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1학년 때 <데미안>을 읽고 독후감을 써야 했다. 교양국어 시간이었나? 같은 학번 친구가 자신이 먼저 읽고 나에게 <데미안>을 빌려주었다. 세상에, 무려 수십년 전에 나온 세로쓰기 책이었다.  갈색의 등은 갈라지고 있었고 활자는 때로 겹치거나 흐릿해서 가독성만 놓고 보자면 참으로 곤란한 책이었다. 나는 그때 활자로 된 건 뭐든지 다 거부하던 시기였고 그래서 이 <데미안>을 읽는 것이 몹시도 고통스러워 집워치워 버리고 싶어졌다. 특히 세로쓰기는 끊임없이 길을 잃게 했다. 한 손으로는 자를 잡고 줄을 안 놓치려 분투하다 나는 <데미안>을 던져버렸다. 간 크게 아마 과제조차 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때 제대로 정말 진심을 다해 <데미안>을 읽었다면 내 인생은 사뭇 달라져 있었을 것이다. 나는 거의 일 년 내내 책이라곤 단 한 권도 제대로 읽지 않으며 방황했고 그 여파를 수습하는 데 꽤 많은 시간과 공력을 후에 들여야 했다. 지금도 나는 이따금씩 그 때를 생각한다. 내가 고작 읽은 건 머리말인지 혹은 해설이었는지 모르지만 어떤 소녀가 죽어가며 자신의 관에 <데미안>을 넣어달라 했던 일화였다. 


모든 인간의 삶은 저마다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고, 그 길을 가려는 시도이며, 하나의 좁은 길에 대한 암시이다. 일찍이 그 누구도 완벽하게 자기 자신이 되지 못했다. 

-데미안, 헤르만 헤세, 김인순 옮김, 열린책들,2014; 정여울의 <대면: 내 안의 '내면아이'와 만나는 시간, Axt 재인용>


Axt에서 다시 만난 정여울의 글에서 <데미안>을 다시 만났다. "일찍이 그 누구도 완벽하게 자기 자신이 되지 못했다."는 이 문장을 과연 스무 살이 이해할 수 있었을까? 이제서야 나는 이 문장을 믿을 수 있다. 결국 제대로 정말 자기 자신이 되어 가는 과정이 나이듦의 과정이라는 걸 이제서야 배운다. 저만치 별처럼 떠 있는 선구자들, 위인들, 유명 인사들이 지향점이 아니라 결국 내가 가장 나다워지는 과정을 사회의 용인되는 틀 안에서 전개해 나가는 게 사는 과정인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책도 인연이 닿아야 한다. 그 친구와 소원해지며 <데미안>도 돌려주지 못했다. 그 친구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서 그 책을 빌렸다는 것도 같았는데 그렇게 몇 순배를 돌던 데미안은 이제 찾을 길이 없다. 


나는 아직도 내 자신을 제대로 찾지 못했지만 찾아가는 과정이라 믿고 싶다. 어쩌면 끝나지 않을지도 미완으로 끝날지 모르는 이 지난한 과정에서 이제 제대로 가로쓰기가 된 잘 읽히는 잘 읽을 수 있는 <데미안>을 다시 시작해야 할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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