야 한다는 고집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건 존재하지 않게 되어버린다는, 존재한 적도 없게 되고 만다는 위험에 처할 테니까. 만사가 꿈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때가 오면, 오직 글쓰기로 보존된 것들만이 현실로 남아 있을 가능성을 갖는 것이다.

-p.27


이 말은 결국 이 책으로 체현되었다. 아흔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제임스 설터의 아내는 그가 "쌓아두면 안 돼."라고 했던 충고의 반증을 찾아내고야 만다. "상자가 자꾸 나왔다." 제임스 설터가 쟁여두었던 글들은 글쓰기로 보존된 그의 삶의 잔재들이었다. 전투기 조종사였던 그가 어떻게 작가의 길로 들어섰는지, 스위스 제네바의 박물관 같은 호텔에서 14년을 지낸 나보코프의 공간은 어떻게 넘쳐나는 꿈으로 채워졌는지, 호색한 단눈치오가 어떻게 여배우 엘레오노라 두세를 유혹하고 조국을 전쟁으로 끌여들였는지가 그의 피뢰침 같은 언어로 묘사된다. 문학, 그의 친구들, 1920년대 프랑스에 대한 동경, 암벽 등반, 스키 도시, 아이의 탄생 등 언뜻 보면 삶의 파편 같은 삽화들이 그의 시선과 목소리를 빌리면 생생한 완결성을 지닌 하나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되어 읽는 이를 한없이 말려들게 한다. 


사람들에 대해 쓴다는 건 그들을 철두철미하게 파괴하고 이용해먹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경험에 대해서도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한 세계를 묘사하는 동안 그 세계는 절멸되고 수많은 기억이 폐허로 돌아간다. 사물들과 사건들은 포획된 뒤 생명이 모두 빠져나가 다시는 반짝이거나 빛을 되돌려 받지 못한다. 

-p.322


그래서 그럴까? 그가 이야기하는 유명 산악인들의 삶과 작가, 영화인, 휴양 도시 아스펜, 파리의 '진짜' 레스토랑 '라 쿠폴'은 마치 눈 앞에서 빛나는 듯 찬란하다. 그의 기억에서 빠져나온 모든 것들의 묘사의 촘촘함은 경이로울 정도다. 모든 화석화된 기억들이 제임스 설터를 뚫고 지나가면 잃어버린 숨결을 부여받는다. "글쓰기란 감옥"에 그가 유폐된 것은 남은 자들에게 형용할 수 없는 행운이었다. 그를 읽는 일은 내가 떠나온 잃어버린 미처 살지 못한 그 세계에 잠시 불시착하는 것과 같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별"이라던 보몽과 플레처가 쓴 시구를 마음으로 암송하는 체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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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eehyun 2020-02-20 10: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셜터의 ‘사냥꾼들‘도 좋았답니다.

blanca 2020-02-20 16:06   좋아요 0 | URL
오, 안 그래도 소설을 한번 읽어봐야겠다 생각했어요. 추천 감사합니다.

Jeanne_Hebuterne 2020-02-23 10: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장의 단어들, 아스펜, 파리, 라 쿠폴, 이런 대목을 읽으니 이 작가가 정말 궁금해져요. 작년 즈음 제임스 설터가 마치 유행가처럼 판매고가 오르는 것을 보고 약간 경계하고 있었거든요!

blanca 2020-02-23 20:25   좋아요 0 | URL
저는 설터의 소설은 읽어보지 못했어요. 그런데 이 에세이집의 문장들을 읽으니 너무 궁금해지는 거예요. 아주 짧은 글 하나도 마치 영상 이미지처럼 직조하는 데에 진짜 일가견이 있는 작가더라고요.
 
배를 엮다 오늘의 일본문학 11
미우라 시온 지음, 권남희 옮김 / 은행나무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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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스트레스가 많거나 우울한 사람이 읽으면 좋을 것 같은 책이다. 십오 년 동안이나 종이 사전을 만드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대단한 서사의 진폭을 보이지 않더라도 잔잔한 감동의 여운이 길다. 언뜻 단조롭게 느껴지는 이야기를 지루하지 않게 끌고 가는 작가 미우리 시온의 발견이 기대밖의 수확이다.


