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있으면 출간될 제 책 [을의 민주주의]의 "서문"을 올립니다. 


그동안 번역서를 여러 권 내고, 편저서라든, 공저서도 여러 권 냈지만, 제 단독저서로는 이 책이 처음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을의 민주주의 1권] [을의 민주주의 2권] 이렇게 책을 낼까 생각했는데 


1권과 2권을 분리해서 각각 독자적인 구성과 제목을 가진 책으로 내는 쪽으로 생각을 바꿨습니다. 


그래서 올해의 마지막 달인 12월에 [을의 민주주의]로 책을 내고, 


다른 원고들은 조금 더 작업하고 생각을 정리해서 내년에 다른 제목으로 책을 낼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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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의 민주주의 서문

 

1

 

지난 해 가을과 겨울 전국을 뜨겁게 달구었던 촛불집회의 열기에 힘입어 새로운 정부가 들어선지 6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5.18 기념사에서 문재인 정부는 5.18 광주 정신과 촛불혁명의 기반 위에서 탄생했다고 선언하면서 국민주권의 새로운 시대를 열겠다고 다짐한 바 있다. 그 이후 촉발된 북한 핵실험 및 미사일 발사로 인해 한반도가 살얼음판 같은 위태로운 국면에 접어들면서 온 국민의 관심은 북한의 통치자와 미국의 통치자가 주고받는 살벌한 말의 전쟁에 쏠려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일촉즉발의 상황에서는 벗어났지만, 여전히 우리는 근본적인 존재론적 수동성의 상황에 놓여 있다.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지,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가 우리 자신에 의해 규정될 수 없는 상황, 아니 그 이전에 우리가 누구인지 자체가 타자에 의해 압도적으로 규정되는 상황에 우리가 놓여 있음을 다시 한 번 절감하게 되었다.


우리를 규정하는 이러한 외재적 조건은 내재적 조건과도 연결되어 있다. 지난 촛불혁명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한반도의 위기 상황은 더욱 예측할 수 없고 불안한 방향으로 흘렀을 것이다. 수구세력과 언론이 촛불혁명 이후 급격하게 위축된 보수 세력의 결집을 도모하려는 목적으로 이번 위기를 더욱 조장하고 군사적 대결의 양상으로 몰고 가려는 모습을 보이는 데서 이를 짐작할 수 있다. 이는 역으로 현재 당면한 위기 상황을 우리가 현명하게 헤쳐 나가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은 내부의 민주적 역량을 더욱 강화하는 길임을 말해준다. 그것은 우리가 을의 민주주의를 얼마나 구현하는가에 달려 있다.


지난 6개월 간 문재인 정부는 참신하고 파격적인 인사를 통해 희망을 보여주기도 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인사 실패와 정책의 혼란을 드러내기도 했다. 문재인 정부가 보여주는 이러한 다소 불안한 행보는 국민주권이라는 말이 지닌 한계와도 무관하지 않다.


국민이라는 말은 한국 현대사에서 한편으로는 독재 정권에 순응하고 그것을 지지하는 수동적인 집단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어 왔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민중이라는 말과 더불어 독재에 저항하는 민주주의의 주체로 호명되어 왔다. 독재자들이나 야당의 정치지도자들 모두가 국민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했다는 사실이 이를 잘 보여준다. 그리고 2008년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 집회나 2016년의 촛불집회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1조를 가사로 한 노래 헌법 제1가 널리 사랑을 받은 것도 국민이라는 말이 갖는 저항적 성격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다.


