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갖고 싶은 게 너무나 많은 인생을 위하여 
이충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8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잡지에 연재된 글과 그 밖의 것들을 모은 것'이라는 말로 이 책을 설명하는 것은 심각하게 잘못되었을 뿐 아니라 어리석은 행동이다. 신문이나 잡지 등에 기고했던 글을 모아 책을 내는 사람들은 많다. 하지만 그 개별적인 글들이, 그 자체가 마치 하나의 잡지처럼 읽히는 글을 쓰는 사람은 거의 없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고 싶은게 너무나 많은 인생을 위하여》의 저자인 이충걸이 유일하다.

이 책에 등장하는 내용들은, 일관성은 있지만 체계적이지 않고 서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긴 하지만 구성되어 있지는 않다. 소비의 현장을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매체를 만들어온 사람답게, 저자는 소비의 안팎을 전부 해집어놓을 듯한 태세로 종횡무진 발걸음을 이어간다. 그것은 쇼핑하는 장소, 백화점이나 중고시장에 대한 것일 수도 있고, 쇼핑의 대상, 자동차에서 전동 드릴까지 이어지며, 궁극적으로는 쇼핑하는 사람, 물건 하나를 구입할때마다 쾌감과 관능과 죄의식을 동시에 느끼는 그 누군가에게로 향한다. 그런 의미에서 책의 말미에 실린 세 명의 디자이너와의 인터뷰는, 체계는 없지만 일관성만큼은 확실한 이 책의 마무리로 매우 적합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을 쉽게 훌훌 읽어넘길 수는 없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 책에 실린 글 하나 하나를 읽는 것은 마치 잡지 한 권을 읽는 것과도 같은 감각적 포화 상태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혹자는 그것을 '이충걸식 글쓰기'라는 편리한 단어 하나에 우겨넣어버린 후 치워버리지만, 이것은 실은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소비의 현란함을 논하는 글쓰기에서, 저자처럼 온갖 명사를 끌어내어, 그들에게 가장 알맞은 형용사를 입혀놓은 후, 그 모든 언어들을 한 줄로 세워놓고 걷게 할 수 있으니, 독자로는 더 바랄 게 없다. 이것은 흔히 말하는 '잡지식 글쓰기'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을 구성하는 방식의 글쓰기이다. 저자는 '잡지에 싣기 좋은 글'을 쓰지 않는다. 대신 그 자체가 잡지가 되어버리는 그런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책의 주제와 내용을 정리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과연 의미 있는 일일까? 그것은 마치 벤야민의 《베를린의 어린 시절》의 주제가 뭔지 논하는 것과도 같다. '주제가 뭐지?' '요점이 뭐지?' 라는 강박을 놓아버려야 한다. 이 책은, 다소 느긋한 마음으로, 마치 평일 한낮에 대형 서점에서 책 고르기를 하듯 읽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의외로 본문에는 '북 쇼핑'에 대한 이야기가 하나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래야 저자인 이충걸이 열어밝히고 있는 한국어 산문 미학의 지점이 서서히 눈에 들어오기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충걸의 글을 좋아할 수도 있고 싫어할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 이런 글을 쓰고 있다고 생각하면 어딘지 모르게 안심이 된다.