겐부쇼부 사전 편집부에서 퇴직을 앞둔 아라키는 새로운 사전을 만들려는 기획의 일환으로 영업부에서 엉뚱하고 외골수인 마지메를 스카우트해 오면서 '대도해 사전'을 출항시킨다. <대도해>는  "사전은 말의 바다를 건너는 배"라는 의미에서 명명되었다. <배를 엮다>는 제목은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언뜻 허술하고 요령부득으로 보이던 마지메는 이 과정에서 사랑에 빠져 결혼도 하고 우직하게 <대도해>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며 사전 편집자로서 자리를 잡아가게 된다. 출판사 측면에서도 크게 명성이나 이윤을 안겨다 줄 것 같지 않은 일에 전력투구하는 이들의 모습은 실용과 실리에만 집착하는 지금의 세태와 대비되어 오히려 더 형형하게 빛난다. 소용이 닿지 않아도 기본에 충실하고 순간에 전념하는 그들의 모습은 우리가 바쁘게 달려가느라 끝내 놓치고 마는 정작 중요한 가치들을 멈추어 고민해 볼 시간을 준다. 작가 미우라 시온의 문장은 정갈하고 쉽고 느린 듯하면서도 특유의 속도감을 잃지 않고 등장인물들의 삶을 진행시켜 나간다. 그래서 어느덧 십오 년이 훌쩍 지나 드디어 <대도해>가 완성되었을 때 수많은 문장들이 엮어낸 그들의 노정에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게 만드는 마력을 보여준다. 


우리는 배를 만들었다. 태고부터 미래로 면면히 이어지는 사람의 혼을 태우고, 풍요로운 말의 바다를 나아갈 배를.


말의 배는 아쉽게도 죽음 앞에서 사전의 완성을 끝내 보지는 못했지만 죽음 직전까지 사전의 완성을 향해 자신의 여생을 바쳤던 고문 마쓰모토 선생의 영정 앞에 가 닿았다. 그 항해는 비록 종이 사전의 죽음을 품고 있는 것일지라도 언어의 기본, 그 핵을 향해 가닿으려는 장인 정신으로 면면히 이어질 것이다.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고 언어로 소통하고 언어로 사유하는 한 그 말의 정의를 채집해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과정에서 모아진 이들의 열정과 정성은 깊은 화인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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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0-02-16 15: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엇, 그러고 보니 영화 제가 언급한 영화 <행복한 사전>의 원작인가 보네요.
이책 보긴했는데 원작일 거라고는 생각 못했어요. 함 읽어봐야겠어요.
영화 혹시 안 보셨으면 함 보세요. 영화 되게 볼만해요.^^

blanca 2020-02-17 10:54   좋아요 1 | URL
오, 그런 것 같아요. 저도 영화 보려다가 말았는데... 원작이라는 강한 심증이^^ 네, 꼭 찾아볼게요.
 
숨그네 (10주년 기념 리커버 특별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1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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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무런 배경 지식 없이 루마니아의 한 소년이 러시아 수용소에 끌려가 오 년의 시간을 보낸 뒤 귀향하는 이 이야기를 읽었다. 유대인의 포로 수용소 이야기가 아닌, 온 가족이 야밤에 나치군에게 끌려가는 이야기가 아닌, 루마니아의 독일어를 쓰는 가정에 부모님과 조부모님을 두고 소년 홀로 끌려가 그 소년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이야기는 전형적이지 않고 쉽게 읽히지 않는다. 그리고 죽거나 다치거나 절망하거나 때로 해방되는 그 쉬운 결말 대신 귀향해서도 가족의 따뜻한 환대가 아닌 왠지 모르는 서먹함, 부적응을 여생 동안 걸머지고 다녀야 하는 소년의 마음을 택한 것은 기민한 핍진성이다. 우리는 모두 수용소에서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고 그곳에서의 시간이라면 치를 떠는 증언들을 충분히 듣지 않았던가. 그들이 돌아오고 나서의 삶에 주목한 이야기는 많지 않다. 초점이 거기로 옮겨가는 순간 이야기의 절실함에서 얻는 주목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일까, 포로 수용수에서 돌아온 많은 이들이 이후의 삶에 대하여 떠벌이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저마다 해방 이후의 그 자유가 주었을 당혹감 대신 살아남은 자의 그 처절한 사투와 의지에 주목한다.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는 그러한 기대 의식을 배반한다. 아주 다른 이야기다. 색다르고 아름답고 처절하고 반역적인 이야기다. 이야기가 되기 위해 분투하는 대신 삶의 속살에 가닿는 그 직접성은 직접적 체험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소설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고백 같았다. 


