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강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에서 내는 [서강인문논총]에 실릴 글 한 편을 올립니다. 


이 글은 지난 5월 '68혁명과 프랑스철학'이라는 주제로 개최된 프랑스철학회에서 발표했던 글을 


수정하고 보완한 것인데, 논문 심사과정에서 심사위원들이 제기한 비평과 질문에 답변하느라 


글이 원래 발표문의 2배 가량으로 늘어나버렸습니다. 


이 글은 아직 교정이 다 끝나지 않은 글이므로, 혹시 토론이나 인용을 원하는 분들은 


[서강인문논총]에 수록된 판본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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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알튀세르와 68: 혁명의 과소결정?

 


 

I. 머리말: 정세에 대한 철학, 정세 속에서의 철학

[이 글에 대한 세 분 심사위원의 꼼꼼하고 비판적인 독해에 감사드린다. 비타협적이면서도 건설적인 독해 덕분에 이 글의 논점을 더 명확히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심사위원들의 문제제기 중 상당수는 내가 받아들이거나 수긍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각주 및 보충 논의를 통해 답변했다. 이 글과 관련하여 앞으로 다른 지면에서 더 토론과 논쟁이 이어지기를 바란다.]

 

언젠가 에티엔 발리바르는 알튀세리엥들을 정세의 알튀세리엥구조의 알튀세리엥으로 구별한 적이 있다.[Etienne Balibar, “L’objet d’Althusser”, in Sylvain Lazarus ed., Politique et philosophie dans l'œuvre de Louis Althusser, Paris: PUF, 1992; 절단토픽’: 철학의 대상, 윤소영 옮김, 󰡔알튀세르와 마르크스주의의 전화󰡕, 서울: 이론사, 1993.]전자가 역사의 예정된 진행 경로나 목적을 설정하는 목적론이나 종말론에 맞서 역사의 우연성 내지 예측 불가능성을 강조하는 관점이라면, 후자는 헤겔 또는 루카치 식의 총체성에 맞서 구조의 복합성 또는 불균등 발전을 강조하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두 종류의 알튀세리엥들이 존재한다면,[이 표현은 사실은 발리바르 자신(구조의 알튀세리엥)과 랑시에르 및 바디우(정세의 알튀세리엥)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실 󰡔자본을 읽자󰡕에 수록된 발리바르와 랑시에르의 글은 이러한 두 가지 방향을 대표하는 글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알튀세르 저작 자체 내에 이러한 두 가지 계기가 모두 존재하기 때문이다. 초기 저작에서는 󰡔마르크스를 위하여󰡕에 수록된 모순과 과잉결정에서 빼어나게 표현된 것이 알튀세르 사상의 정세적 측면이라면,[루이 알튀세르, 모순과 과잉결정 (탐구를 위한 노트), 서관모 옮김, 󰡔마르크스를 위하여󰡕, 후마니타스, 2017. 최근에 유고로 출간된 1966년의 단편 발생에 대하여(Sur la genèse)는 이미 이 시기에 알튀세르가 “‘마주침의 이론내지 콩종시옹이론”(‘théorie de la rencontre’ ou théorie de la ‘conjonction’)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Louis Althusser, Écrits sur l’histoire (1963~1986), Paris: PUF, 2018, p. 81.] 󰡔자본을 읽자󰡕에 수록된 자본의 대상이나 또는 발리바르의 역사유물론의 기본개념들에서는 구조적 측면이 특히 부각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루이 알튀세르, 유물론적 변증법에 대하여 (기원들의 불균등성에 관하여), 󰡔마르크스를 위하여󰡕; Louis Althusser, “L’objet du Capital”, in Louis Althusser et al., Lire le Capital, Paris: PUF, 1996(19651). 철학사의 측면에서 본다면 구조의 측면은 몽테스키외가 나타낸다면, 정세의 측면은 마키아벨리가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지금 정세라는 용어로 표현한 알튀세르의 개념은 프랑스어로 하면 콩종크튀르(conjoncture). 그런데 사실 알튀세르 사상에서 이 개념은 (철학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경우지만) 초기부터 후기까지 단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다.[국내의 알튀세르 연구자들은 지금까지 대개 이 개념을 정세로만 번역해왔는데, 이런 번역은 이 개념의 의미를 모두 표현하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주로 콩종크튀르라고 표현하겠다.] 알튀세르가 󰡔마르크스를 위하여󰡕에서 이 개념을 사용했을 때, 이것은 원래 레닌의 현 상황’(le monment actuel)이라는 용어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1917년 러시아혁명의 시기, “한 국가 내에서 당시 가능했던 모든 역사적 모순들의 축적과 심화[루이 알튀세르, 󰡔마르크스를 위하여󰡕, 172. 강조는 원문.]가 일어나는 예외적 정황들”(circonstances exceptionnelles),[같은 책, 173쪽무엇을 할 것인가가 가장 첨예하게 제기되는 상황이 바로 레닌이 현 상황이라고 불렀던 시기다. 알튀세르는 레닌의 이 용어에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다. 철학적 관점에서 보면 현 상황 또는 정세라고 부르는 것은 모든 혁명적 실천의 가능성과 결말이 그것에 의존하는 본질적 절합들(articulations), 고리들, 전술적 매듭들이요, 주요 모순이 폭발적으로 되는[같은 책, 308~09.]시기를 가리킨다. 따라서 정세는 구조의 모순들이 그 전형성을 드러내고, “모순들의 전위들과 압축들”, “혁명적 단절의 융합’”[같은 책, 311쪽]에 이르는 상황, 요컨대 모순의 과잉결정이 이루어지는 시기 또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심사위원 A는 모순의 과잉결정이 이루어지는 시기라는 표현과 관련하여 내가 과잉결정 개념을 과잉결정된 모순의 정세적(콩종크튀르적상황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하고 있다엄밀한 의미에서 과잉결정과 그것의 정세적 표현을 구별해야 한다는 점에서 보면 일리가 있는 비평이지만사실 알튀세르 자신이 과잉결정을 이 글에서 이런 식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문맥상 양자는 충분히 구별할 수 있다고 본다조금 더 정확히 표현한다면 모순의 과잉결정이 강렬하게 표현되는 시기 또는 상황이라고 하는 게 좋을 것이다그리고 과잉결정에 관해서는 이미 다른 글에서 더 상세하게 논의한 바 있으므로 그 글들을 참조하기 바란다진태원라깡과 알뛰쎄르: ‘또는’ 알뛰쎄르의 유령들 I김상환홍준기 엮음󰡔라깡의 재탄생󰡕창비, 2002. 아울러 심사위원 B는 내가 정세를 시기로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이 때문에 1절 전체를 다시 써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사실 정세를 시기라고 표현하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는 점에서 다소 부주의한 것이다하지만 이런 이유 때문에 1절 전체를 다시 써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은 너무 과도한 비평으로 보인다관련하여 이 논문에 대한 세 명의 심사위원은 공통적으로 과소결정’ 개념에 대한 나의 용법에 관해 질문과 비평을 제기하고 있는데이점에 관해서는 논문의 마지막 절에서 더 보충하겠다.]


알튀세르가 볼 때, 바로 현 상황또는 정세라는 개념을 통해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은 헤겔 식의 관념론적 변증법에서 참되게 발견할 수 없는 생생한 역사, “[레닌] 자신이 살고 이해한 세계 그대로의 모습으로 드러나는 세계, “가능한 유일한 구체성 속에서, 자신의 현재성 속에서”[같은 책, 308쪽] 드러나는 세계를 사고할 수 있으며, 따라서 정치적으로 행동할 수 있고, 혁명적 실천을 수행할 수 있다. 이처럼 초기 저작에서 콩종크튀르 개념은 본질적으로 예외적 상황, 혁명적 상황을 표현하는 것이며, 따라서 정세라고 번역될 수 있다.


그런데 콩종크튀르 내지 정세는 주목할 만한 양의성을 지니고 있다. 한편으로 이 개념은 구조의 전형성 또는 구조가 포함하는 모순들의 본질이 드러나는 계기를 표현한다. 정세야말로 어떤 구조가 있는 그대로, 자신의 모습을 온전히 드러내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개념의 의의는, 정세라는 것을 “‘필연성이 그 속에서 실현되는 우연으로 간주하는 사변적 테제”,[같은 책, 307쪽] 헤겔의 목적론적 역사철학 및 그 이전의 보쉬에(Bossuet) 같은 보수적 신학자의 역사신학에서 유래하는 이 테제에 맞서 역사의 우연성 또는 예외성을 표현해준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우연적이거나 예외적이지 않은 정세는 정세로서의 의의를 지닐 수 없으며, 이러한 예외성이야말로 역사적 현실과 정치적 실천의 정수를 이루는 것이다. 따라서 역설적이게도 정세는 전형적이면서 예외적인 어떤 것, 필연적이면서도 우연적인 어떤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초기 알튀세르에게 정세는 무엇보다 혁명이나 전쟁 같은 예외적 시기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1905, 1914, 1917, 히틀러, 프랑코, 스탈린그라드, 중국, 쿠바 ...”[같은 책, 310쪽]


더욱이 이 당시 알튀세르에게 문제가 되는 정세로서의 콩종크튀르는 역사적 설명의 대상으로서의 콩종크튀르였다. 다시 말해 헤겔 변증법과 구별되는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의 고유성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따라서 역사적 현실과 그 위에서 이루어지는 정치를 설명할 수 있게 해주는 콩종크튀르가 문제였지, 철학 또는 이론적 작업이 바로 그 속에서, 그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서의 콩종크튀르가 문제는 아니었다. 하지만 몇 년 뒤에 집필되고 나중에 유고로 출간된 󰡔마키아벨리와 우리󰡕(1972)에서 알튀세르는 콩종크튀르에 관해 다음과 같이 발언한다.

 

콩종크튀르라는 범주 아래에서 사고하는 것은 구체적인 소여들의 집합에 대해 성찰하듯이 콩종크튀르에 대해 사고하는 것이 아니다. 콩종크튀르 아래에서 사고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그 경우가 산출하고 제기하는 문제에 따르는(se soumettre) 것이다.[Louis Althusser, “Machiavel et nous”, in Écrits philosophiques et politiques, tome II, Paris: Stock/IMEC, 1994, p. 61. 강조는 원문. 알튀세르의 마키아벨리 해석의 독창성은 그의 유고 중에서 가장 많이 주목받은 측면 중 하나다. 특히 알튀세르의 마키아벨리론과 콩종크튀르 개념의 연관성에 관해서는 에마뉘엘 테레, 하나의 마주침: 알튀세르와 마키아벨리, 진태원 엮음, 󰡔알튀세르 효과󰡕, 그린비, 2011; François Matheron, “La récurrence du vide chez Louis Althusser”, Futur antérieur, <numéro spécial>, 1997; Mikko Lahtinen, Politics and Philosophy: Niccolò Machiavelli and Louis Althusser's Aleatory Materialism, New York: Brill, 2009, p. 139 이하; Marie Gaille, “What Does a “Conjuncture- Embedded” Reflection Mean? The Legacy of Althusser’s Machiavelli to Contemporary Political Theory”, in David Johnston et al. eds., Machiavelli on Liberty and Conflict,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17을 각각 참조.]

