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황해문화] 가을호에 실릴 글을 하나 올립니다. 


'을의 민주주의'에 관해 쓴 글인데요, 앞으로 기회가 되는 대로 계속 이 주제로 글을 써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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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의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정치철학적 단상들

[이 글은 촛불집회의 과정에서 구상되어 봄, 여름에 걸쳐 여러 차례의 학술대회, 토론회, 강연회에서 발표되고 조금씩 다듬어진 글이며, 이 글 자체가 아직 미완성인 포괄적인 작업의 단편이다. 여러 차례의 발표 과정에서 좋은 논평과 문제제기, 제안을 해준 분들에게 감사드린다.]

 

 

I. ‘을의 민주주의에 관해 말하기

 

이 글은 을의 민주주의라는 화두에 대해 말해보고자 한다. 필자는 이미 󰡔황해문화󰡕의 지면을 통해 두 차례에 걸쳐 을의 민주주의라는 문제를 거론한 적이 있는데,[진태원, 몫 없는 이들의 몫: 을의 민주주의를 위하여, 󰡔황해문화󰡕 2015년 겨울호; 행복의 정치학, 불행의 현상학, 󰡔황해문화󰡕 2016년 겨울호.] 두 글의 문제의식을 조금 더 심화하고 을의 민주주의라는 화두를 본격적으로 개념화해보자는 뜻에서 이 문제를 더 논의해보고 싶다. 아마 몇 가지 단상 이상을 제시하기는 어렵겠지만, 이 문제는 거듭 제기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을의 민주주의라는 문제를 제기하는 첫 번째 이유는, 최근 갑과 을이라는 용어가 한국 사회의 주요한 사회적 문제들을 표현하는 담론으로서 대중적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재벌 기업과 하청 업체들 간의 불공정한 관계, 프랜차이즈 가맹점들에 대한 본사의 횡포, 다양한 업종의 알바생들에 대한 착취, 대학원생들에 대한 교수들의 갑질,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와 차별, 여러 분야의 소수자들(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이주노동자, 다문화가정 등)에 대한 혐오와 폭력 등을 표현하기 위해 갑질’, ‘을의 눈물등과 같은 방식의 담론이 쓰이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용어가 학자들이 만들어낸 말이 아니라 대중들 스스로 만들어낸 말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사실 을들의 외침이라고 할 수 있다. 는 갑에 의해 억압당하고 착취당하고 모욕당하고 무시당하는 을이라는, 우리는 갑질의 공통적인 피해자인 을이라는, , 우리는 더 이상 이러한 폭력을 참을 수 없다는, 익명적인 을들의 고통의 소리들이다. 따라서 주로 계약관계에서 당사자 중 한 쪽(채무자나 피고용인 등)을 지칭하기 위해 통용되던 이 말은 사회적 약자, 몫 없는 이들 일반을 가리키는 용어로 등장하고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정치적 언표 중 하나가 되었으며, 이제 필자와 같은 지식인들에게 성찰을 강제하고 있다.


을의 민주주의라는 문제를 논의하려는 또 다른 이유는 진보 정치의 상황과 관련이 있다. 다른 글에서 논의한 바 있듯이,[진태원, 포스트담론의 유령들: 애도의 애도를 위하여,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편, 󰡔민족문화연구󰡕 57, 2012 참조.] 1980년대 말~1990년대 초 국내 학계는 커다란 인식론적 전환을 경험한 바 있다. 그 이전까지 국내 진보 인문사회과학계의 논의를 주도하던 마르크스주의 및 민중 담론이 동구 사회주의권의 몰락을 계기로 급속히 위축되고 그 대신 포스트라는 접두어가 붙은 여러 담론, 곧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구조주의, 포스트마르크스주의, 포스트식민주의 같은 담론이 짧은 시간 내에 국내 학계에 널리 확산되었다.


마르크스주의와 민중 민주주의론에서 포스트 담론으로의 이러한 이행은 한편으로 전자의 담론들에 내재한 모순과 난점으로 인한 인식론적실천적 필연성을 지니고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주의에 대한 이론적실천적 투항이라는 성격도 지니고 있었다. 왜냐하면 1980년대 말~1990년대 초는 역사적 사회주의 체제가 몰락한 시기이면서 동시에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전개된 시기, 진영(정치 체제라는 의미에서 진영이든, 국가 대 반()국가 내지 반정부 조직(이른바 운동권’)의 대립이라는 의미에서 진영이든) 중심의 계급투쟁에서 말하자면 계급 없는 계급투쟁’, 또는 더 정확히 말하면개인적 실존 자체가 계급투쟁의 장이 되었다는 의미에서, 사회의 계급적 모순을 주로 을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개인적 실존 속에서 감당하고 있다는 의미에서실존적 계급투쟁으로 이행하게 된 시기였지만, 이는 한편으로 민주화라는 이름 아래, 다른 한편으로는 문화개성이라는 이름 아래 제대로 인식되거나 문제화되지 못했다.


그 결과 마르크스주의는 인문사회과학의 보편적 담론에서 일부 좌파 경제학자들의 경제학 담론’(이른바 마르크스 경제학내지 경제학 비판”)으로 축소되었고, 역으로 포스트 담론은 이데올로기로서의 포스트주의, 자유주의 세력의 헤게모니를 정당화하거나 더 나아가 새로운 문화 담론을 제시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소비담론을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로 전락[진태원, 앞의 글, 32.]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제대로 제기되지 못했다. “역사적 마르크스주의의 몰락이라는 현실앞에서 새로운 종류의 계급투쟁, 새로운 종류의 적대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왜 마르크스주의는 이러한 적대와 갈등을 설명하지 못했고 또 여전히 설명하지 못하는가? 그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이론적실천적 해법들이 모색되어야 하는가?[같은 글, 20.]


내가 보기에 을의 민주주의라는 화두는 이러한 질문들을 제기하기 위한 한 가지 방식이 될 수 있다. ‘현실 사회주의체제가 붕괴하고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전개된 이래 소수 거대 기업들의 부와 권력은 막대하게 증대한 반면 전 세계의 민주주의는 크게 후퇴했으며, 우리가 을이라고 부르는 사회적 약자들은 실업과 빈곤, 혐오와 무시의 위험 속에서 불안정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 더욱이 기존 자유주의 정치 체제가 대다수 을들의 삶을 보호하지 못하고 그들의 고통과 불안정성을 제대로 대표하지도 못하기 때문에 유럽에서는 정치에 대한 실망과 혐오 속에서 오히려 기존 정치 체제를 엘리트 집단들의 독점 체제라고 비난하는 극우파 정당들이 세력을 얻는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는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더 많은 민주화에 대한 대중들의 열망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의 확산과 심화에 스스로 앞장섬으로써 그 이후 이명박박근혜로 이어지는 수구 세력의 집권을 조장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한국 사회의 과두적 지배 체제가 더욱 공고히 되었고, 이는 불평등을 심화하고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토대 자체를 잠식하는 결과를 낳았다.


따라서 어떤 민주주의냐를 따지기 이전에, 또는 바로 더 많은 민주주의를 위한 조건으로서 민주주의 자체를 회복하는 일이 오늘날 한국 사회의 진보를 위한 결정적인 쟁점이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좌파적 기획과 우파적 기획 사이의 커다란 차이는 좌파적 기획만이 모든 종류의 민주주의의 급진화를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에 뿌리를 두고 있[샹탈 무페히로세 준, 포데모스 혹은 좌파포퓰리즘에 대한 두 개의 시선, 󰡔진보평론󰡕 68, 2016, 128.]다는 샹탈 무페의 발언은 경청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것은 오늘날에는 민주주의를 급진화할 수 있기 위해서는 민주주의를 다시 회복하는 게 필수적”[같은 글, 129.]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는 민주주의의 민주화를 오늘날 좌파 정치의 핵심 화두로 제시하고, 시민다움(civilité)의 정치 또는 반()폭력의 정치라는 기획에 따라 정치의 가능성을 잠식하는 극단적 폭력의 감축과 퇴치를 주장하는 에티엔 발리바르의 작업과도 통하는 문제의식이다.[이는 물론 에르네스토 라클라우나 샹탈 무페와 에티엔 발리바르의 정치철학이 동일하다는 뜻은 아니다. 이 글에서는 자세히 논의하기 어렵지만 양자 사이에는 주목할 만한 쟁점들이 존재한다. 에티엔 발리바르의 민주주의의 민주화의 문제설정에 대해서는 진태원, 최장집과 에티엔 발리바르: 민주주의의 민주화의 두 방향,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편, 󰡔민족문화연구󰡕 56, 2012를 참조하고, 그의 시민다움의 정치에 대해서는 진태원, 극단적 폭력과 시민다움: 에티엔 발리바르의 반폭력의 정치에 대하여(미간행 원고) 참조.]


