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선생님, 그런 생각은 언제쯤 하는 게 좋을까요?」

 

「너무 일찍 하면 안 되네. 스무 살이나 서른 살쯤에 세상놈들이 모두 바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히려 바보나 하는 짓일세. 그래서는 절대로 지혜에 도달할 수 없네. 서두르면 안 되지. 우선은 남들이 자기보다 낫다는 생각으로 시작하게. 그러다가 마흔 살쯤에 미심쩍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품고, 쉰에서 예순 살 사이에 이제까지의 생각을 수정한 다음, 백 살에 이르러 하늘의 부름을 받고 떠날 때가 되었을 때, 그 확신에 도달하면 될걸세.

<중략>

 

하지만 죽기 전날까지는 이 세상에 바보가 아닌 존재, 우리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존재가 하나쯤은 있다고 생각해야 하네. 그러다가 적절한 순간에- 미리 하면 안 되고- 그 사람 역시 바보임을 깨닫는 것이 바로 지혜일세. 그래야만 비로소 우리가 담담하게 죽을 수 있을 걸세.」

 

-움베르트 에코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중

 

이 기호학자이자 중세 연구학자로서 <장미의 이름>을 쓴, 살아서 언어로 이루어 낼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는, 이제 백 살을 향해 성큼성큼 걷고 있는 노작가의 이러한 재기발랄한 이야기에 오랜만에 혼자서 책을 읽다 소리내어 웃었다. 나는 이제 아직 다행히 마흔이 안 되었으니 아직은 남들이 나보다는 낫다고 생각하기로 하고 조금 있다 미심쩍다고 생각해도 된다니, 다행이다.

 

어렸을 때에는 세상에는 온갖 정의의 사도가 난무하고 결국 해피엔딩인 이야기가 메아리치다 이윽고 당면하는 사실의 조각들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 선과 정의가 대세는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 앞으로 나이와 함께 나를 밀고 간다. 움베르트 에코가 '미심쩍다'를 마흔 언저리에 둔 것은 대단히 시의적절하게 느껴진다. 마흔인 사람이 아직 세상은 너무나 아름답다,고 전면 긍정하는 모습도 눈물의 계곡이라고 모두를 의심하는 것도 그리 적절하게 보이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아직 두 돌이 안 된 아기가 자꾸 이 책의 사진을 보고 '아빠'라고 부른다.--;; 얘야, 할아버지를 보고 아빠와 닮았다, 하면 아빠가 얼마나 슬프겠니. 안 그래도 늦둥이인데 움베르트 에코와 벌써 닮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과히 좋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리 움베르트 에코 할아버지가 위대한 성취를 많이 이룬 훌륭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말이야. 아직 아빠는 세상을 조금은 긍정할 수 있는 나이라고 에코 할아버지가 말했단 말이다.

 

무심코 넘기는 온갖 사소한 불편, 부당함을 한번 비틀어 보는 그의 시선이 날카롭고 유쾌하다. 뭐, 이런 것까지, 싶다가도  우리는 이미 너무 모든 것들을 익숙하게 넘겨 버리는 데에 익숙해져 버린 단단한 껍질 아래 진짜를 숨기고 살았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잠시라도 하게 해준다면 그것은 바로 움베르트 에코 덕택일 것이다.  

 

이 짧은 글들은 익살스럽지만 촉촉하거나 부드럽지는 않다. 다분히 인문학적이고  진지하기도 하다. 그러나 그가 말미에 덧붙인 움베르트 에코의 고향 이탈리아의 알렉산드리아에 대한 이야기는 어찌나 낭만적이고 아름다운지 여느 로맨스 소설의 저릿한 결말과 닮아 있을 정도이다. 그의 고향을 이해하려면 '안개'를 이해하여야 한다. 안개보다는 조금 굵고 이슬비보다는 가늘다는 '는개'라는 단어에 대한 이해와 함께.

 

다행히도 알렉산드리아 평원에 안개가 끼지 않는 아침 무렵에는 우리가 <스카르네비아>라고 부르는 는개가 내린다. 부연 이슬과도 같은 이 는개는 초원을 환하게 만들어 주기보다는 하늘과 땅의 경계를 없애면서 우리의 뺨을 가볍게 적셔준다. 안개가 끼었을  때와는 달리 시야는 지나칠 정도로 훤하지만, 풍경은 충분히 단조롭고 모든 것이 미묘한 잿빛을 띠기 때문에 눈을 어지럽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 시간이면 자전거를 타고 도시를 빠져나가 지방 도로 혹은 운하를 따라 곧게 뻗은 오솔길을 달려야 한다. 스카프는 두르지 말아야 하고, 재킷 속에는 가슴이 젖지 않도록 신문지를 찔러 넣는 것이 좋다.

-p.427

 

 

언젠가는 꼭 가보고 싶다. 스카프는 두르지 않고 그 충분한 단조로움을 만끽하면서. 세상은 아직 바보로 가득 차지 않았다는 희망과 함께 하는 나이가 다 소진되기 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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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5-07-06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읽고 나면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을 알게 될거라`는 친구의 말에 이 책을 읽었어요.
그런데 전혀 모르겠던데요.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 우연히 그 친구와 만나 말했어요.
네가 그렇게 말해서 읽었는데, 정말 모르겠더라고 말이죠.
그 친구는 본인이 저에게 그렇게 말했다는 사실조차 모르더군요.

늦동이를 키우고 계시군요.
아직 어린 아이와 함께 하는 일은 늘 힘든 일이죠.

blanca 2015-07-06 21:20   좋아요 0 | URL
저도 그 방법이 안 나와 있어서 ㅋㅋ 그래도 정말 한번씩 어찌나 기지가 번득이던지. 이래서 움베르트 에코구나, 싶더라고요. 늦둥이는 지금도 옆에서 우유 쏟고 물휴지로 닦으며 노네요 ㅡㅡ

숲노래 2015-07-06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늦둥이한테 아빠는 어떤 사람이려나요~ ^^

낮잠을 잔 아이들이 오늘 따라 열 시가 되어도 안 자려 하네요.
@.@
아이들보다 제가 먼저 곯아떨어져야 할 듯한 하루입니다......

blanca 2015-07-07 12:26   좋아요 0 | URL
큰 아이와 터울이 여섯 살이나 나니 여러 애환이 생기네요. 건강관리 잘 해서 든든하게 오래 지켜 주고 싶어요. 아직 두 돌도 안 됐는데 요새 낮잠 안 자려 해서 전쟁입니다.

2015-07-18 00: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7-18 09:2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