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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마크하기 날이 이렇게 화창한데요. (추천33 댓글4 먼댓글0) 2010-02-13

어떤 종류의 젊은이들은 '나는 왜 자라지 않는가'를 고민하며 살아간다. 문제는 이게 고민으로 끝나지 않고 시간이 흐를수록 자책이 되어간다는 점에 있는데, 과정을 돌아보면 그 청년이 보고 자란 것들의 영향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내가 잘 아는 누군가(라고 쓰고 '나'라고 읽는)도 그런 경우다.

문득 편애하던 두 남자의 이름이 떠올랐다. 정확한 영국식 발음을 구사하며 주로 자괴에 빠졌다가 사랑으로 이를 극복하는 (정말 극복했을지?) 캐릭터를 연기하는 휴 그랜트와, 그에 못잖은 억양을 지녔지만 이를 완전히 숨기고 자괴에 빠진 미국인 의사를 연기하는 휴 로리. 휴, 그래서였을까. 잡학다식이 세상의 명제인 줄만 알았던 소년은 (뭔가 부족한 것이 있었고, 그에 대한 트라우마도 있었을 것이며... 기타 등등의 이유로) 깊이는 팽개치고 이것저것 표피가 달달한 수박들만 핥으며 살게 되었다. 그리고 나선 이렇게 외친다. 맙소사, 고리타분하고 깊이 있는 척하는 것들은 질색이야. 사실인 동시에 변명인 말들.

폭스의 인기 시리즈 [닥터 하우스] (House M.D. / md지만 인터넷서점md는 당연히 아니다)의 주인공 하우스 박사는 칼날 같은 추리력, 풍부한 의학 지식, 기민한 직관, 거침없는 실행력과 더불어 지구 최고를 노리는 오만과 까탈, 악동 기질을 타고난 천재적이고 문제적인 캐릭터. 한쪽 다리를 절기 때문에 늘 지팡이를 짚고 다니며, 바이코딘(마약류 진통제)를 해바라기 씨처럼 쉴 새 없이 까먹는 이 남자는 겉으로는 익살맞기도 하고 악의적인 장난질에 툭하면 성질을 부리는 시끄러운 사람이지만, 내면적으로는 한없이 어둡고 스산한, 외롭기 그지 없는 사람이기도 하다.

홈즈의 적자(하우스 house는 홈즈 homles처럼 221B에 살고, 유일한 절친의 이름마저 윌슨 wilson이다.) 인 동시에 더없이 현대적인 병폐를 가득 지닌 닥터 하우스는 자기파괴의 극단까지 가 있다. 이 친구는 타인을 사랑하는 방법도, 타인으로부터 사랑 받는 방법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언제나 자신의 세계에만 머물며, 누군가 그 틈새로 침입하거나 자기 스스로 군중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을 몹시도 꺼린다.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고, 세상 앞에서는 오직 그 능력을 과시하는 것만으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가련한 인간인 것인데, 성취를 이루는 와중에도 사람들의 칭찬에는 심드렁하거나 인색한 반응을 보여 더 미움을 산다.

인간적 유대보다는 필요에 의한 관계만 쌓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사랑에 목말라 있고, 유대를 아쉬워하고, 속으로 그걸 꾹 삼킨 채 (자기기만을 가득 안고) 자기만의 방으로 돌아가는 사람. 주변인들은 그 가당치 않은 모습이 빤히 보이기 때문에 안타까워 자신의 손을 내밀지만, 정작 하우스는 손 내미는 자들의 손을 가차없이 내치는 불통의 캐릭터인 것. 문제는 이게 또 이 사람의 매력이라는 점이다.

하우스의 세상에는 친구로 간주되는 여러 등장인물이 있지만, 성 정체성을 뛰어넘어 (팬덤에서는) 연인으로 간주되기도 하는 윌슨 박사와의 관계만 봐도 제대로 된 소통은 없고, 에둘러 표현하는 가운데 서로의 의중을 확인한다. 이 병리적인 캐릭터는 계속해서 극복하지 못할 염세의 진창 속에서 자기만의 게임을 펼친다. 이따금은 아예 게임 바깥으로 벗어나기 위해 난동을 부리기도 한다. 영점, 혹은 빙점을 향하려는 삶이 세상에 정말 있다면, 그가 취하는 인생의 포즈란 일단 그것에 수렴한다. 그럼에도 그 또한 마음 깊은 곳에서는 누군가와의 동화를 원할 것이고, 이 절망뿐인 캐릭터도 언젠가는 세상 앞에 온전히 설 수 있으리라 기대하게 만드는 것이 이 시리즈의 요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에피소드는 두 번째 시즌의 두 번째 에피 autopsy(부검) 편이다. 말기에 다다른 암에 걸린 소녀가 욕실에서 테이프레코더를 작동시킨다. 흘러나오는 노래는 또래 아이들이 좋아하는 크리스티나 아길레라의 'Beautiful'. 항암치료 때문에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는 소녀는 아길레라 같은 가발을 뒤집어 쓰고 흥겹게 노래를 따라 부른다. 임박한 죽음에 대한 불안 같은 것은 없다. 그러다 소녀는 불명의 원인으로 갑자기 쓰러지고, 병원에 실려가 하우스 일당에게 이런저런 치료를 받게 된다.

