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있는 곳
줌파 라히리 지음, 이승수 옮김 / 마음산책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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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동네에서 쭈욱 살며 초중고교를 다 다니다 대학교야 거리가 좀 있는 곳으로 지하철을 타고 다녔다지만 이후 이동이 잦은 직장에서 일하게 되며 나는 내가 참으로 이동을 싫어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새로운 사람, 장소, 사물에 가까스로 적응했다 다시 그 과정을 반복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절로 힘이 쭈욱 빠지곤 했다. 이미 정들어버린 것들을 떠나보내는 것도 힘겨웠다. 자고로 한곳에서 익숙한 것들에 기대어 변화, 변수 없이 살고 싶다는, 안주하고 싶다는 생각은 사실 나이듦과 더불어 더 진해져 큰 일이다. 이별도 적응도 솔직히 귀찮고 두렵다. 



장소를 옮길 때마다

나는 너무나 큰 슬픔을 느낀다.

추억이나 고통,

즐거움이 있던 곳을 떠날 때 

그 슬픔이 더 크지는 않다.

충격을 받을 때마다 출렁이는 단지 속 액체처럼

이동 자체가 날 흔든다.

-이탈로 스베보, [에세이와 흐트러진 페이지]



기다렸던 줌파 라이리의 <내가 있는 곳>의 첫장에 인용된 이 글을 읽고서야 나는 나를 제대로 다시 들여다보게 됐다. 그래, 난 그저 장소를 옮길 때마다 슬픔을 느꼈던 거야. 그곳에서 아름다운 추억을 쌓았든, 진상을 만나 잊고 싶은 경험을 했든 내용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저 그 불안정, 혼돈이 날 흔들었던 거야, 라는 것을 깨달았다. 제목은 이탈리아어로 Dove Mi Trovo. 줌파 라히리는 영어로 더 이상 글을 쓰지 않겠다,는 결심을 공표한 바 있다. 그녀는 십대 때 제 2외국어로 이탈리아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중년이 지나서야 단기로 거주하며 이탈리아어를 비로소 실생활에 직접 쓰며 부딪히는 여러 한계, 좌절,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는 애정에 대한 이야기를 이미 했다. 그런데 이렇게 자신의 모국어가 아닌, 그것도 언어습득기도 아닌 성인이 되어 체류한 나라의 언어로 아름답고 농밀한 글을 써낼 수 있다니, 조각 조각 떨어진 것같은 짦은 이야기들을 읽으며 믿기지 않기도 했고 부럽기도 했다.


46개의 짦은 이야기가 모여도 그 이야기는 여전히 짧다.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 같으면서도 각각의 독립성은 또렷하다. 결혼하지 않은 중년의 여자의 시선은 줌파의 시선을 통과하여 주변의 사물과 사람과 사건을 그녀만의 독특한 무형질의 색깔로 물들인다. 소설이라지만 에세이 같기도 하다. 그 만큼 누구나 읽어도 동감하고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일상에 대한 묘사가 빛난다. 


이따금 내가 사는 동네 길거리에서 함께 어떤 이야기, 어쩌면 인생을 같이 만들어나갈 수도 있었을 한 남자를 만난다.

-<길>

그 남자는 내 친구와 가정을 만든 남자다. 그래서 더 나아갈 수 없는 그 지점에서 동행한다. 경계는 아찔하고 그 경계 너머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아슬아슬하다. 그럼에도 다시 '내가 있는 곳'으로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는 것은 우 모두가 "불길한 목적지를 향해 조용히 나아가는 감금된 죄수들 같다."는 것을 인식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짦은 기간의 빛, 더 이상 나와는 상관없는 뜨거운 에피소드" 앞에서 물러날 줄 아는 '나'는 지극히 평범하다. 줌파 라히리는 뜨겁고 강렬한 서사를 만들기 위해 무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안온하고 단단한 현실에 착 달라붙어 안주하지도 않다. 그 절묘 한 균형 지점을 간파하는 작가의 저력에 그저 놀랄 따름이다. 외국어의 체를 걸러 건너간 지대는 어쩐지 더 핍진성이 있고 간명한 이야기들로 웅성거리는 것같아 인상적이다. 낭비도 잉여도 결핍도 없다. 때로 말로 주워섬길 수 없었던 그 수많은 모호한 감정들이 그녀 앞에서 비로소 이름과 실체를 얻으며 시원해지는 느낌이 반갑다. 문구점에서 존재의 의미를 확인하고 정들었던 주인 가족을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것에 대한 서운함을 토로하는 이야기는 낯설지 않다. 


방향 잃은, 길 잃은, 당황한, 어긋난, 표류하는, 혼란스러운, 어지러운, 허둥지둥 대는, 뿌리 뽑힌, 갈팡질팡하는, 

이런 단어의 관계 속에 나는 다시 처했다. 바로 이곳이 내가 사는 곳, 세상에 내려놓는 말들이다.

결국 내가 떠나고 싶었던 그 지대가 결국 내가 사는 곳이다. '내가 있는 곳'이다. 별스럽지 않은 이야기가 돌아오는 곳이 내가 있는 지점이라 안심이 된다. 흔들리고 당황하고 표류하며 일상을 사는 것. "불길한 목적지"가 종착점이라 할지라도 우리 모두가 나날이 늙어가는 그 시간들의 무게에 대한 사려 깊은 담담한 이야기가 깊이 와닿는다. 역시 그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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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03-26 13: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블랑카님. 이 책 벌써 읽으셨군요!
저도 줌파 라히리의 신간이라며 좋아하면서도 이탈리아어로 쓰여진 소설이라 해, 아아, 그전 소설보다 좋지 않을 수도 있으려나? 살짝 의심했는데 읽어야겠네요. 읽겠습니다.
줌파 라히리의 글만큼 좋은 페이퍼네요, 블랑카님.

blanca 2019-03-26 16:39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저는 줌파 라히리가 너무 부러워요. 자기가 사랑하는 외국어로 이 정도의 글까지 쓸 수 있다니 문학적으로 좀 다른 차원이긴 한데 원하는 대부분의 것을 이루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기대이상이어서 너무 짧아서 아껴 읽느라 딴 곳에 던져두기까지 했답니다. ㅋㅋ 그렇지만 너무 짧으니까 어쩔 수 없이 다 읽어버리고 말았어요. 여하튼 저도 의구심을 품고 읽기 시작했는데 이 작가는 정말 특별하구나, 그걸 부정할 수는 없겠다, 싶었어요.

무해한모리군 2019-03-26 15: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어서 이책 읽고 싶어요. 금요일쯤 받을거 같은데 기대기대

blanca 2019-03-26 16:40   좋아요 0 | URL
도착일이 금요일이라니 딱이네요. 야식과 함께 이 책이라면 진정한 의미의 행복한 불금이 될 거라 믿어요.

붉은돼지 2019-03-26 16: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아아.....저는 또 리하리로 읽고 말았습니다.
이게 한 번 입에 붙어버리니 쉽게 고쳐지지 않는군요..음..

blanca 2019-03-26 16:41   좋아요 0 | URL
저도 그런 게 많아요. 지금 바로 떠오르지는 않는데 한번 굳어버리면 영 고치기가 힘들더라고요. 몇 가지가 있어 예를 들고 싶은데 생각이 안 나 아쉬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