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스틱 장난감을 빨며 쓰레기통 뚜껑을 둥둥 치던 여자아이는 어느날 문득 뱅그르르 소시지컬을 한 연한 금발 머리의 어린 소녀가 진지한 표정으로 서 있는 것을 멍하니 보게 될지도 모른다. 그 진지한 얼굴의 아이는 칠레소나무 주위의 푸른 풀밭에서 굴렁쇠를 쥐고 서 있으리라. 두 번째 소녀는 첫 번째 소녀가 빨고 있던 플라스틱 우주선을 바라보고, 첫번째 소녀는 굴렁쇠를 바라보리라.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애거서 크리스티 <애거서 크리스티 자서전> 중

 

장장 십오 년에 걸쳐 쓴 애거서 크리스티의 자서전이 마침내 일흔다섯의 나이에 마무리지어질 때 덧붙여진 이 아름다운 대목은 누구나 스스로를 대입해도 유효한 부분이다. 물론 가지고 놀던 장난감이나 놀이는 달라지겠지만 꼭 노년이 아니어도 문득 쉼없이 달려온 나의 삶의 연대기의 초입 부분에서 소녀 시절, 소년 시절의 '나'를 또 다른 시간 속의 '내'가 맞닥뜨리는 장면은 상상만으로도 뭉클하다. 추리소설의 여왕이라는 꼬리표가 떨어져 나간 자리에 우뚝 선 이 우아한 할머니 작가는 자신의 삶 속의 수많은 파편들을 하나의 자리에 잘 통합하여 정리하는 데에 탁월한 재능을 그녀 자신의 이야기에서 발휘한다. 따뜻한 가정의 막내딸로 보낸 행복한 유년과 남편의 배신으로 아프게 끝나 버린 첫 결혼 생활과 연하의 고고학자와 사랑에 빠지고 어린 시절 유모가 들었으면 깜짝 놀랐을 여왕과의 만찬까지 그녀의 삶에서 일어난 수많은 에피소드들은 언뜻 서로 충돌하는 것 같지만 그녀의 삶 속에서 일관되게 흐르는 삶에 대한 애정, 겸허함과 이야기를 쓰는 일에 대한 천착으로 한데 뭉그러져 향그럽게 발효한다. 우리는 그녀가 때로 어떤 시점의 환희와 절망 속에 가라앉는 모습을 담담하게 지켜보게 되지만 그녀가 결국 해피엔딩의 주인공이 될 것임을 알기에 일희일비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고 보면 남의 이야기를 들을 때 우리는 얼마간 좀더 현명해진다.

 

정작 우리의 삶 속에는 그럴 수 없다. 오늘 가려운 곳, 아픈 곳은 영원히 나을 것 같지가 않고 어제의 불화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항상 어제를 후회하고 그리워하고 내일을 기대하고 때로 가망 없어 보이는 숱한 미래 앞에서 압도 당한다.

 

 

 

 

 

 

 

 

 

 

 

 

 

 

 

 

로버트 그루딘. 이 생소한 이름의 저자가 드디어 '시간'에 대한 객관적인 담론의 장을 조심스레이 펼친다. 프랑스 혁명력을 본따 만든 글의 목차는 간명하고 예리한  성찰의 말들과 개인의 삶에 대한 성실한 기록들이 어우러진다. 어쩌면 거들먹거리는 듯한 단정짓는 경구들에 시달려 온 우리들에게 단정하게 타이르는 듯한 그의 이야기는  절로 귀기울이고 싶어진다. 무엇보다 군데 군데 그 자신의 삶에서의 회한과 경험들에 대한 솔직한 고백이 진실에 중량감을 가져오고 투명하게 아름다운 문장들이 노래처럼 울려 더욱 그러하다.

 

우리가 중요한 사건을 사진으로 찍을 때처럼, 또는 먼 훗날의 향수를 예견하면서 어린아이의 아름다움이라는 잡기 힘든 본질을 머릿속에 새겨두려 애쓸 때처럼 바로 그렇게, 현재의 모든 정신 상태를 하나의 고유한 전체로, 일시적이고 다시는 되풀이될 수 없는 힘과 내용의 상호작용으로서 음미하고 기억해야 한다.  -p.31

 

첫아이가 태어났을 때 난 정확히 이 반대로 행동했었다. 그저 이제 밤새 숙면을 할 수 없고 종일 아기의 욕구에 맞춰 하루를 재편성하고 나의 욕구와 나의 감정을 존중할 여유를 가질 수 없다는 데에 상실감을 느꼈고 모든 낯선 과제에 너무나 압도 당해 상당 기간 이 힘든 상황이 지속될 거라는 데에 지치느라 여념이 없었다. 나는 그게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 지를 미처 몰랐고아이의 성장에 있어 그 아이와 함께 하는 축복받은 찰나라는 것을 삶의 긴 시간 측면에서 관조하지 못했다. 그래서 수많은 후회가 남는다. 먼 훗날 그 시간을, 그 젊음을, 그때 그 시간 속의 아이를 얼마나 그리워하게 될 지를 미처 몰랐기에 아름다운 시간들은 상당 부분이 가뭇없이 사라졌다.