 

이 대목에서는 콩종크튀르 개념이 과학적 설명의 대상에서 이론적 실천이 가능하기 위한 조건으로 다시 이해되고 있는 것이다.[심사위원 BC는 알튀세르가 초기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 정세에 대해 동일한 의미를 부여했다고 비평하면서 지금까지의 논의를 문제 삼은 바 있다. 알튀세르의 콩종크튀르 개념의 의미변화에 대해서는 이 글의 마지막 절을 참조하라.]


아마도 알튀세르는 자신이 살고 있던 시기가 이런 엄밀한 의미에서 정세의 시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 체계의 형성, 중국혁명, 스탈린의 사망 같은 일련의 사건들, 이 예측 불가능한 사건들, 우연적 사건들 속에서 아마도 알튀세르는 사회주의 혁명의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고 느꼈을 것이며, 특히 우리가 뒤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볼 것처럼 1966년 중국의 문화대혁명과 19685월 프랑스의 혁명적 운동은 그에게 더욱 혁명이 가까이 왔음을 짐작하게 해주었을 것이다. 유고로 출간된 1969년 저작에서 알튀세르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지구 전체에서 사회주의의 승리를 보게 될 세계 속에 진입하고 있다. 머지않아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매우 심각한 위기를 포함해 가능한 모든 돌발 사태들을 통해 혁명은 이제 오늘의 구호가 될 것이다. 1백년이 지나면, 아니 아마 50년만 지나도 세계의 모습은 변하게 될 것이다. 혁명은 지구 전체에서 승리를 거둘 것이다. [Louis Althusser, Sur la reproduction, Paris: PUF, 1995; 󰡔재생산에 대하여󰡕, 김웅권 옮김, 서울: 동문선, 2007, 34.]

 

그가 말한 50년의 시기가 흘렀고,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는 그가 예측했던 지구 전체에서 혁명이 승리를 거두는세계와는 거리가 먼 세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철학자는 예언하는 사람도 아니며 또한 예견하는 사람도 아니다. 따라서 그의 예언 내지 예측이 틀렸다고 해서 그를 비난하는 것은 적절치 않을 것이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알튀세르가 당시의 정세 또는 콩종크튀르에서 과연 무엇을 보았는지, 그가 그 정세에서 어떤 문제가 산출되고 제기된다고 이해했는지, 그리고 이것이 그의 이론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이해하는 일이다. 아마도 알튀세르는 예언에서는 실패했지만, 당시의 콩종크튀르에 대한 분석을 통해, 또한 콩종크튀르 아래에서의 사고를 통해 우리 시대를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개념들 및 통찰들을 우리에게 남기는 데는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그것을 살펴보기로 하자.

 


II. 이데올로기적 반역, 이데올로기적 혁명: 685월 운동과 문화혁명

 

1. 융합에 이르지 못한 마주침: 685월에 대한 평가

 

알튀세르는 685월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가? 우선 알튀세르 자신은 685월 운동을 직접 목격하거나 참여하지 못했다는 점을 일러둘 필요가 있다. 당시 알튀세르는 정신병이 발작해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 [알튀세르의 연인이었던 마도니아 프란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당시의 정황에 대한 언급을 발견할 수 있다. 알튀세르는 1968511일 수아지 병원(Clinique de Soissy)에 입원해서 한달 간 치료를 받은 후 6월 중순께 퇴원했다. 공교롭게도 685월의 가장 뜨거웠던 시기에 그는 정신병원에 있었던 셈이다. Louis Althusser, Lettres à Franca (1961~1973), Paris: Stock/IMEC, 1998, pp. 760~61 참조.병원에서 퇴원한 이후 알튀세르는 685월에 관한 더 상세한 정보를 얻기 위해 여러 모로 노력을 기울이지만, 그다지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 때문인지 이후에 알튀세르가 생전에 685월에 관해 공개적으로 상세하게 논의하거나 평가한 것은 단 한 차례에 불과했다. 그것은 19696월 프랑스 공산당 기관지 󰡔라 팡세󰡕(La Pensée)에 발표된 텍스트인데, 이것은 같은 해 2월에 󰡔라 팡세󰡕에 발표된 사회학자인 미셸 베레의 대학생들의 5월 또는 대체들(Mai étudiant ou les substitutions)이라는 글을 반박하기 위해 작성된 글이었다.[Louis Althusser, “A propos de l’article de Michel Verret sur le ‘Mai étudiant’”, in Yves Vargar ed., PenseR Louis Althusser, Paris: Le Temps des cerises, 2006, pp. 63-84.]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알튀세르는 685월에 관한 또 한 편의 글을 작성한 적이 있다. 이탈리아 공산당원이자 언론인이었던 마리아 안토니에타 마초키와 주고받은 서신들을 묶어서 이탈리아에서 󰡔이탈리아 공산당 내에서 루이 알튀세르에게 보낸 편지들󰡕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책에 수록된 한 편지가 바로 그것이다.[Maria Antonietta Macciocchi, Lettere dall’interno del P.C.I. a Louis Althusser, Giangiacomo Feltrinelli, 1969.] 이 책은 1970년 프랑스어로 번역출판되었으나, 685월에 관한 편지를 포함하여 알튀세르의 편지 10여 통은 번역에서 제외됐다.[Maria Antonietta Macciocchi, Lettres de l'intérieur du parti, François Maspero, 1970. 하지만 이 책의 영역본에는 알튀세르의 문제의 편지가 포함되었다. Letters from Inside the Italian Communist Party to Louis Althusser, trans. Stephen Hellman, NLB, 1973.] 이는 이 편지들이 프랑스 공산당에 관한 여러 가지 비판을 포함하고 있어서 프랑스 공산당이 이 편지들을 출간하지 말도록 압력을 가했기 때문이다. 알튀세르 사후 유고집으로 출간된 저작들에서도 우리는 685월에 관한 또 다른 논평을 살펴볼 수 있다. 특히 1995년 출판된 󰡔재생산에 대하여󰡕에 나오는 논평과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에 나오는 언급들에 우리의 주제와 관련하여 몇 가지 의미 있는 내용이 담겨 있다. [Louis Althusser, Sur la reproduction, op. cit.; 󰡔재생산에 대하여󰡕, 앞의 책; L’avenir dure longtemps, Paris: Stock/IMEC, 2003(초판은 1992);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권은미 옮김, 서울: 이매진, 2008.]


미셸 베레의 글에 대한 논평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는 베레의 글을 비평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베레의 시각과 다른 관점에서 685월의 운동을 평가하고 그로부터 이론적정치적 과제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알튀세르는 베레가 685월을 대학생의 5”(Mai Etudiant)이라고 지칭하는 것을 비판한다. 이는 마치 685월 운동이 오직 대학생들만이 참여한, 또는 적어도 대학생들이 5월 운동의 주역이었다는 인상을 준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베레가 5월 운동을 주도한 좌익 학생들을 비판하고 조롱하면서 그들은 부르주아 및 프티 부르주아의 후예들로서 아나코-생디칼리즘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다고 비판하는 점도 문제 삼는다. 이는 이중적인 잘못이다. 첫째, 대학생들에게 단일한 이데올로기는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다양한 이데올로기들이 혼재되어 있는데, 이는 5월 운동에 참여한 젊은이들이 대학생들만이 아니라 고등학생들, 그리고 다양한 부류의 젊은 지식 노동자들로 구성된 것의 결과다. 따라서 마치 하나의 대학생 이데올로기[Louis Althusser, “A propos de l’article de Michel Verret sur le ‘Mai étudiant’”, op. cit., p. 78.]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히려 베레가 5월 운동에 대한 대학생들 자신의 표상/재현에 사로잡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둘째, 5월 운동 중에 대학생들 사이에서 널리 확산된 이데올로기가 있다면 그것은 아나코-생디칼리즘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자유지상적인 무정부주의 이데올로기(idéologie anarchiste-libertaire)[Louis Althusser, Ibid.]였다는 것, 또는 마초키에게 보낸 편지의 용어법에 따르면 대학생들의 좌익주의프롤레타리아 좌익주의가 아니라 프티 부르주아 좌익주의”[이 편지에서의 인용은 영역본 텍스트에 따른 것이다. 이 편지의 영역본은 버소 출판사 홈페이지에서 읽을 수 있다. “Louis Althusser's Letter on the ‘May Events’” https://www.versobooks.com/blogs/3851-louis-althusser-s-letter-on-the-may-events (2018.6.9. 접속)]라는 것이 알튀세르의 비판이다. 알튀세르는 베레가 공산주의 지식인으로서 5월 운동에 대한 진지한 분석을 수행하려고 했다면, 대학생들의 이데올로기 내지 사회심리적 동기들을 분석하기보다는 일차적으로 노동자들의 파업 투쟁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옳았다고 지적한다. 또한 대학생들의 결함이나 오류를 유치한 병적 좌익주의라고 몰아붙이기보다는 더 인내심을 갖고 차분하게 설득하고 교정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알튀세르는 베레를 비판하는 한편 5월 운동에 관한 자신의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5월 운동은 두 가지의 중요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째, 5월 운동은 프랑스에 국한된 운동이 아니라 청년 학생들의 범세계적인 이데올로기적 반역[Louis Althusser, “A propos de l’article de Michel Verret sur le ‘Mai étudiant’”, op. cit., p. 74.]의 일환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반역은 제국주의의 단말마의 주요 효과들 중 하나로서, 알제리 독립투쟁, 베트남전쟁, 쿠바혁명, 중국의 문화혁명 같이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는 반제국주의 투쟁 및 사회주의 발전의 영향 속에서 일어난 것이다. 알튀세르는 특히 5월 운동의 미증유적인 성격을 강조하는데, 이는 역사상 처음으로 대학생들의 이데올로기적 반역이 고등학생들 및 청년 지식 노동자들의 중요 층위까지 확장되었고, 그 결과 대중의 이데올로기적 반역이 되었다[Louis Althusser, Ibid. 강조는 인용자.]는 데서 기인하는 것이다. 둘째, 5월 운동은 한편으로 이러한 학생들 및 젊은 지식 노동자들의 이데올로기적 반역과 다른 한편으로 내가 알기로는 서양 역사에서 그 참여 인원 수 및 지속 기간에서 유례가 없는 총파업 사이의 마주침(rencontre)”[Louis Althusser, Ibid., p. 75. 강조는 인용자.]을 본질로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5월 운동에서 절대적으로 결정적인역할을 수행한 것은 노동자들의 총파업이었으며, 시간적으로 선행했던 대학생들 및 고등학생, “지식인들의 활동은 그 역시 매우 새롭고 커다란 중요성을 지닌 사건이기는 했지만, 노동자들의 총파업에 종속되어 있던 사건이었다. 그런데 이 두 사건은 “685월에 서로 마주치기는 했으나 융합에까지 이르지는 못했다(sans parvenir à fusionner).”[Louis Althusser, Ibid., p. 76. 강조는 인용자.]


