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을 감미롭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허약한 미숙아이다.
모든 곳을 고향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이미 상당한 힘을 갖춘 사람이다.
그러나 전 세계를 타향이라고 느끼는 사람이야말로 완벽한 인간이다.
-에드워드 사이드 <오리엔탈리즘>중  

여러 가지 사정으로 자원하긴 했었지만 막상 '이천'이라는 도시로 직장 발령이 나자 문득 아연해졌었다. 스물 아홉의 길목에 들어서고 있었다. 두렵고 답답하고 돌아나오고 싶었다. 버스를 타고 이천 집으로 퇴근하며 나는 길을 잃어버렸다. 가슴은 두망망이질치고 버스는 종점으로 종점으로 저무는 해와 언제까지나 어디에나 가버릴 듯 털털거리고 또 털털거리며 가고 있었다. 

이윽고 종점. 승객은 나혼자. 울어버리고 싶었다. 스물 아홉의 여자가 집에 못 가 울어버리면 기사는 집에 데려다 줄 것인가. 나의 집 주소를 읊었다. 바보처럼. 기사는 걱정스레이 나를 시내까지 데려다 주고 거기에서 집에 가는 방법을 신신당부했다.  

타박 타박. 그게 시작이었다. 그리고 이 년. 나는 그 시간들을 잊지 못한다. 그리고 내가 이천에 있었는데, 이천이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거들먹거리기까지 하며 마치 그곳이 나의 고향이었던 듯 되뇌인다. 

나는 고향을 감미롭게 생각하는 종족이었다. 연고도 없는 타향에서 이 년을 묵으며 이방인으로 산다는 것에 대하여 그리고 자연스레이 그 타향에 녹아 들어가는 과정에 대해 조금은 고민했었다고 한다면 가소롭게 들릴 지도 모르겠다. 이방인으로 출발하는 것은 언제나 두렵다. 그러나 그곳이 고향이 될 수도 있겠다,고 자만하게 되는 그 허수룩한 몽상으로 발을 들여놓게 되는 시점 나는 새로운 곳에 낯선 이로 섞여 들어가 하나의 삶을 튼다는 것이 가지는 매혹에 매료되게 된다. 

 

하물며 마흔이 넘은 동양 여자가 스웨덴의 웁살라라는 중세의 흔적이 떠도는 도시에 역사학 석사 과정에 들어가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 터키, 미국, 스웨덴에서 온 나어린 이방인들과 투닥거리고 어울리고 이해하고 오해하고 눈물흘리는 얘기는 얼마나 드라마틱하고 얼마나 다이나믹할 것인가. 

이 책은 스웨덴 그 자체에 대한 감상과 이해도 뭉근하지만, 다양한 나라에서 온 다양한 가치관을 지닌 젊은이들이 서로의 시선을 맞추고 때로는 가치관을 조율하기도 하고 때로는 싸우기도 하면서 공감의 자장 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이 인상깊고 흥미롭게 그려져 있다. 이방인과 이방인이 각자 자신의 민족과 국경의 그 허구적이고 공고한 철책을 들어 깨고 교감하는 과정은 지나치게 극적으로 과장되어 있지도 않고 지나치게 건조하지도 않게 딱 그 만큼 적절한 수준의 감정의 파고를 유지하며 나아가고 있다. 무조건 친해지고 무조건 이해하고 위아더 월드를 외치는 소설적 허구 대신 인간 관계에서 흔히 발생하는 상대의 기대치의 어긋남 뒤에 한시적인 화해, 때로는 끝까지 어긋나 평행선을 긋는 관계 등으로 담담함을 끝까지 간직한 그녀의 관계들은 되레 '너를 알고 있다',가 아닌 '내가 누구인가?'를 묻는 진지함으로 확장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유독 강조되는 여자로서의 정체성이 스웨덴에서 만나는 수많은 프레이야의 딸들의 아름답고 당당하고 오히려 성적 정체성에서 자유로운 모습으로 전환적 계기를 맞는다. 한국인이자 동양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재확립하게 되는 과정에서 그녀는 평등을 자유와 같이 가지고 가기 위해 가진 것들을 기꺼이 양보할 줄 아는 그들의 간소함과 품위에 매료된다. 극빈자도 최상의 부자도 없는 사회 시스템은 그들을 사회민주주의의 정체성으로 자본과 노동의 화해를 주선하게 되는 것이다. 극도의 개인주의적인 문화일 것 같은 그곳이 기실은 가장 타자들을 의식하고 배려한 체제라는 것은 역설 같으면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기본적인 안녕이 담보되어야 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무언가를 알기 위해 떠난 곳에서 내가 누구인가, 또 그것을 묻기 위해 네가 있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함을 알고 귀환하는 그녀의 모습이 간소하고 품위있어 보였다.  

