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거서 크리스티의 자서전은 장장 십오 년에 걸쳐 완성되었다. 일흔 다섯에 찍은 자서전의 마침표는 수많은 곡절들을 거쳐 비교적 행복했던 시절들의 잔향들로 어떤 충만감 속에 찍힌다. 방대한 양이지만 추리소설의 여왕이 회고하는 삶에 대한 이야기는 흥미진진하고 찬란하여 어떤 문학적 가치나 사회적, 정치적 성취에 지지 않는다. 그녀의 추리 소설이 단순한 서스펜스나 반전들로 폄하되지 않을 수 있었던 근저에는 분명 그녀가 이렇게나 진심으로 성실하게 줄곧 열정적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 낸 근면성과 진정성도 있을 것이다. 그녀의 포와로와 그녀의 마플이 많은 독자들의 가슴에 사건 해결사 이상으로 오래 잔잔하게 살아 남은 힘이기도 하다.

 

'메리 웨스트매콧'이라는 필명으로 추리소설이 아닌 여섯 편의 장편 소설을 펴낸 것은 애거서 크리스티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의 삶에서 얻어낸 많은 것들을 진지하게 독자들과 나누고 싶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탐정 에르큘 포와로나 귀여운 해결사 할머니 미스 마플이 나오지는 않지만 대신 하나 같이 이 이야기들에는 주인공들의 방황과 괴로움에 천금 같은 조언을 던져 주는 멘토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들의 조언은 금과옥조 같다. 그들의 탄생의 든든한 뒷배는 애거서의 어머니였음을 짐작하게 하는 결정적인 작품. <두번째 봄>이다.

 

 

 

 

 

 

 

 

 

 

 

 

 

 

원제는 <Unfinished portrait>. 전도유망했던 초상화가 래러비는 전쟁중 손을 잃게 된다. 그리고 그가 그려낸 끝나지 않은 초상화는 붓 대신 펜을 빌리게 된다. 우연히 만난 서른아홉 살의 여인. 래러비는 셀리아의 삶의 '인간 녹음기'를 자처하게 된다. 그녀는 또다른 애거서 크리스티다. 세밀하고 방대한 자서전 대신 조금은 축약되고 조금은 전개가 빠른 또다른 자서전을 읽게 된다. 많은 부분 셀리아의 삶은 실제 애거서가 자서전에서 고백한 에피소드들과 겹친다. 아기방의 연보라색 아이리스 벽지. 친절하고 푸근했던 유모. 언제나 놀이 동무가 되어주고 수많은 이야기들과 꿈, 공상을 진지하게 공유해 주었던 엄마, 느긋하고 너그러웠던 아빠,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남자들의 수면양말을 떠주었던 에너지가 넘쳤던 윔블던의 할머니. 너무나 아름답고 생생하고 사랑스러웠던 어린시절의 파노라마 앞에서 점점 성장해 가는 셀리아의 모습에는 우리들이 잃어버려 언제나 찾아 헤매며 방황했던 바로 그 조각들도 흩어져 있다. 셀리아가 세상의 거친 풍랑을 막아주었던 안온한 방벽 아래에서 보낸 유년은 그녀의 내면 속의 미처 자라지 못한 아이가 찾아 만난 남편과의 가슴 아픈 파경 앞에서 그녀를 거의 해체시킨다. 실제 애거서는 그녀에게 크리스티라는 성을 준 첫남편의 외도로 이혼에 이르게 되고 이 과정에서 죽을 때까지 해명되지 않은 실종 사건을 일으킬 정도로 참혹한 고통을 겪는다.

