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으로 산다는 것 - 삶의 끝에서 헤닝 만켈이 던진 마지막 질문
헤닝 만켈 지음, 이수연 옮김 / 뮤진트리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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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죽음을 어린 시절 겪은 적이 있지만 죽음은 '나'를 주어로 한 것은 아닌 줄 알았다. '삶은 유한하다'는 명제는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프로이트의 말처럼 누구나 자신이 불멸이라는 생각을 한다,는 나에게도 얼마쯤 해당되는 이야기였나 보다. 작년 피부암 조직 검사 결과를 기다리며 밤마다 두려워서 미칠 것 같았다. 아이들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했다. 고통스러운 기다림의 과정 속에서 비로소 '생은 유한하다.'는 명제를 뼈아프게 실감했다. 긍정적인 면이었을까. 이후로 무언가를 마냥 기뻐하고 순간에 함빡 몰입하는 일이 불가능해졌다. 조직 검사 결과가 괜찮았다,고 해서 내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한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더욱 겁쟁이가 됐다. 누.구.나. 죽.는.다. 우리 모두 결국은 죽는다. 그렇다면 나는 당연히 죽는다. 나이가 아주 많이 든 사람을 붙잡고 물어보고 싶어졌다. 정말 안 무서워요? 이 모든 게 결국 끝나는데...거리를 웃으며 지나다니는 대학생들을 보며 아직은 생의 유한성을 실감하지 못하니까 그런거야, 라고 되뇌일 때도 있다. 생의 절반이나마를 통과하면 이렇게 되는 걸까? 이제 내가 경험하는 모든 것들이 무한하지 않다는 것을 의식하게 된다. 이 추운 겨울도 무한히 반복되는 것이 아니다. 꽃 피는 봄도 그렇다. 그러면 모든 당연하게 여겨지던 것들이 갑자기 생생하고 절절하게 느껴진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스무 살이 보는 벚꽃과 서른 살이 감상하는 벚꽃과 마흔이 감동하는 벚꽃의 질감은 엄연히 다르다. 달라진다.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그런 면에서 참으로 경이로운 책이다. 스웨덴의 작가이자 연출가인 헤닝 만켈은 지금은 세상에 없다. 하지만 이 이야기 속에서 그는 암투병을 하는 노년이다. 그가 복기하는 삶의 단편들은 흩어져 있지만 결국 유기적으로 묶여 한 작가가 사람으로 얼마나 진지하고 투쟁적으로 성실하게 자신의 삶을 영위했는지에 대한 하나의 거대한 서사가 된다. 그를 스치고 지나갔던 비극적인 풍경들, 타인의 삶, 아름다운 공명의 순간들이 빛난다. 아프리카에 가서 에이즈에 걸려 죽어가는 소녀의 곁을 지키고, 계속되는 내전과 살육의 현장에서 고대 그리스의 연극을 투사처럼 기획했던 그가 마침내 내전의 평화로운 종식을 들었던 순간을 가장 행복했던 기억으로 반추하고 젊은 시절 풋사랑과 추위 속에서 나누었던 육체적 교감을 추억하는 장면들은 하나 하나가 완결된 짧은 이야기로 들린다. 그는 주절주절 자신의 사적인 삶을 주워섬기는 게 아니다. 10만 년도 더 전의 빙하 속의 물과 10만 년도 더 후까지 위험성이 제거되지 않을 핵폐기물이 후손에 끼칠 영향에 대한 걱정까지 문명의 향유가 아니라 착취가 판을 치는 소외된 아프리카 대륙까지 거대하게 확대된 시공간의 자장에 그의 개인적 삶은 포개지고 확장되고 융화된다. 그러다 보면 그가 그렇게나 어렵다고 이야기했던 죽음까지 어쩌면 꽤 괜찮은 차원으로 승화될 수 있는 것이다. 개인적 차원으로 생과 사를 축소하면 인간의 존재와 삶은 더없이 무의미하고 비극적으로 보이지만 그것이 하나의 매개가 되어 한없이 확장되다 보면 아름답고 거대한 모자이크의 한 부분처럼 딱, 여기, 지금에서의 생의 고결한 가치를 불러온다.