이러한 두 가지 평가는 마초키에게 보내는 1969315일자 편지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알튀세르는 685월 운동은 한편으로 노동자들과 피고용인들의 운동과 다른 한편으로 대학생, 고등학생, 젊은 지식 노동자들의 운동이 마주쳤으나 융합에까지 이르지는 못한 운동이었다고 말하고 있다.[Louis Althusser, “Louis Althusser's Letter on the ‘May Events’”, op. cit.] 하지만 이 편지에서 알튀세르는 대학생들에 대해 좀 더 비판적인 견해를 나타내고 있다. 그들은 노동자들의 세계 및 노동자운동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노동자들과의 동맹을 추구하고 이를 혁명으로 이끌어가려고 했으나, 대학생들의 시도는 현실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몽상에 의거한 것”[Ibid.]이었기 때문에, 양자 사이의 동맹 또는 융합이 일어날 수 없었다고 지적한다. 더욱이 알튀세르는 685월 운동을 대학생 운동”(Mouvement étudiant) [Ibid.]이라고 부르는 것은 부적절하며, 심지어 대학생들의 활동을 운동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한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한다. 왜냐하면 노동자운동 같은 운동이 그 이름을 얻을 자격이 있는 것은, 그것이 사회계급(프롤레타리아)의 운동이기 때문이며, 더욱이 객관적으로 혁명적인 유일한 계급의 운동” [Ibid.]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학생운동이 다루어야 하는 과제는 어떤 조건에서, 어떤 시간적 간격 속에서, 그리고 어떤 시련을 거친 이후에 대학생운동은 노동자운동과 지속적인 연결을 확립하고, 궁극적으로 그것과 융합하는 데 성공할 수 있는가” [Ibid.]라는 문제다.


두 글의 또 다른 공통점은 프랑스 공산당의 두 가지 정치적 오류에 대한 지적이다. 첫째, 중국에서는 유럽 및 프랑스와는 절대적으로 상이한 맥락에서”(왜냐하면 중국의 문화혁명은 사회주의 내부의 문제라면, 유럽 및 프랑스는 자본주의 내에서 일어난 일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조건과 상응하지 않는 직접적인 목적들을 위해서 인민적인 국가 지도부가 청년의 이데올로기적 반역의 선두(또는 발의?)에 나섰다면”, 프랑스 공산당은 (그리고 다른 유럽의 공산당들도) “지난 수년 동안 공산주의 대학생 조직의 계속된 위기 속에서도 실제로는 청년 학생 대중과의 접촉 관계를 상실했다[Louis Althusser, “A propos de l’article de Michel Verret sur le ‘Mai étudiant’”, op. cit., p. 82.]는 점이다. 마초키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역시 우리의 공산당들[곧 프랑스 공산당과 이탈리아 공산당-인용자]은 일시적으로(이것이 사실이기를 바라지만), 하지만 확실히 대학생들 및 청년 지식인들과의 모든 이데올로기적정치적 접촉을 상실했다[Louis Althusser, “Louis Althusser's Letter on the ‘May Events’”, op. cit. 강조는 원문.]고 지적하고 있다. 둘째, 685월에 일어난 노동자 계급의 파업 활동에 대한 상세한 분석을 수행하지도 못했다는 점이다. 곧 공산당은 청년 학생들 및 노동자 계급, 따라서 대중들의 이데올로기적 반역의 원인에 대해서도, 또한 노동 상황들에 대해서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685월 운동이 일어난지 수개 월 이후에 알튀세르가 이 운동에 대해 제시한 분석 및 평가의 개요다. 알튀세르는 685월 운동은 기본적으로 청년 학생들과 지식인들의 이데올로기적 반역과 노동자 계급의 총파업이라는 두 가지 계열의 작용이 마주친 사건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이중에서 이 사건을 더 강력하게 규정하는 것은 후자였다고 간주한다. 청년 학생들 및 지식인들의 이데올로기적 반역은 내부의 분열과 편향된 이데올로기들의 한계를 지니고 있지만, 1950년대부터 범세계적으로 전개되었던 이데올로기적 반역의 흐름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진보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이 알튀세르의 평가다.[이 글을 투고한 이후 발리바르가 자신이 겪은 68의 상황 및 알튀세르의 68 해석에 대해 언급한 한 인터뷰를 발견했다. 그 중 한 대목에서 그는 당시 마오주의 청년 좌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5월 말이나 6월 초에 저는 당시 브장송대학의 조교로 있던 자크-알랭 밀레에게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는 전화로 혁명이 시작됐어라고 단언했습니다. “우리 이제 막 대학생들과 로디아세타 공장(Rhodiaceta) 노동자들이 결집한 첫 번째 공동행동위원회를 건설했어.” 저는 현장에 가서 봐야겠다고 생각했죠. 피에르 마슈레하고 그의 학생 두 명과 함께 르노 도핀 자동차에 필요한 기름을 가득 싣고 프랑스를 가로질러 갔습니다. 일종의 탐사대였죠. ... 그런데 우리가 도착했을 때 혁명은 이미 끝나버렸습니다. 소비에트는 겨우 한 나절 지속되었던 셈입니다.(웃음) 그 이후 저는 사건에 대해 오래 성찰해봤습니다.” “Mai 68: Étienne Balibar, de la pensée sous les pavés”, Chantier de Culture, 201875일 인터뷰

https://chantiersdeculture.wordpress.com/category/pages-dhistoire/ (2018. 8. 5. 접속)] 하지만 이 두 가지 운동은 서로 마주치기는 했지만 융합을 하지는 못했는데, 알튀세르는 그 중요한 이유 중 하나를 공산당의 정치적 지도의 실패에서 찾고 있다.


다른 한편 󰡔재생산에 대하여󰡕에서도 알튀세르는 몇 차례에 걸쳐 685월 운동에 대해 거론하고 있는데, 특히 두 가지 점이 중요해 보인다. 첫째, 685월 운동의 의미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가장 중요한 이데올로기 국가장치가 바로 학교 장치라는 것을 보여주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Louis Althusser, Sur la reproduction, op. cit., pp. 175ff; 󰡔재생산에 대하여󰡕, 222쪽 이하.] 알튀세르에 따르면 봉건제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는 교회였는데, 자본주의에서는 학교가 교회의 역할을 대신한다. 왜 의회 민주주의 같은 정치적 이데올로기 국가장치가 아니라 학교가 지배적인 이데올로기 국가장치인가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는데, 알튀세르는 자본주의는 입헌 군주제, 의회 군주제, 대통령제 등과 같이 의회민주주의와는 상이한 정치적인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들도 매우 잘 받아들일 수 있기[Ibid., pp. 176~77; 같은 책, 224.] 때문에, 의회민주주의는 지배적인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역으로 모든 자본주의 사회에 존재하는 것이 바로 학교이며, 더욱이 학교는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이데올로기와 무관한, 따라서 계급투쟁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장소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학교야말로 진정한 지배적인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라고 할 수 있다.

 

학교는 온갖 사회 계층의 아이들을 대려다가 유치원에서부터 직업학교, 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수 년 동안, 아이들이 가족 이데올로기 장치와 학교 이데올로기 장치에 옴짝달싹 못하고 갇힌 채 가장 연약한’(vulnérable) 상태에 있는 시기 동안, 그들에게 지배 이데올로기 속에서 포장된 몇 가지 초보 지식’(프랑스어, 산수, 자연사, 과학, 문학) 또는 단적으로 말하면 순수 상태의 지배 이데올로기(도덕, 시민 교육, 철학)를 주입시킨다. (......) 그 어떠한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도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 일주일에 6일씩 하루에 여덟 시간 비율로 의무적인 청중을 갖지 못하고(그것도 공짜로), 자본주의적 사회구성체의 전체 어린이들을 다 갖지 못한다. [Ibid., pp. 178~79; 같은 책, 226~27. 강조는 원문.]

 

그런데 685월 운동은 외관상으로는 전혀 지배적인 이데올로기 장치로 보이지 않고 계급투쟁과 무관해 보이는 이 학교라는 곳이 사실은 지배의 장치였다는 것, 학교의 평온함과 자연스러운 질서는 사실 특정한 계급의 지배, 그 이데올로기적 장악의 결과였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주었다. [심사위원 C는 이 문단의 논의가 본인의 주장인지, 알튀세르의 생각을 요약하고 있는지 명확하지 않다고 지적하는데, 이 문단은 당연히 다음에 나오는 주 39) 인용문의 논점을 요약한 것이다. 교육 이데올로기 국가장치에 관한 알튀세르의 더 상세한 분석은 Sur la reproduction, op. cit., pp. 175ff; 󰡔재생산에 대하여󰡕, 222쪽 이하를 참조하기 바란다.]

 

19685월의 사건들과 이에 따른 그 모든 사건들은 우리 테제를 경험적으로 입증해준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 사건들은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참여한 예상치 못한 이 계급투쟁에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을 가져다주었다는 점 이외에도 계급투쟁이 학교가족교회 등의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들 속에서 당연히 종별적인 형태들로 항상 존재해왔음보여주었다. (......) 주목할 만한 것은, 대학생들과 고등학생들이 이데올로기적 반항을 하기 이전에는,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 내에서 부르주아지의 대표자들, 또는 하수인들의 계급투쟁이 학교 장치와 가족 장치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했다는 점이다. 매우 압도적으로 우세했기 때문에, 대학교와 고등학교의 고요함과 평화로운질서 자체가 (분명 특수한 형태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하나의 계급투쟁의 형태라는 사실이 의심조차 되지 않았던 것이다. [Louis Althusser, Ibid., p. 191; 같은 책, 244~45. 강조는 원문.]

 

알튀세르가 대학생들이나 지식 노동자들 이외에도 고등학생들이 685월 투쟁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에 걸쳐 강조하는 이유는, 바로 이들의 투쟁을 통해 685월 투쟁에서 학교가 지닌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의 성격이 뚜렷이 드러났으며, 따라서 그 지배력에 균열이 생겼다는 점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둘째, 알튀세르는 앞의 두 글과 마찬가지로 학생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던 무정부주의적 관점, 곧 반역 내지 혁명의 목표를 억압’(répression)으로 이해하는 관점을 비판하고 있다.[Louis Althusser, Ibid., pp. 209ff; 같은 책, 271쪽 이하.] 알튀세르는 68년 당시 영향력이 있던 주간지 󰡔악시옹󰡕(Action)의 표지에 실린 당신 머릿속에 있는 경찰을 쫓아내라는 구호에서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전형적 표현을 발견한다. 이는 두 가지 점에서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우선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배의 본질은 하부구조에서 일어나는 착취라는 것을 은폐하거나 적어도 몰인식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것이 이데올로기의 본성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위의 구호는 이데올로기의 핵심이 사람들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관념들이라는 것, 곧 지배 계급이 사람들로 하여금 지배 질서에 순종하도록 만들기 위해 유포하고 주입하는 그릇된 관념이나 기만적 관념, 허위의식 같은 것들이 이데올로기적 지배의 근간을 이룬다는 것을 함축한다. 하지만 알튀세르에 따르면 이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표상[Ibid., p. 220; 같은 책, 284.]에 불과한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물질적인 것인데, 이는 이데올로기가 이데올로기적 장치들 및 의례들, 관행들(practices)을 통해 형성되고 작동하고 재생산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더 나아가 이데올로기는 단순한 관념들이 아니라 개인들이 자신들의 현실적 실존 조건들과 맺는 상상적 관계에 대한 상상적 표상/재현/상연(représentation)”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개념이 지닌 물질성에 대한 더 자세한 논의는 진태원, 과잉결정, 이데올로기, 마주침: 알튀세르와 변증법의 문제, 진태원 엮음, 󰡔알튀세르 효과󰡕, 앞의 책 및 스피노자와 알튀세르: 상상계와 이데올로기, 서동욱진태원 엮음, 󰡔스피노자의 귀환󰡕, 서울: 민음사, 2017을 각각 참조하라.]


