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얘기로 나는 어렸을 때부터 한글도 모르면서 책을 읽는 시늉을 하며 놀았다고 한다. 이렇게 그림책과 글밥이 많은 책을 번갈아 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한글을 깨우치는 아이들도 많다지만 나는 예외였다. 한글을 모르는 책벌레로 초등학교에 입학했으니...둘째는 새해로 여섯 살이 되었는데 책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역시 그렇다고 해서 한글을 절로 깨우치는 신통력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묘하게 누나가 좋아했던 책들을 아이도 특히 자주 본다. 백희나의 <알사탕>은 하도 자주 읽어달라 해서 내용을 거의 외우게 되었다. 친구 사귀는 데에 서툰 동동이가 아버지와 할머니의 든든한 사랑과 지원을 바탕으로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이야기에 나도 절로 감정이입이 되곤 한다. 특히 돌아가신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대목은 읽을 때마다 가슴이 떨린다. 사후세계를 믿지는 않지만 때로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재회가 가능한 그런 세계가 있다면 어떨까', 하며 명치께를 어루만지게 된다. 하지 못한 이야기들, 하지 말았어야 하는 이야기들, 미처 잡지 못한 손, 안아주지 못한 어깨를 해결할 수 있는 그러한 곳이 있다면, 여기 지금이 좀 더 견딜만해질텐데...결국 나에게 동동이의 알사탕에 버금가는 매개가 없다면 다 불가능한 얘기다. 그리고 그 '알사탕'은 결국 이런 고정관념, 단언, 아집이 쓸고가버린 동심일 거다. 어린이의 이야기가 어른 안의 아이를 불러내고 치유하는 경험은 각별하다. 어떤 형태로든 상처받고 슬퍼하는 아이들이 치유받고 성장하는 이야기들은 그런 의미에서 빛난다. 성장이란 결국 경중을 떠나 어떤 고통을 자기 방식대로 처리하고 묻어버리며 확장하는 것일 테니 말이다. <알사탕>은 그런 의미에서 어른들이 읽으면 더 좋을 것 같다. 누구든 한번쯤 같이 놀 친구가 없어 가슴시리게 외로웠던 경험, 어느 날 갑자기 사랑하는 가족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형태의 작별 선고를 남기고 떠났던 체험을 겪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알사탕>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