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터에서
김훈 지음 / 해냄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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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꿈 속에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이모가 나왔다. 이모는 꿈 속에서도 몸이 아팠던 기억을 가지고 있었지만 정결한 숲에서 얼굴을 보여준 이모는 우려했던 것보다 훨씬 건강해 보이고 예뻤다. 안심이 되기도 했지만 문득 잠에서 깨니 역시 마음 한곳이 아려왔다. 이모에게 제대로 된 작별 인사, 감사를 전하지 못했다. 죽음 앞에서 생은 어찌 이다지 하찮고 허무하게 스러지고 마는 것인가. 죽고 나면 우리 같은 평범함은 때로 하찮음과 망각으로 치환되어 서럽다. 기억하는 사람이 남는다고 해서 생이 더 유의미해지고 무거워지는 것은 아닐진대 오늘이 영원할 것처럼 마치 발이 단단히 이 지구t상에 못박혀 있는 것처럼 일상 속의 사람들은 싸우고 끄달리고 욕망하고 붙잡는다.


"2017년 설", 작가의 사인은 힘찬데 어쩐지 조금 아릿하다. 내가 기억하는 김훈은 영원한 오십 대인데 작가는 벌써 칠십 대에 접어들었단다. 우연히 옆에 있던 딸아이가 작가의 후기를 읽다 "엄마, '늙기가 힘들어 허덕지덕하였대'."라고 뜻도 이해하지 못한 말을 슬며시 옮긴다. 작가보다 한참 어린 나인데 그 '허덕지덕'의 무게를 실감한다. 시간의 경과가 늙음과 동의어는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 늙어지지만 늙음을 내면화하는 일은 별개의 일이다. 거죽은 풍화하는데 내면에 생의 기운과 젊음의 추억은 차곡차곡 쌓이니 그것들을 내칠 용기를 차마 내지 못한다. 어느 날 서 있을 초로의 여인과 나를 동일시하기란 쉽지 않다.


"마동수는 1979년 12월 20일 서울 서대문구 산외동 산18번지에서 죽었다."



이러한 첫문장으로 들어갈 때 이야기의 하중이 절로 다가와 다리가 갑자기 무겁게 느껴졌다. 생으로 시작하지 않고 죽음으로 풀어나가는 이야기. 이 이야기는 필연적으로 다시 그 사람의 삶으로 가는 역순환적 순서로 갈 것을 예고하는 것은 아니다. 마동수의 삶은 결국 그가 낳은 형제 마장세와 마차세를 이야기하기 위한 출발점이 되기도 하고 그들의 이야기가 결국은 만날 접점이 되기도 하고 마침내 그들의 이야기가 종결될 복합적인 지점이다. 세상에 발붙이지 못한 부박한 아비의 삶은 결국 죽음을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전제이자 출발, 도착점이 된다. 형제는 아버지처럼 살고 싶지 않아 분투하지만 결국은 아버지의 삶을 이해하게 되고 그의 삶을 닮게 되는 생존의 그 지엄하고 가혹한 본질에 가 닿는다. 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했고 이미 늙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오해했던 시간은 시간의 결을 따라 제대로 해석되고 때에 따라서는 나의 것이 되기도 한다.


"아버지가 죽어 홀가분했다."는 차남 마차세만의 문장이 아니었다. 형 마장세는 일치감치 베트남전의 참전을 로 빌미로 그의 던적스러운 삶에서 도망치려 하지만 결국 그가 타지에서 벌였던 불법적인 사업으로 인해 아버지 만큼 추락한다. 형과는 달리 동생 마차세는 늘 아버지와 어머니의 삶과 죽음을 지척에서 지켜보게 되지만 그 또한 신산하고 초라하고 때로 비겁한 그들의 생존에서 멀리 떨어지려 시도해도 결국은 다시 떨어지는 진자 추처럼 생으로 귀환한다.


억새꽃이 부풀었고, 가을빛이 자글거렸다. 시든 줄기가 바람에 끄달리면서 바람을 버티고 있었고 꽃씨들은 바람 속으로 흩어졌다. 억새는 꽃이 아니라 꽃의 혼백처럼 보였다.

-p,311


전쟁통에 전남편과 젖먹이를 잃어야 했고 평생 방황하는 남편을 두고 형제를 키워내야 했고 말년은 치매로 요양원에서 보내야 했던 형제의 어머니를 화장하고 내려오는 길의 묘사는 눈부시다. 그것은 비단 어머니 김도순의 삶의 은유로만 해석될 것이 아니다. 누구나의 삶인들 이러지 아니할까. 충분히 나이든 김훈의 삶의 결을 간파해내는 문장들은 가슴의 결에 아로새겨질듯 간명하면서도 처절하다. 그의 문장은 끌로 판 듯 치열하고 또렷해서 차마 흘려보내지 못할 듯하다.


우리의 삶은 지극히 사적이지만 공적인 큰 파도 속에서 부유하며 그 사사로움을 잠식 당한다. 누군가의 삶도 결국 개인적인 서사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이유다. 사사롭지만 사소하지 않은 그 모든 것들을 언어로 도열하면 삶의 지고하고 처절한 순간들이 드러난다. 개인과 사회와 역사, 욕망과 의지와 이상과 좌절의 겹쳐진 그 틈새를 간파한 작가의 필력은 그가 살아 낸 생의 기억들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마지막 장을 덮으며 늙고 사는 일을 실감한다. 무겁고 무섭지만 신비로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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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7-03-06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따님이 문장을 또박또박 잘 읽는데요?
엄마를 닮아 글을 잘 쓰려나 봅니다.ㅎ
그 뜻이야 앞으로 살면서 문득문득 많이 떠오르겠죠.
김훈 작가의 그 문장 참 기가막히군요.
정말 앞으로 살면 살수록 허덕허덕할 때가 많겠죠?
살면 살수록 물 같으면 좋겠는데...

blanca 2017-03-07 09:28   좋아요 0 | URL
벌써 4학년인 걸요. 김훈 문장은 여전히 경이로운 대목이 많더라고요. 늙는 일은 절로 되는 게 아니라 너무 넘어야 할 산이 많은 것 같아요.

stella.K 2017-03-07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딸래미가 벌써 4학년이어요? 아니 언제에...ㅎㅎㅠ

blanca 2017-03-11 13:20   좋아요 0 | URL
저도 깜짝 놀라요. 제가 4학년이던 게 엊그제 같은데 --;;; (이건 좀 과장이죠?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