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좀 이상한 증세가 생겼다. 글을 읽거나 드라마를 보거나 할 때 주인공이나 주변 인물에게 큰 시련이 닥치거나 선고되는 장면을 도저히 못 보겠다. 이를테면 가족을 잃거나, 어려운 병을 진단받거나, 예기치 않은 배신을 겪거나 하는. 그러다 자문하게 된다. 왜 이렇게 힘든 얘기를 일부러 듣는 거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내가 내 삶 안에서 감당하는 서사만으로도 충분히 벅찬데 이렇게까지 타인의 힘든 서사를 일부러 감당할 필요가 있나?
소설 속 등장인물에게 감정이입함으로써 불편해졌다면, 그것은 삶에 대한 통각을 얻은 것이다.
-은희경 <Axt 5/6 중>
이 대목은 마치 나에게 들으라고 한 얘기인 듯 와닿았다. 나는 불편하고 그 불편이 두렵지만 그것은 새로운 차원의 성장과도 만난다. 삶은 정합적이지도 정당하지도 온건하지도 않으니까 이러한 통각을 미리 습득해 두는 것은 분명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또 그런 믿음이 있어야만 이야기를 읽고 듣고 쓰는 일을 타인과 소통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다. 은희경의 이야기는 솔직하고 깊이 있고 새로운 층위의 사고를 도발하는 내용이었다. 다른 사람들과 매일 이야기를 나누지만 그것은 소통이라기보다는 각자의 독백인 경우가 많다. 이렇게 내가 미처 고백하지 않은 이야기와 질문에 예비된 답변을 듣는 것 같은 기분은 신비롭고 언제나 흥미롭다. 인터뷰의 힘일 것이다. 어제 내가 무얼 먹었고 아이와 어떻게 지냈는지 구체적으로 나열하는 일이 나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것은 아닐 테니 그것을 나눔으로써 서로를 더 잘 알게 되는 것도 아니라는 공허감이 치유받는 기분.
소설가 존 쿳시는 이름만 알지만 그를 번역한 번역가 왕은철이 존 쿳시와의 첫 만남을 이야기하는 글은 너무 아름다워 그 자체가 존 쿳시의 소설을 읽은 듯한 착각을 준다. 과묵한 작가와 머나먼 이국에서 함께 샌드위치를 먹는 장면. 이후로 그의 번역자가 되고 어떤 의미에서 그의 제자가 되고 그를 사랑하고 존경하게 되는 이야기. 어떤 글을 번역하거나 리뷰를 쓰거나 분석하거나 할 때 사실 가장 필요한 것은 가장 숨길 수 없는 대목은 그 글을, 그 작가를, 그 연구 과제를 진심을 다해 사랑했나, 일지도 모르겠다. 그건 그 누구에게도 숨길 수 없는 부분이다.
어떤 사람은 나와 소통할 수 없다. 그 언어를 나는 모르고 내가 쓰는 언어를 그는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소통할 수 있다. 언어가 다가 아닌 무언가가 있다. 그 무언가는 평생 배워야 할 것이다. 어쩌면 언어를 매개로 숱한 오해와 착각과 상처를 교환하는 것을 소통이라고 자위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쓸려나간 자리에서 서성거리다 보면 때로 진짜가 보일 때도 있다. 모르겠다. 아직은 좀더 배워야 알 수 있는 것들 투성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