가수 이상은이 여행을 하는 이유가 새로운 나를 발견하게 되는 매력 때문이라고 얘기하며 멋쩍은 미소를 짓는 모습이 TV에 흐른다. 여행의 순간에는 자기 자신보다 더 강해진다는 정혜윤의 말은 이런 면에서 겹친다. 항상 '너'와 '그것'에 치이다 갑자기 '나'를 응시하게 되는 그 기점에서 우리는 새로운 시간을 선물받는다. 나에 대한 질문이 난무하는 그 새로운 곳에서 우리는 성장한다. 그러니 모든 곳을 타향으로 느끼는 사람은 완벽한 존재의 꿈을 꿀 수 있다. 땅에서 발을 살짝 들어 도약하는 순간 우리는 가장 아름답고 견고하게 착지하는 법을  체득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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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 버스 아저씨는 물었지, 집이 어디냐고 -
    from 아, 여름, 외계인 살려 - 2010-07-17 18:28 
            【기억 재생기】 다시 보고 싶은 20세기        1996년경, 봄과 여름 사이           마음 잡고 공부 좀 하겠다고, 친구와 공부방에서 공부를 한 후 늦은 밤, 글쎄 11시가 넘었을까.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하
 
 
잉크냄새 2010-07-17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천,,,전 스물 일곱에 들어가 서른 여덟에 그곳을 떠나왔군요.
제가 경험한 여행은 그 여행의 과정에는 제가 없는듯 했어요. 무엇을 찾고 무엇을 버려야한다는 강박관념이 어느 순간 사라지더군요. 그리고 여행을 마치고 그 길을 다시 돌아오는 어느 언저리에서 다시 자신을 발견하게 되더군요.

stella.K 2010-07-17 21:36   좋아요 0 | URL
헉, 잉크냄새님 그럼 지금 나이가...?!
사실은 그럴 줄 알았어요.ㅋ
이천 사신다는 건 서재질 초기에 알았지만 결국 떠나셨군요.
언제 떠나셨나요? 전 세계를 타향이라고 생각하시고
여행을 떠나셨던 그때...?

blanca 2010-07-17 22:05   좋아요 0 | URL
잉크냄새님! 그러면 어쩌면 마주쳤을 수도 있겠네요! 온데를 다 휘젓고 다녔었는데요 ㅋㅋㅋ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나이가 더 드신 것 같기는 하네요^^ 아, 여행하면 잉크냄새님한테 얘기를 들어야지요. 지금도 여행중이신가요. 여행의 과정에서 강박을 버려야 한다는 것! 예...그 경지까지 가봐야 겠습니다. 아직은 저는 강박이 있는 것 같아요. 다 기억하고 다 기록하고 새로운 것을 얻어가겠다는...그것도 욕심이 되겠지요.

L.SHIN 2010-07-17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블랑카님의 이야기가 좋아져 버려서, 성급한 마음에 추천부터 누르고 이 좋은 글을 다 읽지도 않은 상태에서
이렇게 댓글을 쓰고 있습니다.(웃음)
덕분에 흐믓한 기억이 떠올랐거든요. 그래서 [기억 재생기]를 하나 돌리기로 했습니다.^^

blanca 2010-07-17 22:07   좋아요 0 | URL
엘신님, 읽고 왔어요^^ 엘신님이 그렇게 수줍어하시는 부분이^^ 저는 고맙다,를 좀 남발하는 경향이 있답니다. 그것도 과히 바람직하지만은 않은 것 같아요. 정말 고마울 때 나의 고맙다,는 말이 가볍게 치부되니까요.

stella.K 2010-07-17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아무래도 저를 위한 책 같기도 하네요.
저는 어쩌면 그리도 집 떠나 모든 곳을 타향으로 한 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었던 것인지...
지금은 앞으로 얼마간은 내 집이란 거 두지 않고 여기 저기 조금씩 살아보다가
60 넘으면 다시 안착하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blanca 2010-07-17 22:08   좋아요 0 | URL
스텔라님. 저는 요새 왜이리 붙박이에 집착하는지 다 늙어버린 것 같이 그래요. 어디서든 언제든 떠나고 적응하고 즐겁게 그렇게 살아야 할텐데...점점 새로운 곳을 더 피하게 되고. 이러면 안되겠죠...