그런데 오늘날 좌파적 관점에서 급진적 민주주의 또는 민주주의의 민주화 기획을 추구하려고 할 경우 곧바로 직면하게 되는 문제가 정치적 주체 또는 정치적 주체화의 문제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속에서 부와 권력이 소수에게 독점되는 과두제 체제가 더욱 강화됨으로써, 자본의 영향력은 더 이상 좁은 의미의 자본과 노동의 관계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자본의 힘은 일자리만이 아니라 주거와 환경, 교육, 건강, 노후생활에 이르기까지 사회의 모든 성원들, 특히 을 내지 을의 을(, ...)에 속하는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일부 경제학자들이나 사회학자들이 일상생활의 금융화라고 부른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 반면 노동자 계급은 예전과 같은 진영을 구축하지 못하고 있으며(노조 조직률이 10% 남짓 하고 통합진보당 사태를 겪은 우리나라에서는 더욱 더)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더 이상 설득력 있는 정치적규범적 대안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1 : 99’라는 구호가 말해주듯이, 극소수의 과두제 지배자들에 맞서 최대 다수의 주체들을 주체화하는 전략 또는 민주주의의 급진화[민주주의의 급진화라는 주제에 대해서는 󰡔급진민주주의 리뷰 데모스󰡕 1, 2011 참조. “민주주의의 급진화라는 제목이 붙은 이 학술지에는 조희연, 서영표, 김진업, 이승원, 장훈교 등의 주제 논문이 실려 있다.] 내지 좌파 포퓰리즘[좌파 포퓰리즘에 관해서는 Ernesto Laclau, On the Populist Reason, Verso, 2005 Íñigo Errejón & Chantal Mouffe, Podemos: In the Name of the People, Lawrence & Wishart, 2016 참조. 아울러 유럽과 중남미, 한국의 포퓰리즘에 관한 국내의 논의로는 진태원 엮음, 󰡔포퓰리즘과 민주주의󰡕, 소망출판사, 2017 참조.전략이 오늘날 좌파 정치 내지 진보 정치의 가장 중요한 과제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전략이 과연 주체 내지 주체화의 문제를 충분히 고민하고 있는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급진 민주주의 내지 좌파 포퓰리즘의 전략적 목표는 그 자체로는 존재하지 않는 인민 내지 민중을 구성하는 것인데, 이러한 인민 내지 민중이 해방적이거나 민주주의적인 주체인지(곧포퓰리즘을 좌파적인 포퓰리즘으로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여부가 불확실할뿐더러,[이 점에 관해서는 진태원, 포퓰리즘, 민주주의, 민중, 󰡔역사비평󰡕 2013년 겨울호, 207쪽 이하 참조.] 이러한 다수자 전략에서 소수자들의 위상이 무엇인지도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는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오늘날 99를 이루는 다수가 사실은 소수자/약소자들의 다수라는 점을 감안하면, 앞의 경우처럼 내용상으로만이 아니라 형식화에서도 급진 민주주의의 요구에 미치지 못한다. 을의 민주주의라는 우리의 화두는 이 문제에 대해 더 좋은 답변을 제시해주지는 못할지 몰라도, 적어도 더 정확하게 문제를 제기하도록 도와줄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을의 민주주의라는 화두는 작년 10월부터 올해 3월까지 전국을 뒤덮었던 촛불집회 및 그 결과로 수립된 문재인 정부에 대한 평가라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지난 518 광주민주화운동 37주년 기념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새롭게 출범한 문재인 정부는 광주 민주화운동의 연장선 위에 서 있다고 강조하면서 마침내 5월 광주는 지난 겨울, 전국을 밝힌 위대한 촛불혁명으로 부활했습니다.”라고 말했다. 더 나아가 그는 촛불은 518 광주의 정신 위에서 국민 주권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국민이 대한민국의 주인임을 선언했습니다.”라는 점을 역설했다.


518, ‘촛불혁명’, 국민 주권. 이 세 개의 단어를 연결하고 더 나아가 이것들 사이의 등가성을 선언한 이 기념사는 여러 모로 감회가 깊은 것이었다. 특히 지난 이명박박근혜 정권 동안 518 항쟁의 의의가 (의도적으로) 축소되거나 폄훼되고 그것이 상징하듯 한국 사회의 인권과 시민권이 크게 후퇴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번 기념사는 남다른 울림을 준다. 이 기념사의 핵심을 이루는 단어는 내가 보기에는 국민 주권이다. 법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국민 주권이라는 단어는 이미 오래 전부터 우리 헌법의 첫머리에 기입되어 있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본다면,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선포한 헌법 조문은 오랫동안 유명무실한 조문으로 남아 있던 것이 사실이다. 국민이 주권자라는 것은 통치자를 선출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다는 의미로만 제한되어 있었던 반면,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은 국민의 대표자가 아니라 국민을 다스리는 통치자들로 인식되었으며 또 스스로 그렇게 처신해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촛불이 국민 주권의 시대를 열었고 국민이 대한민국의 주인임을 선언했다는 말은 국민이 단순히 피통치자에 머물지 않고 통치자를 통제하거나 적어도 실질적으로 감시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는, 그러한 시대가 되어야 한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아직 정권 초기이지만, 문재인 정부는 여러 측면에서 국민 주권의 시대를 열어놓는 정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이 충분한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국민 주권이라는 개념에 대해 좀 더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국민 주권이라는 말은 일종의 허구이기 때문이다. 주권의 주체로서 인민내지 국민과 같은 것은 실물로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며, 그것의 실물 내지 실체가 있다면 그것은 그 실천적 효과 속에서만 현존한다. 더욱이 국민은 동질적인 개인들의 집합이 아니며, 계급들로 분할되고 성과 젠더로 구별되고 지역출신학벌 등으로 나뉜다. 특히 우리가 정치공동체 안에 존재하고, 사회적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이상 국민은 지배자와 복종하는 자, 권력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몫을 가진 이들과 몫 없는 이들, 갑과 을로 분할된다. 따라서 주권자로서의 국민이라는 범주에는 갑의 위치에 있는 국민과 을의 위치에 있는 국민, 1퍼센트의 국민과 99퍼센트의 국민의 차이가 기입되어 있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을 감춘다. 이러한 은폐가 우연적인 사태이거나 단순한 이데올로기적 효과가 아니라, 보편적 평등을 표현하는 국민 주권 개념의 구조적 특성에서 기인한다는 점에서 이는 더욱 문제적이다. 더욱이 주권자로서의 국민은 다른 주권자 국민들과 맞서는 범주일 뿐만 아니라, 한국 내에 있는 국민 아닌 이들을 시민 아닌 이들, 따라서 한나 아렌트의 통찰에 따르면 (적어도 잠재적으로는) 인간 아닌 이들로 배제하는 개념이다.[한나 아렌트의 인권의 역설에 관해서는 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 1, 이진우박미애 옮김, 한길사, 2005 중 특히 9장을 참조. 이에 관한 평주로는 Etienne Balibar, “Arendt, le droit aux droits et la désobéissance civique”, in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PUF, 2010 및 진태원, 무정부주의적 시민성? 한나 아렌트, 자크 랑시에르, 에티엔 발리바르, 서강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편, 󰡔서강인문논총󰡕 37, 2013 참조.]


그렇다면, ‘국민 주권의 시대를 열겠다는 새 정권의 의지에 주목하고 그것에 힘을 실어주되, 그것에 내재적인 아포리아를 을의 민주주의라는 화두를 통해 살펴보는 것도 무익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국민 주권 개념만이 아니라 민주주의에 내재한 여러 쟁점들을 새롭게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줄 것이다.