하지만 우리가 국민이라는 말이 지닌 이러한 저항적이고 민주주의적인 성격을 감안한다고 해도 그것이 새로운 시대의 민주주의적 가치를 담는 데는 여러 가지 한계를 지니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무엇보다 국민이라는 말에 담긴 동질성은 실제 국민을 구성하는 계급적, 성적, 지역적 차이와 대립을 은폐하는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적인 세계화 및 사회화가 산출한 가장 심각한 문제점은 ‘10 : 90’, ‘1 : 99’ 같은 숫자로 표현되어 왔다. 이 숫자들은 사회를 구성하는 극소수의 부자들이 점점 더 많은 부를 차지함에 따라 나머지 대다수의 사람들은 줄어드는 몫을 둘러싸고 더욱 치열하고 가혹한 경쟁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경쟁에서 늘 피해자 내지 패배자의 위치를 강요당하는 것은 성적경제적사회적 약소자들이다. 또한 국민이라는 말의 전체성에는 다양한 개인들 및 소수자들이 감당해야 하는 차별이 식별되고 정정될 여지도 존재하지 않는다. 국민이라는 말이 정상성의 기준이 될 때 그것에 미달하는 사람들은 배제와 차별, 무시의 폭력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국민이라는 말에서, 그리고 국민주권이라는 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실제 국민의 대다수를 이루는 ’()들을 정치적으로 재현하고 대표할 수 있는, 그리고 그들이 실질적인 정치적 주체로 참여할 수 있는 을의 민주주의를 이제 사고하고 실험해볼 때가 되지 않았을까? ‘촛불혁명이 혁명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새로운 정치적 실천의 신기원으로 기억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2

 

이 책은 제목이 말해주듯 을의 민주주의에 관한 화두를 제기해보려고 한다. 내가 말하는 을의 민주주의가 무엇을 뜻하는가에 관해서는 3부에 수록된 글들에서 충분히 논의했으므로, 여기에서는 왜 내가 을의 민주주의라는 질문을 제기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만 간략하게 제시해보겠다.


최근 몇 년 동안 갑과 을의 문제는 우리 사회의 중요한 사회적 담론으로 부상했다. 정규직 노동자에 비해 임금복지안정성지위 면에서 심각한 차별의 대상이 되는 비정규직 노동자, 여성 혐오, 동성애 혐오, 장애인 혐오, 다문화 혐오 등 각종 혐오의 피해자가 되고 있는 우리 사회의 많은 소수자, 약소자들, 프랜차이즈 본사의 갑질의 피해자인 영세 프랜차이즈 가맹점주들 및 알바생들, 교수의 횡포에 시달리는 많은 대학원생들, 서울 중심의 나라에서 차별과 소외의 대상이 되는 지방 주민들 ... 이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신문방송 및 SNS의 주요 주제가 되어 왔고, 여전히 그렇다. 최근 며칠 사이에도 의사 교수의 횡포에 시달린 수련의들의 이야기, 제빵 프랜차이즈의 제빵기사와 가맹점주 이야기, 치킨 프랜차이즈 가맹점 이야기, 현장 실습 도중 사망한 고등학생에 관한 이야기 등이 신문방송의 사회면 주요 기사로 보도된 바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이야기들을 접하다보면, 각종 혐오와 폭력, 갑질과 무시의 대상이 되는 을들이 사실 대다수 국민 또는 시민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각자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우리들 대부분은 을의 지위 때로는 을의 을의 지위에 놓여 있다. 때로는 비정규직 노동자로서의 을이기도 하고, 정규직이지만 여성으로서의 을이기도 하며, 또는 정규직이지만 여러 종류의 경쟁과 압력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정규직으로서의 을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일용직 노동에 여성으로서 장애인으로서 이주노동자 내지 불법체류자로서 또는 성적 소수자로서 가중된 을의 지위에 놓여 있는 을 중의 을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면 각자 을의 상황에 있는 이들이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고 협력하여 불공정한 갑을 관계를 개선할 수 있도록, 더 나아가 을로부터도 갑질과 무시의 대상이 되는 을의 을이 배제되거나 차별받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공동으로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리고 갑질을 구조화하고 확산시키는 사회구조 및 권력 관계를 개혁하도록 공동으로 요구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며, 사실 많은 지식인, 활동가, 시민들이, 때로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의 현장에서, 또 여성 및 성적 소수자들에 대한 혐오와 폭력에 맞서, 장애인들의 인권과 지위 향상을 위해, 그리고 그밖에 다른 분야, 다른 싸움의 장에서 이러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값진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을들에 대한 혐오와 폭력, 무시와 배제가 지속되고 있다면, 그러한 노력에 더하여 과연 우리 사회의 어떤 구조와 제도, 문화와 관행들로 인해 이러한 갑질의 행태가 지속되는지를 면밀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


