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딸과 이십대 정도로 보이는 남녀들이 커플로, 혹은 각자 혼자 온 (지금까지 거의 항상 어린이, 아기로 아비규환인 극장 관람이 대부분이었다.) 전혀 다양하지 않은 연령층의 관람객과 함께 영화를 봤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만화로는 <언어의 정원> 정도를 봤다. 그런데 역시나 일관되게 흐르는 독특한 정서가 있다. '시간'의 불가역성이 해체되는 부분이다. 시간의 자장 안에서 일어날 수도 있었던 일과 일어나야만 했던 일들은 다른 차원에서 병존한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온갖 회한은 다 치유될 수 있다,는 환상이다. 죽은 사람들도, 헤어진 연인들도 결국은 다시 살아나고 만나고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은 다시 교환된다. 이게 환상이라는 것은 알겠는데 묘하게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끌어들여 저마다의 상흔을 치유하는 역할이 있는 것 같다. 가만히 상상해 보게 되는 것이다. '그때'로 다시 돌아가 땜질하고 고치고 끌어안고 뭐 이런.
동경에 사는 소년과 시골에 사는 소녀는 서로 몸을 바꾸고 서로의 삶을 관찰하고 개입하고 때로 수정한다. 나중에 그 둘은 서로의 시간이 동시에 흐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 둘의 차원을 함께 공유하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안타깝게 어긋나고 비껴가지만 결국은 감독이 바라는 대로 된다. 곳곳에 동일본 대지진으로 파괴된 것들에 대한 일본 국민들이 공유하는 특유의 상처를 치유하려는 흔적이 느껴졌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는 것과 설정 자체는 조금 다르더라고 결국 한 마을이 파괴되고 그 마을 안에서 꿈꾸던 모든 것들이 사라진 과거를 다시 수정하는 대목에 대한 감흥은 그 깊이와 넓이 자체가 다를 것 같다. 있었던 일을 없었던 일로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다시 그 지점으로 돌아가 파괴될 것들을 지키려고 분투하는 소년, 소녀의 이야기가 파고들었다. 역사 속 가해자로서의 일본을 떠올린다면 이러한 이야기가 한없이 아이러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아이는 지루하다,고 했고 아름다운 영상과 누구나 매혹당할 수밖에 없는 환상에 끄달린 엄마는 과거 어느 지점, 지점마다 그 아이들처럼 달려가서 고치기도 하고, 더 용기있게 행동하기도 하는 지극히 애니메이션적인 꿈을 꾼다. 하지만 그것은 현재의 아이와 내가 함께 이 시간, 그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시간으로 수렴하는 이야기들을 해체하는 결과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모든 우연과 모든 곡절은 지금 여기로 수렴한다. 영화관에서 다시 불이 켜지는 순간, 잠시 동안 가졌던 모든 불가능에 대한 환상은 꺼진다. 나는 열네 살이 될 수 없고 지금 당장 삶의 모든 힘겨운 과제들을 완수한 팔순 노인이 될 수도 없다. 죽어버린 아이들을 다시 살릴 수도 없다. 지금 할 수 있는 일들도 오 초만 흘러도 비가역성으로 응고된다.
사는 일은 참으로 알 수 없다. 결국 시간은 모든 가능성을 불가능성으로 닫아 버리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