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거서 크리스티 자서전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시현 옮김 / 황금가지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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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3학년 무렵이었나 보다. 전학와서 사귄 친구와 단짝이 되어 그 친구 집에 놀러갔다 우연히 애거서 크리스티의 <오리엔트 특급 살인> 책을 보게 되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언니의 책이었나 했다. 단숨에 나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팬이 되었다. 어떤 긴장을 끌고 가는 힘 뒤에 애거서가 슬몃 슬몃 뿌려 놓는 사람과 삶에 대한 이야기들이 좋았다. 막 달리는 롤러 코스터가 아니라 때로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고 뒤를 짚어볼 수 있게 하는 그녀만의 추리소설에 대한 애정은 감해지지도 스러지지도 않고 꾸준히 나의 성장과 함께 했다. 그녀가 다른 필명으로 장르 소설이 아닌 본격 소설 작품을 한동안 썼고 그것이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출판되어 또 다른 진지한 삶과 여인의 내면에 대한 천착을 들여다 볼 수 있게 되어 참 반가웠다. 까도 까도 또 깔 껍질이 나오는 양파처럼 이 작가는 무궁무진하고 깊다.

 

그녀는 다행히도 환갑 언저리에 시작하여 장장 15년에 걸쳐 쓴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남겨 두어 나 같은 독자들의 호기심과 관심을 어느 정도 충족시켜 주었다.  고고학자인 남편을 따라 유적 발굴에 참여했던 이라크의 님루드에서 시작된 그녀의 삶의 복기는 그 자체로 하나의 파란만장한 문학이다. 전체를 따라 흐르는 그 유쾌한 분위기와 삶의 애착이 참으로 따뜻하다.

 

나는 삶을 사랑한다. 때로는 나락으로 떨어진 듯 절망하고, 날카로운 비참함에 온몸이 꿰이고, 슬픔에 몸서리치기도 했지만, '살아 있다'는 것은 위대한 것임을 여전히 확신한다.- 서문 중

그녀는 뉴욕 출신의 아버지와 영국 태생의 어머니 사이에서 오빠와 언니를 둔 다복한 가정의 사랑받는 막내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인내심 많은 유모와 유쾌한 아버지, 이해심 많고 끊임없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어머니 밑에서 그녀는 행복한 유년 시절을 보내는 행운을 누린다. 유아기와 유년기에 대한 그녀의 묘사는 너무 생생해서 상상놀이에 심취하고 굴렁쇠를 굴리는 어린 애거서가 눈앞에 있는 것 같았다. 한번도 진지하게 작가를 꿈꿔보지 않았고 음악에도 재능을 보이고 약제실에서도 일했던 그녀가 우연히 어머니의 제안과 격려로 이야기를 쓰게 되는 장면은 참으로 드라마틱하다. 써 보기 전에는  쓸 수 있는 지 알 수 없다,는 어머니의 조언은 금과옥조다. 디킨스를 함께 읽고 어떤 선택이든 지지해 주었던 그녀의 어머니의 모습이 아이를 키우는 나에게 시사하는 바가 컸다. 거의 한 세기 전의 그녀의 어머니의 육아 방식은 자녀의 눈높이에서 성장의 단계마다 아낌없이 호응하고 너그러움을 발휘하는 모습으로 오늘날의 각종 육아서에서 설파하는 가장 이상화된 엄마의 현현 같았다. 어쩌면 애거서가 그렇게도 삶에 대한 굳건한 애정과 신뢰를 보낼 수 있었던 바탕에는 이러한 행복한 성장 과정이 밑받침되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의외로 평생 눌변이었고 소심한 편이었다고 한다. 여행이나 변화를 싫어하는 나로서는 애거서가 그 틀을 깨고 나와 세계일주를 하고 심지어 중동에 가서 유적 발굴에도 참여하는 모습이 신선한 자극을 주었다. 누군가 데려다 주기 전에는 산책을 나가지 않는 개 습성을 버리지 않으면 평생 그렇게 살 지 모른다는 그녀의 조언은 울림이 컸다. 그녀의 이야기 속 귀여운 해결사 할머니 미스 마플의 모습은 그녀가 군데 군데 남발하기도 하는 빛나는 조언들 속에 녹아 있다. 그런데 그 이야기들이 듣기 싫지 않도록 위트와 자신의 경험을 풀어 놓는 장치가 아주 정교해서 지루할 틈이 없다. 그녀가 아마추어 작가에서 프로 작가로 나아간 지점에 '돈'이 있었다는 솔직한 고백도 그렇다. 백년해로할 줄 알았던 남편의 외도로 괴로워하다 끝내 이혼을 선택하는 장면은 노년인 지점에서의 회상씬이라 할지라도 너무나 슬프고 애잔하다. 재혼의 대상이 될 줄 모르고 한참 어린 청년과 예쁜 빛깔의 돌을 색깔별로 늘어놓는 장면은 너무나 아름답다. 그의 이름은 맥스이고 그녀와 백년해로하게 되고 그녀가 마지막으로 등장시킨 미스 마플의 <잠자는 살인>을 헌정받게 되는 주인공이 된다.