혹시 이러한 갑과 을의 관계는 일시적인 현상이거나 특정한 분야 및 영역에서만 나타나는 특수하거나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 정치와 권력, 문화의 핵심과 연결된 근본적인 쟁점이 아닐까? 특히 노동자 해방을 부르짖는 민주 노조 내에서도 끊임없이 여성 차별과 성추행의 문제가 제기된다면, 진보적 지식인들마저도 자신들의 제자인 대학원생에 대해 일상적으로 갑질을 행한다면, 반정부 투쟁을 위해 여성 폭력이나 혐오 같이 사소한 문제는 덮어두도록 강요된다면, 더욱이 여성의 평등과 자유를 위한 투쟁이 동성애에 대한 배제나 주변화를 조건으로 한다면, 우리는 해방을 말하고 진보를 주장하고 평등과 자유를 내세우지만 그것은 우리가 말하는 해방, 진보, 평등과 자유가 누군가의 희생과 주변화, 침묵과 배제를 늘 전제한 것, 따라서 역설적이게도 구속을 전제한 해방, 반동을 조건으로 한 진보, 누군가의 불평등과 억압을 수반하는 평등과 자유인 것은 아닌가?


따라서 나는 갑과 을의 문제를 특수한 사회적 영역에서 나타나는 주변적인 문제로 이해하거나 갑질’, ‘을의 눈물같은 담론을 왜곡된 담론 내지 을질하는담론이라고 윽박지를 것이 아니라, 이 문제를 좀 더 보편적인 쟁점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수많은 해방운동, 급진적인 변혁운동이 존재해왔지만, 그것들 중 어느 것도 을로서의 을의 해방, 1부에서 다룬 시인 김남주의 표현을 빌리면 외롭고 가난한 사람들이/아직까지 한번도 맛보지 못한/자유에 이르지는 못했다. 보편적인 해방과 근본적인 사회 변혁, 독재 타도와 민주화를 내세웠지만, 그것은 때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독재로 전도되는 것이었거나 민족해방의 투사가 새로운 독재자로 역전되는 것이었으며, 모든 국민의 승리가 우리 편의 승리로 축소되는 과정이었다. 이것은 그러한 해방 투쟁들이 갑과 을의 관계를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거나 간과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해방의 정치, 또는 진보 정치는 갑과 을의 관계를 자신의 중심 과제로 삼아야 할 텐데, 이러한 과제는 단순히 보편적인 정치를 넘어서는 보편적이면서 독특한, 독특하면서도 보편적인 정치(이 책 5장의 보론 개인-보편적이면서 독특한참조)만이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내 생각에 이것은 새로운 혁명이라고 부를 만한 정치에 대한 혁명적 개조를 요구하는 것이다.

 

3

 

1부에는 세 편의 글을 수록했다. 1980년대의 대표적인 민중시인 김남주, 우리 시대의 비극 세월호 참사, 그리고 포퓰리즘을 다룬 이 세 편의 글은 별로 연관성이 없을 것처럼 보이지만, 내 생각에는 뚜렷한 주제 상의 관련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민중의 분할이라는 문제, ‘과소 주체로서의 민중, 이질적이고 갈등적인 을들의 집합으로서의 민중이라는 문제다.


이제는 진보 지식인들조차도 거의 읽지 않는 김남주의 시들을 읽어보면, 민중에 대한 깊은 신뢰와 민중 해방에 대한 뜨거운 열망의 한 편에 민중에 대한 배신감, 진보 정치에 대한 실망감, 그리고 진정한 해방의 정치에 대한 갈구만큼이나 깊은 그 정치의 불가능성에 대한 비극적 자각을 엿볼 수 있다. 그것은 민중은 근본적인 해방의 주체가 되어야 하지만 사실 그렇지 못하며, 진보 정치 역시 민중의 희생 위에 서 있다는 통찰에서 나오는 자각이었다.