 

II. 을을 위한, 을에 의한, 을의 민주주의

 

을의 민주주의는 간단히 말하면, 링컨 대통령의 말로 잘 알려져 있는 “for the people, by the people, of the people”, 국민(인민)을 위한, 국민(인민)에 의한, 국민(인민)라는 경구의 의미에 대한 재해석의 시도, 또는 그것을 새로운 방식으로 선언하려는 시도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이때 을의 민주주의는 우선 을을 위한 민주주의로 이해될 수 있다. 흔히 말하듯 우리 사회가(아울러 세계의 많은 지역과 국가들이) 신자유주의적으로 재편되면서 빈부격차가 심화되고 민족주의적 또는 국민주의적 배타성과 충돌이 강화되고 있으며, 사회 대부분의 사람들, 곧 우리가 을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사회적 안전 메커니즘의 약화와 해체 속에서 각자도생의 생존경쟁의 논리를 강요받으면서 불안정한 노동과 삶을 영위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사회 질서가 평등한 자유의 이념 위에서 시민들의 공동선을 추구하는 것을 존재 이유로 삼고 있는 민주주의 공동체의 원리와 충돌할 수밖에 없다는 점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보여준 바 있다.[지나치는 김에 몇 가지 문헌만 언급해둔다면, 리처드 세네트, 󰡔신자유주의와 인간성의 파괴󰡕, 조용 옮김, 문예출판사, 2002; 콜린 크라우치, 󰡔포스트민주주의󰡕, 이한 옮김, 미지북스, 2008; Pierre Dardot & Christian Laval, La Nouvelle raison du monde: Essai sur la société néolibérale, La Découverte, 2009; 피에르 다르도크리스티앙 라발, 󰡔새로운 세계 이성: 신자유주의 사회에 관한 시론󰡕, 오트르망 옮김, 그린비, (근간); 지그문트 바우만, 󰡔방황하는 개인들의 사회󰡕, 홍지수 옮김, 봄아필, 2013을 각각 참조.]


그렇다면 을의 민주주의란,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질서에 따라 세계와 사회가 재편되면서 생겨난 많은 을들을 보호하고 배려하기 위한 정책을 추구하는 민주주의라고 규정해볼 수 있다. 여기에서는 그들이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각자 존엄과 행복을 추구할 수 있고 시민으로서의 평등을 보장받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제도적인 대안이나 정책을 모색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된다. 가령 다양한 형태의 비정규직 노동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을 위한 정책, 최악의 실업난에 시달리는 청년들을 위한 실업대책, 결혼과 출산을 기피하는 젊은이들을 위한 주거, 육아, 복지 제도 확충, 질병과 가난의 이중고에 시달리는 빈곤 노인들을 위한 정책, 차별과 모욕, 배제에 시달리는 성적 소수자들, 여성들, 이주자들을 위한 인권 보호 정책 등이 을을 위한 정책의 사례들이 될 것이다. 우리 사회가 민주공화국의 이념에 걸맞은 사회가 되기 위해 이런 정책들은 실로 매우 중요하고 긴급한 시행을 요구하는 것들이다.


하지만 만약 을의 민주주의가 이것에 그치게 된다면, 그때 을의 민주주의는 을을 그냥 약소자의 처지, 피통치자, 피억압자의 처지에 놓아두게 되며, 따라서 (용어모순적이게도) 일종의 후견적인(paternalistic) 민주주의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알다시피, 약소자로 머물러 있는 약소자들을 위해 윗분들이 알아서 대안을 마련하고 정책을 집행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따라서 우리가 좀 더 근본적인 의미에서 을의 민주주의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그들을 위한 정치를 할 것인가를 묻는 데 그치지 않고, 여기서 더 나아가 을에 의한 민주주의, 민주주의는 어떤 것인지 질문해봐야 한다.


여기서 을에 의한 민주주의는, 정확히 말하면 을의 의지와 목소리가 잘 대표된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 민주주의는 대부분 대의 민주주의 체제로 운영되고 있고, 따라서 민주주의가 잘 작동하기 위해서는 국민(인민)의 의지를 잘 대표하고 그 목소리를 정책과 제도에 잘 구현할 수 있는 대표자들을 공정하게 선출하며 그들을 잘 감시, 통제하는 것이 중요하다.[대표의 문제에 관한 국내 학자들의 논의로는 홍철기, 「󰡔대표의 개념선거는 민주적인가: 정치적 대표와 대의 민주주의의 미래, 󰡔진보평론󰡕 61, 2014 및 이관후, 대의민주주의가 되었는가?: 용례의 기원과 함의, 󰡔한국정치연구󰡕 252, 2016, 한국 정치에서 대표의 위기와 대안의 모색: 정치철학적 탐색, 󰡔시민과 세계󰡕 28, 2016 등을 참조.] 반대로 현대 민주주의에 대한 많은 비판과 불만이 제기된다면, 이는 이러한 대표자들이 국민 전체, 특히 대다수 을의 의지와 이해관계를 대표하기보다는 권력자나 재벌을 비롯한 소수의 갑의 이해관계와 의지를 구현하고 집행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세계화 시대 국민국가는 세계시장의 압력에 항상적으로 노출됨으로써, 을의 이해관계와 의지가 입법 및 정책 과정에 반영되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따라서 어떻게 을에 의한 민주주의, 을의 목소리와 이해관계를 대표할 수 있는 민주주의를 실행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오늘날 더욱 더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더 나아가 민주주의’, 곧 약소자로서 을을 배려하고 보호하는 정책과 제도만이 아니라, 또한 을의 이해관계와 의지를 잘 대표할 수 있는 대표자들을 선출하고 통제하는 과정만이 아니라, 을들 자신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고 영향을 발휘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하고 모색하는 것이 을의 민주주의의 근본적인 관심사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좁은 의미의 을의 민주주의주체로서의 을들이 직접 참여하는 민주주의라고 정의하는 게 적절할지 모른다. 과연 그런 것인지 뒤에서 더 살펴보기로 하자.


아무튼 이렇게 되면 을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중요해진다. 을은 누구인가? 우리가 서두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다양한 형태의 비정규직 노동자들, 이주자들, 성적 소수자들, 여성들, 청소년들, 소규모 자영업자들, 교수의 각종 뒤치다꺼리를 감당해야 하는 대학원생들, 빈곤 노인들, 또는 모든 것이 서울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나라에서 늘 손해와 차별을 감수해야 하는 지방 도시 및 농어촌에 사는 사람들 등이 을인가?


만약 이들이 을이라면, 이들은 을을 위한 민주주의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민주주의의 주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이들이 각자 이해관계의 주체로서 압력 집단이 되어 각종 정책과 입법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한다면 이들을 을에 의한 민주주의의 행위자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역시 이들을 민주주의의 주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해관계의 주체로서의 을들은 항상 자신보다 더 강한 다른 갑들의 이해관계에 밀릴 수밖에 없고, 따라서 약소자로 남게 될 것이다. 더욱이 자신의 이해관계를 표현할 만한 길을 처음부터 차단당한, 이해관계의 주체로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수많은 을들, 그리하여 을이라는 개념을 통해서도 제대로 재현되거나 대표되지도 못하는 이들이 존재할 것이다. 이들이 이처럼 을로, 병으로, 정으로 남아 있는 한, 민주주의는 보편적인 민주주의, 모든 국민 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다수의 을을 배제한 배제의 민주주의로 남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을의 민주주의라는 화두는, 이해관계의 경쟁에서 밀려나고 차별받고 배제당하는 을들이 민주주의의 주체로 인정받고 구성되는 길은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정치적 대표의 과정을 포함하여 이러한 을들의 이해관계와 의지를 광범위하게 대표하고, 이들을 민주주의의 주체로 구성하고 주체화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III. ‘정치적 주체로서의 을: 몇 가지 개념적 비교

 

그러므로 다시 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다시 한 번 던져볼 필요가 있다. ‘이라는 말은, 얼핏 보기에는 자명한 대상을 지칭하는 것 같다. 앞서 말했듯이 재벌 가족의 횡포에 시달리는 직원들, 프랜차이즈 가맹점주들, 그 알바생들, 하청업체 직원들, 비정규직 노동자들, 성적 소수자들 등이 바로 을들 아닌가?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기에 이는 이론적 성찰의 소재로서의 을이지, 이론적 작업을 통해 개념화된 것으로서의 을은 아니다. ‘이라는 단어가 단순한 시사적 용어에서 이론적 개념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제기하고 그것에 대답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1. 을은 계급 개념인가 그렇다면 그것과 전통적인 계급 개념의 차이는 무엇인가?