다시 말하지만 이 책은 쇼핑에 '대한' 책이 아니다. 그냥 이 책이 쇼핑 그 자체이다. 잡지에 대해 논하는 꼭지가 몇 개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저자가 다루는 주제가 아니라, 그 주제가 다루어지는 방식이다. 쇼핑에 대해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한국어의 경계와 그 확장에 대해 탐색해보기 위해서라면 이 책을 읽어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p.s. 책 표지의 디자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게다가 종이를 왜 그렇게 무거운 걸 사용했는지도 이해하기 어렵다. '소비 문화의 가벼움'을 논하는 책이 한없이 무겁게만 느껴질 때의 역설이란. 단행본도 결국 하나의 매체라는 점에서, 이 지점은 다소 아쉽다. 내지 디자인은 평가가 오갈 수 있겠는데, 내 취향은 아니지만 독자 친화적이라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이웃 2008-09-12 14:21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노정태님의 글을 읽다 보면 한국어에 대한 언급이 가끔 나오는데 솔직히 어떤 생각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한국어의 경계와 그 확장에 대한 탐색.." 이 부분에서 궁금증이 확 몰려와 굳이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Q & A 
비카스 스와루프 지음, 강주헌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마치 한 편의 발리우드 영화를 보는 것만 같은, 경쾌한 터치가 도드라지는 이 소설을 나는 설날 연휴가 시작하기 전날인 그저께부터 오늘 아침까지 약 사흘에 걸쳐서 다 읽었다. '이것은 나름대로 회심의 상품입니다'라고 말하는 듯, 잘 만들어진 표지와 훌훌 넘어가는 내지가 우선 마음에 들었다. 물건만 놓고 보더라도 책값이 아깝지는 않다.

인도의 현실을 뭄바이의 슬럼에서 생활하는 한 웨이터의 눈을 통해 두루 짚어보기 위해, 저자는 다소 작위적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그의 이력을 다채롭게 꾸며낸다. 가톨릭 신부의 손에서 자라나, 힌두교 신자와 이슬람교 신자의 조언을 동시에 받아들여 세 가지 종교색을 전부 띤 이름을 가지게 된 그는, 한 사람이 평생에 다 겪을 수 없는 일들을 서른 살도 되기 전에 모두 경험한다. 저자도 쓰다가 헷갈렸는지, 아니면 다소 뒤죽박죽 뒤섞인 플롯으로 일종의 '혼종성'을 구현하고 싶었는지, 주인공의 인생사에는 다소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 있고 시간 순서도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면이 없잖아 있다.

주인공의 캐릭터가, 이런 류의 '활극'에 가장 적합한 '백지'라는 점도 우선 단점으로 기록해둘 만하다. 이 책은 말하자면 '람 모하마드 토마스'와 함께 떠나는 현대 인도 유람에 가깝다. 이 작품의 주인공 람은 캐릭터가 아니라 사파리용 관람차인 것이다. 전형적으로 몰상식하거나 방황하거나 타락하는 캐릭터 속에서, 람 또한 전형적으로 올바르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주인공 람의 시선은 상식적이지만, '살인은 무조건 안 돼'라는 식으로까지 상식적이지는 않다는 것이다. 고아원에서 자라고 슬럼에서 생활하는 사람다운 최소한의 면모는 갖추고 있다. 죽어 마땅한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난간에서 떠밀고도, 서구식의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는 모습이 그렇다.

작품의 기본적인 성격이 이러하다보니, 독자로서 내가 갖는 관심은 소설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사회학적인 것으로 변모할 수밖에 없다. 이 책을 읽으며 줄곧 마이크 데이비스의 <슬럼, 지구를 뒤덮다>를 떠올리고 있었다. 마이크 데이비스가 논픽션으로 묘사한 현실을, <Q & A>의 저자는 픽션의 형태로 고스란히 한 번 더 그려낸다. 정부에 의해 그 존재가 애초에 인정되지 않는 슬럼에서의 생활 말이다. 화장실을 한 번 이용하기 위해 줄을 서야 하고, 골목길을 걷다가 똥물을 뒤집어쓰는 일도 없지 않으며, 살인과 강도와 강간이 빈번하지만 그 누구도 경찰의 도움 따위 기대하지 않는 그런 삶 속에 처한 수억의 사람들. 하지만 작품의 본래 성격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저자는 마이크 데이비스처럼 진지한 성찰과 운동을 촉구하거나 하지 않는다.

