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 속에서야 겨우 인간은 자기가 누구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진지한 깨달음은

 

빵을 요구하는 민중들에게 케이크를 이야기해 빈축을 샀다고 하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한 말이기도 하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나의 소설에서 주인공은 늘 운명에 의하여 쓰러진 자"라고 공언한 바 있다. 그렇다면 그가 로코코의 여왕이라 명명했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가장 전형적인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최고와 최악만을 몸소 구현한 인물이다. 인생에서의 성공이라는 척도가 지금 자본주의의 그것으로 한정된다 하더라도 그녀는 최고를 누려봤으며 파멸이라는 것이 어떤 형태로 가장 극악무도하게 운명의 손아귀에서 형상화될 수 있을지 상상할 수 있다면 그 극한의 마침표를 찍은 것도 그녀의 삶이었다. 슈테판 츠바이크가 그려내는 마리의 삶은 모두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이기도 하고 모두의 기대를 상회하는 것이기도 하다. 오백 페이지가 넘는 그녀의 이야기의 만가의 대목에 이르면 누구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도 그가 어떻게 한 인간의 삶에 대한 신화, 오해의 휘장을 벗겨내고 인간에 밀착하여 그 내면의 심리, 감정, 욕망을 세밀하게 언어로 설득력 있게 그려낼 수 있는가의 능력의 지평이기도 하다.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진실과는 너무나 먼 것이었다.

 

 

진실이란 대개 그렇듯이 중용에 가까이 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왕권주의의 위대한 성녀도 아니었고, 혁명의 "매춘부"도 아니었으며, 불도 얼음도 아니고, 특별히 선을 베풀 힘도 없을 뿐더러 악을 행할 의사 또한 없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여인일 뿐이었다.-p.10

 

 

마리 앙투아네트는 평범했다. 위대하지도 그렇다고 비열하거나 간악하지도 않은 하지만 자신에게 무상으로 주어진 것들의 댓가를 고려하지 못하는 둔감함에 굴복했을 뿐이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그녀가 어머니인 오스트리아의 여제인 마리아 테레지아와 주고받은 편지를 자주 인용한다. 어머니는 본능적으로 딸의 아둔함과 무절제함을 간파하고 걱정하여 몇 번이나 그러한 우려와 충고들을 했고 심지어 측근을 파견하여 멀리 떨어져서도 제대로 훈육하려 애썼지만 불행 중 다행인 것인지 딸의 개과천선도 비참한 말로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뜨게 된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성장통은 혁명의 압력이 왕가에 직접 가해지면서부터 시작된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그녀의 불행이 그녀를 결국 제대로 성장시키는 계기가 됐음을 간파한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통해서 자신이 학습했던 그 수많은 가치들이 이 평범하지만 너무나 갑작스럽게 지대하게 주어진 물질적 풍요로 타락일로를 걸으려 했던 한 여인이 어떻게 스스로에게 주어진 운명 앞에서 그것을 수긍하고 마침내 그것을 박차고 더 높은 경지로 뛰어오를 수 있었는 지에 대한 그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우리 평범한 인간들이 삶을 통해 어떻게 단련되며 타락하거나 침몰하지 않고 고귀해질 수 있는지에 대한 하나의 예를 제시해 준다. 그녀의 사치행각은 일부였고 억지로 파리로 끌려가 유폐되며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당하고 최소한의 불빛조차 빼앗겼을 때 그녀가 어떻게 동요하지 않고 자신에게 파도처럼 밀려오는 수많은 비극들을 감수하고 죽음으로 걸어들어갈 수 있었는 지에 대한 이야기는 어쩌면 그녀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에 대한 대부분의 이야기다. 그녀는 이제 미래 세대와 역사를 의식하기 시작한다. 아이들과 자신의 이야기가 역사가 되고 자신을 단두대의 제물로 바침으로써 혁명이 달성하려 했던 명분의 뒤안에 더 많은 것들이 있음을 감지했다. 그 순간부터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렇게나 마리아 테레지아가 한탄하며 되뇌었던 "도대체 넌 언제 너 자신이 될 거냐!"라는 어머니의 탄식에 응답하게 된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바로 이러한 이야기들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검증되지 않은 수많은 호사가들의 입방정은 없다. 좀 빈약하더라도 진위가 분명한 자료들만으로 슈테판 츠바이크는 사치스러운 인형을 한 명의 평범한 어머니로 사랑하는 남자의 가문의 문장을 새겨놓은 반지를 감옥 안에서까지 끼고 있었던 여인으로, 마지막에는 역사에 남겨질 위대한 여제의 막내딸로 살려 놓는다. 그 틈새에는 인간에 대한 통찰과 그 내면의 심리에 대한 섬세한 고찰이 더욱더 풍요롭게 이야기들을 낳는다. 특히나 그녀가 죽을 때까지 사랑했던 스웨덴 백작 페르센과의 이야기는 그것이 하나의 거대한 환상이라 할지라도 결국 우리가 꿈꾸는 불멸의 가치와 만나 빛난다. 그녀가 추락할 때 이 남자는 전면에 등장한다. 가지고 있던 그 모든 것들을 다 잃어 버린 지점에서 숨어 있던 사랑은 걸어 나온다. 그녀가 사라지자 이 선량했던 미남자는 냉정해지고 불우해지고 비관적이 된다. 그녀를 위해 죽지 못했던 날짜는 자신이 마침내 죽은 날짜와 만나 드디어  완성된다. 시종일관 담담했던 문장들은 이 둘의 사랑 앞에서 흥분하고 떨린다.