이 문제를 포퓰리즘이라는 개념으로 이론화하려고 한 사람이 이제는 고인이 된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였다. 라클라우는, 우리나라 보수 언론 및 정치가들이 복지 정책이나 진보 정책을 공격할 때 주로 대중영합주의라는 뜻으로 써먹는 용어, 따라서 정쟁의 수사법이 된 이 용어의 깊은 의미를 살려내서, 이를 진보 정치 전체의 중심적인 개념으로 이론화했다. 라클라우가 이해하는 포퓰리즘은, 민주주의 정치가 민주주의이기 위해서는 전제하지 않을 수 없지만(인민주권 내지 국민주권이 민주주의의 토대를 이루는 한에서) 동시에 현재 민주주의의 지배적인 정치 제도를 구성하는 자유민주주의 질서가 그것이 실제로 주체로 등장하는 것을 될 수 있는 한 억제하고 배제하려고 하는 정치의 주체, 곧 인민(people) 내지 민중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포퓰리즘의 문제는 어떻게 민주주의 정치의 주체로서 인민 내지 민중이 자유주의 정치 질서 내로 포함되면서 동시에 배제되는가 또는 내적으로 배제되는가 하는 문제를 포함할 수밖에 없는데, 이는 과소 주체로서의 인민 내지 민중이라는 문제, 따라서 을들의 분할과 갈등이라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가 세월호 참사에서부터 지난 해 가을과 겨울의 촛불집회와 이른바 태극기집회에서 목격하고 있는 것, 또는 여성 혐오와 동성애 혐오로 표출되고 이른바 미러링메갈리아또는 워마드등과 같은 기표들로 나타나는 젊은 여성들과 남성들 사이의 또는 페미니즘 내부의 격렬한 젠더 전쟁에서 살펴볼 수 있는 것 역시 이러한 을들의 분할과 갈등이라는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그렇다면 민중은 진보 정치 및 민주주의 정치의 당연한 전제가 아니라 매우 문제적인 쟁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2부에 수록된 글들은 현대 민주주의 이론의 여러 쟁점들을 고찰하고 있다. 특히, 민주주의, 주체화, 폭력 등이 2부에서 다루고 있는 주요 주제들이다. 나는 주로 에티엔 발리바르의 개념들과 문제의식을 전유하여 이 쟁점들을 살펴보려고 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민주주의 이론에 관해 논의하기 위해서는 최장집의 한국 민주주의론을 우회할 수 없다. 그의 이론만큼 체계적으로 구성되고 학문적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미친 이론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2000년대 초부터 체계적으로 전개된 그의 이론은 지난 몇 년 간 그 자신의 행보를 통해 잘 드러났듯이 뚜렷한 한계를 지니고 있으며, 더욱이 진보적인민주주의 이론으로 간주되기에는 여러 모로 부족한 이론이다. 나는 에티엔 발리바르의 민주주의 이론과의 비교를 통해 이 점을 부각시켜 보려고 했다. 내가 볼 때 발리바르 이론의 강점은 민주주의의 봉기적 성격(또는 해방의 운동으로서 민주주의)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민주주의의 구성적 성격(또는 절차와 제도로서 민주주의)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반면 최장집의 이론은 민주주의의 봉기적 성격을 포기하거나 최소화한 가운데 절차와 제도로서의 민주주의에만 배타적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다. 스피노자 식으로 말하면 대중들에 대한 공포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 최장집의 한국 민주주의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또는 그의 제자들이 촛불혁명이 지닌 봉기적 성격을 최소화하면서 그것을 하루빨리 제도 정치(‘적폐 청산에 반대하는 통합의 정치’)의 문제로 대체하려고 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대중들의 해방적 봉기로서의 민주주의라는 문제는 과거에도 그랬거니와 오늘날에도 여전히 좌파 정치 이론가들과 활동가들의 주요 관심거리다. 특히 대중들의 반역이나 해방운동을 봉쇄하는 것으로 보였던 신자유주의적 통치가 지난 2008년 미국의 금융위기 이후 균열을 드러내고 아랍의 민주화 운동, 미국의 월스트리트 점령 운동, 스페인의 분노한 사람들’indignados의 운동 등을 통해 불평등하고 불공정한 세계 질서와 지역 통치에 대한 대대적인 저항이 표출되고 있는 만큼 더욱 그렇다. 하지만 봉기 그 자체는 늘 일시적으로 드물게표출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우리가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할 문제는 이러한 해방의 열망의 표출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 어떻게 이러한 봉기를 절차와 제도로서의 민주주의 내부에 포함시킬 것인가의 문제다. 무정부주의적 시민성이라는 관념은 여기에서 생겨난다.