물론 그것은 단점이 아니다. 적어도 외국인인 내가 부담없이 읽을 수 있는 '소설'로서 이 작품이 갖는 미덕이 거기에 있다고 볼 수도 있다. 발리우드 영화처럼 현란하고, 발리우드 영화처럼 정신없으며, 발리우드 영화처럼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다. 지금 나는 내가 인도인이 아니니까 그정도면 만족한다는 소리를 하고 있는데, 얼핏 생각해보면 이것은 너무 편한 입장이 아닌가 싶지만, 한번 더 생각해보면 어차피 인도인이 아닌데 '이런 시각은 사회 변화에 도움이 되지 않아' 따위 발상으로 괜히 분노하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싶기도 하다. 그러니 이쯤해서 넘어가고, 이 책을 읽으면서 떠올릴 수밖에 없었던 또 다른 소설인 <퀴즈쇼>에 대해 잠깐 언급이나 해보자.

당연히 김영하의 <퀴즈쇼>를 연상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 속에서 뭔가 인생이 안 풀리는 청춘이 주인공이고, 사회상을 두루두루 짚어내고 있으며, 결정적으로 퀴즈쇼를 소재로 삼고 있으니 말이다. 기왕에 영화의 비유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전반적인 분위기도 그렇고 심지어는 결말도 그렇고, <Q & A>가 발리우드 영화라면 <퀴즈쇼>는 한국 영화와도 같다. 두 작품 모두 그 소설이 태어나게 된 사회의 요즘 모습을 나름대로 잘 포착하고 있으니, 이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김영하의 <퀴즈쇼>도 한 번 읽어보기를 권한다. 람 모하마드 토마스가 뭄바이의 슬럼 집단주택에 살 때, <퀴즈쇼>의 이민수는 고시원에서 상한 고구마 먹고 채한 '옆방녀'의 등을 두드려준다. 전반적인 것을 접어두더라도, 디테일만으로도 두 작품은 비교해 볼 가치가 있다(만 지금 그런 글을 쓸 생각은 별로 없다).

<Q & A>는 현대 인도 사회에 대한 일종의 파노라마를 제공한다. 그것이 주마간산이라고 해서 우리가 이 책의 가치를 폄하할 필요는 없다. 한국에 사는 독자인 우리는 그저, 점점 평평해지면서 작아지는 세계의 가장자리 바깥으로 떨어지고 있는 이들이 너무도 많다는 사실 정도를 기억하면 된다. 나 자신도 아차하는 순간 그런 처지가 될 수 있다는 것까지 굳이 떠올리지는 말기로 하자. 그런 '통찰'을 위해서라면 우리는 <퀴즈쇼>를 펼쳐보는 편이 더 나을 테니 말이다. 아무튼 이 소설은 재미있고, 부담 없이 훌훌 넘길 수 있도록 잘 쓰여진 작품임에 분명하다. 여기서 묘사된 대도시 슬럼의 생활상을 좀 더 리얼하게, 혹은 적나라하게 알고 싶다면 마이크 데이비스의 <슬럼, 지구를 뒤덮다>를 꼭 읽어볼 것을 추천하면서 대강대강 생각나는 대로 두들기는 리뷰를 마치도록 하겠다.

 
 
jung eun 2009-06-16 09:12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slumdog millionaire 영화도 강추합니다... Danny Boyle 스타일..무지 재밌는데요 인도 친구들중에는 poverty porn 이라고 싫어하기도 하던데, 솔직히 한국에서 수많은 울고 짜는 영화나 드라마를 봐왔던 저로서는 별 저항감 없이 보았습니다.
 
용의 이 
이영수(듀나) 지음 / 북스피어 / 2007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듀나(이영수)의 새로운 소설집 <<용의 이>>를 나는 서점에 깔리기 전에 볼 수 있었다. 지금도 이 책을 직접 본 사람은 얼마 되지 않겠지. 그러니 여기서는 내용에 대한 꼼꼼한 리뷰를 하기보다는, 이 소설집의 네 작품이 가지고 있는 모티프를 짚어내고 이 책이 지니고 있는 장점을 소개하는 정도의 감상문을 써볼까 한다.