 

누구나 운명에 의하여 농락당할 수 있다. 표면상으로 보면 그렇다. 그러나 그것이 성장이나 그 인간의 내면의 진정성에 대한 이야기라면 국면은 달라진다. 진정한 자기가 되는 것은 저자 슈테판 츠바이크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가장 평온하고 안정되어 있을 때가 아니다. 불행은 아프지만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암초임을 그는 이야기한다. 오디세우스의 험난한 여정은 결국 우리 모두의 것이 되고 만다. 그게 삶임을 슈테판 츠바이크는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그는 인간이 언젠가는 한없이 고귀해질 수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마감한 것은 그가 삶과 인간에 절망해서가 아니다. 그의 말들은 그가 진정한 의미에서는 포기하지 않았음을 웅변한다. 어떤 최악의 상황에서도 극단의 지점에서도 날아오를 수 있는 그 잠재력을 이미 보아 버린 다음에야 순전한 포기와 절망은 절대 뒤따라올 수 없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솔이 2016-03-01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이네요

blanca 2016-03-03 18:0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부족한 점이 많지만 열심히 쓰겠습니다.

Jeanne_Hebuterne 2016-03-14 0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재판정에서 마리 앙투아네트가 했던 것 만큼이나 탁월한 자기변론을 이전에도 이후에도 본 적이 없어요. 불굴의 정신을 보았다는 느낌이랄까요. 탕플 이후에야 이 사람은 진실한 자기 자신을 본 것이 아닌가. 그렇다 하면 어제와 오늘이 같은 다른 이들보다 이 사람은 여러모로 압축된 삶을 살았다는 점에서는 행운을, 그럼에도 그 압축된 삶이 하필 자유 평등 형제애라는 프리즘을 지나쳐야만 했다는 점에서는 불운을 지녔던 게 아닐까. 그저 안타까웠어요. 츠바이크의 말대로 당시 보통의 귀족 딸로 태어났더라면, 아니면 그저 농부의 딸로 태어났다 하더라도 훨씬 더 평온한 삶을 살았을 것 같다는 생각도요.

blanca 2016-03-14 14:58   좋아요 0 | URL
쟌느님은 며칠 전에 이 책을 읽은 저보다 더 세세하게 깊이 있게 내용을 잘 떠올리시는 것 같아요. 저에게 츠바이크의 마리 앙투아네트는 세상을 보는 그 숱한 주어진 시선들에 대하여 다시 한번 돌아보게 만들 만큼 충격이었어요. 항상 사치스럽고 생각 없는 사람으로만 알고 있었던 여인이 삶의 비극 앞에서 보인 태도와 말들이 츠바이크의 말처럼 삶의 불행 그 자체가 사람을 성숙시키는 과정이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