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옛 친구에게: 결혼이란, 특히나 한국 사회에서 나이 서른 넘어서의 결혼이란, 근본적으로 생존의 차원에서 접근해야 하는 문제 같다. 결국 우리는, 근본적으로는 말이야, 자신의 생존에 이롭다고 판단된 자와 결혼 제도를 활용하여 전략적으로 결탁하는 게 아닐까. 너와 내가 헤어진 것은 서로가 서로를 자신의 생존에 해롭다고 파악했기 때문이겠지. 지금 하는 이 말에는 절대로 냉소가 담겨있는 게 아니다. 생존에 대해 왈가왈부할 때 감히 냉소를 머금을 수는 없는 일이지. 생존은 절대적이고 숭고하며 절박한 무엇이니까.

 

아무튼, 너의 감각을 활성화시키고 생의 지평을 확장시킬 만한, 아니다, 적어도 그러한 네 생명활동을 ‘방해’하지 않을 만한 인간을 찾으면 좋겠다. 그러고 보면 나는 너를 (네가 미처 사전에 예상치 못했던 방식으로) 얼마나 방해했던가? ㅎㅎ 무엇보다도 정신과 생활의 두 영역에서, 혹은 자유와 의무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나가는 일이 중요할 것 같다. 네 고유의 생명활동을 위축시키지 않으면서 거기서 더 나아가 네 삶의 균형 감각을 적당히 증진시켜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 너무 이상적인가? 하지만 균형을 유지하는 일이야말로 장기적으로 잘 생존하기 위한 것이니.
     
2 독서를 추동하는 내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나는 왜 이렇게밖에 살 수 없는가? 혹은, 나는 왜 이렇게밖에 살 수 없도록 형성되었는가? 한마디로 나는 왜 이 모양 이 꼴인가, 하는 의문. 여기서 ‘나’의 범주는 좀 더 확장될 수도 있겠지만, 그 역시 궁극적으로는 세계를 인식하는 나 자신의 문제가 아닐까. 확실히 나는 불만 종자인 듯. 어쩌면 나는 이렇게밖에 살 수 없는 나의 삶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납득하고 수용하기 위해서, 책을 읽어나가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다, 어쩌면 나는 이렇게밖에 살 수 없도록 형성된 내 삶을 아주 오래 전부터 이미 받아들였는지도. 그리고 그것을 논리적으로 합리화시키기 위해 책을 필요로 하는 것인지도.

 

3 "내가 사랑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활동에 관해서 이 사회는 철저히 무관심하지. 오로지 내가 사회적 개체로서 효과적으로 기능할 수 있는 분야, 즉 체력적으로 쉽게 방전되지 않으면서 장시간을 오류와 실수없이 정확히 처리해낼 수 있는 업무의 분야가 무엇인지만이 관심사일 뿐, 내 사정 같은 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나의 선호와 흥미에 사회가 화답해줄 거라는 기대부터가 유아적 망상이겠지만, 그래도 소름끼쳐. 개체의 능력을 냉엄하게 측정하고 평가해서 적재적소의 좌표에 위치시키는 이 정교한 배치의 시스템이."

 

"스터즈 터클의 <일>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7~80년대 미국에서 웨이트리스, 연주자, 야구선수, 미장이, 주식중개인 등 각양각색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과 인터뷰를 한 책이거든. 근데 다들 그때도 판에 박힌 삶에 소름끼쳐 하고... 그나마 나은 사람들이 자신의 노동의 결과물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사람들이더라, 연주자라든지 건설노동자라든지... 아니면 노동의 강도를 자유로이 조절할 수 있는 사람들이거나... 그런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을 그나마 긍정적으로, 최소한 쓸모없지는 않았다고 평가하더라고."

 

밥벌이의 지겨움을 주제로 친구랑 주고받은 카톡 대화 내용 중에서. 최소한 알라딘 서재에서만큼은 직업적 자아로부터 벗어나서 다른 인격체, 다른 자아, 다른 정체성으로 살고 싶다. 간절히! 블로그까지 업무 관련 내용으로 가득 채워 밥벌이 수단으로 삼는 이들을 보면 존경을 넘어 경이를 느낀다. 아니 어떻게 저토록 순정적일 수가 있지. 아니 어떻게 인간으로서 저토록 단 하나의 차원만을 가질 수가 있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