 

그녀가 이야기를 들려 준 화가 래러비는 "그녀가 성장하기 위해 서른아홉에 돌아왔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구개월도 아홉 살도 열아홉도 아닌 서른아홉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진정한 의미의 성장에 다다른 셀리아라는 여인의 삶은 애거사 크리스티 자신의 처절했던 성장통에 대한 또다른 내밀한 고백이다. 그 고백은 삶 속에 온전히 빠져 있을 때에는 결코 인식할 수 없는 삶의 원경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일종의 '패턴'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실제 애거서는 여러 작품에서 줄곧 '삶의 패턴'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누구나 한번쯤 자신의 삶에서 어떤 거리감을 유지하게 되면 자신이 그려온 삶의 궤적이 나름대로의 일정한 패턴을 그리고 있다고 느끼게 된다. 그때 일어났었던 일들은 그 일들로 종결되는 것이 아니다. 더 큰 밑그림의 한 귀퉁이였던 경우가 많다. 애거서 크리스티는 실제 첫결혼의 실패 후 연하의 따뜻한 고고학자를 만나 재혼하게 되고 죽을 때까지 해로하게 된다. 수많은 회한은 어쩌면 전체를 보고 난 후에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작가라면 자신의 창조한 인물들에게 신이 될 수 있습니다. 작가에게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혹은 생각하는 대로 인물을 만들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인물들이 도리어 작가에게 놀라움을 선사하지요. 진짜 신 역시 인간에 대해 그런 느낌을 갖는지 궁금합니다......

-<두번째 봄> 중

 

위엄 있게 단호히 삶을 떠나는 것을 꿈꾸었던 애거서 크리스티는 자서전을 마무리하고 십 년 후에 그 꿈에 거의 다다른다. 삶에 관한 한 말해야 할 것은 모두 말했다고 느꼈던 일흔다섯의 나이 앞에는 십 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이 선물로 주어져 있었다. '여기', '지금'은 죽는 그 순간까지 잠정적이다. 결국은 그 모든 것들에 대한 답 대신 질문의 무게가 주어질 것이다. 믿고 걸어가는 데 삶의 매력이 있을 테니까. 그녀의 말처럼 크고 진지한 것들보다 작고 사소한 것들에 어리석게 끄달리면서도 가끔은 저만치 한 발자국 떨어져 나와 나의 궤적을 가만가만 들여다 보고 싶다. 그 순간의 감탄을 잊지 말아야겠다. 나도 성장하기 위해 이야기를 여기 떨구고 간다.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Jeanne_Hebuterne 2015-03-30 2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안그래도 이 시리즈 신간을 기다렸는데 반가운 글 잘 읽었습니다 ;)

blanca 2015-03-31 07:57   좋아요 0 | URL
쟌느님도 이 시리즈 좋아하시는군요!! 추리소설도 좋지만 애거서 크리스티의 이 이야기들도 참 좋아요. 이렇게 순차적으로 번역하여 펴내어 주어 고마울 따름입니다. ^^

다락방 2015-03-30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신간 소식에 쫑긋했는데 블랑카님의 반가운 리뷰로군요!

blanca 2015-03-31 07:58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도 그러시구나!! 반갑네요. 좋아하고 기다리는 게 겹치면 참 행복해져요^^

moonnight 2015-03-30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저도 기다리고 있던 시리즈예요. 감사합니다. 블랑카님^^

blanca 2015-03-31 07:58   좋아요 0 | URL
이 책들 읽고 나시면 더욱 행복해지실 겁니다.

라로 2015-03-31 0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요!!^^(한꺼번에 다 지르려고 기다린 보람이 있어요~~`.^^)

blanca 2015-03-31 08:00   좋아요 0 | URL
아웅, 한꺼번에 다 지르고 읽어내실 그 기쁨도 못지않죠!! 저는 나올 때마다 챙겼는데 이게 또 감질나더라고요. 이 시리즈는 한 권의 번역이 기다리고 있더라고요. 아쉽기도 하고 기대도 됩니다.

transient-guest 2015-04-07 0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거서 크리시티는 삶 자체도 종종 소설 같다고 느낄때가 있어요. 나중에 꼭 구해서 봐야겠습니다.

blanca 2015-04-07 18:52   좋아요 0 | URL
저는 그녀의
광팬인데 자서전이랑 다른 필명으로 쓴 이 책 읽고 더 빠져들게 되었어요. 강추드려요.

숲노래 2015-04-08 0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쓸 때에도
내 삶을 누릴 때에도
우리는 저마다 스스로 새로운 하느님(신)이 되어서
하루를 보내는구나 하고 느끼곤 해요

blanca 2015-04-08 23:34   좋아요 0 | URL
요새 들어 더욱 하루하루가 소중하게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