이미 제목에서 언급되어 있는 바와 같이, 나는 이 소설이 ‘강간’과 ‘소녀’라는 두 가지 모티프를 바탕으로 하여 성립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정도 주제 노출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스포일러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따지자면 책 뒤표지에 나와 있는 정성일의 추천사도 스포일러가 될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그렇지 아니하듯이 지금 내가 쓰는 리뷰 겸 추천도 내용에 대한 직접적인 노출을 포함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작품집에 포함된 네 편의 소설들은 모두 강간 피해자의 이야기를 조금씩이나마, 혹은 중요한 전개의 일부로서 포함하고 있다. 여기까지 말하고 보니 내용에 대한 언급이 나올 것 같기도 하니, 입이 근질거리긴 하지만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아무튼 강간 이야기가 반드시 포함되어 있고, 그것들은 대체로 소녀인 화자들의 입을 통해 재서술된다. 드물게도 <천국의 왕>은 주인공이 남성이지만 그는 “좌우대칭이 어긋난” 얼굴과 “절룩거리는 왼쪽 다리”를 지닌 장애인이다. 그 화자들은 듀나가 이끌어내는 세계 전멸의 이야기들을, 다소 즐거운 일이라는 듯이 투덜거리며 서술해낸다.

개인적인 호오를 따지자면 이 책에 실린 네 편의 소설 중 가장 재미있는 것은 <너네 아빠 어딨니?>이다. 판타스틱 창간호에 실려 상당한 호응을 받아낸 그 작품은 현재 영화화되고 있기도 하다. 헌대 그 소설이 그려내는 세계의 몰락과, 그것을 마치 고소하다는 듯이 풀어내는 작품 특유의 톤이 영화화 과정에서 실각되지 않을 수 없다고 나는 예측하고 있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영화가 나오기 전에 먼저 원작을 읽기를 권하고 싶다. 제정신을 가진 PD라면 이 작품의 특유한 뉘앙스를 감독이 다 살려내거나 발전시키도록 방치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소설이 재미를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은 아니지만, 어차피 장르문학을 읽는 행위 자체가 ‘대중적’이지는 않기 때문에, 이런 종류의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기회를 놓치고 영화를 먼저 본 다음 실망스러운 첫인상을 느끼지 말고 우선 원작을 읽어야 한다. 그로테스크한 설정 밑에 유머와, 소녀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하지만 아무튼 사회적인 풍경의 일부를 잡아내고 있는 날카로운 시선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천국의 왕>과 <거울 너머로 건너가다>는 둘 다 강렬한 설정에서 작품의 동력을 얻고 있는 ‘하드 SF/판타지’의 범주에 속할 것이다. 스토리텔링의 측면에 있어서는 <천국의 왕>이 낫고, 상상력이 주는 해방감을 평가의 기준으로 삼는다면 <거울 너머로 건너가다>에 더 높은 점수를 줄 수 있다. 표제작인 <용의 이>는 <천국의 왕>과 나름대로 대구를 이룬다고 볼 수 있는 작품인데, 작가가 자신의 설정을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기 때문에 세계관에 적응하는 것이 다소 어렵긴 하지만, 듀나가 시종일관 화자로 삼고 있는 ‘소녀’의 성격을 파악하려면 반드시 집어 들어야 할 소설임에 틀림없다. 이 작품에서 소녀는 아저씨와 유령과 좀비와 괴물과 싸우고, 또 다른 소녀를 만난다.

일전에 그가 운영하는 홈페이지의 게시판에서 듀나는 자기 소설의 화자가 보여주는 행동 패턴을 ‘듀나질’이라고 부른 바 있다. 아는 것 많고 불평불만에 가득 찬 소녀의 행동거지와 말투 등이 자기 소설에서 고스란히 묻어나고 있다는 것을 그는 잘 안다. 하지만 <<용의 이>>를 놓고 볼 때 그것은 그의 개성일 뿐 결코 단점이 아니다. 세계의 몰락을 염원하는 소녀가 냉소적으로 키들거리며 풀어놓는, 강간 이야기가 슬며시 언급되는 네 편의 소설들은, 나름의 일관된 스타일을 구성함으로써 듀나라는 몇 안 되는 한국인 SF 작가의 작품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작품의 코드는, 내가 보기에 ‘강간’, 그리고 ‘소녀’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이 책을 읽어주신다면 리뷰를 쓴 사람 입장에서 더 바랄 게 없겠다.

