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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코의 미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7월
평점 :
솔직히 많은 기대가 없었다. 이미 충분히 근사한 짧은 이야기들은 톨스토이가 체홉이 카버가 다 해버렸으니까. 대부분의 단편들은 그러한 후광에 압도당하기도 하고 기대기도 하고 애써 왜면하며 닮아가거나 너무 멀리 튀어나가버려 버석거린다. 시작한 이야기는 마침표를 향해 어쩔 수 없이 나아가곤 했다. 어느 순간 작가가 쓴 단편에 대한 기대가 없어져버렸다. <쇼코의 미소>를 두고 진지하거나 호의적으로 출발하지 못했다.
표제작, <쇼코의 미소>에 특별한 서사가 이야기의 견인력은 아니다. 화자의 고등학교 시절 우연히 홈스테이를 하게 된 일본 여학생 쇼코와 펜팔을 하게 되며 그녀의 삶의 서사를 목격하게 되며 각자의 모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의 한계 안에서 소통하는 이야기의 갈피짬에는 화자가 이 사회의 주류 세력이 추구하는 자본주의 바깥에서 '꿈'을 향해 비틀거리는 외부인으로서의 소외감과 그것의 근저에 있는 "제대로 풀리지 않는 욕망의 비릿함"을 냉정하게 자인한다. 그것은 자신을 키워준 할아버지라는 공통 분모 앞에서 각자 자신의 꿈과 삶으로 신 나게 뛰어나가지 못하는 화자와 쇼코의 생래적 한계가 결국은 자신들이 만들어 낸 하나의 환각이자 변명거리임을 알아차리는 지점에서도 그러하다. 공교롭게 조부의 죽음이 만나는 지점에서 '나'와 쇼코는 다시 만나고 새로운 소통의 가능성을 확인한다. 최은영 작가는 우리 모두가 사실은 알고 있지만 차마 말하지 못하는 것들을 기민하게 포착한다. 가족 안에서 '사랑'은 때로 '체념', '구속'의 완충장치처럼 작용한다. '사랑'은 '소통'이 아니고 '삶'을 부드럽게 말랑거리게 만드는 것도 아니다. 같은 언어를 공유하지 않는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소통은 때로 이러한 객관의 시선을 가져온다. 조금 더 냉정하고 조금 더 진지하게 어느 순간 내 안의 것들을 들여다보게 된다.
<씬짜오, 씬짜오>에서 독일에 체류하게 된 두 동양인 가정이 함께 시간을 보내며 교류하다 과거 베트남전의 역사에서 충돌하고 소원해져버리는 이야기는 그렇게 스쳐가게 되는 관계의 한계를 형상화하면서도 남기는 것에 대한 응시가 돋보인다. 타인에게 "곁을 주는" 일은 그래서 무의미하지 않다. 정감 있고 가족조차 외면하는 상대의 존귀함을 발견해 내는 관계는 사소한 오해로 붕괴될 만큼 연약하지만 그 둘의 삶에 긴 여운을 드리우며 영원히 남는다. 엄마들 관계에서 틀어졌지만 화자가 그 때의 엄마 나이 만큼 성장해서 길을 마주하고 다시 그 예전의 이웃 아주머니와 조우하는 장면은 뭉클하다. 그 희망은 유치하지 않고 미화되지 않아 더 현실적이다.
'삶의 어느 지점, 잃어버린 인연'에 대한 최은영의 천착은 계속된다.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에서 어머니가 어린 시절 함께 큰 친척 언니의 삶이 의도하지 않은 외부적 사건으로 하류층으로 전락하며 서서히 부담을 느끼고 그녀의 고난에 동행했던 손을 슬쩍 놓아버리며 분리되는 이야기는 냉정하지만 진실이다. 그것은 타이밍의 문제이기도 하고 관계의 어긋남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놓아버렸다고 해서 함께 보내버린 시간마저 허공으로 부서지는 것은 아니다. 그랬으니 그 언니의 죽음 앞에서 화자의 엄마는 다시 오해를 풀고 그녀와의 시간을 떠올리는 결말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한지와 영주> 또한 그렇다. 이 이야기는 좀더 젊고 많이 예쁘다. 프랑스의 수도원 봉사에서 우연히 만나 감정적 교류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어긋나버리는 둘의 관계는 단순히 젊은 남녀의 치기어린 열정으로 치환될 것은 아니다. 둘의 관계는 일상성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고 공통의 언어로 내밀하게 소통했다고 볼 수도 없다. 모든 경계와 한계를 넘어 불완전하게 그러나 그래서 더 깊이 편견 없이 이루어진다. 그렇지 않다면 한국의 대학원생이 나이로비의 수의사와 잃어버린 꿈과 사회적 압력과 가족의 사랑과 부담을 함께 공유할 일은 없을 것이다. 결국 둘은 어긋나지만 그 어긋남마저 그 나잇대의 아련함과 더불어 아름답게 느껴진다. 누구나 한번쯤 잃어버리게 되는 그 타인과의 완전한 소통과 감정적 교류에 대한 완벽한 기대치에 대한 연가는 언제나 눈물겹다. 그것은 그러한 기대를 품었던 자기 자신에 대한 청춘에 대한 애달픈 안타까운 정서이기도 하다.
교황이 집전하는 미사 참석을 위해 상경했던 미용사 엄마가 연락되지 않는 딸때문에 우연히 찜질방에서 만나게 된 할머니와 시위에 참석하게 되는 이야기와 키우다시피 한 손녀가 기간제 교사가 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만날 수도 연락할 수도 없게 된 할머니의 사연은 세월호와 만난다. 충분히 애도되지 못하고 충분히 납득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앞선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역시 답답하고 슬프고 억울하다. <미카엘라>와 <비밀>은 작가가 차마 선뜻 위로하기도 힘든 이 큰 비극에 가지는 애도의 마음을 짐작케 하지만 거기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는 어떤 머뭇거림이 느껴져 이야기가 멈춘 듯해 아쉽다. 우리 모두 마음 한 구석에 묻은 아이들의 이야기는 그 어떤 서사로도 덮어질 수 없을 만큼 너무나 크고 깊은 눈물이라 그런 듯도 하다.
"십대와 이십대의 나는 나에게 너무 모진 인간이었다."라는 작가의 말은 이십대의 나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라 가슴이 떨렸다. 그런 스스로에게 사과하는 작가의 의연함에 위로 받았다. 나는 그러지 못했다. 나에게 너무 가혹하고 모질었던 청춘은 또 다른 형태로 나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언젠가는 나도 최은영 작가처럼 스스로에게 사과하고 싶었나 보다. 고마운 작가, 그녀의 건투를 빈다. <한지와 영주>에서 다른 언어를 썼던 아이들이 최선을 다해 서로 이야기를 하고 듣고 이해하고 공감하려 했던 그 작은 장면에서의 대사가 비어져 나와 나에게 도착한다. "그런데 내 말을 이해해?" ...
이해하려는 노력은 아무리 무용해도 멈추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