stella.K 2010-07-18 14:31   좋아요 0 | URL
제가 그러고 살았다는 거 아닙니까?
달도 차면 기운다나 뭐라나...
이젠 좀 떠돌이로 살아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인생 한 번 사는 건데 세상은 저렇게 넓구요...^^

다락방 2010-07-17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lanca님의 개인적인 경험담과 맞물려 진 책에 대한 이야기라니. 책에 대한 흥미가 확 일어나는데요. 보관함에 넣어두고 갑니다. 글 좋아요, blanca님.

blanca 2010-07-18 21:51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글 좋아요, blanca님이라는 댓글이 왜이리 기분이 좋으면서 다락방님의 말투가 상상이 갈까요? ㅋㅋㅋ 이런 말투 너무 특이하고 좋아요^^

꿈꾸는섬 2010-07-18 0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lanca님 글은 늘 좋네요.^^

blanca 2010-07-18 21:51   좋아요 0 | URL
꿈꾸는섬님 '늘'이라는 말이 이렇게 소중하게 들리다니. 고맙습니다.^^

하이드 2010-07-18 0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천에는 미란다 호텔 온천이 좋고, 쌀이 맛있으며, 도자기 굽는 곳에 들어가 볼 수 있는..
외가가 거기에 있어서, 발걸음 한지는 오래되었지만, 어린시절의 기억이 새록새록 박혀 있는 곳이에요.

주말마다 가는 강기사를 보자면, 그리 멀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blanca 2010-07-18 21:53   좋아요 0 | URL
하이드님 외가가 그쪽이에요? 아하! 그렇군요. 미란다 주민 할인이 20프로인가 되서 거의 공중 목욕탕 가듯이 했던 기억이 나네요. 금요일 퇴근하고 노천탕에서 하늘 보며 좋아라 했던 기억이 납니다. 테르메덴이 생겨서 인기가 덜해지긴 했지요. 하이드님 외가가 이천에, 또 원래는 사당동에 살았던 거. 이래저래 겹치는 부분이 많아서 참 신기해요.

후애(厚愛) 2010-07-19 0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글 잘 쓰세요. 너무 부러워요.^^

blanca 2010-07-19 14:14   좋아요 0 | URL
후애님~ 한국 오신다니 괜히 막 제가 다 설레어요. 감사합니다.^^

마녀고양이 2010-07-20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갑자기 <카모메 식당>이 떠오르네요... 너무 더워여.
책 표지의 여자를 보니, 어딘가 길바닥에서 여유롭게 헤매는 "나"를 떠올리게 되어 여행이 더욱 그립네요.
아흐흐.........

blanca 2010-07-20 16:28   좋아요 0 | URL
마녀 고양이님, 저는 지금 또 일본의 걷고 싶은 길 읽으며 흐억 하고 있어요. 궁둥이에 날개 달았어요. 돈은 없고 아이는 있고 떠나고만 싶고 ㅋㅋㅋ카모메 식당! 아, 맞아요. 표지랑 그 영화랑 분위기가 참 비슷하네요.

비로그인 2010-07-20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은 타향에 대한 동경이...타향에 대한 향수로...
난 그럴 때가 있더라구요.
그니까~~타향이 고향같은 뭐 그런 역설적인...
말이 안되는 소릴 아침부터 지저귀는 마기는 지금 수면부족으로 정신이 아득한 상태입니다.
이해바람!

blanca 2010-07-20 16:30   좋아요 0 | URL
마기님! 요즘 마기님 시랑 짧은 글귀 보고는 정말 시인 같다, 하며 감탄중입니다. 타인에 대한 향수. 맞아요. 맞아요...그런 것도 있어요^^

2010-07-20 20: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21 09: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10-07-21 0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타향에서 이방인으로 산다는 건 참 힘들지요~
어디든 마음을 열면 녹아들어갈 수 있게 되더라는...
나를 만나는 여행을 꿈꾸지만 훌쩍 떠나는 게 쉽지 않지요, 더구나 엄마라면요.ㅜㅜ

blanca 2010-07-21 09:30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혹시 전라도는 고향이세요? 저는 요새 이곳에 관심이 많아요^^

순오기 2010-07-21 19:38   좋아요 0 | URL
94년 대선이든가~ 그때 호남인의 정서라는 걸 눈물겹게 동감한 후로
광주는 이제 내 고향이나 다름 없지요.^^
충남 당진에서 15년, 인천에서 15년, 그리고 광주에서 20년이 넘었지요.

blanca 2010-07-21 21:35   좋아요 0 | URL
아아. 순오기님이 당진, 인천에서도 그렇게 오래 사셨군요. 순오기님..꼭 뵐 수 있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