 

 

나는 지금 대기실에서 피할 수 없는 부름을 기다리며 빌린 시간을 살고 있다. 부름이 내리면 그것이 무엇이든 기꺼이 다음 단계로 나아가리라. 운이 좋게도 우리는 이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다.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는 되어 있다. 지금까지 너무도 복된 삶을 살아왔다. <중략>

에스키모 사람들은 언제나 내게 찬미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어느 화창한 날 늙으신 어머니를 위해 맛있는 음식을 요리한다. 그리고 어머니는 얼음 너머로 걸어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처럼 위엄 있게 단호히 삶을 떠나는 것은 자랑스럽기 그지없는 일이리라.

-에필로그 중

 

 

일흔다섯의 나이에 삶에 관한 한 말해야 할 것은 모두 말했으므로 자서전을 끝내야겠다는 그녀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 감동적이어서 되풀이해 읽었다. 그저 언어로 포장한 것이라 할지라도 죽음에 대하여 이토록 담담하고 아름답게 이야기한 것을 들어본 기억이 없다. 늙음과 죽음은 항상 두렵고 소외된 것이라 여겼는데 이 위대한 추리 소설의 여왕이 노년에 이야기하는 그것은 어떤 타협의 지점에서 깊이 있는 울림을 주어 기억해 두고 싶다. 위엄 있게 단호히 삶을 떠날 수 있다면, 그것 자체로 삶의 근사한 대미로 장식될 것이다. 소멸은 물론 분명 어떤 고통을 담보로 하겠지만 그것은 그것 나름대로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이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한번 존재한 것은 무엇이든 영원히 존재하는 법이라는 애거서의 이야기를 위로로 담는다. 그녀처럼 더없이 행복하기만 한 유년을 가지는 축복은 받지 못했지만 나에게 아낌없는 헌신과 스러지지 않는 사랑을 가르쳐준 나의 할머니와의 추억들도 엄연히 거기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그래서 나는 몇 번이나 다시 돌아가 끝내 하지 못한 포옹과 '사랑한다'는 말을 다시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고 싶으니까. 프롤로그가 아니라 에필로그를 장식한 애거서의 어린 시절 사진은 분명 그런 기회가 있음을 의미할 것이다. 나이가 들어도 삶을 예찬할 수 있었던 그녀의 작품들을 읽어 온 시간들이 더욱 더 오롯이 나에게 채워지는 것 같은 시간들, 고마운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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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1-03 2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가사 크리스티라면 실종 사건이 제일 먼저 떠올려요. 어렸을 때 미스터리 모음집에서도 나올 정도로 특이한 사연이었어요. 그런데 무슨 이유로 크리스티가 사라졌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아요. 아마도 남편과의 관계 때문에 그런 것 같은데 이 자서전을 읽으면 실종 사건에 관한 언급을 확인할 수 있을지 궁금하군요.

blanca 2015-01-04 10:09   좋아요 1 | URL
저도 어렴풋이 들었는데 자서전에서 이 중대한 사건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어요. 찾아보니까 첫남편의 외도후 운전해서 나간 차에서 실종되었는데 어느 여관에서 그 남편이 외도한 상대 여성의 이름으로 묵고 있었다고 해요. 이게 충격에 의한 기억상실인지 아니면 일존의 연기였는지 그 진실에 대해서는 아직도 밝혀진 바가 없다고 합니다.

cyrus 2015-01-04 23:50   좋아요 0 | URL
하필 제일 중요한 내용이 없다니 아쉬워요. 그래도 본인에 관한 모든 얘기를 자서전이라해서 무조건 다 알려줘야하는 법은 없으니까요. ㅎㅎㅎ

라로 2015-01-04 0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른 나이에 아가사의 팬이 되셨군요~~~초딩때의 독서가 참 중요하다는 생각이 갑자기 드네요!! 해든이도 아가사를 읽히고 싶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지만 수준이~~~ㅠㅠ 그러고보니 블랑카님 엄청 똑똑하셨군요!!!

blanca 2015-01-04 10:09   좋아요 0 | URL
아웅, 비비아롬모리님, 똑똑한 것과는 ㅋㅋ 거리가 있었어요. 참, 해든이 혹시 구스범프는 어떨까요? 요새 분홍공주는 거기에 빠져 있는데 글밥이 좀 많아서 부담스러워하긴 하더라고요.

라로 2015-01-06 04:16   좋아요 0 | URL
분홍공주는 벌써 구스 범스를 읽는 다는 말이에요!!! 저도 이번 학기는 분발해야겠네요~~~. 어쩌면 해든이도 읽으라고 하면 읽을지도 모르겠긴 하네요,,,^^;;; 암튼 더 분발해야 겠어요,,,해든이 막내라고 거의 방목!!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