소년은 현재에도 있고 육십 년 이후에도 있다. 회고의 시점과 지금 여기에서 철저히 무의미한 반복적인 노동과 배고픔에 시달리는 시어 같은  단어들로 자신의 체험을 철저하게 재구조화하는 소년의 현재는 끊임없이 중첩된다. 그 정도로 수용소에서의 기아는 끈질겼음을 짐작케 한다. 소년은 노인이 되어서도 그 기아 상태에서 제대로 회복하지 못한다.


삽질을 하며 나는 다시 정신을 추슬렀고, 총에 맞아 죽기보다는 러시아인들을 위해 배를 곯고, 추위에 떨고, 중노동을 하고 싶었다. 나는 할머니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나는 다시 돌아갈 거예요. 그러면서도 그 말을 부정했다. 그래요, 할머니, 하지만 그거 아세요, 그게 얼마나 어려운지.

-p.81

그가 수용소에서 느끼는 모든 감정은 사물과 형상을 찾는다. 기아는 '배고픈 천사'가 된다. 그것은 실질적인 대상이다. 여러 장에 걸쳐 여러 에피소드에 한창 성장기의 소년이 느끼는 그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배고픔에 대한 감정은 강렬하게 묘사되어 있다. '배고픈 천사'는 수용소에서의 소년의 머리까지 기어오르고 소년이 하는 도적질, 존엄성의 포기, 타인에 대한 강렬한 증오 등 모든 행동과 감정의 가장 원초적인 정서이자 시발점이 된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또다시 강제추방을 당한다면, 나는 알아야 했다. 어떤 처음들은 내가 원치 않아도 다음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그 이어짐 속으로 나를 밀어넣는 것은 무엇일까. 왜 나는 밤이면 다시 처참해질 권리를 가지려는 것일까. 왜 나는 자유로워질 수 없을까. 어째서 나는 수용소가 내 것이기를 강요하는 것일까. 향수, 마치 그것이 필요하다는 듯.

-p.265


수용소 이후의 삶에서 소년이 그가 집을 떠나 없는 동안 마치 그를 대체하듯 동생을 낳아버린 가족에 대하여 느끼는 서운함과 거리는 심지어 소년이 수용소에서의 결국 순응할 수밖에 없었던 자유의 박탈, 곤궁, 단순 노동에 대한 이끌림으로까지 나아간다. 러시아인이 아니면서 그들을 위해 일하며 포로들을 괴롭혔던 수용소 지도부원 투어 프리쿨리치는 소년의 삶 전체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의 말이 그들에게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의 속성을 규정한다. 삶에 대한 무게의 중심추가 된다. 이 아이러니는 소년이 돌아오고 나서도 결코 그의 손아귀에서 만큼은 해방될 수 없었음을 보여준다. 


작은 보물이란 나 여기 있다라고 적힌 것들이야. 

그것보다 조금 큰 보물은 아직 기억나니라고 적힌 것들이고.

그러나 무엇보다도 큰 보물은 나 거기 있었다라고 적힌 것들이지.

-p.307

억압자는 피억압자의 그 억압적 체험이 삶 속에서 결코 지워질 수 없음을 그의 기억은 결코 지워질 수 없음을 폭력적으로 암시한다. "나 거기 있었다"가 보물이 되는 순간 그의 삶은 평생 가해자의 손아귀에서 놓여날 수 없다.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는 단순한 허구가 아니다. 그녀에게는 실제 소년 레오의 모델이자 목소리가 있었다. 시인 오스카 파스티오르는 자신의 수용소 생활을 함께 쓰자는 약속을 못 지키고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헤르타 뮐러는 그와 함께 한 약속을 홀로 지킨다. 그가 얘기했던 '실존의 절대영도'는 이렇게 탄생했다. 헤르타 뮐러의 언어는 그래서 무언가 설명하기 힘든 마력을 가진다. 그녀의 어휘는 마술적이고 환상적이고 중의적이다. 오스카의 '숨그네'가 그녀를 통해서 돌아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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