따라서 685월 운동, 특히 고등학생, 대학생, 젊은 지식 노동자들이 일으킨 이데올로기적 반역은 프랑스와 같은 자본주의 사회의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헤게모니에 균열을 내고, 특히 학교라는 곳이 중립적이거나 보편적인 선을 실현하는 장소가 아니라 지배적인 이데올로기 국가장치의 역할을 수행하는 곳이라는 점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지만, 정작 반역을 실행한 학생 대중들은 자신들이 수행한 일의 정확한 본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알튀세르의 논점이라고 할 수 있다. 알튀세르가 685월 운동 이후 서둘러 󰡔재생산에 대하여󰡕 원고를 작성하고, 그것으로부터 몇 부분을 발췌하여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들논문을 발표한 것은 그가 이 운동이 제기한 이데올로기 반역의 문제의 중요성을 인정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이러한 반역이 혁명(또는 노동자 운동과의 융합)에 이르지 못했다는 점에 그 한계가 있으며, 앞으로 도래할 혁명을 위해서 이러한 한계를 이론적실천적으로 극복하는 일이 중요한 과제라는 점을 알튀세르가 적극적으로 피력했다고 볼 수 있다.

 

2.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의 퇴보 위험과 이데올로기적 혁명: 문화혁명에 대한 분석

 

하지만 685월에 대한 분석 및 평가만으로는 당시의 정세에 대한 알튀세르의 생각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울뿐더러, 5월 운동에 대한 분석 및 평가의 이론적 함의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없다. 따라서 이것은 그보다 앞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 곧 문화혁명에 대한 분석과 연결해서 살펴봐야 한다. 알튀세르가 문화혁명에 대해 생전에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한 글은 한 편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발표될 당시부터 사람들이 알튀세르의 글이라고 짐작했고, 오늘날 대부분의 알튀세르 연구자들이 그의 글이라고 간주하는 익명의 논문이 한 편 존재한다. 1966(마르크스-레닌주의) 공산주의 청년 동맹('Union des jeunesses communistes marxistes-léninistes)이 간행하던 기관지 󰡔카이예 마르크시스트-레니니스트󰡕(Les Cahiers Marxistes-Léninistes) 14호에 발표된 문화혁명에 대하여가 바로 그 글인데, 이 글에서 알튀세르는 중국 문화혁명의 특성을 고찰하면서, 그것이 왜 단지 정치적으로 중요한 혁명일 뿐만 아니라 이론적으로 중요한 것인지 분석하고 있다. [알튀세르는 이미 󰡔마르크스를 위하여󰡕에 수록된 모순과 과잉결정(1963)에서 마오의 모순론(1937)을 주요한 이론적 준거 중 하나로 삼은 바 있다. 발리바르의 전언에 따르면 알튀세르는 이미 1950년대 초에 뤼시엥 세브(Lucien Sève)와 함께 모순론실천론을 학습했지만, 후자에 관해서는 거의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다고 한다. Etienne Balibar, “Althusser et Gramsci: entretien avec Étienne Balibar”, Revue Période, 2016. http://revueperiode.net/althusser-et-gramsci-entretien-avec-etienne-balibar/ (2018.7.12. 접속) 심사위원 B는 알튀세르와 함께 모순론을 학습한 이는 세브가 아니라 발리바르라고 지적하고 있는데, 그가 좀 착각을 한 것으로 보인다. 1950년대 초라면 발리바르는 초등학생일 때이며, 무명의 공산당원이었던 알튀세르와 아무런 관계도 없을 때다. 원문을 다시 잘 살펴보기 바란다. 또는 필요하다면 다음 글의 주 13)도 참고하기 바란다. Etienne Balibar, “Althusser et Mao” (2015), Revue Période, http://revueperiode.net/althusser-et-mao/#footnote_12_2245 (2018.8.5. 접속)] 이러한 분석은 685월 운동에 대한 알튀세르의 분석의 배경을 이룰뿐더러, 알튀세르가 󰡔재생산에 대하여󰡕(1969)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들(1970)에서 전개한 이데올로기 이론의 실마리를 제공해주기 때문에 상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이 글의 실제 필자가 알튀세르라는 점에 대해서는 발리바르도 최근 다시 한 번 확인한 바 있다. Etienne Balibar, “Althusser et Mao” op. cit. 참조. 알튀세르의 이 글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는 거의 전무한 편이다. 국내의 경우 문화혁명 또는 마오주의에 관한 바디우와 발리바르의 평가를 비교고찰하는 백승욱의 글에서도 알튀세르의 이 글은 참조되지 않고 있다. 백승욱, 문혁 평가의 하나의 우회로: 정치의 아포리아를 둘러싼 논점, 󰡔중국 문화대혁명과 정치의 아포리아󰡕, 서울: 그린비, 2012. 한편 바디우가 열광했던 마오주의(또는 문화혁명)는 역사적 실재로서의 그것이 아니라, 한 논평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라캉적 의미에서 주인 기표로서의 마오주의였다고 할 수 있다. 제이슨 바커, 주인 기표: 라캉-마오주의의 간략한 계보학, 󰡔문화과학󰡕 77, 2014. 제이슨 바커는 간략하게 알튀세르의 글을 언급하고 있다. 관련하여 심사위원 A는 내가 에티엔 발리바르의 마오: 스탈린주의의 내재적 비판?을 이 글에서 참조하지 않는다고 비평하고 있다. 내가 이 글에 관해 굳이 언급하지 않은 것은 1960~70년대 프랑스 철학(특히 알튀세르와 그의 제자들)에서 마오주의의 전유 문제는 따로 다룰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문화혁명의 전개과정 및 그 내적 모순에 대한 분석은 심사위원의 관심사일 수는 있어도 나 자신의 관심사는 아니다. 오히려 내가 흥미롭게 생각하는 것은 알튀세르가 이 글에서 문화혁명을 이처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음에도, 그 이후의 다른 글들(유고를 포함하여)에서는 지나치는 언급 이외에는 문화혁명이나 마오주의에 관해 별로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가 문화혁명의 이후 전개과정에 실망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에게 관심이 있던 것은 문화혁명 그 자체보다는 자신의 문제설정과 관련이 있는 대중의 이데올로기적 혁명이라는 논점뿐이었던 것일까, 또는 프랑스공산당과 마오주의 제자들 사이에 놓여 있는 그의 처지로 인한 침묵이었을까? 내가 보기에는 프랑스철학(특히 알튀세르와 그의 일부 제자들)과 마오주의의 관계를 제대로 다룰 수 있기에는 아직 우리가 모르고 있는 사실이 너무 많다.]


알튀세르는 중국의 문화혁명이 여느 주장(argument) 중 하나의 주장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며, 그것도 미증유의 역사적 사실”(fait historique sans précédent)이라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그는 이것이 예외적인 역사적 사실인데, 이는 첫째 이것이 선행하는 것이 없는 역사적 사실이며, “극도의 이론적 흥미 [Louis Althusser, “Sur la révolution culturelle”(1966), Décalages, vol. 1, no. 1, 2014, p. 1.]를 지닌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알튀세르는 이론적이라는 말을 강조하는데, 이는 곧바로 그가 주장하듯이 문화혁명이 이데올로기적인 혁명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은 항상 정치적 혁명에 의해 설립된 사회주의적 토대에 대해, 그것에 상응하는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 사회주의적 상부구조를 제시해야 할 절대적 필요성을 공표한 바 있다. 이를 위해서는 이데올로기적 혁명, 대중들의 이데올로기 내에서의 혁명(une révolution dans l'idéologie des masses)이 필수적이다. 이 테제는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기본 원리를 표현한다. 레닌은 이러한 필요성을 첨예하게 의식하고 있었고, 볼셰비키 당은 이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커다란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상황은 소련이 대중의 이데올로기적 혁명(révolution idéologique de masse)을 정치적 의사일정에 올리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중국 공산당은 새로운 수단을 채택함으로써 최초로 이러한 길에 진입했으며, 대중들이 진입하도록 했다. 문혁이라는 표현으로 지칭되는 대중의 이데올로기적 혁명을 최초로 의사일정에 올린 것이다.[Ibid. 강조는 원문.]

 

따라서 알튀세르에 따르면 문화혁명은 지금까지 이론적 상태”(l'état théorique) [Ibid. p. 2]에 머물러 있던 한 가지 이론적 테제, 곧 사회주의적 토대는 그에 상응하는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를 요구하며, 이를 위해서는 대중들의 이데올로기 내에서의 혁명또는 대중의 이데올로기적 혁명이 필요하다는 테제를 실현하는 것, 또는 적어도 실현하려는 정치적 시도라는 점에서 미증유의 역사적 사실이라고 할 수 있으며, 또한 바로 이점에서 극도의 이론적정치적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의 사설을 분석하면서 알튀세르는 중국의 문화혁명이 모든 사회주의 국가들이 직면하게 되는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하고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을 모색하려는 시도라는 점에 주목한다. 그것은 자본주의로 후퇴할 것인가 아니면 혁명의 길로 나아갈 것인가(곧 사회주의의 발전을 끝까지 추구하여 공산주의로 이행할 것인가) 사이의 양자택일에 관한 문제다. 그리고 바로 후자의 혁명의 길을 택하기 위해 제시한 것이 대중의 이데올로기적 혁명인 문화혁명이다.

 

중국공산당은 중국에서 사회주의를 강화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그 장래를 공고히 하고 모든 퇴보의 위험에 맞서 사회주의를 지속 가능하게 보존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혁명과 경제적 혁명에 대해 제3의 혁명, 대중의 이데올로기적 혁명을 추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선언한다. 이러한 대중의 이데올로기적 혁명을 중국 공산당은 프롤레타리아 문화혁명이라고 부른다. [Louis Althusser, Ibid., p. 6. 심사위원 A는 이 글의 이 대목이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에 관한 단계론적 이해를 드러내고 있으며, 그것이 이 글의 한계라고 지적한 바 있는데, 그것은 이 글의 논점을 잘못 이해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알튀세르의 논점은 대중들의 이데올로기적 혁명이 생산관계의 변혁 및 국가장치의 개조와 철폐를 가능하게 해준다는 것, 곧 공산주의로 이행하기 위한 계급투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적어도 그것이 내가 이해하는 이 글의 핵심 논점 중 하나다.]

 

알튀세르는 문화혁명이 제기된 정세의 핵심을 자본주의로의 후퇴위험에서 찾는다.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이행한 사회에서도 여전히 자본주의로 후퇴할 수 있는 위험이 상존한다는 사실, 따라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혁명의, 해방의 확실한 보증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문화혁명의 핵심적인 조건이 된다. 더 나아가 이러한 위험에 맞서 사회주의를 지속 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중첩된 혁명들이 필요하다는 점이 중요하다. 곧 정치적 혁명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더 나아가 과거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사회적 생산관계 및 소유관계를 변혁한다고 해서 혁명이 완수되거나 적어도 확고하게 보증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 더하여 제3의 혁명인 대중의 이데올로기적 혁명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대중의 이데올로기적 혁명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을 목표로 하는 혁명인가?

