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점까지 나는 내 삶에서 모든 게, 비록 정확히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 할지라도, 내가 희망하는 대로 또는 원하는 대로 어떻게든 잘 풀릴 거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하지만 그 순간 빨래방에서, 그건 전혀 진실이 아님을 깨달았다. 나는 내 삶의 대부분이 어지럽고 시시한 일로 이루어졌으며, 희망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레이먼드 카버 <내가 필요하면 전화해> 중
카버가 빨래방에서 가족들의 빨래를 안고 초조해하며 건조기 순번을 기다리는 순간 새치기를 당하고 느낀 단상이다. 카버는 언제나 가난했고 스무 살이 되기 이전에 이미 두 아이의 아빠가 되어 있었고 아버지 카버처럼 반생을 술로 고생했다. 이러한 게 단순히 카버적인 개별적인 그만의 신산한 삶의 풍경이었을까? 아니면 삶의 전반적인 풍경이 그저 카버 앞에서 순수하게 더 명료하게 모습을 드러낸 그 순간 카버의 언어로 형상화된 것 뿐일까? 대체로 누구에게나 결국 삶은 시시하고 힘들고 예기치 않은 불운에 때로 얼굴을 가격 당하며 그렇게 버티며 나아가는 것일까? 그러다 늙음에 병마에 먹혀 자기가 미처 마침표도 찍기 전에 그냥 '끝'으로 사라지고 마는 걸까...
카버의 단행본에 실리지 않은 단편들의 끝은 여느 평범한 단편처럼 마무리되는 맛도 없고 오 헨리의 그것처럼 반전도 없고 다만 삶의 진실, "명쾌한 해답이나 엔딩은 주어지지 않는다"에 충실하다. 언제나 비극에 무방비이지만 쉽게 무릎꿇지도 않고 그렇다고 자신에게 다가온 일들을 좌지우지하겠다고 섣불리 덤비지도 않는다. 그의 '이야기'는 '현실'이다. 그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것은 내가 어제 생각했던, 혹은 몇 년 전에 들었던, 보았던 것들, 미래에 겪고 느끼게 될 감정들이다.
아껴 읽고 싶다. 노동자였던 그래서 일을 하며 술을 마시며 외동 아들을 사랑했던 아버지 레이먼드 카버에 대한 이야기, 이제 '쓴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 정열, 좌절, 자신의 삶, 아이들, 그리고 또 카버가 만든 많이 다듬지는 않은 날것의 이야기들. 병원 복도의 창에 기대어 눈물을 흘리며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의 부모의 심정을 돌이켜 보게 될 줄 몰랐듯이 그의 대부분의 이야기들이 그냥 산다는 것의 편린들이라 무심코 흘려보낼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