네 편의 소설 외에도 이 책에 좋은 점수를 주게 만드는 요소가 있다면, 원고지 3매를 쓰려다가 30매를 훌쩍 넘겨버린, 영화평론가 정성일의 길고 긴 추천사가 아닐까 한다. 길고 길지만 재미있게 술술 읽힐뿐더러, 여느 문학평론가들처럼 상찬의 언어를 무성의하게 풀어놓는 대신 그 또한 한 사람의 장르문학 독자이자 듀나의 팬이라는 것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마치 책을 다 읽은 후 정성일과 수다를 떠는 것 같은 기분마저 맛볼 수 있다. 소설을 다 읽은 후 뒤에 딸린 ‘작품해설’을 보며 기분을 잡쳐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주례사비평이 문학계를 망쳤다’라는 말에 전적인 공감을 표할 수 있을 텐데, 이 책은 전혀 그렇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더욱 기분이 좋아지는 새로운 체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이 큰 장점이다. 다른 출판사에서도 이런 부분을 참조해주었으면 싶기까지 하다. 정말이지, 한국 문학계를 망친 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 소설 뒤에 붙는 ‘작품해설’임을 다들 모르는 걸까.

듀나에 대한 글을 쓰다 보니 듀나처럼 투덜거리며 마무리를 짓게 되었다. 아무튼 여러모로 <<용의 이>>는 추천할만한 책이다. 구매 버튼을 눌러도 좋다고 하겠다.



 
 
 
칼의 노래 - 1.2권 합본, 우리 소설로의 초대 4 (양장본)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1년 10월
평점 :
절판


이제 김훈은, 차라리 저주다. 문장의 날을 세워 무언가를 노려보려는 이들에게 김훈은 악몽일 것이다. 최고의 문장가는 자기 글에 비문을 허용하지 않는다. 단 한 순간, 단 하나의 숭고한 비문을 통해 말로 베어질 수 없는 것을 베기 위함이다. 이 책의 드러나는 주제는 이 한 줄과 그것을 감싼 문단에 모두 담겨있다.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의 교서를 받았을 때 나는 김덕령의 죽음과 곽재우의 삶을 생각했다. 나는 김덕령처럼 죽을 수도 없었고 곽재우처럼 살 수도 없었다. '나는 다만 적의 적으로서 살아지고 죽어지기를 바랐다.' 나는 나의 충을 임금의 칼이 닿지 않는 자리에 세우고 싶었다. 적의 적으로서 죽는 내 죽음의 자리에서 내 무와 충이 소멸해 주기를 나는 바랐다.' -구판 1권78p.

가슴이 시리다. 자판을 두드리는 손가락에 행복을 느낀다. 그러나 나는 이 한 문단을 읽어, 김훈을 찌를 것이다. 앞서 말했지만 그는 저주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 글의 유효함을 짐작할 수 없다. 단지 이것이 내가 아는 한 처음 있는 일이며, 하지 않으면 안 될 짓이라는 건 알겠다. 또한, 나의 칼이 징징거리고 있음을 감출 수가 없다. 이것은 나의 싸움이다.

충무공이 거대한 것을 볼 수 없고 벨 수 없는 것은, 그가 충무공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 제목이 칼의 노래, 차라리 칼의 독백이라고 한다면, 충무공 자신 또한 한 자루의 칼일 것이다. 칼은 적을 벤다. 몹쓸 칼은 주인도 벤다. 그러나 칼이 기어이 벨 수 없는 것은, 그 날을 붙들고 있는 자루, 그 동여진 새끼줄을 칼은 끝내 벨 수가 없다. 이것이 이 소설이 근거하는 부조리의 전부다. 날은 자루를 볼 수 없고, 벨 수 없다.