 

을이 다양한 형태의 피지배 집단들을 가리킨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이것을 사회과학적 계급 개념과 어떻게 관련시킬 수 있을지는 매우 불분명해 보인다. ‘은 노동자 계급이 아니며, 빈민 계급도 아니고, 더욱이 중간 계급도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회적 실재성을 결여한 가공적인 용어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용어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로 인한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심화를 나타내는 여러 가지 표현들, ‘20 : 80’, ‘10 : 90’, 또는 ‘1 : 99’ 같은 표현들이 지칭하는 사회적 현실을 정확히 가리키는 기호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라는 용어는, 최근 촛불집회에서 주권의 주체로 호명되고 있는 국민(nation)이라는 개념이 담지 못하는 계급적 함의, 곧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사회경제적정치적 불평등 관계를 표현하는 용어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 자체로는 전통적인 계급 개념이 아니지만 다양한 형태의 계급적 불평등과 차별을 표현하는 을이라는 용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다른 식으로 질문해본다면, 을이라는 용어는 계급에 관한 전통적인 표상/재현(representation) 방식(리프리젠테이션에 관해서는 뒤에서 좀 더 논의하겠다)을 어떻게 해체하는가? 을이라는 용어 자체는, 계급적 불평등의 현실, 따라서 계급투쟁의 현실(이것의 완화된 표현이 갑질일 것이다)을 표현하되, 전통적인 계급 표상/재현 양식을 해체하는 가운데 그렇게 하는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을이라는 용어가 표현하는 것은 계급() 없는 계급투쟁의 현상, 적어도 우리가 갖고 있는 계급 표상/재현 양식으로 적절히 설명되지 않는 계급투쟁의 현상이 아닌가?

 

2. 을은 민중의 다른 이름인가?

 

이러한 질문은 바로 을과 민중의 관계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다양한 종류의 피억압자들을 지칭한다는 점에서 을은 한국 인문사회과학에서 오래 사용되어온 민중이라는 용어와 매우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또는 을은 민중이라는 개념의 시사적인 표현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우리가 보기에 을과 민중 사이에는 꽤 중요한 차이점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을이라는 용어는 (적어도 그 현행적 용법을 고려해볼 때) 민중이라는 개념과 달리 저항의 주체나 변혁의 주체로 제시되지 않는다. 오히려 을은 피해자, 피착취자, 피억압자, 피차별자 등과 같이 수동적으로 피해를 겪는 존재자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주로 쓰인다. 을이라는 용어가 사회적으로 널리 쓰임에도 불구하고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들이 이 용어에 별로 주목하지 않거나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을 터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을의 이러한 용법은, 민중이라는 개념에 담긴 가상적 측면 및 그 한계를 드러내주지 않는가? 우리가 보기에는 특히 두 가지 측면이 중요한 것 같다. 곧 한국 인문사회과학에서 표준화된 민중이라는 개념은 피억압자, 피착취자들 사이의 연대나 통일성을 선험적으로 전제하는 것 아닌가? 더 나아가 민중이라는 개념은 피억압자, 피착취자로서의 민중, 수동적 피해자로서의 민중과 능동적인 저항과 변혁의 주체로서의 민중 사이의 거리를 이상적으로 최소화하거나 제거해온 것은 아닌가?


반면 을이라는 용어는, 그 통일성이 문제적일 뿐만 아니라, 80년대 진보적인 인문사회과학이 이상화한 변혁의 주체로 자처하지도 않는 이질적이고 다양한, 또한 사회의 거대 다수를 형성하는 약소자들을 지칭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들은 스스로 자신들을 갑과 대립하는, 갑에게 착취당하고 모욕당하고 지배당하는 을이라고 부름으로써 자신들을 정치적 집합체로서 정체화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을이 반드시 진보적인 것은 아니다. 18년 간의 박정희 군사독재를 지지했던 것은 다수의 을이었고,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뒤 이명박, 박근혜 정권이 연속적으로 집권할 수 있게 해준 동력은 다름 아닌 박정희의 유령을 호명했던 을들의 욕망이었다.


아마도 을은 민중의 다른 이름이고, 을의 민주주의는 민중 민주주의의 다른 이름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의 민중은, 우리가 상상해온 민중보다 훨씬 더 이질적이고 다양한, 더욱이 훨씬 더 분할되고 갈등적인 집합체일 것이며, 을의 민주주의로서 민중 민주주의는 하나의 해답이라기보다는 훨씬 더 까다롭고 복잡한 문제에 대한 명칭일 것이다.

 

3. 을은 소수자(minority), 서발턴(subaltern), 프레카리아트(precariat) 등으로 표현될 수 있는가?

 

을과 민중의 이러한 차이점은 또 다른 질문을 낳는다. 2000년대 들어서 한국 인문사회과학에서 꽤 널리 쓰이는 용어들이 소수자, 서발턴, 프레카리아트 같은 용어들이다. 을은 이러한 이론적 용어들의 시사적인 표현인가?

하지만 우리가 보기에는 을이라는 용어는 이 용어들과도 꽤 의미 있는 차이점을 지닌 것 같다. 우선 프레카리아트라는 개념은 주지하다시피 노동자 계급을 지칭하는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라는 마르크스주의적 개념과 불안정한을 의미하는 ‘precarious’라는 용어를 결합하여, 현대 사회의 많은 노동자들이 다양한 형태의 불안정 노동(임시직, 기간제, 파견, 외주 등) 업무에 종사하면서 불안정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점을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용어다.[가이 스탠딩, 󰡔프레카리아트: 새로운 위험한 계급󰡕, 김태호 옮김, 박종철출판사, 2014 및 이광일, 신자유주의 지구화 시대, 프레카리아트의 형성가 해방의 정치, 󰡔마르크스주의 연구󰡕 10, 3, 2013 참조.]이라고 지칭되는 많은 부류의 사람들이 이러한 불안정 노동에 종사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을과 프레카리아트는 서로 겹치는 점이 많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을이라는 용어는, 주로 노동 관계의 특성을 지칭하는 프레카리아트라는 개념에 비해 이러한 불안정 노동자들은 동시에 모욕당하고 차별당하고 때로는 혐오의 대상이 된다는 특성, 곧 사회적 인정 관계 내지 상징적 위계 관계에서 종속적인 위치에 속해 있다는 특성도 지닌다는 점을 표현해주는 것으로 보인다.


을이라는 용어는 인문사회과학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소수자라는 용어와도 일정한 차이점을 지니고 있다. 사실 영어의 마이너리티(minority)나 불어의 미노리테(minorité)라는 용어에 비하면 우리말의 소수자라는 용어는 의미 범위가 상당히 제한적인 편이다. 영어나 불어에서 이 용어들은 우리말로 미성년이라는 말을 포함하고 있으며, 또한 약소자라는 뜻도 담고 있다. 칸트가 유명한 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1784)의 서두에서 계몽이라는 개념을 정의할 때 등장하는 것이 바로 미성숙으로서의 미성년이라는 의미이며,[계몽이란 우리가 마땅히 스스로 책임져야 할 미성년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미성년 상태란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는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수 없는 무능력이다.” 이한구 옮김, 󰡔칸트의 역사철학󰡕, 서광사, 1992, 13(강조는 칸트). 독일어 원문은 다음과 같다. “Aufklärung ist der Ausgang des Menschen aus seiner selbstverschuldeten Unmündigkeit. Unmündigkeit ist das Unvermögen, sich seines Verstandes ohne Leitung eines anderen zu bedienen.”] 이것은 영어나 불어로는 minority 또는 minorité로 번역된다. 또한 마이너리티나 미노리테는 약소자라는 뜻도 담고 있는데,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가 해방’(émancipation)을 정의하면서 이를 미노리테에서 탈출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때 염두에 둔 것이 이러한 다층적인 의미이다.