 

스무 살이 서른 살을 상상하지 못하듯 밤에 두 세번씩 깨는  아가가 책가방을 매고 타닥타닥 뒷모습을 보이며 혼자 걸어갈 것을 몰랐기에 그 아기 옆의 엄마는 빈곤했다. 아직도 여전히 자주 상황에 먹히기는 하지만 적어도 그 상황이 전체가 아님을 알 정도로 나이가 들어버리니 숱하게 손가락 사이로 흘려보낸 어리석은 근시안의 나날들이 아쉽고 그립다. 로버트 그루딘은 "하루하루는 8만 6천 초가 넘는 작은 영원이다."라며 그 자신 언젠가는 그리워하며 돌아볼 '오늘'을 성실하게 기록한다.

 

삶의 미미함, 그 오목한 자국과 새김눈 자체가 만족스럽게 길어지기를 소망하려면 실로 시시콜콜할 만큼 충만하게 삶을 사랑해야 한다. 그런 삶을 소망하는 건 이미 그런 삶을 시작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그러는 것이 삶을 무한히 확장하는 길이다.-p.65

 

이제 반이나마 온 것같다. 자도 자도 읽고 또 읽어도 항상 남아돌았던 청춘의 하루는 저만치 걸어가 버리고 이제 내 앞에 남은 시간은 유한하다,는 것을 아는 중년이 되었다. 시간은 삶의 배경이 아니라 삶의 핵심을 좌우하는 가장 큰 힘이다. 그것을 배워가는 것이 어쩌면 삶 그 자체일런지도 모르겠다. 어쩔 수 없이 많은 것들을 '시간'을 통해 배우고 '시간'에 헌납하고 가야 한다. 저자의 소망처럼 이 책은 섣불리 결론으로 이끈다기보다는 잠시 멈춰 서서 생각하고 숱한 찰나의 파편들을 원경에서 커다란 패턴 속에서 관조하는 시간을 선물해 주었다. 이 책도 나와 함께 같이 늙고 숙성해 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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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애 2015-06-04 0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저도 아침마다 버스를 두 번이나 타고 아이와 함께 하는 어린이집길을 소중히 즐거워하며 가고 있습니다. 물론 등원 전의 그 엄청난 소란함도요.

blanca 2015-06-04 13:08   좋아요 0 | URL
아애님, 버스를 두 번이나 타는 길이어도 아이와 더불어 아애님한테 지금 이 시간들은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을 테니 참 부럽네요. 이제 큰 애는 초등학생이어서 유치원 시절 추억들이 어찌나 그리운지. 참 아기자기한 행사도 많고 유치원생 학부모로서 누리는 작은 즐거움들이 있더라고요.

하지만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려 해요. 오늘 오전에 고무줄 공예 도구들 주문해 달라고 책상 청소 하더라고요.
귀여워요^^

숲노래 2015-06-04 0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곰곰이 보면, 어머니 자리에 서는 이들은 `아이와 함께하는 나날`을 되돌아보지만,
아버지 자리에 서는 이들은 `아이와 함께하는 나날`을 미처 돌아보지도 못하는 채
너무 빠르게 내달리기만 하지 싶습니다.

언제 어디에서나 무엇이든 모두 축복일 텐데요

blanca 2015-06-04 13:10   좋아요 0 | URL
숲노래님, 정말 그렇습니다. 그런 면에서 숲노래님이 지금 아이들과 함께 하는 그 시간들이 참 더욱 값지게 다가와요. 특히 정성스럽게 차리는 밥상이 저한테는 언제나 자극을 줍니다. 천연재료들로 그득한 밥상은 양육자의 아이에 대한 마음이기도 하니까요.

바람향 2015-06-04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나이를 먹는 걸 두려워 하지 않는 자신이 되었으면 좋겠네요...ㅎ

blanca 2015-06-04 13:10   좋아요 0 | URL
바람향님, 저도 여전히 두려워요. 아주 많이...

Nussbaum 2015-06-04 1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lanca님. 하루하루가 비슷한 요즘 저는 어딘가에 뭔가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예전과는 다르게 기록하는 데 시간을 많이 두지 않고, 기록하는데 필요한 장면을 마음에 담는데까지 시간을 많이 두고 있는 점이 다르네요. 올리신 글을 보니 다시금 그 기록을 빼먹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네요.

blanca 2015-06-04 23:59   좋아요 0 | URL
기록이라는 게 참 중요한 게 시간을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시간에 온전히 패배하지는 않을 최소한의 노력이 되어주는 것 같아요. 저는 다이어리를 열심히 쓰려 하는데 제가 기억하는 상황과 기록이 어긋날 때가 있더라고요. 누스바움님은 저보다야 더 기억도 명료하고 또 기억을 남길 그림도 그리실 수 있으니 더 행운이신 게 아닐까요.

lachrimae7 2015-06-04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lanca님, 저는 이 책을 만들 때 옆에서 일을 조금 거든 편집자입니다. 이 글을 읽으니 ˝독서는 내 몸 전체가 책을 통과하는 것˝이라는 정희진 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나네요. 마음에 와 닿는 서평 감사합니다.^^

blanca 2015-06-05 00:00   좋아요 0 | URL
아, 좋은 책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직도 이렇게 읽고 또 인생의 책으로 간직할 독자가 있다는 것 기억해 주시고 힘 내시기를 바랍니다. ^^

2015-06-07 0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6-07 1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