 

[문화혁명의-인용자] 궁극적 목표는 대중들의 이데올로기를 변혁하는 것, 중국 사회의 대중들에 여전히 스며들어 있는 봉건제 이데올로기 및 부르주아, 프티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대중들의 새로운 이데올로기, 프롤레타리아적이고 사회주의적인 이데올로기로 대체하는 것이며, 이로써 사회주의의 경제적 하부구조 및 정치적 상부구조에 대해 그것들에 상응하는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를 부여하는 것이다. [Ibid. 강조는 인용자.]

 

그 다음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혁명을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곧 혁명의 수단과 방법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알튀세르에게 (그리고 아마 문화혁명의 주동자들에게도?) 본질적인 질문인데, 정의상 대중의 이데올로기적 혁명은 대중들을 대신하여 선도적인 혁명가들이나 공산당이 수행할 수 없는 것이며 대중들이 스스로 수행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것은 위로부터 강제되어 수행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대중들이 자발적으로, 그리고 자각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혁명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계몽주의적인 방식으로 공산당을 비롯한 엘리트들이 대중들을 지도하거나 계몽하여 수행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만약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혁명이 다른 누군가에 의해 수행되거나 강제로 집행되는 것이라면, 심지어 누군가의 계몽을 통해 수동적으로 수행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대중들의 이데올로기적 혁명이라고 할 수는 없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원칙이 천명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문혁은 대중들의 이데올로기를 변혁하는, 그리고 이것이 대중들 자신에 의해 수행되어야 하는 대중들의 혁명이어야 한다. (......) 대중들의 이데올로기의 이러한 변혁은, 대중의 조직들 안에서, 그리고 그것들에 의해서 활동하는 대중들 자신의 작업일 수밖에 없다.” [Ibid. p. 7] 이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이 알튀세르는 조직들을 강조한다. 대중들은 조직들 안에서만 활동하며, 따라서 대중들의 이데올로기적 변혁 역시 조직 안에서, 그리고 그것들에 의해서 수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알튀세르는 중국 문화혁명의 방법적 독창성을 여기에서 찾는다. “대중들은 대중 조직들 안에서만 활동할 수 있다. 가장 독창적이고 혁명적인 문화혁명의 수단은 문화혁명에 고유한 조직들의 출현, 곧 다른 계급투쟁 조직들(노동조합 및 당)과 구별되는 문화혁명 조직들의 출현에서 찾을 수 있다. 문화혁명에 고유한 조직들은 이데올로기적 계급투쟁 조직들이다.” [Ibid. p. 8]


여기에서 알튀세르는 문화혁명의 이론적 중요성을 이끌어낸다. 문화혁명이 이론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이데올로기적인 것을 다시 사고하고 이론화하도록 요구하기 때문이다.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들이나 󰡔재생산에 대하여󰡕에서처럼 명시적으로 그 한계를 지적하지는 않지만, 토대와 상부구조라는 건축물의 은유에 입각하여 이데올로기의 성격과 역할을 규정하는 전통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대비하여 자신의 관점을 피력하고 있다. 전통 이론에 따르면 모든 사회는 경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이데올로기적인 것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데올로기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과 더불어 상부구조를 형성한다. 이때 상부구조의 한 부분으로서 이데올로기적인 것은 한편으로 정치적인 것과 경제적인 것에 대해 상대적 자율성을 지니지만, 동시에 이 후자의 것들에 대해 의존적이다.


하지만 알튀세르는 만약 우리가 이데올로기적인 것의 구체적인 존재 형태에 대해 제시하고 싶다면, 이것을 건물의 한 층보다는 시멘트와 비교하는 것이 더 낫다[Ibid. p. 14]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시멘트가 건물의 한 부분에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건축물을 건축물로서 공고하게 유지하기 위해 그 모든 부분에 사용되어야 하듯이 이데올로기도 건물의 도처에 스며들기때문이다. 곧 개인들과 그들의 모든 실천들 사이의 관계에, 개인들이 관계 맺는 모든 대상들과의 관계에, 이데올로기가 과학, 기술, 예술과 맺는 관계에, 경제적 실천 및 정치적 실천과 맺는 관계에, “개인적관계들에도 이데올로기는 스며들어 있다. 따라서 이데올로기는, 기술적 구별이 문제든 아니면 계급 구별이 문제든 간에, 사회 속에서 구별하면서 결합하는(cimenter) 것이다.” [Ibid. 강조는 원문]


따라서 이데올로기는 토대와 구별되는 상부구조에만 속할 수 없으며, 또한 상부구조 내에서도 정치라는 심급, 법이라는 심급과 구별되는 하나의 심급으로 한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데올로기는 토대를 포함한 사회의 모든 곳에 스며들어야 하며, 모든 심급 내지 수준 속에서 작용해야 한다. [심사위원 B는 이 문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하고 있다. “알튀세르뿐만 아니라 마르크스 이래의 모든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데올로기가 인간적 실천의 모든 영역에서 작용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공장, 시장, 기업, 학교, 법정, 행정기관, 언론기관...) 이데올로기를 상부구조에 속하는 것으로 파악해 왔습니다.필자는 알튀세르의 논의를 이데올로기는 상부구조에만 속하는 것이 아니라 하부구조에도 속한다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따라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개념이(이데올로기에 대한 정의가) 마르크스주의와 인간주의에서의 정의→「문화혁명에 대하여에서의 정의→「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에서의 정의로 변해간 것으로 보는 필자의 잘못된 논의는 수정되어야 합니다. 이데올로기에 대한 알튀세르의 정의는, 표현은 각각 달라도, 일관된 것으로 지속됩니다.나는 왜 심사위원이 와 같은 비평을 제시하는지 잘 이해할 수 없다. 이 문단에서 강조 표시한 부분의 논점은 앞의 문단에서 강조했듯이 토대와 상부구조라는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의 장소론적 관점에서 이데올로기를 이해하는 것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인데, 그는 내가 이데올로기는 상부구조만이 아니라 토대에도 속해야 한다고 주장한다고 비평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의 의 논점이 무엇인지도 불분명하다. 문장 그대로 본다면 알튀세르도 이데올로기를 상부구조에 속하는 것으로 파악해 왔다는 뜻인지? 와 같은 비평을 제기하는 심사위원이 어떻게 과 같은 주장을 제시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또한 그는 과 같은 주장을 나에 대한 비판으로 제기하고 있는데, 나는 이 글에서 알튀세르의 정의가 비일관적이라고 말한 적이 전혀 없다. 다만 마르크스주의와 인간주의와 달리 문화혁명에 대하여에서는 더욱 명확하게 ““‘이론적체계들과 실천적체계들또는 관념들의 체계(좁은 의미의 이데올로기들)와 태도-행위(습속)”를 포괄하는 넓은 개념으로 재정의하고 있다고 말했으며,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들과 달리 호명이라는 개념이 이데올로기와 관련하여 아직 제시되지 않고 있다고 말했을 뿐이다. 이것은 알튀세르 이데올로기론이 비일관적이라고 주장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아울러 심사위원 B가 말하는 일관된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도 쟁점이 될 수 있다. 그것이 알튀세르 이데올로기에는 아무런 모순이나 난점 또는 한계가 없다는 뜻이라면, 그것은 내 관점하고는 다르다. 알튀세르 이데올로기론의 난점 내지 애매성에 관해서는 주 11)에서 언급한 진태원, 라깡과 알뛰쎄르및 주 44)의 논문들 참조.] 그렇다면 이데올로기는 다음과 같이 재규정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데올로기적인 것은 개인들이 자신들의 실존 조건, 그들의 실천, 그들의 대상, 그들의 계급, 그들의 투쟁, 그들의 역사, 그들의 세계 등과 맺는 체험된 삶의’(vécu) 관계를 규제한다.” [Ibid.]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데올로기가 개인적이거나 주관적인 본성을 갖는 것은 아니며, 이데올로기는 객관적인 사회적 관계”[Ibid. 강조는 원문].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러한 규정은 알튀세르가 마르크스주의와 인간주의(1964)(󰡔마르크스를 위하여󰡕에 수록)에서 제시된 생활세계로서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정의에서 개인들이 자신들의 현실적 실존 조건들과 맺는 상상적 관계에 대한 상상적 표상/재현/상연(représentation)”이라는 정의(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로 나아가는 도상에 있음을 보여준다(물론 아직 호명’(interpellation)이라는 저 유명한 개념은 등장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적인 것을 “‘이론적체계들과 실천적체계들또는 관념들의 체계(좁은 의미의 이데올로기들)와 태도-행위(습속)”를 포괄하는 넓은 개념으로 재정의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데올로기가 토대를 포함한 사회의 모든 심급이나 수준들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에, 이데올로기는 관념들이나 표상들로만 이루어지지 않고, 노동 행위, 기술적 행위, 통치 행위, 감독의 방식, 사고 습관, 믿음과 태도, 관행 등을 포괄하게 된다. 따라서 만약 이데올로기적 혁명이 필요하다면 이것은 단순히 관념들(또는 이데올로기) 내에서의 혁명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실천적 태도와 행위(또는 습속)에서의 혁명이어야 한다.” [Ibid., p. 15] 요컨대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서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생산관계 및 소유관계가 변혁된다고 해도, 노동자들의 노동 방식, 사고 습관, 생활 태도, 당 간부들의 작업 방식, 감독 태도, 생활 방식 등이 과거의 이데올로기적 관념들과 습속에 젖어 있다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바로 일정한 실천들, 곧 일정한 습속들(......)에서 자신의 지주를 발견할 수 있는[Ibid.] 것이다.


문화혁명이 단순한 이데올로기적 혁명이 아니라 대중의 이데올로기적 혁명이라는 점이 의미하는 또 다른 중요한 논점은 당과 구별되는 새로운 대중 조직들의 존재를 요구한다는 점이다. 전통적으로 마르크스주의 조직은 당이라는 정치 조직과 노동조합이라는 경제적 조직으로 분류되었다. 하지만 문화혁명은 (적어도 그 원칙의 수준에서는) 이 두 종류의 조직과 구별되는 제3의 조직, 이데올로기적 대중 조직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이는 사회주의 혁명 이후 새로운 국가의 지배 계급이 된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정치적으로 지도하는 것이 바로 공산당이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곧 자본주의 국가 내의 공산당이 정의상, 그리고 실천적으로 현존하는 자본주의 국가와 적대적인 거리를 유지하게 된다면, 사회주의 국가 내에서 공산당은 통치 정당이 된다. 이는 사회주의에서 당은 국가와 거의 동일시된다는 위험, 이 시기에 당은 국가와 자신을 융합하도록 부분적으로는 강제되고 부분적으로는 시도된다[Ibid., p. 17 강조는 원문]는 위험을 초래하게 된다. 그렇다면 사회주의 내에는 관료제, 통치자와 피통치자의 체계적 분리를 비롯한 부르주아 국가의 결함들로 전락할 수 있는 위험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셈이다. 따라서 알튀세르는 대중의 이데올로기적 조직들, 세 번째 혁명을 수행할 책임을 떠맡은 이 조직들이 수행해야 하는 역할은 바로 당이 국가로부터 자신을 구별하도록 강제하는 [Ibid. 강조는 원문] 일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과연 대중들이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까? 또는 대중들이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혁명을 자발적이고 자각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고, 따라서 당과 국가를 분리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 그것은 이미 대중들이 당이 없이도 (능동적) 주체들로 행위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 아닐까? 그리고 그것은 더 나아가 대중들을 사실 역사의 (대문자) 주체, 정치의 (대문자) 주체로 가정하는 것 아닐까? [주지하다시피 몇 년 뒤에 씌어진 󰡔존 루이스에 대한 답변󰡕(1973)에서 알튀세르는 역사를 만드는 것은 인간이다라는 존 루이스의 주장에 대하여 역사를 만드는 것은 대중들이다. 계급투쟁이 역사의 동력이다라는 테제를 대비시킨 바 있다. 하지만 알튀세르에 따르면 역사 (단수) 주체란 존재하지 않으며 역사 속의 (복수) 주체들만이 존재한다. Louis Althusser, “Responses to John Lewis, in Essays in Self-Criticism, trans. Grahame Lock, London: NLB, 1976, pp. 50, 59, 95. 강조는 원문.] 이 질문들을 통해 우리는 (잠정적인) 결론에 이르게 된다.