작품의 시야는, 초기에 언급된 저 문단을 지나서면, 끊임없이 인간 이순신의 武에 집중된다. 이 소설이 뿜어내는 문장의 괴력은 다름아닌 저 집중의 힘이다. 판옥선이 화력을 집중하여 일본의 함대를 깨부수듯, 그렇게 武앞에 작가의 필력은 집중된다. 그리고 그는 끝내 말하지 않는다. 부러 부조리하게 남겨놓는다. 그의 시호를 구성하는 또 다른 요소를, 忠을, 그래, 그의 '밥벌이'를. 그리하여 결국 그의 자루를.

임금과 충무공이 과연 싸우고 있었던가? 충무공은 임금의 면사첩 앞에서 그의 살의를 느끼며 코피를 흘린다. 그러나 그 또한 알고 있듯이 그 죽음은 자연사가 아니다. 문제는, 존재하는 모든 죽음이 자연사라는 것이다. 임금이 이순신을 죽인다면, 그는 적의 칼에 쓰러지는 것도 임금의 칼에 쓰러지는 것도 아니라, 단지 자루를 쥔 임금의 손에 의해 부러지는 것일 뿐이다. 임금이 진정 또 하나의 적이었다면, 조정의 지원을 받지 않는 수군의 우두머리인 그가 두려울 것이 무엇일까. 그는 '적의 적으로서 살아지고 죽어지는' 사내인데.

김훈 자신도 모르는 바 아니다. 하여 그는 임금이 보낸 쇠고기의 칼 씹힌 흔적 뒤에, '정부은은 한 번 칼질에 베어지지 않았다(179p).'며 임금과 충무공의 관계를 무의식적으로 깨닫는다. 결국 그는 임금에게 충성을 바쳐야 하는 존재라는 것, 그 목이 잘려 종묘사직에 쇠고기처럼 올라도 할 말이 없다는 것. 이 엄연한 진실을, 그는 이후 더 말하지 못한다. 글쓰기는 오히려 무의식과의 치열한 싸움이다. 이것은 그의 싸움이다.

나는 이 책을 두번 읽었다. 지금보다 더 철 없던 시절, 이런 의문이 들던 시점에 슬며시 등장하는 '삼별초(하권 130p.)'운운은, 나를 분노하게 했다. 이렇게 비겁하다니. 칼의 노래를 부르는 자가 이렇게 눙치며 발 뺄 구석을 남기다니. 이제 겨우 알겠다. 혹하는 모습마저 담아내는 것이, 불혹을 넘긴 문장가의 일임을. 그 어떤 치사함과 비겁이라도 일단 드러내는 것이, 김훈 특유의 솔직함이라는 것. 그것이 없다면 이 작품은 오히려, 유치해진다. 소설은 원래 거짓말하는 것이다. 고작 두어 해 된 일이지만, 이제 그정도는 알고 넘어갈 정도로 나는 성장하였다.

그는 이후 '밥벌이'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나는, 끼니를 거르며 썼다. 다가올 모든 글 앞에 이 글도 무효일 것이다.


 
 
 
폴라리스 랩소디 1 - 제국의 공적 제1호 
이영도 지음 / 황금가지 / 200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자유와 복수의 의미를 이미 알고 있는 상태에서 다시 읽는 독자는, 일곱 하이마스터의 자유/복수 게임이 복수로 결정이 났음에도 오스발이 선언하는 바가 자유에 가깝다는 것을 쉽게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분명히 오스발은 억지를 부리고 있다. 다른 하이마스터들이 복수를 선택했다면 그는 복수의 화신이 되어, 이 세상의 인과응보를 철저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트랩이다. 제목의 '실패'는 이것을 언급한 것이 아니다.