무정부주의적 시민성은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세계시민적 시민성(cosmopolitan citizenship)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버마스 계열의 학자들이나 영미 권의 세계시민주의 이론가들이 주로 위로부터의 제도화 및 절차적 정당성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반면, 나는 한나 아렌트, 자크 랑시에르, 에티엔 발리바르로 이어지는 이론적 흐름 속에서 이러한 위로부터의 세계시민주의와 구별되는 아래로부터의 세계시민주의의 가능성에 주목하고 싶었다. 내가 이를 무정부주의적 시민성이라는 좀 더 도발적인, 어떻게 보면 용어모순적인 개념으로 표현하려고 한 이유는, 이것이 담고 있는 아포리아적인 성격을 부각시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곧 이는 우리가 기존에 보유하고 있는 민주주의 개념이나 제도들로는 온전하게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며, 따라서 이를 제대로 개념화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개념들과 제도들(가령, 국민국가와 여기에 기반을 둔 시민권, 인권, 주권, 대표 등)의 근본적인 해체와 재구성이 필요한 것이다.


다른 한편 봉기로서의 민주주의는 다중의 정치라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주지하다시피 이탈리아의 철학자 안토니오 네그리와 그의 미국인 동료인 마이클 하트는 󰡔제국󰡕(2000), 󰡔다중󰡕(2004), 󰡔공통체󰡕(2008) 3부작을 통해 우리 시대에 가장 영향력 있는 좌파 정치이론 중 하나를 구성했으며, 그 중심에는 다중(multitude)이라는 개념이 놓여 있다. 네그리와 하트의 다중 개념은 네그리가 자신의 유명한 저서 󰡔야생의 별종: 스피노자에서 권력과 역량에 관한 시론󰡕(1981)에서 재해석한 스피노자의 물티투도(multitudo) 개념에 근거를 두고 있다. 네그리의 스피노자 해석은 여러 모로 혁신적인 것이었으며, 특히 이전에는 거의 주목받지 못했던 물티투도 개념이 스피노자 정치학 및 형이상학의 핵심에 위치해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스피노자 연구사에서 한 획을 그었다. 하지만 이러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스피노자 철학 및 물티투도 개념에 대한 그의 해석은 다분히 편향적인 것이며, 이 개념에 기반을 둔 네그리와 하트의 다중의 정치학 역시 여러 가지 난점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한계와 난점은, 이들과 더불어 다중 또는 대중들의 봉기적 역량이 민주주의 더 나아가 모든 정치의 토대를 이루고 있음을 믿고 있는 (나 자신을 포함한) 사람들의 관점에서는 더욱 문제적인 것이다. 따라서 대중의 정치에 대한 더 정확한 인식과 실천을 위해서도 그들의 관점에 담긴 문제점을 분명히 드러내는 일은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네그리와 하트의 다중의 정치학의 중요한 한계 중 하나는 정치적 주체화의 문제를 제대로 사고하기 어렵게 만든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푸코가 개념화한 주체화 개념은 오늘날 인문사회과학의 주요 어휘 중 하나로 널리 쓰이고 있지만, 충분히 인식되고 있지는 못하다. 주체화 개념이 중요한 것은 몇 가지 이유 때문이다. 우선 이 개념은 예속화(assujettissement/subjection)가 지배 권력의 핵심을 이룬다는 것을 전제한다. 이런 관점에 따르면 지배 권력이 자신의 지배를 재생산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지배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을 예속화의 메커니즘 내지 기술을 통해 예속적 주체로 생산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알튀세르와 푸코가 각자 이데올로기 이론과 규율권력 이론을 바탕으로 제시한 예속화 개념은 서양 근현대 철학의 근간을 이루는 주체가 자율적이고 주권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권력의 지배 장치의 효과라는 점을 드러내는 매우 전복적이고 도발적인 개념이다.