치료에 성공해도 암은 사라지지 않는다. 연장 가능한 수명은 1년 정도. 예의 까칠한 하우스는 눈앞에 보이는 죽음 앞에서도 의연한, 외려 홀로 남겨질 엄마를 위로하는 소녀를 보고 심사가 뒤틀린다. 넌 자신을 속이고 있어, 넌 이제 곧 죽을 텐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구는 건 말이 안 돼, 넌 그저 절망 속에 있어야 해, 라는 식이다. 집요한 하우스의 괴롭힘에 어른스럽고 성실하게 자신의 상황을 답파해가던 소녀도 잠깐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치료가 끝나고, 1년의 생명을 유예 받은 채 돌아가는 길에 소녀는 해맑게 웃으며 하우스를 꼭 끌어안는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소녀의 짧지만 아름다울 생환을 진심으로 기뻐하는데, 정작 그녀를 살려낸 하우스는 뚱한 표정만 짓고 있다. 그런 하우스를 향해 소녀는 (기억이 맞다면) 아마 이런 식으로 말했을 거다. "날이 이렇게 화창한데, 산책이라도 나가봐요." 당신이야말로 그렇게 절망 속에 갇혀 있지 말고, 저 아름다운 세상 속으러 걸어나가보라는 말이다. 하우스는 여전히 뚱한 표정으로 산책 같은 건 좋아하지 않는단 식으로 대답한다.

소녀가 사라진 뒤, 하우스는 이어폰을 끼고 지팡이를 짚은 채 거리를 걷는다. 그러다 오토바이 가게 앞에서 멈춰선다. 이어폰에서는 이미 노래가 시작된 상태. 가게 점원이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없다. 한쪽 귀에서 이어폰을 뽑아내자 점원의 말이 들려온다. "이쪽 다리가 아픈 건가요? 괜찮아요. 다리 하나가 성치 않아도 바이크를 몰 수 있어요." 장면 전환. 하우스는 지팡이를 오토바이 위에 얹은 채 소녀가 말했던 화창한 날씨 속을 질주하고 있다. 이어폰으로 작게만 들리던 노래 소리는 커진다. Beautiful. 이번에는 엘비스 코스텔로가 부른 버전이다. 화면은 원경으로 불구의 다리 따윈 잊고 달리는 하우스와 그의 오토바이를 비춘다. 날은 화창하기 이를 데 없고, 세상은 온통 풀빛. 물론 내일이 되면 다리의 통증은 돌아올 것이다. 소녀의 암처럼, 하우스의 고독과 불행도 어디로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 순간만은 노래 제목처럼 아름답기 그지없다. 

엘비스 코스텔로의 beautiful 듣기
http://www.ilike.com/artist/Elvis+Costello/track/Beautiful

발번역 가사 보기

(눈물 좀 닦고) 하우스의 세계란 결국 이런 것. 찰나의 희망 속으로 들어섰다 다시 깊고 어두운 절망으로 되돌아 오는 것. 의학 시리즈이기 때문에 탄생, 죽음, 불치의 병이나 잉태, 사랑과 가족, 우정, 범죄와 거짓과 사기, 욕망과 배신, 음모 따위를 종횡무진하지만 결국 (세상 모든 이야기가 그렇듯) 애매하고 모호한 성장에 대한 것이 주다. 더이상의 성장이 불가능할 것 같은 인물을 다루기 때문에 더 사랑스러운 걸까. 나도 잘 모르겠다. 다만 마음속으로 저 사람이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나도... 하는 심정이 좀 있다. 이미 다리를 다친 하우스가 다시 두 발로 걷게 되는 기적은 없을 것이다. 이 불행한 남자가 최후에 이르러 행복한 결말을 맞게 될 것 같지도 않다. 설사 행복한 결말이 나더라도 그건 그저 드라마의 해피엔딩인 것이지 이 남자의 인생은 계속될 것이다. 그렇더라도, 이 고립무원의 캐릭터가 행복해지는 꼴을 조금이라도 보고 싶다. 그래서 계속 보고 있는 것이고.

