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게 드라마 <응답하라 1994>를 다시 제대로 정주행 중이다. 나정이를 둘러 싼 그 묘한 애정 기류들에 나도 덩달아 자꾸 설레어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 마흔의 아줌마와 볼살 통통하고 걸핏하면 짝사랑과 그것이 응답받는 착각에 빠지곤 했던 그 대책 없던 스무 살의 간극은 몇백 광년 같다. 스무 살의 오월 나는 짝사랑에 빠졌다. 너무 큰 애정과 그 응답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실의와 넘치는 그 사람을 다 안을 수 없는 내 보잘것없음에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오열하기도 하며 파란만장한 연애사를 쓰던 시간들은 다른 차원의 다른 삶, 때로는 하나의 과장된 허구 같다. 정말 그 때 그 아이는 나였을까? 그렇다면 그러한 내가 썼던 그 오글거리지만 원없이 사랑했던 시간들은 어떻게 이 억겁의 시간 안에 쌓일까, 혹은 사라질까, 여전히 그 차원에서 그 공간에서 그 일은 현재진행형일까도 싶고. 하여튼 말로 담을 수 없는 온갖 회한과 공상과 그리움은 그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할 막무가내의 열정과 헌신과 범벅이 되어 기억의 화석이 되어 가끔 돌아보게 된다.

















영문판 표지만 봐도 이 소설의 사랑이 어떤 종류일지 대강 짐작할 수 있다. 남녀 간의 사랑이 아니라 열일곱 소년 엘리오와 그의 이탈리아 집에 부모님의 젊은 학자들의 책출간 후원의 일환으로 초대받게 된 이십 대의 미국 청년과의 감각적인 이끌림을 처절할 정도로 정묘하게 묘사한 이야기다. 비단 퀴어 로맨스물로 한정되어 이해할 수 있는 소설이 아니라 누구나 통과의례처럼 겪게 되는 성장통과 첫사랑이 어떻게 어우러져 한 사람의 삶에 저 나름의 의미를 가지게 되는지에 대한 예리한 통찰이 보편적인 공감을 얻게 되는 작품이다.


특히 함께 자전거를 타고 엘리오의 단골 동네 서점에서 스탕달의 처녀작 두 권을 나란히 나눠 갖는 장면. 엘리오는 자신의 성소, 이미 올리버가 자신의 삶으로 들어오기 이전부터 그를 꿈꿨던 그 곳으로 그를 안내하는 듯한 느낌에 전율한다. 이때의 엘리오의 시점은 복합적이다. 그 둘만의 내밀한 시간이 어떻게 서로의 삶 안에서 기억될지를 앞서 예감하고 인식하는 한편, 미래에 이미 나이들어버린 엘리오가 관조하는 과거의 추억의 생생한 복원처럼 느껴지는 복합적인 시선은 시간이라는 자장 안의 일련의 사건들을 여러 차원에서 더 깊이 있고 넓은 차원에서 재해석하게 된다. 경험하는 나와 서술하는 나와 기억하는 나와 예견하는 나는 흠결없이 하나의 늙어가는 몸 안에서 섞인다. '응사'를 보며 추억하는 스무 살의 나와 그 스무 살이 기억하게 될 스무 살의 일들과 지금 내가 추억하는 그 스무 살의 일들은 각각 다른 차원에서 통합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 때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 때 그 사람과 헤어지지 않았다면. 시간이 아주 많이 지나 담담하게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난다면. 이러한 가정은 그 당시의 그 무모한 열정에 색깔을 더 입히지도 그 것을 바래게 하지도 못한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가정들을 무용한 것으로 만들고 그 교감, 그 열정, 그 치기 자체를 쓰다듬는 애치먼의 언어의 결의 섬세함과 예리함은 경이로울 정도다. 결국 이것은 하나의 짧고 강렬한 사랑 이야기로 삶과 인간 자체를 제대로 시간의 격자 안에서 탐구하는 진지한 철학으로까지 확대된다.


열일곱은 내 경험상 자신 앞에 펼쳐질 삶을 시간의 축소 안에서 조망하는 게 아니라 무한한 공간으로 인식하게 되는 나이인 것 같다. 그렇다면 엘리오의 시선은 엘리오의 열일곱의 시선이 아니라 철저하게 이미 시간이 지나버린 중년의 그가 재해석하는 내면의 가정에서 다시 탄생하는 이야기다. 그 정교한 장치 안에서 결국 청춘은 어리석고 근시안적이어야 제대로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통찰과 예지가 실수와 무모함과 어리석음을 강타하는 시간은 그들의 것이 아니다. 그래서 조금 넘어져도 조금 너무해도 다시 복기할 이야기가 있는 중년은 그 치기의 시간을 소중이 다시 주워담아 구석에 쌓아두려 한다. 


'너'를 만나러 '나'는 간다. 햇살은 눈부시고 나는 너를 보면 눈이 부시고 자꾸 눈물이 나려 해서 제대로 쳐다볼 수조차 없다. 나는 '너'를 사랑하거나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경외한다. 너가 나중에 그렇고 그런 아이로 판명이 난다고 해도 난 그 때 그랬다. 엘리오처럼. 다시는 내 생에 다시 오지 않을 감정이라는 걸 나는 그때 알았으니까. 그렇게 나는 기꺼이 무모한 멍청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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