둘째, 이렇게 되면 마르크스주의를 포함한 급진 정치 더 나아가 민주주의 정치 일반의 토대를 이루는 해방의 주체(프롤레타리아든 민중이든 민족이든 아니면 여성이든 간에)라는 가정이 크게 약화될 수밖에 없다. 근대 정치 질서 내에 존재하는 주체는 정의상 지배 권력의 근간을 이루는 예속적 주체화의 메커니즘에 의해 생산된 주체들이기 때문이다. 알튀세르와 푸코가 각자 이데올로기의 바깥은 없다, 권력의 바깥은 없다고 말할 때 염두에 둔 것이 이것이다. 알튀세르와 푸코는 이른바 복지국가 내지 사회국가(또는 발리바르 식으로 말하면 국민사회국가’)가 정착된 20세기 후반 서구 사회의 구조적제도적 조건을 이론화하려고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구호가 말해주듯 사회국가에서 개인들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국가와의 관계 바깥에서 살아갈 수 없다. 그런데 이러한 국가는 계급 중립적이고 공동체의 보편적인 가치를 구현하는 국가이기 이전에 지배 계급 내지 지배 권력의 이해관계를 표현하고 강제하는 국가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모든 개인은 지배 계급 내지 권력의 이해관계를 강제하는 국가를 통해 탄생하고 살아가며 국가 안에서 사망하는 것이다.


