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44
존 밴빌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평점 :
절판


어디에서 오는 길이었을까. 잘 기억나지 않는다. 퇴근길이었을 낯선 아저씨는 가족에게 주려고 산 붕어빵 봉지에서 붕어빵을 하나 꺼내 낯선 아이에게 건네 주었다. 따뜻했다. 하늘의 달은 정말 신기하게도 집까지 따라와 주었다. "신들의 시절"이었을까? 세상도 우주도 한없이 광대한 시절,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아 신기한 것은 신비로 점철되던 시절, 유년. 서서히 장막은 걷히고 남에게 일어날 수 있었을 또는 있었던 모든 일들은 나의 안전한 지지대로도 파고든다는 것을 알게 되는 그 시점, 나도 내가 사는 삶도 별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단단하게 깨닫게 되는 그 시간, 어른은 소멸을 향해 늙어간다.


온화한 날씨 속에 한 해가 끝을 향해 이울어가고, 낙엽들이 허둥지둥 달려가고, 알아채지도 못하는 사이에 낮의 밝음이 희미해지고, 가로등이 매일 저녁 어제보다 약간 더 일찍 켜지는 때에. 그래, 이것이 내가 어른의 생활이라고 생각하던 것이다. 늦가을에 맞이한 기나긴 화창한 날씨 같은 것, 고요의 상태, 호기심이 사라진 차분한 상태. 견디기 힘들었던 유년의 날것 그대로의 직접성은 다 사라지고, 어렸을 때 곤혹스러워하던 것은 다 풀리고, 모든 수수께끼가 해결되고, 모든 질문에 답이 나오고, 순간순간에 물이 똑똑 듣듯이 거의 알아챌 수도 없이, 황금 방울처럼 똑똑, 마지막, 거의 알아챌 수도 없이 해방을 향해 흘러가는 상태,

-p.92


이 남자는 지금 이 시간을 상실과 더불어 통과하고 있다. "그들은, 신들은 떠났다."는 선언으로 시작되는 이야기. 이미 남자는 충분히 늙었다. 반 세기가 더 지나 돌아온 유년의 풍경은 화석처럼 보존되어 있었다. 오십 년의 시차는 같은 공간 안에서 경계를 허물고 서로 극복된다. 남자가 회상하는 자신의 세계 밖의 풍경은 예나 지금이나 지극히 관조적이다. 남자는 그 모든 시간을 직접 통과해 왔건만 번번히 불투명하게 관찰하는 시점에 자신을 고착화한다. 그렇다면 그가 이야기하는 모든 것은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우리의 이야기로 응축되는 것이다. 내가 어린 시절 경험했던 그 모든 것의 직접성은 비록 서사의 구체적인 결은 다르지만 이 남자의 음험한 짝사랑과 서툴지만 영롱했던 그 모든 처음이었던 것들과 겹친다. <바다>를 읽게 되면 그래서 멈칫멈칫하게 된다. 이것은 타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도 되니까.


작가는 "세속적 표현의 순간"을 고대하는 이 남자의 목소리를 빌어 그의 소망을 실현했음을 들킨다. "나는 표현될 것이다."는 작중 화자의 고백으로 폄하되지 않는다. 그 뒤에 숨어 끊임없이 자신의 시선을 들키는 작가 본인의 것으로 의심되어도 충분할 것이다.


사는 일은 지난하지만 절실한 일이다. 상실과 필연적으로 만나는 것은 유한한 삶의 본질적 속성일 게다. 눈물 없이는 나아갈 수 없는 일이다. 상실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일은 그래서 때로 진부해지지만 영원히 반복되는 삶의 이야기다. <바다>를 유영하는 일은 그러한 상실을 저마다 개별적인 지점에서 보편적인 곳으로까지 밀고 나가는 힘겹지만 의미 있는 과정이다. 우리는 이미 모두 모든 불가능한 것들의 발치를 쓸어가는 시간을 통과해 신들의 시간을 통과해서 다시 신들의 시간으로 갈 운명이다. 그 운명을 기억하는 과정에서 <바다>는 하나의 이정표가 되어 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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