 

죽는다는 건 현존하는 인간의 전통 중 가장 위대한 전통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p.108

 

그는 스웨덴 사람이지만 생의 많은 부분을 아프리카에서 보냈다. "우리는 어떤 종류의 사회를 함께 만들어갈 것인가 하는 결정"이 그의 평생을 관통해온 질문이라는 고백은 감동적이다. 사회의 변방에서 생존 그 자체에 매달리느라 다른 차원의 고민이나 사고는 할 겨를이 없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 우리가 지금 자본주의의 공간 안에서 누리는 이 모든 것들의 반대급부와 어두운 면면을 응시하게 한다.

 

정말로 중요한 모든 이야기들은 각성을 다루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p.225

 

나한테는 헤닝 만켈의 이야기가 그러했다. 죽음 앞에서 가감없이 "두렵다"고 고백하면서도 품위와 평온을 유지하기 위해 온갖 힘을 끌어모으는 노작가의 진지하고 섬세한 모습, 그가 이야기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소외된 세계의 사람들이 최소한의 생존을 위해 분투하는 노정, 자신의 삶을 거대한 역사와 공간적 차원으로 확대하여 조망하는 시선은 나를 각성시켰다. 크레타에서 매일 안온하고 단조롭지만 한없이 고결하고 경건하게 느껴지는 하루를 채웠던 그의 읽기, 쓰기의 추억은 나를 떨리게 했다. "매일 뭔가 새로운 것을 배웠다."는 그의 문장이 너무 아름다워 찡했다. 그러한 와중에도 "세상에 여전히 예속과 압제가 있는 한 문명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문명을 만드는 것이 과연 가능할지" 고민하는 지식인으로서의 그의 책임의식이 존경스러웠다.

 

그러나 나는 무엇보다고 새로운 은총의 순간들을 기대하며 살고 있다. 나 스스로 뭔가를 창작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창작한 것을 볼 수 있는 기쁨을 아무도 내게서 빼앗아가지 않는 순간들, 내게로 오고 있는 순간들. 나에게 인생이 가치 있으려면 반드시 와야만 하는 그런 순간들을.- p.450

 

만켈의 에필로그. 2014년 이 에필로그를 끝으로 2015년 10월 5일 잠에서 깨지 못한 채 그는 두려웠지만 차근차근 공부하며 기다렸던 삶의 대미로 뚜벅뚜벅 평화롭게 걸어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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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7-01-17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헤닝만켈의 이 책을 봤지만,
님이랑 비슷한 종류의 두려움으로 미뤄뒀었죠.
님의 이 페이퍼를 읽으니 저도두렵지만 차근차근 공부하고 기다릴 수 있을것 같아 이 책이 읽고싶어졌어요.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좋은 자극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꾸벅~(__)

blanca 2017-01-18 10:35   좋아요 0 | URL
양철나무꾼님, 이 책 읽고 저는 늙는다는 것, 죽는다는 것에 대해 조금 생각이 달라졌어요. 작가의 진지하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뭉클했어요. 빨리 읽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희선 2017-01-18 0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해에 그런 일이 있었군요 결과를 기다리는 시간이 무척 힘들었겠습니다 괜찮은 거죠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고 생각해도 자신의 죽음을 바로 생각하기는 어려워요 아니 자신보다 부모님 죽음도 바로 생각하지 못하는데... 저는 제 죽음은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기도 해요 그런 때가 찾오지 않아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blanca 님 건강 잘 챙기시기 바랍니다


희선

blanca 2017-01-18 10:36   좋아요 0 | URL
희선님, 감사해요. 흑, 저는 아직 무서워요. 그렇지만 점점 덜 무서워지는 것 같기도 하고... 살면 살수록 사는 일과 죽는 일은 동전의 양면처럼 얽혀 있으면서도 멀리 떨어져 있는 것도 같고 잘 모르겠습니다.

2017-01-19 20: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1-20 14: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1-20 11: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1-20 14: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서니데이 2017-01-26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laca님, 즐거운 설연휴 보내세요.
새해엔 소망하시는 일 이루는 한 해 되시길 기원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blanca 2017-01-27 13:21   좋아요 1 | URL
감사해요.^^ 서니데이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017-01-27 02: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1-27 13:2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