 

해방이란 소수파/약소자/미성년(minorité)에서 탈출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누구도 자기 스스로의 힘을 통하지 않고서는 사회적 소수파/약소자/미성년에서 탈출할 수 없다. 노동자들을 해방하는 것은 노동을 새로운 사회의 정초 원리로 보이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을 소수파/약소자/미성년의 상태에서 탈출하도록 만드는 것이자, 그들이 정말 사회에 속해 있음을 증명하고, 그들이 정말 공통 공간 속에서 모두와 소통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 도래할 사회를 지배할 대항 권력을 정초하는 것보다는 능력을 증명하는 것그것은 또한 공동체를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이 중요하다. 스스로 해방된다는 것은 이탈을 감행하는 것이 아니라, 공통 세계를 함께 나누는 자로서 자신을 긍정하는 것, 비록 겉모습은 다르지만 우리가 상대와 같은 게임을 할 수 있음을 전제하는 것이다.[자크 랑시에르,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양창렬 옮김, 도서출판 길, 2014(수정 재판), 92~93. 번역은 다소 수정했다. 특히 번역문에서는 minorité소수파로만 번역했지만, 우리가 보기에 저 단어에는 약소자미성년이라는 뜻이 포함되어야 한다.]

 

이렇게 확장된 의미로 이해된 마이너리티 또는 미노리테는 소수자라는 용어가 담을 수 없는 여러 가지 쟁점을 표현해준다(가령 최근 화제가 된 선거 연령의 문제가 그렇다).


그렇다고 해도 이라는 용어는 마이너리티나 미노리테로 환원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라는 용어는 마이너리티나 미노리테라는 용어에 비해, 소수자나 약소자는 수적으로 소수가 아니라 사실은 압도적 다수라는 것(‘1:99’에서 ‘99’라는 숫자가 표현하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는 사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산출하는 주요 현상 중 하나는 소수자들/약소자들의 다수화 현상이라는 점을 드러내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함의를 지닌다. 곧 신자유주의적 사회화는 노동자 계급 조직을 비롯한 사회적 연대 조직을 약화시키거나 해체하고 더 나아가 개인들이 속해 있는 소속 관계를 불안정화함으로써(비정규직화, 조기 정년, 프리랜서, 자영업 등이 그 한 사례일 것이다) 대다수 개인들을 단자화(單子化)하고 불안정한 존재자들로 만든다. ‘은 수적으로는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고 있지만, 사실 자신들의 독자적인 조직과 네트워크로 연결되지 못한 단자적이고 불안정한 소수자들/약소자들이다.[지그문트 바우만, 󰡔방황하는 개인들의 사회󰡕, 앞의 책; Robert Castel, La montée des incertitudes: Travail, protections, statut de l'individu, Seuil, 2009; 에티엔 발리바르, 보편들, 󰡔대중들의 공포󰡕, 서관모최원 옮김, 도서출판 b, 2007을 각각 참조.]


이런 시각에서 보면 이라는 용어는 서발턴(subaltern)이라는 개념과 매우 비슷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이탈리아의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였던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가 고안해낸 이래 인도 서발턴 역사학 연구자들 및 가야트리 스피박(Gayatri Spivak) 같은 문예이론가들이 발전시킨 서발턴이라는 개념은, 한편으로 지배 엘리트 집단과 대비되는 대다수의 피지배 집단을 가리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스스로 자신을 표현하거나 주체화하지 못하는 정치적 무능력을 표현하기 때문이다.[라나지트 구하, 󰡔서발턴과 봉기󰡕, 김택현 옮김, 박종철출판사, 2008; 가야트리 스피박,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 로절린드 모리스 엮음, 태혜숙 옮김,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 그린비, 2013; 존 베벌리, 혼종이냐 이분법이냐? 하위주체와 문화연구에서 다루는 민중의 범주에 관하여, 󰡔하위주체성과 재현: 라틴아메리카 문화이론 논쟁󰡕, 박정원 옮김, 그린비, 2013을 각각 참조.]


하지만 을이라는 용어는 서발턴 개념과도 일정한 차이를 지니고 있다. 인도 역사학자들과 가야트리 스피박이 이론화한 서발턴 개념은 두 가지 난점을 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 이 개념은 일정한 역사적 시기의 흔적을 깊이 포함하고 있다. 곧 이 개념은 국민 대다수가 문맹자 농민이었던 식민지 시기 또는 포스트 식민 초기 시기의 인도 상황(대략 1960년대까지의 시기)을 표현하고 있다. 반면 그 이후 인도는 급속한 산업화 과정 및 사회적 분화 과정을 겪었으며, 원래 서발턴 개념의 주요 지시체였던 문맹자 농민들은 더 이상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지 않게 되었다. 이에 따라 서발턴 역사학자들 중 일부는 피통치자’(governed)라는 푸코적인 개념으로 서발턴 개념이 지닌 역사적 한계를 극복하려고 시도하고 있다.[Partha Chatterjee, The Politics of the Governed: Reflections on Popular Politics in Most of the World, Columbia University Press, 2004.] 둘째, 서발턴 개념은 지배 엘리트와 대비되는 피지배 집단, 특히 자신을 표현하거나 주체화할 수 없는 집단들의 일반적 상황에 초점을 맞춘 개념으로, 피지배 집단 내의 이질성과 차이, 따라서 갈등적 상황을 표현하는 데 난점을 지니고 있다.


반면 을이라는 용어는 서발턴이라는 용어가 지닌 이러한 난점들을 반드시 수반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을이라는 용어 자체는 을과 병, ... 과 같은 내재적 분할과 또 다른 위계 관계를 그 자체 안에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을이라는 용어는 본질적으로 복수적이며 내적으로 분할된 용어라고 할 수 있다. 탄핵 정국에서 촛불집회와 대결하는 또 하나의 대중 집회로 주목을 받은 이른바 태극기집회야말로 을의 이러한 복수성과 내적 분할을 잘 드러내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을이라는 범주, ‘몫 없는 이들이라는 개념에 제대로 포함되지도 않는 존재자들을 떠올려 볼 수 있다. 올 겨울 AI 파동으로 인해, 또 몇 해 전에는 구제역 파동으로 인해, 살아 있는 채로 매몰되거나 살처분당한 수천 만 가축들이야말로, 가장 대표적인 을이면서 역설적으로 을이라는 범주에 포섭되지 못하고 그 지위를 인정받지도 못하는, 따라서 그야말로 역설적인 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자들이 아닌가? 어떤 사람들은 자연 환경, 생태계 자체 역시 이러한 역설적인 을에 포함시킬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또 다른 AI, 곧 인공 지능과 로봇의 문제에도 역설적인 을의 문제가 함축되어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4. 을은 다중인가?

 

현대 인문사회과학에서 정치적 주체를 표현하기 위해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또 다른 용어로 다중(multitude)이라는 개념을 들 수 있다. 이탈리아의 철학자인 안토니오 네그리와 그의 미국인 제자인 마이클 하트의 공동 저작인 󰡔제국󰡕, 󰡔다중󰡕, 󰡔공통체󰡕[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제국󰡕, 윤수종 옮김, 이학사, 2001; 󰡔다중󰡕, 서창현 외 옮김, 세종서적, 2008; 󰡔공통체󰡕, 윤영광정남영 옮김, 사월의책, 2014.]를 통해 국내에도 잘 알려져 있는 이 용어는, 그 저자들에 따르면 근대 서양정치철학에서 정치적 주체를 지칭해온 몇 가지 주요 개념들과 차이를 지닌 개념이다. 이들에 따르면 우선 다중은, 주권 개념과 한 쌍을 이루며, 통일성과 환원을 특징으로 하는 인민’(people) 개념남한의 헌법이나 정치적 원리에서는 국민개념에 해당하는과 구별된다.

 

인민은 하나(일자)이다. 물론 인구는 수없이 다양한 개인들과 계급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인민은 이 사회적 차이들을 하나의 정체성으로 종합하고 환원한다. 이와 달리 다중은 통일되어 있지 않으며 복수적이고 다양한 상태로 남아 있다. 정치철학의 지배적 전통에 따르면, 이것이 바로 인민이 주권적 권위로서 지배할 수 있고 다중이 그럴 수 없는 이유이다. 다중은 독특성들의 집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여기서 독특성은 그 차이가 동일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사회적 주체, 차이로 남아 있는 차이를 뜻한다.[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다중󰡕, 135.]