셋째, 알튀세르와 푸코에 대해 기능주의 내지 허무주의라는 비판들이 제기되었지만, 내가 볼 때 이것이 해방의 정치 내지 급진 정치의 가능성을 부정하거나 봉쇄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급진 정치의 현실적 조건들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려 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 곧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들 내지 규율권력(및 생명권력)의 작동이 오늘날 정치적사회적 관계의 보편적 조건이 되었다면, 이러한 조건 속에서 급진 정치는 어떻게 가능한가? 따라서 예속화가 권력의 지배 메커니즘의 중심으로 이해되면, 급진 정치의 핵심 과제는 어떻게 이러한 예속적 주체화의 질서를 깨뜨리거나 변화시킬 수 있는가의 문제가 된다. 이는 해방의 주체, 정치의 주체를 이미 주어진 것으로 가정하지 않고, 생산과 재생산 및 전화의 관점에서 사고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정치적 주체화의 문제를 자신들의 정치철학의 핵심 주제로 삼고 있는 동시대의 철학자들이 바로 랑시에르와 발리바르이며, 나는 푸코와의 관계 속에서 이들의 작업을 비교, 고찰하고 싶었다. 이들 이외에도 주체화의 문제를 중시하는 여러 이론가들이 존재하지만, 내가 볼 때 랑시에르와 발리바르의 작업은 (급진) 민주주의의 새로운 개념화와 실천을 위해 중요한 통찰을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특별히 숙고해 볼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처럼 정치적 주체화를 그 가능성의 조건의 문제만이 아니라 동시에 그 불가능성의 조건이라는 문제와 함께(데리다 식으로 말하면 유사초월론(quasi-transcendentalism)의 관점에서) 사고하게 되면, 폭력의 문제를 다루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시대의 폭력의 문제는 지배 계급 내지 권력의 폭력(또는 국가 폭력)과 이에 맞서는 피지배 집단의 대항 폭력의 관점만으로는 충분히 해명되기 어렵다는 점은 이미 많은 철학자이론가들이 제시한 바 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발터 벤야민이나 한나 아렌트 또는 자크 데리다의 저작을 읽어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들과 비교할 때 폭력의 문제에 관한 발리바르의 독창성은 내가 볼 때 극단적 폭력과 시민다움의 관점에서 폭력을 고찰한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극단적 폭력은 단순히 폭력의 규모나 강도 또는 잔인성이 극심한 폭력을 지칭하는 개념이 아니다. 내가 글에서 상세하게 밝히려고 했지만, 이 개념은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이나 푸코의 권력론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주체화의 ()가능성의 조건이라는 문제를 극한적으로 사고하기 위한 개념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해하면 극단적 폭력은 아프리카나 중남미 등에서 또는 대규모 종교 분쟁이나 민족 분쟁이 벌어지고 있는 곳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폭력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사람을 일회용 상품처럼 취급하는 곳에서, 초월적 주체(이것이 하느님이든 민족이든 아니면 나라 경제이든 국가 안보등이든 간에)의 이름으로 개인과 공동체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하는 곳에서는 어디든지 나타나는 폭력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반()폭력의 정치로서 시민다움의 정치는 국가의 문명화와 봉기의 문명화, 따라서 정치 그 자체의 문명화를 요구하는 정치라고 이해할 수 있다. 내가 시민다움이라고 번역한 프랑스어의 시빌리테(civilité)나 영어의 시빌리티(civility)는 일상적인 용법에서는 그 자체로는 정치에 포함되지 않은 일상적인 예절이나 공공 도덕을 가리키는데, 발리바르가 마키아벨리의 시민적 삶”(vivere civile)으로서 치빌리타(civilità) 개념을 염두에 두고 시민다움의 정치를 극단적 폭력에 맞서는 정치로 제시한 것은 폭력의 문제가 시민들의 삶을 문명화하는 문제, 곧 갑과 을의 관계를 문명화하는 문제와 결부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역으로 시민들의 삶의 양식으로서 민주주의는 그 일상적 삶에 내재해 있는 극단적 폭력(‘갑질’)의 문제, 곧 시민적 주체성을 잠식하는 폭력의 문제를 주요 과제로 다루어야 함을 의미한다. 시민다움은 반폭력의 정치이자 윤리이며, 시민적 삶의 기술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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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수록된 글들은 내가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이하 민연으로 약칭)의 인문한국(HK)연구단에 재직하는 기간(2008.2~2017.8) 동안 발표한 글들 중 일부를 선별한 것이다. 이 주제와 관련된 기존에 발표한 다른 글들 그리고 현재 작업 중에 있는 몇몇 글은 '을의 민주주의'를 주제로 한 또 다른 책으로 출간될 예정이다.


민연에 근무하게 된 것은 여러 모로 나의 지적 작업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무엇보다 내가 한국에 대해서, ‘한국학에 대해서 새로 눈을 뜨게 된 것은 전적으로 민연 동료들의 작업과 토론 덕분이다. 만약 민연에 오지 않았다면 나는 여전히 한국이라는 준거에 대한 고민 없이 추상적인 보편성 위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보편적인 이론이라고 생각한 철학들, 나 자신의 문제라고 생각했던 유럽 및 영미 철학자들의 문제가 사실은 철저하게 그들의 준거에 기반을 둔 그들의 철학이고 그들의 문제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된 것은 그들 덕분이다. 따라서 나를 포함하여 한국에서 철학하는 이들이 일차적으로 숙고해야 하는 것은 그들과 나의 존재론적 괴리를 인정하고 그 위에서 그들을 우리의 맥락에서 어떻게 수용하고 변용할 것인가의 문제이며, 우리의 기반 위에서 어떻게 보편성()을 구축할 것인가의 문제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 역시 그들 덕분이다.


