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은 응당 한계를 지고 하는 행위다. 서로 다른 두 언어는 완벽하게 포개어질 수 없고 한 언어로 말해여졌을 때의 느낌은 어떤 형태로든 다른 언어에게로 가서 반드시 원문과는 다르게 변주되게 마련이다. 하물며 소리와 배열과 흥취가 배어 있는 시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You must understand, your teacher no longer exists."

- [The heart of Haiku] Jane Hirshfield

"너는 이해하여야만 한다, 너의 스승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17세기의 하이쿠 시인 바쇼는 죽음을 앞두고 제자에게 자신의 죽음을 이렇게 시처럼 읊조린다. 이러한 배경 설명이 없다면 우리는 이러한 담담한 언질의 무게를 짐작할 수가 없다. 하지만 죽음을 앞둔 스승이 제자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한 이야기라면 그 느낌은 사뭇 달라진다. 영어로든 우리말로든 원문에서 번역된 하이쿠는 그 간결함과 그 적시에 최대로 응축된 언어의 밀집을 짐작할 수 있을 뿐 그 전부를, 그 날것을 그대로 체험하고 느낄 수는 없을 것이다. 바쇼의 방랑자적 삶에 대한 설명은 그래서 그의 시들과 더불어 텍스트의 일부를 이룬다. 그의 하이쿠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바쇼의 생애에 대한 이해는 첨언이 아니라 골격이 될 수 있다. 그는 평생 가난했고 언제나 걸었고 한곳에 머물지 못했고 일가를 이룬 기록이 전하여 오지 않는다. 


바쇼의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Narrow Road to the Deep North)은 리차드 플래너건의 장편소설의 제목이 되기도 했다. 시간과 공간의 거리와 넓이를 가로지르는 그의 언어의 집은 끊임없이 후손들에게 영감을 준다. 마흔다섯의 바쇼는 그 자신이 직접 걸어서, 혹은 말을 타고 끊임없이 걸어낸 길을 인생의 여정과 오버랩시킨다. 여행자의 삶은 그 여정 정 자체가 결국 목적지이자 집이 되는 것이고, 그것은 결국 삶 그자체로 확장된다. 죽음과의 간격이 그리 멀지 않은 시점의 시인의 깨달음은 가볍고도 묵직하다. 그가 향한 '먼 북'은 끝내 다다를 수 없지만 끈질기게 지향하는 그 곳일 것이다. 누구나에게 공통이지만 언제나 달라지는 지점일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 울림을 가지는 이야기.


나는 멀고 동떨어진 곳을 향해 걷는 것이 아니라 보폭 하나 하나에 하루를 매달고 그 가운데에서 생을 만든다. 그러나 그 깨달음은 아직 머리로만 아는 것이고 마음으로 나의 말과 글로 행해진 것이 아니다. 그러니 아직 멀었다. 17세기의 시인은 여전히 스승으로 남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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