 

또한 다중은 대중’(mass) 개념과도 차이를 지니는데, 이는 대중 개념이 근본적으로 수동적이고 지도를 받아야 하는, 지리멸렬하고 공통성이 없는 개인들의 집합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이들에 따르면 대중은 다른 측면이며, 동질적이고 분산된 개인들의 집합으로 해체된 인민을 가리킨다.


더 나아가 다중은 마르크스주의에서 말하는 노동자 계급과도 구별되는 개념이다. 노동자 계급이 주로 산업 노동자 집단이나 생산적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명칭인데 반해, 이들에 따르면, 다중은 프롤레타리아 개념에 그 가장 풍부한 규정, 즉 자본의 지배 아래에서 노동하고 생산하는 모든 사람들이라는 규정을 부여”[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같은 책, 143.]하는 개념이다. 특히 이들은 종래의 물질노동과 구별되는 비물질노동, 서비스, 문화 상품, 지식, 또는 소통과 같은 비물질적 재화를 생산하는 노동[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제국󰡕, 382.]이 포스트모던 자본주의에서 종래의 물질노동에 대하여 질적 헤게모니를 차지하게 되면서, 좁은 의미의 산업노동자 계급을 넘어서는 새로운 계급 주체, 실로 공산주의의 주체로서의 다중이 등장할 수 있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본다면 다중은 을이라는 용어와 상당히 가까운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을은 정치 공동체의 성원 전체 및 그 통일성을 가리키는 인민(또는 국민)과 동일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내부의 이질성과 다양성을 표현한다. 또한 을은 당연히 넓은 의미의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일 것이며, 그 중 상당수는 네그리와 하트가 비물질노동이라고 부르는 종류의 노동을 수행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을이라는 용어와 다중 개념의 중요한 차이점은, 앞에서도 지적했던 것처럼 을이라는 용어가 이질성과 다양성을 넘어서 갈등성을 자신의 본질적 요소로 포함하는 데 반해 네그리와 하트가 이론화한 다중 개념에서는 이러한 내적 갈등과 분할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이다. 실로 다중 개념은 근본적으로 목적론적인 개념이며, 따라서 현대 철학에서 사용되는 주체화의 문제를 사고하기 어렵게 만드는(불가능하게 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개념이다.


네그리와 하트는 󰡔제국󰡕에 대한 비평가들에 대해 답변하는 대목에서 다중 개념이 함축하는 두 개의 시간성을 구별한다. 하나는 영원성으로서의 다중으로, 이러한 다중은 그것이 없이는 우리의 사회적 존재를 생각할 수 없[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다중󰡕, 272.]는 다중, 곧 사회의 존재론적 토대로서의 다중이다. 이러한 다중은 강한 의미의 정치적 주체로서의 다중, 곧 사회를 형성하고 유지하고 이끌어가는 다중, 따라서 자율적인 사회적정치적 역량을 지닌 주체로서의 다중이다. 다른 하나는 역사적 다중, 아니 정확히 말해서 아직 아닌다중이다. 이러한 다중은 첫 번째 영원성의 다중에 걸맞은 다중으로 아직 구성되지 않은 다중, 따라서 정치적으로 구성되고 형성되어야 하는 다중을 가리킨다. 문제는 두 가지 시간성에 따라 구별되는 다중은, 내적 갈등과 분할의 문제에서 비껴나 있는 다중이라는 점이다. 두 번째 다중은 항상 이미 첫 번째 다중에 의해 규정되어 있는 다중, 곧 목적론적 발전 경향 속에서 포착된 다중이다. 이 때문에 이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두 유형의 다중은 개념적으로 구별될 수 있을지언정, 실제로는 분리될 수 없다. 다중이 이미 우리의 사회적 존재 속에 잠재되어 있지 않고 내재되어 있지 않다면, 우리는 다중을 하나의 정치적 기획으로 상상할 수조차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우리가 오늘날 다중을 실현하기를 바랄 수 있는 것은 다중이 이미 하나의 실재적인 잠재력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같은 책, 같은 곳.]

 

이런 질문을 던져보자. 태극기 집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다중인가 아닌가? 탄핵 정국의 와중에서 탄핵에 집요하게 반대하고, 헌법재판소에서 탄핵 결정이 내려진 이후에도 여전히 탄핵에 불복하면서 계엄령을 내려달라고 호소하는 이들은 다중인가 아닌가? 또한 2012년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에게 투표를 했던 51%의 유권자들은 다중인가 아닌가? 만약 이들이 다중이라면, 보수적이거나 심지어 반동적인 정치 세력도 다중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인가?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해방의 주체로서의 다중이 이미 하나의 실제적인 잠재력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만약 이들이 다중이 아니라면, 아마도 수구 보수 세력을 지지하지 않고 적어도 자유주의적인 세력 이상을 지지하는 사람들만이 다중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네그리와 하트가 말하는 공산주의의 주체로서,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를 계승하는 해방의 주체로서의 다중에 걸맞은 개인들과 집단을 추출하려면 그 지표는 훨씬 더 엄정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가령 2012년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를 지지한 48%의 사람들 전체가 다중은 아닐 것이며, 아마도 그중의 일부, 구 통합진보당이나 오늘날의 소수 진보정당, 곧 정의당이나 노동당 또는 녹색당을 지지하는 사람들만이 진정한 의미의 다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대다수는 다중이 아닐 터인데, 어떻게 다중을 사회의 존재론적 토대라고 할 수 있을까?


따라서 다중이 사회의 존재론적 토대로 간주될 수 있으려면 다중은 필연적으로 다수의 보수적인 또는 더 나아가 수구반동적인 세력을 포함해야 한다. 반대로 다중이 이미 하나의 실제적인 잠재력으로 존재하는해방의 정치적 주체로 존재하려면, 다중은 상당히 축소된 범위의 개인들 및 집단들로 한정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사회의 존재론적 토대로 간주될 수 없다. 내가 보기에, 네그리와 하트가 가능한 한 최대로 다중의 외연을 확장하면서도 이들을 해방의 주체, 공산주의의 주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목적론적 추론의 가상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목적론적 추론의 가상은 정치적 분석이 분석하고 설명해야 할 대상 자체를 말소시켜 버린다. 그것은 곧 갑과 을의 대립을 넘어서 을들 내부의 이질성과 다양성, 그리고 갈등성이라는 문제이며, 랑시에르, 에르네스토 라클라우, 에티엔 발리바르 및 여러 현대의 정치 이론가들이 푸코에서 유래하는 주체화(subjectivation)라는 개념을 갖고 씨름하는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현대 정치철학에서 주체화의 문제에 대해서는 진태원, 정치적 주체화란 무엇인가? 푸코, 랑시에르, 발리바르, 󰡔진보평론󰡕 2015년 봄호 참조.]

 

 

IV. 아포리아로서의 을의 민주주의

 

만약 을이라는 용어가 현대 인문사회과학의 주요 개념들과 이러한 차별성을 지니고 있다면, 을을 주체로 하는 민주주의란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은 지금까지의 민주주의와 어떤 차이점을 지니는가라는 질문들이 제기될 수 있다.


나는 우선 을의 민주주의가 매우 아포리아적인 개념이라는 점을 지적해두고 싶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을의 민주주의는 민주주의 자체가 매우 아포리아적이라는 점을 드러내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아포리아(aporia)는 알다시피 아(ἀ) + 포로스(πόρος), 길이 없음’, 따라서 더 이상 진전이 불가능한 논리적 궁지를 가리키는 고대 그리스 철학의 개념이었다. 이 개념을 현대 철학의 주요 개념으로 만든 이는 다름 아닌 자크 데리다였으며, 그를 준거로 삼아 현대 정치철학의 쟁점들을 숙고하기 위한 유사초월론적 토대로 아포리아 개념을 활용한 이는 에티엔 발리바르였다.[발리바르가 아포리아의 문제를 진지하게 검토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초 스피노자에 관한 연구를 통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에티엔 발리바르, 󰡔스피노자와 정치󰡕, 진태원 옮김, 그린비, 2014 참조. 그 이후 역사적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탈구축, 관국민적 시민성 개념에 대한 모색, 극단적 폭력과 시민다움을 중심으로 한 폭력론에 관한 연구, 시민주체 및 공산주의에 관한 탐구에서 늘 아포리아는 발리바르 사유의 유사초월론적, 방법론적 지침으로 작용하고 있다.] 고대 그리스 철학의 용법과 달리 이들의 성찰에서 아포리아는 단순히 부정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기존의 개념들과 이론, 실천의 한계를 나타내기 위한, 따라서 그것을 돌파하기 위한 극한의 노력을 표현하는 개념이었다. 물론 이러한 돌파의 노력이 아무런 성공의 보장이 없는 모험적인 기획이라는 점이 중요한데, 왜냐하면 아포리아는 철학적으로는 우리의 합리성 자체, 정치적으로는 정치공동체 자체가 토대가 없는 것임을 긍정하는 데서 시작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랑시에르의 정치철학은 한편으로 본다면 아포리아에 기반을 둔 작업이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그 아포리아를 봉쇄한다. 그의 데리다 비판은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랑시에르의 데리다 비판에 대한 검토는, 진태원, 대체보충, 자기면역, 아포리아: 자크 랑시에르와 자크 데리다의 민주주의론(미간행 원고) 참조.] 을의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아포리아적인 성격에 근거하고 있으며, 이를 뚜렷하게 부각시켜 준다.

