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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 제25회 시바타 렌자부로상 수상작 ㅣ 사건 3부작
가쿠타 미츠요 지음, 권남희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4년 12월
평점 :
책보다 미야자와 리에 주연의 영화를 먼저 보았다. 내면의 심리를 영화라는 매체로 보여주는 것에는 한계가 따를 수밖에 없음에도 한때 누드집으로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그녀는 짧은 숏컷 머리에 담담하고 물기 없는 모습으로 우메자와 리카의 끝간 데 없는 탈선을 적절하게 잘 연기해 내었다. 무채색의 유니폼을 입고 자전거를 힘겹게 구르며 은행으로 출퇴근하고 외근을 나가는 중년의 리카가 자신의 직장에서 거액의 횡령을 저지르게 되고 태국으로까지 도피하게 되는 파국은 그 과정에서 어떤 설득력이나 해명을 요구하지 않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흘러가 오히려 보는 이를 당황케 한다. 아마도 그것은 작가가 또한 영화를 만든 감독이 돈 앞에 선 인간의 무력함, 그 어쩌지 못하는 아킬레스건을 정확히 간파한 탓일 게다. 또한 누구나 그 지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자각은 그리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돈'을 의식하게 되는 순간 판단을 해야 한다. 그것은 분명 경제적 상황이 내 개인적 자유와 어긋날 때 시작된다. 기본적인 의식주 뿐만 아니라 흔히 경험하게 되는 사람 간의 인사나 선의 교환에도 분명 돈은 유효한 매개가 된다. 그것이 부족하거나 없게 되는 지점, 돈의 날카로운 요철은 살갗을 찌르기 시작한다. 분명 인간은 그 위에 있다고 비교대상조차 되지 않는다고 배웠는데 이것이 무언가를 좌지우지하게 되는 순간부터 가치관은 흔들리기 시작할 수 있다. '삶'과 '돈'은 쉽게 분리될 수 없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그 지점에서부터 시작된다.
우메자와 리카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그녀의 학교 동창, 신혼 시절 다녔던 요리교실에서 만난 친구, 심지어는 결혼 전 사귀었던 남자 친구 등의 삶이 들쑥 날쑥 끼어든다. 그리고 묘하게 그들의 갈등, 고민은 리카의 횡령과는 또 다른 시점에서 돈과 겹친다. 때로는 너무 그것을 의식하고 아껴서, 혹은 함께 사는 사람과의 돈에 대한 다른 가치관으로, 아이와의 관계에서 돈은 힘을 행사한다. 우연히 듣게 된 리카의 횡령, 지명수배 소식에서 그들 각자는 자신들이 '돈'에 대하여 가지는 그 이율배반적인 감정, 태도를 의식하게 된다. 리카가 그 날 하필 외근을 마치고 직장에 복귀하며 백화점 화장품 매장에서 점원의 유혹에 설복당해 자신이 가진 돈보다 더 비싼 화장품들을 구입하지만 않았더라면,으로 시작되는 가정들은 저마다 다른 형태로 나타나는 돈과의 힘겨루기의 장면이었다. 받아 둔 고객의 예금에서 일부를 잠시 꺼내 화장품을 사면서 시작되는 그녀의 고객 돈 횡령은 갑부 노인의 손자와의 불륜으로 폭주하게 된다. 어린 고학생과의 그 비현실적인 행복을 일상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리카는 점점 더 대담하게 은행 고객들의 돈에 손을 대게 된다. 그녀는 죄책감 대신 언젠가 반드시 모두 되돌려 놓을 거라는 비현실적인 자기와의 약속에 매달리며 죄책감을 희석시킨다. 은행 문서를 위조하고 거짓말을 남발하면서도 그녀가 정작 맛본 것은 두려움이나 죄책감이 아니라 일종의 비현실적인 '자유'였다. 어떤 상황, 심지어 삶까지 스스로의 힘으로 제대로 통제하고 있다는 착각. 그것은 '종이달' 같은 환각이었다.
'돈'에 대한 인식은 지극히 현실적인 것 같지만 기실은 환상, 환각과 가장 가깝기도 하다. 무엇보다 빚을 권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러한 환각은 도처에 난무하며 삶에 게재된다. 무시무시한 고금리를 숨긴 사금융의 광고 노래를 꼬마 아이들은 재미있어하며 따라하고 신용카드를 몇 장식 소지하며 그것의 신용한도가 나의 소비 여력처럼 느껴지도록 달콤한 말을 속삭이는 카드 회사, 각종 브랜드가 마치 개인의 정체성이나 라이프 스타일인 것처럼 떠들어 대는 매체들. 소비하지 않고 자신을 주장하기란 정말 쉽지 않은 분위기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종이달>에서 삶과 돈은 대단히 밀착되어 있다. 그 사람을 설명하는 데에 있어 그 사람이 가진 것과 그 사람이 쓰는 것, 또 돈에 대한 생각 들을 들어낸다면 분명 빈한한 것이 되리라는 것을 작가는 정확히 알고 있다. 이것은 반면 그러한 것들에 밀착하여 들어가는 것이 그 사람이 살고 있는 삶의 상당 부분을 설명하는 요긴한 시점이 될 것이라는 것과 같은 얘기이다. 그러니 드문 드문 드러나는 리카를 둘러 싼 이들의 생활의 단편들은 상당히 많은 것들을 이야기해 준다. 이를테면 마트의 전단지의 할인 품목을 체크하고 절약에 집착하는 유코가 사실은 무엇을 잃고 있는지를, 아내와 소통하지 않고 각자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가즈키가 왜 그러고 있는 지, 과소비 때문에 이혼당했으면서 여전히 딸에게 원하는 것들을 안겨 줌으로써 관계를 지탱해 나가려는 아키가 정작 얻고자 했던 것은 무엇인 지를 말이다.
시종일관 담담한 어조의 이야기들은 사실 평범한 주부가 어떻게 거액의 횡령을 저지르게 되었는 지에 대한 설득력 있는 해명만으로 향하지는 않는다. 아니 많은 것들을 설명하지 않으면서 그저 그러한 리카의 행동들을 영화에서는 갑자기 그 커다란 진폭을 이해할 수 없었던 공백을 과하지 않은 언어들이 채워준다. 그 수많은 어긋난 선택들이 모여 리카의 그 도피의 삶을 만들었음을 그 경로를 찬찬히 보여주는 것이다. 누구의 삶이든 아귀가 꼭 맞는 인과관계 안에서 설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그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슬프지만 처연하지만 그렇구나, 그랬구나, 하게 되는. 그것이 꼭 돈을 매개로 한 것이 아닐지라도 한 사람의 삶의 어느 지점에 가닿으려는 그 무용한 시도에 약간의 의미를 덧댈 수 있는 것이 바로 이러한 이야기일 것이다. 다 읽고 나면 가슴이 먹먹하고 아려온다. 그리고 나를 들여다 보게 된다. 내가 했던 그 수많은 선택들과 지금 하고 있는 이 자잘한 작디 작은 순간 순간의 움직임이 진실로 바람직하고 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 진정 나의 온전한 의지로 행해지고 있는가? 라는 자문에서 아연해지는 것. 삶은 상당 부분 그렇지 않을 수 도 있다는 것을 가르치려 드니 때로 참 힘이 빠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