오스발의 억지는 이렇게 해석된다. 실은 오스발도 자유에 한 표를 던져서 사실상 7인의 게임이 아니라 8인의 게임이고, 인간인 키 드레이번이 이제 그 불가해한 세상과 싸우기 위해(우리의 삶에서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새벽의 안개를 찢으며 드디어 오스발을 죽이러 간다고. 오스발이 다른 하이마스터들에 비해 월등히 강한 것은, 인간이 일반적으로 세상을 복수보다는 자유가 더 구현되는 곳으로 인식함을 의미한다. 중력의 원리와 같은 수많은 복수를 인식하지 못하므로. 그래서 이영도의 자유/복수 게임은 타당하다. 인간은 9번째 결정자, 자유와 복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자이니까. 자유호를 타고 복수검을 휘두르는.

이 문제를 이렇게 접어두더라도, 이 소설은 구성상 더 큰 심각한 문제에 봉착한다. 다들 어느 정도 감 잡을 수 있다시피, 거대한 전쟁 로망으로서의 폴랩과 자유/복수에 관한 거대한 우화로서의 폴랩은, 샴쌍둥이처럼 일체이면서 이질감을 느끼게 한다. 이 이질감의 연원을 캐보면, 판타지가 무엇인지에 대한 근원적인 인식을 얻을 수 있다. 이 작품은 훌륭한 판타지 소설이면서, 판타지에 대한 연구 소재로서 훌륭한 실패작이다. 이 말은 결코 욕이 아니다. 오답도 되지 못하는 싸구려 무늬만 판타지가 즐비한 세상이니까.

전쟁 로망으로서의 폴랩은 치밀하고 완벽하다. 서 소팔라가 그랜드마더와 그랜드파더의 포격 속에서 이게 왠 개수작이냐고 하고 절규할 때 전율을 느끼지 못한 독자는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이 세계는 완벽하게 작동하고, 독자들은 그 속에서 노닌다. 이것이 바로 실효성을 지니는 판타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문제는, 작가가 문제의식을 가지고 접근하는 자유/복수 게임이 이 잘 짜여진 판타지 세계의 사람들에게마저도 판타스틱하다는 점에 있다. 이중 판타지는 자살이다. 한국인 독자가 보르헤스를 읽는 것이 그렇듯이.

풀어 설명하자면 이렇다. 이영도가 창조한 세계의 인간 중에 자유/복수 게임을 리얼하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한마디로, 이영도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영도가 만들어놓은 세계에서마저 물 위의 기름처럼 떠다닌다는 뜻이다. 설령 누군가 한 두 사람이 자유/복수의 개념을 이해했더라도, 그것은 <세계에 영향을 주는> 사건일망정 <세계의> 사건은 아니다. 그리고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작가가 만들어놓은 스테이지에 올라온 배우들의 대사를 경청하는 것이 아니라, 그 스테이지 자체마저 통괄하여 보는 것이다.

대체 바스톨 엔도 장군에게, 라오코네스가 그를 선택했다는 것이 '엄청난 아군이 생겼군' 외에 무슨 의미를 지닐 수 있단 말인가? 이들이 이런 이야기를 꼭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른다는 것도 어색하다. 모른다기 보다는 감을 잡지 못한다는 것이. 이영도의 주제의식을 철저하게 드러내자면 휘리 노이에스를 중심에 둔 전쟁 로망을 자유와 복수의 이중주가 완전히 소화해내야 하는데, 오히려 후자가 전자에 포위되어 있다. 얼핏 보면 느끼지 못하지만, 이런 측면에서는 드래곤 라자가 더 낫다. 적어도 D/R에서는 주제의식을 논하려는 등장인물들이 독자들이 가장 즐겁게 읽은 등장인물들을 장기말 보듯 하며 판타지 위의 판타지, 옥상옥을 쌓지는 않으니 말이다.

못 읽어낸 혹은 다루지 못한 코드들이 수두룩하지만(예컨데 새벽의 사수), 그래도 이정도면 이영도의 폴라리스 랩소디를 이해함에 있어서 전과 같이 혼란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이 글도 폴랩과 마찬가지로 값어치 있는, 즐겁고 유쾌한 실패로 남기를 바란다면 지나친 바램일까.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