 

1. 을을 잘 대표하는 것으로서의 을의 민주주의

 

을의 민주주의에 관하여 일차적으로 을을 잘 대표하는 민주주의라고 정의해볼 수 있다. 그리고 다시 을을 잘 대표하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제도적 함의를 제시해볼 수 있다. 가령 최근 많은 논의의 대상이 되는 경제 민주화를 생각해볼 수 있다. ‘경제 민주화라는 표제 아래 우리 사회 극소수 파워 엘리트 집단을 대표하는 재벌 체제를 해체하고, 그 대신 사회의 대다수를 이루는 을의 경제적 이해관계 및 지위를 강화하는 여러 가지 법적제도적 대안들을 고려해볼 수 있다. 여기에는 재벌 지배구조를 개혁하고 소수 주주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에서부터 산업적 시민권을 강화하는 방안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제안이 포함될 수 있다.


또한 정치적 대표의 틀 자체를 개혁하는 방안도 생각해볼 수 있다. 보수 양당 체제가 독점해온 정치적 대표의 틀을 해체하고 다수의 진보 정당의 원내 진출을 통해 을의 정치적 이해관계와 지위를 보장할 수 있는 방안은 을의 민주주의의 주요 내용을 구성할 것임에 틀림없다. 흔히 지적되는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비롯하여 선거 연령 인하, 결선투표제 도입, 지방 자치제도의 정비 등이 이러한 대안에 포함될 것이다.


아울러 포괄적인 의미에서 사회적 민주화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의 법적제도적 방안도 모색해볼 수 있다. 우리가 사회적 민주화라고 부르는 것은, 사회경제적 구조나 정치적법적 제도를 통해 완전히 포괄되지 않는, 하지만 대다수의 을들이 삶 속에서 겪는 억압과 차별, 착취 등을 개혁하는 과정을 지칭한다. 가령 여성이나 비정규직 노동자, 장애인, 성적 소수자, 청소년 등에 대한 차별과 억압, 착취를 법적으로 금지하고 그들을 보호하거나 그들의 피해를 지원하는 방안을 마련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들을 보호하거나 지원하는 일을 넘어, 그들을 예외적이거나 비정상적인 존재자들, 피해자들이 아니라 정상적인 주체들, 민주주의의 중심적인 구성원들로 재현하는/대표하는(represent), 그리고 구성하는 것은 더욱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대표하기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로 제기된다.

 

2. 을을 대표한다/재현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촛불 집회 이후 직접 민주주의 내지 참여 민주주의가 언론 및 학계의 중요한 화두로 떠올랐다. 헌정사에서 유례가 없는 현직 대통령 탄핵을 성취하고 새로운 정권을 출현시키는 데 촛불 집회의 힘이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만큼 이는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직접 민주주의나 참여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논객들이 대개 이를 대의 민주주의와의 대립의 관점에서 거론한다는 점이다. 곧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대의 민주주의 대신 참여 민주주의를 추구해야 하며, 설령 대의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하더라도 그것을 될 수 있는 한 최소화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자주 제기된다. 그런데 이것은 매우 조야한 주장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흔히 말하듯 현대 국가처럼 복잡하고 다원적인 정치 조직을 국민들의 직접적인 참여로 통치하거나 운영한다는 것은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며 더욱이 효율적이지 못하다는 반론을 예상해볼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더 중요한 것은 대표의 문제를 그 자체로 살펴보는 일이다. 참여 민주주의 내지 직접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 뒤에 존재하는 것은 두 가지 생각이다. 첫째, 현재 한국의 정치 체제의 성격상 대표자들은 국민, 특히 을로서의 국민의 의지나 목소리를 대표하기보다는 자신들이 속한 정당이나 권력 질서의 이해관계에 충실한 이들이며, 이들 자신이 갑으로서의 통치자 내지 지배자에 불과하다는 생각이다. 둘째, 따라서 갑으로서의 대표자들에게 정치 권력을 부여하는 대의 민주주의보다 을로서의 국민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우리가 앞에서 간략하게 제시했던 좁은 의미의 을의 민주주의’, 곧 을들 자신이 정치적 주체로서 직접 참여하는 민주주의라는 관념과도 부합하는 일이 아닌가?


이런 생각은 대표(또는 재현)의 과정 이전에 이미 정치적 주체로서의 국민, 더 나아가 을들이 현존해 있다는 관념을 전제한다. 그런데 과연 국민 내지 인민은 대표/재현의 과정에 앞서 미리 현존해 있는가? 가령 프랑스의 예를 들어보자. 프랑스혁명 및 더 나아가 근대 민주주의 헌정의 이념적 기초를 제공한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1789)이것은 프랑스 헌법의 전문(前文)으로 사용된다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제헌헌법에서는 재산의 유무(일정한 납세액)에 따라 능동시민과 수동시민을 구별했으며, 전자에 해당되는 25세 이상의 성인 남성들에게만 선거권을 부여했으며, 피선거권은 더 많은 세금을 납부하는 사람들에게만 부여했다. 1848년 이후에야 성인 남성들은 보편적 선거권을 얻게 되었다. 또한 여성의 경우는 20세기에 들어서야 비로소 참정권을 얻게 되었으며, 미국에서 흑인들이 어떤 험난한 과정을 거쳐 정치적 권리를 얻게 되었는가 하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더욱이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만 19세 이하의 젊은이들은 정치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존재들이다. 이주 노동자들과 같이 우리나라 국적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는 대표/재현의 과정 이전에는 정치적 주체란 존재하지 않음을 잘 보여준다. 더욱이 주권자로서 또는 정치적 주체로서의 국민 내지 인민은 처음부터 동일하게 존재해온 이들이 아니라 대표/재현의 과정에 따라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변형되거나 확장되어 온 것이라는 점 역시 분명하다.


따라서 미국의 한 연구자가 적절하게 말한 바 있듯이 대표의 반대말은 참여가 아니라 배제”[David Plotke,“Representation is Democracy”, Constellations, vol. 4, no. 1, 1997. 강조는 인용자.]라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적절한 대표의 제도나 실천이 없다면 정치적 주체들이 존재할 수 없으며, 사회적 약자들인 을들과 을의 을들은 대표가 없다면 정치적으로 존재하지 않게 되거나 아니면 자신의 목소리를 들리게 하게 위해 늘 목숨을 건 필사적인 싸움을 전개하는 수밖에 없다. 더욱이 참여 민주주의와 대의 민주주의를 단순히 대립시키는 것은, 기존에 존재하는 대의 제도의 모순과 문제점을 그대로 용인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대표제란 본성상 과두제적인 메커니즘이며, 대표자들은 원래 유권자나 국민의 의사를 표현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관철하기 마련이라면, 그것을 애써 개선하거나 개혁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을의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참여와 대표를 대립시킬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참여를 위해 더 잘 대표할 수 있는 제도와 실천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사실 우리가 대표하기내지 대의하기라고 부르는 개념, 곧 영어로는 리프리젠트(represent) 내지 리프리젠테이션(representation)이라는 용어들로 표현되는 개념은 꽤 복잡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용어는 다음과 같은 기본적인 의미를 지닌다.