 

III. 혁명의 과소결정과 이행의 아포리아

 

1. 모순적인 이행기로서 사회주의, 그렇다면 공산주의는?

[심사위원 A는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개념에 관한 자신의 관점을 길게 제시하면서 논평하고 있는데, 그의 관점은 그것대로 존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문제에 관한 견해의 차이는 다른 지면에서 토론이나 논쟁을 통해 확인하거나 해결하면 될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의 논평에 대해 특별히 더 논의를 추가하지는 않겠다.]

 

우선 문화혁명과 관련하여 알튀세르가 제기한 사회주의 내에서의 퇴보라는 쟁점이 중요하다. 이는 사회주의 혁명이 그 자체로 자본주의와의 단절 또는 절단을 보증하는 준거가 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오히려 사회주의는 공산주의를 향해 전진할 수도 있지만, 역으로 언제든지 자본주의로 다시 후퇴하거나 퇴보할 수 있는 시기, 그러므로 본질적으로 모순적인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사회주의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1970년대 중반 서유럽 공산주의 정당들의 유로코뮤니즘 전환을 계기로 표출된 프랑스 공산당 당내의 사상투쟁에서 더욱 명확하게 제기된다. 알튀세르는 1976년 프랑스 공산당 제22차 당대회에서 사회주의로의 평화적 이행을 위해 프롤레타리아 독재 강령의 폐기가 이루어진 뒤 발표된 󰡔22차 당대회󰡕라는 소책자에서 사회주의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22차 당대회에서-인용자] 사회주의는 있는 그대로, 곧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의 모순적인 이행기로 제시되지 않았다. 반대로 그것은 도달해야 할 목표이자 동시에 한 과정의 종착점으로 제시되었다. 더 명료하게 표현하자면, 안정된 생산양식으로서, 그리고 다른 모든 생산양식과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고유한 생산관계 속에서 자신의 안정성을 발견하는 것으로서 제시되었다. (......) 그런데 마르크스와 레닌에게는 사회주의 생산양식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사회주의 생산관계, 사회주의 법 등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주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일체를 이루고 있으며, (......)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의 이행기’(마르크스와 레닌이 말했던 유일한 점이 이것이다)이며, 자본주의적 요소들(가령 임노동)과 공산주의적 요소들(가령 새로운 대중 조직)이 갈등적인 방식으로 공존하는 모순적인 시기이다. 이 시기는 정의상 불안정한 시기이며, 이 시기에 계급투쟁은 우리 자신의 계급투쟁에게는 식별될 수 없는, 판별하기 어려운 전화된 형태아래 존속한다. 그리고 이 시기는 역관계와 추구하는 노선에 따라 자본주의로 후퇴할 수도 있고 아니면 경직된 형태 속에서 제자리걸음을 할 수도 있고 아니면 공산주의로 전진할 수도 있는 시기다. [Louis Althusser, XXIIe Congrès, Paris: Maspero, 1977, pp. 48~49; 루이 알튀세르, 󰡔당 내에 더 이상 지속되어선 안 될 것󰡕, 이진경 엮음, 새길, 1992, 43~44. 강조는 원문.]

 

문화혁명에 대한 글에서 제기한 주장에서 더 나아가 이제 알튀세르는 사회주의는 하나의 독자적인 생산양식이 아니며, 따라서 사회주의 생산관계, 사회주의 법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것은 노동운동 및 공산당이 추구해야 하는 목표도 아니고 투쟁의 종착점도 아니며, 그 자체가 하나의 이행기다. 더욱이 사회주의는 안정된 시기가 아니라 불안정한 시기이고 모순적인 이행기이다. 이행기로서의 사회주의를 규정하는 모순은 자본주의적 요소들과 공산주의적 요소들이 공존하는 데서 생겨나는 모순이다.[알튀세르는 이미 1973년 무렵 씌어진 제국주의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사회주의 생산양식을 부정하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Louis Althusser, “Livre sur l’impérialisme”, in Écrits sur l’histoire, op. cit. 참조.]


알튀세르가 사회주의를 독자적인 생산양식이 아닌 것으로, 모순적인 이행기로 규정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의 폐기가 소련 및 프랑스 공산당과 같은 서유럽 공산당들의 교조적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을 이루는 단계론적 역사인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이는 같은 시기에 저술된 에티엔 발리바르의 󰡔민주주의와 독재󰡕에서 더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다. 발리바르는 이처럼 사회주의를 독자적인 생산양식으로 간주하는 것이 단계론적진화론적 역사관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한다.

 

마르크스에 대한 이렇게 비변증법적이고 기계론적진화론적 해석에서 공산주의사회주의가 완결될 때 비로소 시작되는 계기적인 단계로 이해된다. (......) 경향과 모순의 견지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이러한 진화론적 접근 논리에서는 그로부터 생겨나는 이론상의 난점을 회피하기 위해 중간 단계들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 과도기에, 제국주의와 사회주의로의 이행 사이에 또 하나의 중간 단계, 그리고 사회주의 단계 자체 내에 또 하나의 중간 단계 등등을 삽입시킨다. 그러나 왜 하필 이들 단계만 필요한가? 왜 그보다 더 또는 그보다 덜 필요하지 않은가? [에티엔 발리바르, 󰡔민주주의와 독재󰡕, 최인락 옮김, 서울: 연구사, 1988, 143. 강조는 원문. 이 책의 원제는 Sur la dictature du prolétariat, Paris: François Maspero, 1976이며, 따라서 원래대로 하면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하여󰡕라고 제목을 번역하는 것이 정확하다.]

 

또한 알튀세르와 발리바르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국면 내지 단계가 아니라 사회주의와 일체를 이루는것으로 규정한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새로운 계급적 지배를 가리키며, 지배 계급은 당연히 프롤레타리아 계급이다. 이러한 계급 지배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지배 계급인 부르주아 계급을 분쇄하기 위해 요구되는 것이지만, 이것은 프롤레타리아 계급 혼자만의 지배를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른 동맹자들에 대해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지도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계급적 지배다. 더욱이 이러한 계급적 지배는 오늘날 통용되는 좁은 의미에서, 곧 자유주의적인 의미에서 민주주의와 대립하는 의미의 독재가 아니라,[사실 마르크스가 파리코뮌에 대해 프롤레타리아 독재라고 불렀을 때, ‘독재라는 용어는 고대 로마의 일시적인 통치 방식인 딕타토르(dictator)를 염두에 둔 것이었으며, 오늘날 통용되는 자유주의적인 의미를 지닌 것이 아니었다. 최갑수, 해제: 빠리 꼬뮌, 프롤레타리아의 독재, 민주주의, 칼 마르크스, 󰡔프랑스 내전󰡕, 안효상 옮김, 박종철출판사, 2003 참조.] 민주주의와 동일시되는 독재, “가장 광범위한 대중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독재를 가리킨다. 따라서 당시의 알튀세르(와 발리바르)가 볼 때 사회주의로의 평화적 이행을 위해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을 폐기한 프랑스 공산당(및 다른 서구 공산당들)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차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뿐더러,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 자체가 사회주의를 의미한다는 것, 따라서 그것의 폐기는 사실 이행의 포기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몰이해하고 있는 셈이다. [유고로 발표된 상상적 인터뷰 형식의 󰡔검은 소󰡕 전체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의 중요성을 옹호하고 있다. Louis ALthusser, Les Vaches noires: Interview imaginaire, Paris: PUF, 2016.]


그런데 당시의 알튀세르(그리고 발리바르)가 끝까지 질문하지 않은 것은, 또 질문할 수 없었던 것은, 만약 사회주의가 독자적인 생산양식이 아니라 모순적인 이행기이며, 따라서 사회주의는 지속적인 혁명을 통해서만 공산주의로 전진할 수 있다면, 그럼 공산주의는 하나의 생산양식이며, 이행의 최종 목적지인가 하는 점이다. 만약 그렇다면 이러한 공산주의에 대한 관점이 역사철학이나 진화론, 그리고 경제주의에서 벗어나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알튀세르와 발리바르는 공히 공산주의를 역사적 단계나 먼 미래에 실현될 수 있는 이상으로 이해하는 관점을 비판한다. 가령 알튀세르에 따르면 이것은 공산주의가 이상이 아니며 우리 앞에서 전개되고 있는 현실적인 운동이라는 마르크스의 말을 구체적으로 환기시킨다. (......) 이것은 단순히 사회주의 전략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공산주의 전략이다. (......) 오직 공산주의 전략에서만 출발함으로써만, 사회주의는 과도적이고 모순적인 국면으로 파악될 수 있[].” [Louis Althusser, XXIIe Congrès, op. cit., p. 50; 루이 알튀세르, 󰡔당 내에 더 이상 지속되어선 안 될 것󰡕, 45. 강조는 원문. 또한 유고로 발표된 “Marx dans ses limites”, in Écrits philosophiques et politiques, tome I, Paris: Stock/IMEC, 1993에서의 더 상세한 논의도 참조.] 또한 발리바르는 󰡔민주주의와 독재󰡕에서 공산주의는 이상이 아니며, 예측하거나 예언할 수 있는 미래에 있어서의 단순하고 추상적인 역사적 단계도 아니라는 것, 오히려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현존하는 모순들 내부에 존재하면서 점차로 강력해져가는 하나의 현실적 경향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리고 발리바르는 현실적 경향으로서 공산주의의 두 형태를 생산 및 생산력의 사회화로의 경향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에티엔 발리바르, 󰡔민주주의와 독재󰡕, 152. 강조는 원문.]이라는 형태로, 곧 생산관계 및 소유관계의 변혁과 (부르주아) 국가장치의 철폐 및 비()국가적인 소비에트(또는 평의회) 권력의 강화가 그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알튀세르가 문화혁명에 대하여에서 제기한 3번째 혁명, 곧 대중들의 이데올로기 혁명의 문제는 빼놓고 있는데, 이 문제가 제기되면 공산주의라는 이념은 깊은 아포리아에 빠져 있음이 다시 드러나게 된다.


역으로 공산주의 역시 모순에서 자유롭지 않다면(주지하다시피 알튀세르는 이미 마르크스주의와 인간주의에서 공산주의 사회에도 이데올로기가 존재한다는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테제를 제기한 바 있다), 그렇다면 이행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에도 모순적인 계급투쟁이 존재하고(자본주의는 두 가지 대립하는 사회적 경향, 곧 자본주의를 재생산하려는 경향과 이미 존재하는 공산주의적 경향 사이의 모순이므로) 사회주의 또한 그렇다면, 그리고 공산주의 역시 모종의 계급투쟁에서 면제되지 않는다면, 이행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의문스러워지기 때문이다. 이행은 역사적 과정 내에 항상 이미 존재하며, 결코 끝이 없는 어떤 것, 따라서 사실은 역사의 갈등적인 과정 자체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알튀세르(와 당시의 발리바르)가 제기하지 않았지만, 오늘날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질문은 이행이라는 문제설정과 분리된 해방을 사고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일 것이다.