하우스 캐릭터의 입담에는 휴 로리의 그것이 상당 부분 반영되었을 텐데, 이 사람 영국에서는 꽤 잘나가는 코미디언이었고 각본도 직접 썼다. <건 셀러 The Gun Seller>는 휴 로리가 쓴 소설인데 밀리터리-스파이-블랙코미디물 정도인 것 같다. 똑똑한 사람이라 필력도 좀 되지 않을까 싶은데 배우의 인기에 비해 큰 이슈가 되진 못한 걸 보면 그리 재밌진 않은가 보다. 우리나라에서는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안 팔렸던 <밀레니엄> 시리즈를 낸) 아르테 출판사에서 출간 예정이라고 들었는데, 이런저런 사정으로 당분간 하우스 박사의 소설을 우리 말로 읽는 건 힘들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휴 로리만 소설을 쓰느냐, 하면 그건 아니고. 하우스의 인생을 현실에서 살고 있는 것만 같은 휴 그랜트도 최근 소설을 완성했단다. 인터뷰 전문은 <엘르> 2월호에 실려 있는데, (옮겨 놓을 수 없어서 아쉽) 그는 자신의 소설에 대해 '굳이 장르를 따지자면 블랙코미디다. 20년 동안 머릿속으로 구상했던 이야기였는데 마지막으로 만났던 여자친구가 완성하도록 옆에서 도와줬다. 이틀 이상 멈추지 않고 쓴 뒤 읽어봤는데 역겨울 만큼 최악이었다.'고 평했다. 이 인터뷰는 시크한 도시 남자의 경전으로 삼아도 좋겠는데 (저는 필요 없습..) 심지어 '하지만 내 여자에겐 따뜻'하지도 않아 보인다는 게 포인트.

인터뷰를 보며 웃다 보니 퍼뜩, 아무리 봐도 이건 하박(하우스 박사)의 언사가 아닌가... 그런데 그 안에 [어바웃 어 보이], [그 여자 작사 그 남자 작곡], [노팅힐], [브리짓 존스의 일기], [스몰 타임 크룩스]의 모습이 다 들어있는 게 또 신기하고. 외롭고, 찌들었고, 멍청하고, 한물 갔고, 허풍쟁이에, 멍청하고, 나약하고, 바람둥이에, 까불대는 모습. 심지어 도둑놈 심보까지... 깝권이 대수냐 깝휴님이 여기 계시다, 하는 느낌.

아, 덜 자란 어른 이야기를 하려고 했지. 자라지 않는 남자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바웃 어 보이]가 나왔고, 그러다 보니 또 닉 혼비가 생각나고. 그러고 보니 닉 혼비의 신간도 나왔는데. 이것 때문에 쓰는 건 아닌데, 게다가 명절인데...

<슬램>은 전설적인 스케이트 보더 토니 호크를 T.H.로 줄여 부르며 T.H.라고 하면 축구선수 티에리 앙리 (Thierry Henri) 밖에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우쭐해 하는 열여섯 철부지 소년 샘 존스의 이야기. 자신과 같은 나이에 열일곱살 짜리 남자애와 관계하여 자신을 낳은 엄마에게 동년배들이 치근대도 대수롭지 않은 쿨한 소년 샘 존스는 자신의 인생이 엄마와는 다를 거라 생각하지만, 인생은 그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주지 않는다. 미모의 모델 지망생 엘리시아와 사랑에 빠졌기 때문.

열여섯 나이에 애 아빠가 될 생각을 하니 끔찍할 수밖에. 자, 인생은 이미 꼬였고, 도망은 가야겠는데 어디로 가야 할 지는 모르겠고. 새파란 청춘인데 어른 인장이 찍히는 건 싫은 샘 존스의 선택은 (물론 그가 선택한 대로 흘러가지 않겠지만) 어떻게 될까. 아직 다 읽지 않아서 나 역시 궁금한 가운데, 덜 자란 남자들의 천국 <삼미...>를 떠올려 본다. 상식 선에서 자란 재미없는 어른 말고 덜 자라도 좋으니 행복하게만 살아달라며 1할대 승률을 들먹이던 박민규는 얼마나 나이브했나. 그래서 또 얼마나 좋았나. 다카하시 겐이치로 얘기는 빼고서라도 말이다. 그런데, <삼미...>를 읽은 사람들이 이렇게 나태해도 괜찮아, 포기해, 포기하면 편해, 라고 자신을 위로하며 사는 동안 박민규는 성장했고, 마침내 '딜도가 우리 가정을 지켜줬어요'에 이르러 '네비를 찍고 화성으로 가는' 방법마저 고안해 냈다. 짝짝짝. 이게 대체 무슨 뻘글인가 싶지만, 명절이고... 또... 세상은 계속 될 테니까 그냥 올려둔다.




 
 
다락방 2010-02-14 00:36   댓글달기 | URL
그러지 않으려고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추천 한방 보태고,
닉 혼비의 책을 보관함에 또 어쩔 수 없이 넣어버리고,
연휴중 하루가 가버려서 울어버릴까 말까를 고민하다 이 페이퍼 읽고 힘을 내서 자지말고 버텨보자 생각했습니다. 아, 이게 뭔말이죠?

여튼 오랜만에 읽는 인간김재욱님의 글이 좋구나, 뭐 그런 뜻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구요!

wordsfall 2010-02-23 15:54   URL
그러지 않으려고 하신 이유는 뭘까요?

오늘도 날이 참 화창해요. 다락방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늦었지만)

비연 2010-02-17 00:10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추천요~ 하우스의 수많은 에피소드들을 봤는데, 이 장면은 못 본 것 같아요..꼭 보고 싶어지네요.

wordsfall 2010-02-23 15:56   댓글달기 | URL
ㅎㅎ 이 에피 참 좋답니다. 그냥 좋은 걸로는 좀 모자라고 사랑스럽달까, adorable하달까... 꼭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