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913년에 시작해서

1914년에 마침.


더 행복한 날들에 바친다.

-E.M 포스터 <모리스>

















'더 행복한 날들에 바친다.' 지금까지 숱한 제사를 봤지만 포스터의 이 헌정이 최고인 것 같다. 특정한 대상이 아닌 아직 오지 않은 날들에 바치는 <모리스>를 거의 단숨에 읽었다. 흡인력이 대단한 소설이다. 등장 인물들이 거의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어떤 선택, 그 선택의 반향, 열린 결말은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일에 대한 어떤 판단 자체를 유보시킨다. 그것이 개인의 삶과 사회에 초래하는 것들을 넘어서는 것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면밀한 성찰은 긴 여운을 남긴다. 


사랑은 실패했다. 사랑은 이따금 기쁨을 가져다주는 감정일 뿐이었다. 사랑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p.330


모리스 쪽의 이야기다. 모리스는 그렇게 느낀다. 케임브리지에서 만난 첫사랑 클라이브는 모리스를 떠난다. 클라이브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회적 페르소나와 타협한다. 심지어 여성과 결혼하여 가정을 꾸린다. 모리스도 그런 식으로 살아주기를, 그래서 자신에게 남아 있는 어떤 꺼림칙한 잔여를 깨끗이 치워주기를 바란다. 모리스를 일깨운 쪽은 그인데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은 오히려 모리스다. 모리스의 좌절과 모리스의 두려움은 지극히 사실적이다. 어리석고 무모하고 쩨쩨하다. 타협과 안주가 없으니 언제나 위태위태하다. 우리의 삶이 클라이브와 더 가깝다고 해서 그를 응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포스터는 영리하게 포착한다. 모리스에게서 우리는 우리의 잃어버렸던 숨기고 싶었던 치부를 본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왜냐하면 그때 이미 모리스는 그곳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 뒤에 남은 흔적이라곤 조그맣게 쌓인 달맞이꽃의 꽃잎뿐이었다. 꽃잎들은 꺼져가는 모닥불처럼 땅 위에서 애처로운 빛을 뿜고 있었다. 클라이브는 죽을 때까지도 모리스가 정확히 언제 떠났는지 알지 못했고, 노년에 이르러서는 그런 순간이 있었는지도 확신하지 못했다. 블루 룸은 희미한 빛을 발하고, 고사리 풀숲은 물결쳤다. 영원한 케임브리지 어딘가에서 친구는 온몸에 햇살을 입고 그에게 손짓하며 5월 학기의 소리와 향기를 떨치기 시작했다. 

-p.348

포스터의 묘사는 눈부시다. 향기와 시각은 시간의 결을 넘나든다. 꺼져가는 꽃잎과 지는 청춘의 모습은 겹친다. 여전히 남는 것에 대한 가치를 이해하는지에 대한 몫은 읽는 이들의 것으로 남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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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11-14 14: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크- 저도 읽어보고 싶어서 장바구니에 담아뒀는데 블랑카님 벌써 읽으셨군요! 블랑카님의 리뷰를 읽으니 저도 꼭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책을 읽어봐야 알겠지만, 사랑으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까요?

‘필립 베송‘의 [그만해 거짓말]이 생각나네요. 그 책에서도 서로 사랑했던 남자 둘이 헤어져서 한 쪽은 나중에 커밍아웃하는 작가가 되지만 한쪽은 여자랑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거든요. 그리고 내내, 그 작가의 행보를 좇습니다.

blanca 2019-11-15 11:30   좋아요 0 | URL
포스터 자신의 생각도 반영되어 있는 것 같아요. 약력을 보니 죽을 때까지 사랑하고 배신 당하고 이것에 반복이었더라고요. 다락방님 예랑 비슷하게 사랑했던 남자들 대부분이 여성과 결혼하여 가정을 이뤄요. 참 아이러니한 것 같아요. 심지어 그 사이에 낳은 애의 대부까지 서주고...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포스터의 전기를 읽어보고 싶어요. 삶 자체가 아주 드라마틱하더라고요. 그냥 몇 살에 어떤 일이 있었다,는 것만 읽어도 가슴이 시려오는 그런 삶을 살았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