발리바르는 2000년에 발표된 공산주의 이후에 어떤 공산주의가?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더. “19세기와 20세기 마르크스주의에서 (......) 사회주의는 잠재적 공산주의로 간주됨과 동시에, 공산주의는 사회주의의 귀결점이자 완성으로 생각되었다. 이같은 목적론적 분절은 (......)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망 속에서 역사적 이행이라는 근본 관념과 일체를 이룰 따름이다. (......) 하지만 우리가 이제부터 근본적으로 상대화해야 할 것이 바로 이 관념이다.” [Etienne Balibar, “Quel communisme après le communisme?”, in Eustache Kouvelakis ed., Marx 2000, PUF, 2001, pp. 78~79; 허은진 옮김, 공산주의 이후에 어떤 공산주의가?, 웹진 인-무브. 강조는 원문. http://en-movement.net/118 (2018.7.12. 접속)] 또한 2017년에 이루어진 인터뷰의 한 대목도 인용할 만하다.

 

우리가 마르크스에서 상속받은 공산주의 이념은 그 역사가 유구하여, 근대성을 가로지르고, 종교적 이단 및 사회적 반란과 깊숙이 얽혀 있습니다. (......) 이후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적 희망이 과학적 토대를 부여받으려면 역사적 진화 안에 미래의 생산양식으로서 기입되어야 한다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었고, 이 진화의 방향을 따라 필연적으로 계급에 기초한 사회에서 계급 없는 사회에 이를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 저는 마르크스에게서 이러한 형태의 근본적 진화주의와 경합하는 요소들을 찾는 중이었고, 몇 가지를 찾아냈습니다. 제 의도는 한편으로 정치에 속하는 불확실성과 창조성의 차원을 복원하는 것이었고, 다른 한편으로 대안을 최종목적지라고보다는 접합 지점(junction)으로 사고하는 것이었습니다. [Etienne Balibar, “The Communist Desire to Change the Worldand Ourselves”, in “Dossier: The Return of Communism”, The Viewpoint Magazine, 2017.1.18https://www.viewpointmag.com/2017/01/18/the-communist-desire-to-change-the-world-and-ourselves/ (2018.7.13. 접속); 세계-그리고 우리 자신-를 바꾸려는 공산주의적 욕망, 장진범 옮김. 웹진 인-무브. http://en-movement.net/65?category=733236 (2018.7.12. 접속)]

 

이는 모두 공산주의를 진화주의적 역사철학에서 떼어내어 그것을 마르크스의 또 다른 생각, 현존하는 상태를 폐지하는 현실적 운동으로서의 공산주의라는 생각에 입각하여 탈구축하려는 노력을 표현하는 것이다. [최근 몇몇 외국의 연구자들은 이러한 관점과 다른 시각에서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의 이론을 원용하여 이행의 문제를 다시 사고하려고 시도한 바 있다. Alberto Toscano, “Transition Deprogrammed”, The South Atlantic Quarterly, vol. 113, no. 4, 2014; Fabio Bruschi, “Dualité du pouvoir, stratégie du communisme et dépérissement de l’Etat. Le débat entre Althusser et Poulantzas”, Actuel Marx, no. 63, 2018을 각각 참조. 두 연구자는 모두 레닌주의적인 이중 권력이론을 현재적으로 재구성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알튀세르만이 아니라 발리바르 자신의 1970년대 작업을 원용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는 역으로 보자면, 두 사람 모두 1980년대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발리바르 작업의 핵심 요소 중 하나인 이데올로기론과 철학적 인간학(‘인간학적 차이들’)의 문제설정을 (의도적으로 배제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적어도) 간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발리바르의 철학적 인간학의 최근 방향에 관해서는, Etienne Balibar, “Fermeture. Malêtre du sujet: universalité bourgeoise et différences anthropologiques”, in Citoyen sujet et autres essais d'anthropologie philosophique, PUF, 2011; “Une nouvelle querelle”, in Des universels, Galilée, 2016을 각각 참조. 또한 국내의 논의로는 서관모, 반폭력의 문제설정과 인간학적 차이들: 에티엔 발리바르의 포스트마르크스주의적 공산주의, 󰡔마르크스주의 연구󰡕 52, 2008을 참조.]

 

2. 이데올로기적 혁명인가 혁명의 과소결정인가?

 

이 질문은 이데올로기적 혁명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문화혁명에 관한 글에서 알튀세르가 사회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을 위해서는 정치적 혁명, 경제적 혁명에 더하여 대중의 이데올로기적 혁명이 필요하다고 역설한 것은, 이데올로기적 혁명이야말로 이행의 성패를 좌우하는 궁극적인 혁명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혁명의 주체성, 역사의 주체성을 보증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알튀세르가 유고로 출판된 우발성의 유물론이나 마주침의 유물론 이전까지 계속 고수하고 있었던 유물론적 테제, 곧 상부구조에 대한 토대의 우위, 억압에 대한 착취의 우위라는 테제와 충돌이 불가피할 것이다. 정치권력의 장악도, 생산관계 및 소유관계의 변화도 혁명을 보증하는 데, 따라서 역사에서의 진보를 확고히 하는 데 불충분하며, 그것은 항상 이데올로기적 혁명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혁명의 주체성의 생산 및 재생산으로서 이데올로기적 혁명이 이행의 궁극적 준거가 된다면, 그것은 알튀세르 자신의 이데올로기에 관한 테제와 또 다시 충돌을 모면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알튀세르 이데올로기론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호명 개념은 바로 주체의 생산 및 재생산으로 정의되며, 이때의 주체는 정의상 예속적인 주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데올로기적 혁명을 혁명의 주체들의 생산 및 재생산이라고 할 수 있다면, 그 주체는 역설적이게도 예속적인 주체이면서 혁명의 주체가 되는 셈이다. 이러한 모순 내지 역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는 본성상 부르주아 또는 프티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와 다르다는 가정이 수반되어야 하는데, 이번에는 그러한 본성상의 차이를 무엇이 규정하는가라는 질문이 불가피하게 제기될 것이며, 다시 그것은 착취나 억압에서 자유로운 프롤레타리아 계급, 사회주의 국가의 이데올로기라는 동어반복을 되풀이하는 것 이상으로 나아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만약 사회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이 대중의 이데올로기적 혁명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면, 사실 그것은 사고해야 할 문제를 다른 문제로 계속 대체하는 것 이상의 것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이행이란 불가능하다는 문제, 또는 이행이 보증하는 해방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문제다. 그리고 그 역의 문제는 대중들이 역사를 만들지만, 대중들은 주체가 아니다라는 문제다. 이런 의미에서 이행으로서의 혁명과 혁명의 주체는 근본적으로 과소결정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아마도 문제는 이행의 문제도, 대중들의 이데올로기적 혁명의 문제도 아니고, 오히려 주체화의 문제일 것이다. 물론 이때의 주체화는 갈등적인 복수의 주체화(계급, 젠더, 인종, 국민 등)일 것이며, 예속과 해방, 봉기와 구성, 통치와 피통치의 모순적인 과정 속에서 전개되는 주체화일 것이다. [주체화의 문제에 관한 더 자세한 논의는 에티엔 발리바르, 󰡔마르크스의 철학󰡕, 배세진 옮김, 서울: 오월의책, 2018 및 진태원 정치적 주체화란 무엇인가? 푸코, 랑시에르, 발리바르, 󰡔을의 민주주의󰡕, 서울: 그린비, 2017을 참조.] 하지만 이것은 또 다른 지면이 필요한 주제다. 여기에서도 발리바르 글의 한 대목을 인용하는 것으로 만족하겠다.

 

바로 이로부터 내가 끌어내는 결론은, “공산주의자들은 별도의 당을 형성하지 않는다[󰡔공산당 선언󰡕-인용자] 발상을 되찾고 재정식화해야 한다는 것이며, 이 발상에 나는 의도적으로 도발적인 다음과 같은 형태를 부여할 것이다. 아마 우리 공산주의자들은 특정한 조직들(그리고 다소간 조직된, 특정한 캠페인들)에 참여하고, 조직된 투쟁들과 캠페인들과 운동들에서 주도성을 발휘하려고 특히 노력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다시피, 구체적 목표에 따라 조직 형태가 아무리 다양하더라도(심지어 교회와 군대, 국가조차 조직 형태의 하나로 포괄될 수 있다), 조직들이 없다면 정치도 없기 때문이다. (......) 그런데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어떤 본래적 의미의 조직도, 심지어 비밀조직도 구축하지 않는다. 우리가 하는 것은 차라리, 현존하는 조직들, 즉 우리가 구성원 및 활동가로 속한 조직들 자체를 흔들어놓는 것(désorganiser), 아니 -조직하는 것(dé-organiser)이다. (......) ‘사라지는 매개자’ (......) [Etienne Balibar, “Communism as Commitment, Imagination, and Politics”, in Slavoy Zizek ed., The Idea of Communism, vol. II, Verso, 2013, p. 34; 에티엔 발리바르, 공산주의의 질문들, 장진범 옮김, 웹진 인-무브. http://en-movement.net/84?category=733236 (2018.7.12. 접속)]

 

3. 알튀세르의 교훈

 

