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상 읽고 싶은 책이 손 안에 들어오면 주춤하게 될 때가 있다. 꼭 봐야겠다고 결심했던 영화도 그 앞에 서면 멈칫하게 된다.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제대로 듣겠다고 결심하면 하나의 과업이상이다.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읽는 것도 보는 것도 해가 갈수록 집중력이 떨어지는 것은 나만의 여과기가 더욱더 고착화되어가고 있다는 예증이다. 그래서 숱한 오해와 오독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결국 나는 보고 싶은 것, 듣고 싶은 것만을 임의적으로 '보았다', '들었다', 고 표현하는 지도 모른다.
<위대한 개츠비>를 보았다. 원작처럼 화자는 토비 맥과이어가 분한 닉 캐러웨이다. 모성애를 불어일으키는 눈망울을 지닌 배우가 연기하는 닉은 개츠비와 데이지의 사랑의 관찰자, 때로는 조력자로서 무력하지만 마지막까지 남아야 하는 증언자로서의 역할을 훌륭하게 해낸다. 영화에서 그는 여러 정신질환들에 시달리면서 의사의 상담을 받는 환자로 개츠비를 둘러싼 일들의 회고록의 저자로서 나온다. 눈이 내리는 바깥의 황량한 풍경과 대비적으로 1920년대의 그 소비향락적인 흥청망청의 분위기의 귀환은 화면 전체를 압도하며 화려하게 복원된다. 백 년 가까이 전의 젊은이들의 사치스러운 파티는 당시의 재즈 음악과 현대의 힙합이 적절히 배합된 사운드트랙으로 오늘날처럼 역동적이고 생생하다. <채털리 부인의 사랑>에서도 종종 언급되었던 흥겨운 찰스턴춤을 추는 그들을 보면 아이돌들의 약속이나 한 듯한 일률적인 댄스 동작보다 더 배워보고 싶은 욕구가 일게 한다.
데이지역의 캐리 멀리건은 원작에서보다 오히려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모습과 매력을 보여준다. 짧은 금발 머리, 코와 입술 사이의 절묘한 지점의 점, 순수해 보이는 눈망울이 참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원작에서보다 조금 더 개츠비에게 몰입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에서 데이지는 개츠비를 사랑한다. 내가 느꼈던 데이지의 개츠비에 대한 감정은 원래 사랑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개츠비가 데이지를 위하여 만든 그 어마어마한 저택에서 수많은 셔츠들을 꺼내 보여주며 과시하던 대목에서 데이지가 흘리던 눈물에 대한 해석도 원작과는 다르다. 너무 아름다워서 울었다,고만 표현하며 데이지의 물질에의 그 다소 천박한 욕망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되곤 하던 원작과는 달리 영화에서는 닉의 설명을 빌어 데이지가 톰 뷰캐넌과 해온 결혼생활의 비참함에 대한 속내를 그저 숨기고 그렇게 표현한 것으로 그려진다. 결론적으로 데이지는 개츠비가 그렇게 평생을 바쳐 모든 것의 의미를 부여할 만한 여인이 아닌 것으로 귀결되는 것으로는 같지만 그 종착점으로 가는 길에서 영화와 소설은 갈린다. 그래서 영화에서 데이지가 조금 더 관객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인물로 그려지다 갑자기 설명 없이 개츠비의 죽음 앞에서 매몰차게 돌아서는 결론은 설득력을 상실한다. 어쩌면 피츠제럴드가 꾸준히 데이지를 묘사하며 풍겼던 그 가벼운 정서가 데이지 그 자체를 이해하는 데에는 더 용이했는 지도 모른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타이타닉호>의 그 앳된 소년의 모습과는 다소 다른 중후한 매력을 풍긴다. 눈물을 가득 머금고 자신의 과거와 데이지와의 사랑을 닉에게 이야기하는 장면은 장중한 사운드트랙과 함께 그가 연기해 낸 개츠비의 속살을 가감없이 드러내어 공감을 자아낸다. 영화는 최대한 원작에 근접하려고 노력했고 개츠비의 슬픈 몰락과 대비되는 그 화려한 흥청망청함을 잘 살려낸 성실한 느낌이다. 닉이 개츠비에 대하여 다 쓰고 마지막에 "The Great"를 덧붙이는 대목은 개츠비의 그 허망한 사랑이 결론의 중추가 아님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그리고 화면을 떠도는 닉의 마지막 이야기들은 거의 정확하게 원작의 마지막과 겹친다.
개츠비는 오직 저 초록색 불빛만을 믿었다. 해가 갈수록 멀어지기만 하는 가슴 설레는 미래를. 그것은 이제 우리 앞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무슨 문제인가. 내일 우리는 더 빨리 달리고 더 멀리 팔을 뻗을 것이다...... 그러면 마침내 어느 찬란한 아침......
그러므로 우리는 물결을 거스르는 배처럼, 쉴새없이 과거 속으로 밀려나면서도 끝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위대한 개츠비>p.225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장면에서 관객들은 멈칫한다. 영화의 완성도도 완성도지만 <위대한 개츠비>의 그 허망하면서도 장중한 결말 덕택일 것이다. 삶도 그런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