1) 재현하기: 리프리젠테이션의 기본적인 의미는 표상내지 재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표상으로서의 재현(再現), 인식하는 주관 바깥에 이미 그 자체로 성립해 있는 또는 현존하는 어떤 사물이나 대상을 가능한 한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다시-제시함(re-presentation)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의 재현은 첫째, 재현 과정에 앞서 미리 그 자체로 성립해 있는 사물이나 대상의 현존을 전제하며, 둘째, 재현 작용 자체는 이러한 사물이나 대상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잘 묘사하거나 제시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는 것을 전제한다.


2) 대표하기: 이것의 정치적 표현이 대표라고 할 수 있다. 인식론적 의미의 재현과 마찬가지로 현대 민주주의의 핵심적인 활동으로서 대표는, 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표자들이 자신을 선출해준 피대표자들, 곧 주로 유권자들의 목소리나 욕망, 이해관계를 잘 대변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따라서 정치적 활동으로서의 대표역시 재현과 마찬가지로, 대표 과정에 앞서 이미 그 자체로 성립해 있는 피대표자들 내지 유권자들이라는 사물 내지 대상의 현존을 전제하며, 이러한 사물 내지 대상을 가능한 한 정확하게 다시-제시하는 것, 그들의 이해관계, 욕망,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다시-들려주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3) -현하기: 그런데 포스트 담론의 주요한 이론적 기여는, 재현에 관한 통상적 생각과 달리 재현 과정과 독립해서 이미 성립해 있는 사물 그 자체는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재현 과정이란, 리프리젠테이션(representation)이라는 말의 원래 뜻과 달리 이미 존재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나 대상 자체를 구성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따라서 이런 의미의 재현은 오히려 -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이때의 재-현은, 재현 과정을 통해 기존에 존재하는 사회적 범주들이나 대상을 변형하고 재구성하는 과정, 이를 통해 이전까지 드러나지 않고 들리지 않았던 것을 드러나게 하고 보이게 만드는 변형적인 현시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랑시에르는 󰡔불화󰡕에서 이처럼 (‘치안체제 안에서)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고 들리게 만드는 것을 정치라는 개념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로 규정한 바 있다. 그렇다면 민주주의적 대표/재현은, 유권자들의 이해관계나 욕망,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전달한다, 대표한다는 소극적인 목표(때로는 기만적이기까지 한)에 만족할 수 없으며, 그러한 대표/재현은 적극적인 변형적 현시로서의 재-현 작용까지 포함해야 할 것이다.

 

3. ()주권적 ()주체로서의 을?

 

하지만 우리가 화두로 제안하는 을의 민주주의는 이러한 재-현의 차원에 머무를 수는 없다. 이러한 재-현 과정 자체는 주체의 문제를 그냥 방치해두기 때문이다. 우리가 재현을 단순한 다시-제시하기로 이해하지 않고 -으로 이해하게 되면, 주체의 문제, 특히 정치적 주체의 문제가 첨예하게 제기된다. 그런데 만약 현대 사회 체제의 성격상 부재하지만, 정의상 존재해야 하고 또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된 주권적인 주체가 사실은 허구적인 개념에 불과하다면, 주권자로서의 국민 같은 것은 현존하지 않는다면 또는 항상 부재하는 원인으로서만 현존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사실 현대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인민 주권 내지 국민 주권 개념은 두 가지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 그것은 권력의 정당성의 궁극적 기초 역할을 수행한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은, 국민 내지 인민이라는 주권자의 허락이나 승인 없이는 어떠한 정치권력도 성립하거나 유지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둘째, 하지만 역으로 이러한 정당성의 궁극적 기초로서의 국민은 항상 부재하는 이상, ‘국민은 기존 권력 또는 그러한 권력을 산출하고 재생산하는 체제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적 근거로 활용되기도 한다. 때때로 일정한 사건들을 통해 이러한 유령 같은 주권자가 출몰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홀연히 나타났다가 다시 어느덧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주권자로서의 인민 내지 국민인 이상 그것은 늘 자신의 대리자를 정당화하는 역할(‘연기’) 이상을 수행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주권의 주체는 국민을 넘어서 인민으로 또는 민중으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요컨대 국민 주권이 아니라 인민 주권 내지 민중 주권을 실현하는 것이 진정한 민주주의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며, 을의 민주주의란 을을 주권의 주체로서의 인민 내지 민중으로 세우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런데 최근 몇몇 철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제기하는 바와 같이, 여기에서 인민내지 민중이라는 개념이 포함하는 내적 분할의 문제가 생겨난다. 영어의 피플(people)이나 불어의 푀플(peuple) 또는 스페인어의 푸에블로(pueblo) 같은 단어들은 공통적으로 두 가지 대조적인 의미를 지닌다. 곧 이 용어들은 한편으로 어떤 국가 내지 정치체의 합법적 성원이라는 의미, 따라서 우리말의 국민에 더 가까운 의미를 가리킨다(라틴어로는 포풀루스(populus)라는 개념에 해당하는 것).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용어들은 라틴어의 플레브스(plebs)라는 말이 역사적으로 뜻했던 것처럼 몫 없는 이들로서의 을을 지칭하기도 한다. 이런 후자의 의미에서 본다면 피플, 푀플, 푸에블로는 공동체의 합법적인 성원이면서 또한 그 안에서 착취당하고 모욕당하고 차별받는 이들을 의미하는 것이다.[진태원, 몫 없는 이들의 몫: 을의 민주주의를 위하여, 󰡔황해문화󰡕 2015년 겨울호 참조.]


따라서 인민 내지 민중이 주권자가 되는 민주주의는 아마도 피플, 푀플, 푸에블로가 지니는 이러한 내적 차이와 위계 관계를 해체하거나 제거하는, 또는 적어도 줄이거나 최소화하려는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러한 내적 차이와 위계 관계를 해체하거나 축소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가령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 있을 것이다. 을의 민주주의가 국민 주권을 인민 주권이나 민중 주권으로 대체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현행 헌법에서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표현되어 있는 것을 새로운 헌법에서는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민중으로부터 나온다.”로 바꿀 수 있을까? 요컨대 인민 내지 민중으로서의 을은 헌법 속에 권력의 주체, 주권의 주체로서 명기될 수 있을까? 만약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인민 내지 민중으로서의 을은 계속해서 더 나은 대표/재현의 대상으로 머물러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을들이 (법적) 주권의 주체로 존재하지 않지만 정치의 주체가 될 수 있는 또 다른 길을 모색해볼 때가 된 것인가? 가령 대의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법적 틀인 의회제 대표와 독립적인 또 다른 대표의 체계를 조직할 수 있으며, 또한 조직해야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이것의 헌법 상의 지위는 어떤 것인가? 아니면 이것은 헌법 밖의 체계이자 조직으로 남아야 하는가?


더 나아가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도 있다. 만약 이 주권자가 사실은 주권자로 존재하기를 원하지 않거나 그것을 두려워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실제로 우리가 촛불 정국에서 대선 정국으로 이행하면서 관찰했고, 또한 새로운 정권이 들어선 이후 관찰하고 있는 것은, 몇 달 동안 촛불집회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계속 운동을 지속할 수 없으며 또 그럴 의사도 없다는 점이다. 이들은 이제 자신들을 대신해서 정치를 수행할 대표자를 뽑고 싶어 하며, 자신들은 정치의 장에서 물러나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그리고 사실 또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스스로 통치할 수 있는 역량의 부재 때문이든 아니면 스스로 통치자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든, 또 아니면 민주주의 정치가 지닌 무정부주의적 본성(랑시에르가 말하듯 아르케 없음’(an-arkhe)이라는 존재론적 의미에서) 때문이든, 주체가 주체되기를 거부한다면, 그때 민주주의는, 특히 을의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우리가 보기에 이러한 질문들은 이라는 주체가 지닌 본질적인 특성들로 인해 불가피하게 생겨나는 질문들이며, 바로 이점이 을의 민주주의를 민중 민주주의나 인민 민주주의와 다른 것으로 만든다. 민중 민주주의나 인민 민주주의라는 이름 아래에서는 불가능한 또는 제기되지 않고 제기하려고 하지도 않는 질문들, 아마도 민주주의의 본성과 한계에 대한 핵심 질문들을, ‘을의 민주주의는 열어놓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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