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왔는데 게다가 애거서 크리스티의 <두번째 봄>까지 읽었는데 (공교롭게도 주인공 셀리아가 두번째 봄을 맞은 나이는 나와 같다. 물론 서양식으로 한다면 아직 나에겐 이년의 시간이 남아 있다.)도 불구하고 요즘 종종 우울하다. 이것은 내가 나로 태어나서 나의 삶을 살아간다면 언젠가는 또 당면하게 될 우울감이라 도망갈 수도 없다. 그래도 역시 나에게 힐링은 책에 관련된 것들. 아주 오랜만에 이동진의 팟캐스트 빨간 책방을 찾아 들었다.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에 대하여 이야기한다지 않는가. 두 시간 가까이 되는 중혁 작가와의 그 주저리주저리가 너무 좋아 그 순간 만큼은 살아 있다는 것이 참 좋았다. 나는 '카버'에 대하여 좀 각별한 기억들이 있다. 이렇게 얘기하니 마치 친분이 있는 것처럼 들려 더 좋다. 분홍공주가 아기였을 때 아기가 잠에서 깨기 전 그 아침 시간이 나에게는 거의 유일하게 주어진 자유 시간이었다. 빈속에 꼭 믹스 커피를 마시고 책을 읽었다. 아마존에서 한 달이나 걸려 내 손에 온 중고책은 카버의 단편집. 물론 전체를 다 제대로 읽어낼 역량은 되지 않았다. 드문 드문, 어쩌면 철저한 오독과 몰이해였을 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냥 이렇게 카버가 쓴 그 언어 자체를 내 눈 앞에서 볼 수 있다는 게 좋았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에서 아이를 낳고 평범한 행복을 누리며 사는 부부에게 어느덧 벼락처럼 아이의 사고와 죽음이 다가왔을 때의 카버의 이야기는 분홍공주가 많이 아팠을 때  다시 나에게 돌아왔다. 카버는 분명 이런 종류의 상실이나 고통을 직접 겪어본 후에 이 이야기를 시작했을 거라는 심증이 들 정도로 그 담담한 듯하면서도 핵을 건드리는 정황 설명, 감정의 변화는 나의 그것들과 만났다. 소름이 끼쳤다. 작년 사월 이동진은 이 작품을 낭독하는 것으로 아이들의 죽음을 애도한다. 고저나 강약이 강조되지 않은 읊조리는 듯한 잠긴 그의 목소리로 듣는 일상의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그 삶의 가혹한 반전은 영락없이 또다시 나를 흔들었다. 빵집 주인의 그 따뜻한 위로의 결말은 어쩌면 이 이야기의 핵심이 아닐 거라는 의혹. 난 언제나 아이가 서서히 죽어가며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그 평온한 일상이 해체되는 그 현실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그 평범한 부부의 가슴을 저미는 고통에 전염된다. 언젠가 느꼈던 바로 그 고통의 흔적은 다시 거스러미를 뚫고 돌아오고 만다.

 

카버의 편집자와의 스캔들, 대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추측이고 주장인 지에 대한 그 모호한 지점에 대한 갑론을박은 카버의 이야기들에 대한 본질적인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여기, 이렇게 우리 손에 주어진 그 가난하고 항상 돈에 급급해야 했던 신산한 삶 속에서나마 한 자, 한 자, 이야기를 놓치지 않으려 했던 그 처절한 시도들의 주인공인 거구의 사내가 남기고 간 이야기들, 그것들로 충분한 것이 아닌지. 김연수의 번역은 되도록 카버의 그 직설적이고 짧고 과장되지 않은 문장 그대로를 살리려는 노력에 닿아 있다.

 

 

 

 

 

 

 

 

 

 

 

 

 

김영하는 김연수와 대척점에 있는 작가라고 나는 종종 느낀다. 김연수가 삶에 대한 소통에 대한 희망, 낭만에 대한 그 어떤 희구에 언어를 어루만진다면, 김영하는 삶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항변하는 듯하다. 그의 언어는 그의 이야기와 닮아 있다. 친절하지도 부드럽지도 않다. 살의, 의심, 망설임, 비정함 들이 난무하는 현실 앞에 그는 일말의 희망마저 단칼에 베어 버린 그 지점에 독자들을 불러 세운다. 그는 글을 잘 쓴다기보다는 이야기를 잘 만드는 데에 가깝고 언어의 조탁에 크게 괘념치 않아 보이는 모습이 매력적이기도 하고 무심해 보이기도 한다. 한데 이런 추측들이 그의 가치관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았다.

