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우연히 둘째와 같은 프리스쿨에 다니는 친구 엄마가 '한국은 알파벳이 몇 개냐',고 진지하게 묻자 머릿속이 하얗게 됐다. 솔직히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외국인들도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을 들여 한글을 읽고 쓰는 법을 깨우칠 수 있을 정도로 한글은 과학적이고 체계적일 뿐 아니라 상형문자 못지않게 아름다운 외형을 지닌 고유문자라는 사실을 떠올리니 더욱 부끄러웠다. 정작 나의 정체성을 둘러싼 우리의 문자에 관련된 중요한 정보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다른 지엽적인 것에 집착하고 다녔던 것이다. 집에 와서 검색해 보니 그렇게나 열심히 외웠던 자음 19개, 모음 21개가 어찌나 새롭게 느껴지던지...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에게 내심 부끄러워지는 밤이었다. 지금도 가끔 한글 창제 당시의 집현전 학자들과 세종대왕의 그 창조적 에너지가 끓어올랐던 밤들을 상상한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을까? 어떻게 그런게 가능했을까? 그냥 중국문자를 쓰고 현실에 안주할 수도 있었을 텐데 우리 고유의 문자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하고 또 그 과정에서 맞닥뜨렸을 수많은 회의와 시행착오, 경직된 계급 구조와 보수적인 유교 통치 구조의 한계를 정면으로 돌파해 가며 창조적 에너지를 발산했던 그들이 새삼 경이롭게 보였다. 비록 수직적 통치 구조의 한계는 있었지만 그 안에서 최대한의 애민 정신을 발휘한 세종대왕의 위대함은 아무리 칭송해도 지나치지 않으랴.
<황금 물고기>로 잘 알려진 프랑스의 소설가 르 클레지오가 한글을 읽고 쓸 수 있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 제주도의 해녀를 실제로 보고 영감을 얻어 소설까지 썼단다. 아프리카에서 보낸 남다른 어린 시절은 그의 정체정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듯 이국적 정서와 다른 언어는 그의 이야기의 전반적인 분위기로서만 남는 게 아니라 때로 견인차 역할을 한다. 그 나라의 정서와 그 나라의 배경 정도를 아는 것과 그 나라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 문자를 조금이라도 알고 하는 이야기는 천양지차가 될 수밖에 없다. 공통의 외국어로 교감하는 것은 언제나 어느 지점까지다. 그 경계 넘어 확장이 될 듯 말 듯한 지점에서 서로가 머뭇대면 항상 얼마쯤은 아쉽고 슬프다. 그런 점에서 르 클레지오는 다른 이야기를 좀더 깊이 넓게 제대로 하지 않았을까 기대가 된다.
그 엄마에게 나는 엉뚱한 이야기를 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모르니까. 한글은 쉽게 배울 수 있는 문자라고. 그럼에도 나는 한글을 깨치지 못하고 초등학교에 들어가 한동안 수업 적응에 그 당시에도 어려움을 겪었던 기억이 있다. 그래도 다행히 금세 배울 수 있었다. 자음과 모음을 사정없이 해체해 가며 샤파 연필깎이로 연필심을 최대한 뾰족하게 깎고 무자비하게 쓰고 또 쓰며 배웠던 글자들이 결국 내 속으로 들어와 지금도 웅웅대고 있다. 나는 아마도 다시 한글을 제대로 배워야 할 것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