더욱이 민연의 동료들은 그들의 관점에서 보면 이질적이고 낯선 공부를 하는 나에게 자신들의 관점을 수용하고 자신들의 영역으로 들어올 것을 강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게 묻고 도움을 청하고 나의 작업에서 무언가 배우려고 했다. 따라서 융합 연구학제 연구니 하는 관료적인 용어를 동원하지 않고서 내게 공동 연구가 어떤 것인지 깨우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 역시 그들이었다.


그들이 보기에 이 책에 수록된 여러 글들은 여전히 너무 서구 중심적이고 유럽 중심적일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너무 추상적인 것으로 비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그들은 아마 앞으로 내가 이를 스스로 깨우치도록 지켜볼 것이다. 그들의 이러한 무관심한 관심이 지난 10년 간 나의 공부를 이끌어온 중요한 동력 중 하나였음을, 깊은 감사의 마음과 함께 밝혀두고 싶다.


아울러 이 책은, 여전히 서툴고 부족하고 초보적이지만, 여기 수록된 여러 글들을 함께 읽고 토론하고 때로는 날카로운 비평을 아끼지 않은 다른 동료들과 독자들, 그리고 여러 강의를 통해 만날 수 있었던 수강생들과 지인들의 도움의 산물이다. 그들이 이 책에서 그들 각자가 남긴 흔적을 발견할 수 있으면 기쁘겠다.


그린비 출판사의 여러분께는 다시 한 번 큰 빚을 지게 됐다. 여러 권의 번역서와 한 권의 편서를 내면서, 프리즘 총서를 기획하고 운영하면서 그린비 출판사의 친구들에게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깊고도 넓은 도움을 받았다. 그들과의 우정이 앞으로도 오래 지속되기를 바란다.

 

 

2017년 겨울의 문턱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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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2017-12-03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축하드립니다. 드디어 선생님의 단독저서를 읽게되는군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balmas 2017-12-03 11:45   좋아요 0 | URL
예 감사합니다. :)

마야 2017-12-03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이 시중에 아직 안나왔어요~

balmas 2017-12-03 16:18   좋아요 0 | URL
예 책이 서점에 나오려면 1주일 정도 걸릴 겁니다.
감사합니다. :)

궁금 2017-12-05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선생님, 근데 8월에 서문 쓰셨던 포퓰리즘 책은 언제 나오나요. 요새 언론에서 자꾸 포퓰리즘이 거론돼서
궁금한데, 읽어보려하니 서점에는 안나와 있네요.^^

balmas 2017-12-05 13:38   좋아요 0 | URL
저도 왜 안 나오는지 궁금합니다. 곧 나온다고 해서 기다리기를 3달, 11월 초에 인쇄 전 최종 확인한다고 연락하고서 또 한 달 ... 그래서 그냥 나오면 나오겠지 하고 기다리는 중입니다.

권오성 2017-12-06 0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배움터 권오성입니다. 선배 덕분에 읽었던 구체성의 변증법, 휴머니즘의 부활 등을 잠 못 이루는 밤... 빠르게 잘 수 있는 수면제로 사용하다가 형의 블로그까지 왔네요... 항상 건강하세요. 언제 한번 찾아 뵙겠습니다.

balmas 2017-12-06 10:27   좋아요 0 | URL
ㅎㅎ 오성아 진짜 오랜만이다. 그동안 잘 지냈니? 여기까지 찾아와줘서 고맙다.^^
물리학도가 여전히 철학책 읽고 있다니 반갑구나. :)
언제 식사나 한번 하자.

모험가 2017-12-20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유합니다! 책도 주문했습니다! ^^

balmas 2017-12-20 14:10   좋아요 1 | URL
오랜만에 오셨네요.^^ 잘 지내시죠? 감사합니다.

도요새 2017-12-20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여 년 전 선생님 수업 들었던 학생입니다. 선생님 단독저서라니 정말 기대가 됩니다. 서문은 지금껏 읽어온 선생님의 글들과 조금 다른 차원에서 또한 깊고 감동적이기도 하네요. 감사합니다.

balmas 2017-12-20 14:15   좋아요 0 | URL
예 감사합니다. :) 비판적으로 잘 읽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