 

 

 

 

 

 

 

 

 

 

 

 

 

 

 

정말 김영하가 말한 내용들. 강연회, 인터뷰, 대담. 내밀한 사적인 이야기들을 말하는 것도 아닌데 꼭 작가로서가 아닌 일반 생활인으로서의 김영하에 대한 많은 것들을 듣고 알게 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그는 말하는 것보다 쓰는 것이 낫다고 주장하지만 여하튼 자신을 표현하는 데에 어떤 경계나 거리낌, 가식을 치워버리고 덤벼든 그의 진정성에서 비롯된 면이 있을 것이다. 비관적 현실주의자. 하지만 그러한 현실 안에서 지속 가능한 즐거움을 추구하자는, 그것이 일상의 경건함을 만들어 간다는 그의 이야기는 지금의 나에게 굉장히 호소력 있게 들린다. 나는 그가 추구하는 단단함과는 멀리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의 지향은 역설적으로 그의 이야기와 급하게 만난다. 그가 이야기하는 견고한 내면을 가진 개인들이 다채롭게 살아가는 세상의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나는 분명 더 단단해져야 할 것이다. 나의 못남과 나의 어리석음과 나의 편견, 아집들은 결국 나의 나의 약함과 만나고 그것은 타인과의 관계를 건강하게 만드는 데에도 분명 걸림돌이 된다. 소비에도 관계에도 의존하지 않고 쓰면서 그 과정에서 이미 충분한 행복을 누리는 작가의 삶이 일견 참 부러웠다. 

 

작품을 발표하지 않고 금고에 넣어둔 샐린저를 몇 번이나 언급하며 사실 소설가는 이미 쓰는 과정에서 보상을 받는다는 그의 이야기는 어쩌면 내가 지금 여기에 이렇게 글을 끄적거리며 치유를 받는 것과 닮아 있다. 읽고 쓰고 듣고가 만나고 이야기하고 느끼는 것보다 나에게는 더 절절하고 친밀하다. 어떤 게 진짜 삶인지는 섣불리 단정짓지 않으려 한다. 다 살아 내고 마지막에는 결론을 낼 수 있을까, 확답하기 힘든 문제다. 레이먼드 카버의 알콜 중독에 평생 시달렸던 그 삶과 자신의 작품 <대성당>에서 주인공 남자가 아내의 맹인친구에게 티비의 대성당을 느끼게 해주기 위해 함께 대성당을 그리며 느낀 감동과 전율의 대목 어떤 것이 더 진짜인 지를 우리가 판단해 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단정하고 확신하지 않고 한번 더 질문하고 회의하는 지점에 바로 '이야기'와 '작가'가 있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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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03 10: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4-03 18: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4-03 19: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ocomi 2015-04-03 10: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김영하와 김연수를 대비하신 점 격하게 동감해요. 저도 이렇게 생각하곤 했는데 잘 정리해주셨네요.^^

blanca 2015-04-03 18:57   좋아요 0 | URL
아, 감사합니다. 써놓고 항상 좀 뭣한데 힘이 되네요.

AgalmA 2015-04-03 11: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blanca님이나 cocomi님처럼 공감.
좋은? 선호되는 작가는, 시대를 사는 독자들이 원하는 어떤 것을 계속 제시해주는 것일 거라 생각합니다. 대중에 대한 아부가 아니라 그자신 또한 치열하게 고민하기 때문에 공감을 낳는 접점을. 김연수, 김영하 두 작가가 그래서 나란히 환호받는 것이기도 할테고, 카프카나 도스토예프스키가 영원할 이유이기도 하고요. 그걸 담보하지 못하는 작가는 밀려나는 거죠.(코드가 맞는 소수의 마니아라도 있으면 다행이고;)
뛰어난 소설이나 시는 인간의 그런 면을 언제나 대변해주기 때문에, 우리는 작가들을, 시인들을 내내 기억하려고 애쓰는 것이기도 하겠죠.

blanca 2015-04-03 19:00   좋아요 1 | URL
Agalma님의 댓글을 읽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되네요. 대중에 영합하고 무언가 자신의 내면에 있는 것들을 배신하기 시작하면 작가는 위험해지는 것 같아요. 하지만 사실 어떤 직업이든 누군가의 반응이 결과에 포함되어 있는 경우에는 그 유혹에서 완벽하게 자유로워지는 것도 쉽지 않을 테고요. 그래서 위대한 작가는 쉽게 되는 것이 아닌가 봅니다. 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