이제 68운동에 대한 알튀세르의 평가로 되돌아가보자. 알튀세르가 68운동에 대하여 양가적인 태도를 보인 이유, 곧 한편으로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대중의 이데올로기적 반역으로 평가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것이 끝내 융합에 이르지 못했다고 평가한 이유는 무엇보다 알튀세르가 매우 충실한 마르크스주의자였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사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알튀세르는 그 자신이 매우 양가적인 존재였다고 말할 수 있다. 한편으로 그는 20세기 후반의 가장 독창적이고 혁신적인 마르크스주의자로 간주되는데, 인식론적 절단, 과잉결정(및 과소결정), 구조인과성, 이데올로기의 물질성, 호명 같은 개념들은 그의 사상의 독창성을 단적으로 표현해준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그는 이른바 서방 마르크스주의의 이론가들 중에서 가장 정통적인, 심지어 교조적인 이론가의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변증법적 유물론과 사적 유물론이라는 스탈린주의적 도식을 (매우 변형된 형태이긴 하지만) 고수한 것, 이데올로기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지속적으로 토대의 우위를 강조한 것,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에 대한 완고한 방어, 다른 많은 지식인들과 달리 공산당에서 끝내 탈당하지 않은 것 등이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이 때문에 그는 685월 운동의 전례 없는 새로움, 학생들의 이데올로기적 반역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그것이 노동자운동과 융합되어야 한다는 점, 더욱이 공산당이 운동의 전위로서 남아 있어야 한다는 점을 역설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68 운동에 대한 알튀세르의 평가는 여러 모로 결함을 지닌 것으로 나타난다. 알튀세르는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입장을 고수한 까닭에 68 운동이 표현했던 세계혁명[Immanuel Wallerstein, “1968, Revolution in the World-System”, in Geopolitics and Geoculture,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1; 1968, 자본주의 세계체제에서의 혁명, 󰡔변화하는 세계체제: 탈아메리카와 문화이동󰡕, 김시완 옮김, 서울: 백의, 1995 참조. 또한 뮈르달의 유산: 인종차별주의와 저개발의 딜레마」 󰡔사회과학으로부터의 탈피󰡕, 성백용 옮김, 서울: 창작과비평사, 1994도 참조.]적인 성격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을 뿐더러, 푸코가 이후에 강조했던 것처럼 68 운동이 사회의 특정한 계층과 청년 문화에 영향을 발휘하던 권력 형태의 전체적인 연결망에 대한 반역이었다는 것”,[미셸 푸코, 󰡔푸코의 맑스: 둣치오 뜨롬바도리와의 대담󰡕, 이승철 옮김, 서울: 갈무리, 2004, 140.] 따라서 그것은 제도적실천적으로 배제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론적 또는 담론적으로도 배제된 이들에 관한 문제제기였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알튀세르는 다른 어떤 마르크스주의자들보다 더 사회를 구성하는 심급들’(instances)경제, , 이데올로기, 지식의 다양성과 환원 불가능성을 강조했지만(과잉결정 개념이 대표하는 것), 동시에 이것들 모두는 최종 심급에서계급투쟁의 상이한 표현들이라는 점을 고수했다. 그에게는 이것이야말로 마르크스주의의 양보할 수 없는 유물론적 핵심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매일 확인하게 되는 것은 이데올로기적 갈등(특히 우리나라에서는 국민주의 및 민족주의로 표현되는), 성적 차이 및 적대, 인종적 갈등, 생태적 위기 등은 결코 계급 모습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보면 알튀세르가 제기한 문제는 여전히 우리 자신의 문제로 남아 있음을 깨닫게 된다. 우선 68운동이 과연 성공한 운동이었는가, 심지어 혁명이었다고 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남는다. 월러스틴처럼 세계체계론의 시각에서 그것은 실패한 혁명이었지만 세계적인 혁명이었다고 말하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알튀세르처럼 그것이 융합에 이르지 못했다고, 68운동에 참여한 다양한 세력들, 특히 이데올로기적 반역 세력과 계급착취에 저항하는 세력이 마주쳤지만 융합에 이르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도 가능하다(아마 라클라우와 무페라면 절합’(articulation)이나 민중적 요구’(popular demand)를 형성하는 데 이르지 못했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융합에 이르지 못하는 한에서 진정한 혁명()은 일어날 수 없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그는 옳았다.


또한 알튀세르가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로서 계급투쟁의 우위를 강조하고 다른 투쟁들을 이러한 투쟁의 우위에 종속시키려고 했던 것이 사실이라면, 68 운동 당시에도 그랬거니와 오늘날의 많은 68의 후예들은 계급투쟁의 중요성을 간과했던 것은 아닌가? 곧 고전 마르크스주의에 고유한 경제주의와 노동의 인간학에서 벗어난다는 구실 아래 오히려 자본주의의 모순 및 계급투쟁의 문제를 청산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망각하고 그 문제를 권력의 문제나 문화의 문제, 젠더의 문제로, 또는 단순히 복지국가(또는 사회국가)의 문제로 대체한 것은 아닌가? 하지만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면서 우리가 여실히 깨닫게 된 점은 이 모든 문제들에 계급투쟁의 문제가 스며들어 있다는 점이다. [심사위원 C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 있다. “5월 혁명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이 부족하기 때문에 조금 더 보완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알튀세르가 5월 혁명의 가치를 적합하게 이해하지 못했다는 주장에는 충분히 동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주장은 5월 혁명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저자 자신의 분석이 제시될 때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이 글에서는 5월 혁명의 어떤 가치와 의의에 주목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제시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 지적에는 두 가지 답변을 할 수 있다. 첫째, 이 글에서 나의 주제는 685월 운동 자체가 아니라, 알튀세르가 685월 운동을 어떻게 평가했으며, 이러한 평가가 그의 이론적 전개과정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더 일반적으로 본다면 이행해방의 문제와 관련하여 어떤 함의를 갖는가 여부였다. ‘5월 혁명에 초점을 맞춰 논의를 전개하는 것은 이 글의 주제가 아니기 때문에, 월러스틴이나 푸코의 평가와의 간략한 대비로 논의를 대신한 것이다. 둘째, 3알튀세르의 교훈에서 내 논점은 알튀세르가 5월 혁명의 가치를 적합하게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일방적으로 알튀세르 평가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 나의 논지는 아니었다. 오히려 내 논지는 월러스틴과 푸코가 발견한 5월 운동의 어떤 측면들을 알튀세르가 이해하지 못했을 수 있지만, 역으로 그들(및 다른 이들)이 파악하지 못한 다른 점들을 알튀세르의 5월 운동에 대한 평가가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또한 심사위원 C는 심사평의 다른 대목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초록에서 알튀세르가 68년 혁명을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고 썼습니다. 그러나 아카이브를 통해 알튀세르의 미발표 원고가 널리 알려진 지 이미 오래되었고, (그 원고들들 통해) 그가 68 혁명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점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따라서 이 부분은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알튀세르 유고 가운데 68에 관해 상세하게 언급하거나 분석하는 곳은 󰡔재생산에 대하여󰡕 정도밖에 없으며, 내가 이 글에서 주요 분석 대상으로 삼은 두 편의 글은 이미 그의 생존시에 발표되어 있었다. 따라서 유고가 나온 이후 알튀세르가 68을 중요하게 생각했음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더욱이 널리 알려져 있다는 심사위원 C의 언급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은 과문한 탓에 알튀세르와 68의 관계를 다루는 국내외의 문헌을 발견하지 못했다. 따라서 나로서는 어떻게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고 말할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계급투쟁의 기치를 높이 들고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로의 이행을 위해 투쟁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것은 마치 현존 사회주의 체제 붕괴 이후 30여 년 동안, 또는 알튀세르의 문제제기(과잉결정 및 과소결정) 이후 50여 년 동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예전의 좋았던정통 마르크스주의로 돌아가자는 말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우리는 오히려 알튀세르가 고심했던 그 문제에서 다시 출발해야 할 것이다. 어떻게 여러 가지 적대 내지 갈등(계급, 문화, 인종, 젠더 등)을 위계적으로 구조화하지 않으면서 이것을 자본주의의 모순()과 연결할 수 있는가? 어떻게 우리는 과잉결정된 자본주의의 모순을 넘어 이러한 연결을 사고할 수 있는가? 혁명의 과소결정 속에서의 해방과 변혁이란 무엇인가?

 

4. 과소결정 및 콩종크튀르에 관한 보론

 

마지막으로 내가 이 글의 제목으로 사용한 과소결정이라는 개념에 관해 몇 가지 보충적인 설명을 덧붙여두겠다. 이 글의 심사위원 세 명은 공통적으로 내가 사용한 과소결정 개념이 모호하거나 문제가 있다고 비평을 제기한 바 있다. 내가 이 글에서 과소결정 개념에 대해 별도의 논의를 하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이미 이전에 다른 글에서 몇 차례 이 개념을 논의한 바 있기 때문이다. [진태원, 라깡과 알뛰쎄르: ‘또는알뛰쎄르의 유령들 I, 앞의 주 11)의 글; 과잉결정, 이데올로기, 마주침, 앞의 주 44)의 논문 참조.] 하지만 심사위원들이 해명을 요구하기 때문에, 이 개념에 관한 좀 더 전문적인 논의는 다른 글에서 하고 여기에서는 간략하게 몇 가지 논점만 제시하겠다.


과소결정이라는 단어 자체는 나타나지 않지만 그것의 개념적 의미소가 처음 등장하는 곳은 󰡔마르크스를 위하여󰡕에 수록된 모순과 과잉결정이다. “‘과잉결정된 모순역사적 억제라는 의미에서, 모순의 진정한 차단의 의미에서 과잉결정될 수도 있고(빌헬름 시대의 독일) 또는 혁명적 단절의 의미에서 과잉결정될 수도 있지만(1917년의 러시아), 이러한 조건들 속에서 모순은 결코 순수한 상태로 자신을 현시할 수 없다고 주장할 것이다.”[루이 알튀세르, 󰡔마르크스를 위하여󰡕, 189. 강조는 원문의 것이고 번역은 다소 수정했다.] 따라서 알튀세르는 surdétermination이라는 개념(곧 우리가 과잉결정으로 번역한)혁명적 단절이라는 의미와 더불어 역사적 억제또는 모순의 진정한 차단’”이라는 뜻 역시 표현할 수 있는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이중적 함의를 갖는 surdétermination다원결정이나 다중결정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과소결정이라는 용어 자체가 처음 등장하는 곳은 󰡔자본을 읽자󰡕에 수록된 자본의 대상인데, 여기에서는 그것의 과잉규정 내지 그것의 과소규정이라고 불려온 것[Louis Althusser, “L’objet du Capital”, in Lire le Capital, p. 293. 강조는 원문.]라고 두 개념이 병치되고 있을 뿐, 새로운 용어의 등장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제대로 설명되지 않고 있다. 사실 이 대목은 자본의 대상전체에서 제일 핵심적인 대목 중 하나이기 때문에, 이러한 병치의 함의를 이해하려면 또 다른 본격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과소결정 개념에 대한 더 상세한 해명이 제시되는 텍스트는 1975년에 발표한 철학에서 마르크스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인가?라는 글이다.[이 글은 알튀세르가 아미엥 대학에서 업적에 근거한 박사학위를 받으면서 자신의 연구를 집약해서 소개한 박사학위 업적 소개문이다. Louis Althusser, “Soutenance d’Amiens”(1975), in Solitude de Machiavel et autres textes, ed., Yves Sintomer, Paris: PUF, 1998; 아미엥에서의 주장, 김동수 옮김, 󰡔입장들󰡕, 서울: , 1991.] 알튀세르는 헤겔 변증법과 달리 마르크스의 변증법은 모순의 불균등성을 보여줄 수 있으며, 이러한 불균등성은 필연적으로 모순의 과잉결정 또는 과소결정이라는 형태 속에 반영됩니다[Ibid., p. 215; 같은 책, 153. 강조는 원문의 것이고 번역은 수정했다.]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행 또는 혁명의 문제와 관련하여 과소결정 개념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혁명이 일어난 것은 19세기의 영국이 아니었으며 20세기 초의 독일도 아니었습니다. 혁명은 가장 발전한 나라들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곧 러시아에서, 그리고 그 뒤에는 중국이나 쿠바 등지에서 일어났습니다. 불균등발전이라는 레닌의 범주(이는 모순의 불균등성 및 모순의 과잉- 그리고 과소-결정(sa sur- et sa sous-détermination)을 가리킵니다) 없이, 제국주의의 주요 모순이 가장 약한 고리로 이처럼 전위되는 것을 어떻게 사고할 수 있으며, 이와 관련하여, 계급투쟁이 승리를 거둘 것처럼 보이는 나라들에서 계급투쟁의 이러한 침체를 어떻게 사고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일부러 과소결정을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은 결정에 무언가를 추가하는 것은 쉽게 받아들이는 반면, 과소결정이라는 관념, 곧 그것을 넘어서지 못하면 혁명이 유산되고 혁명 운동이 침체되거나 사라지게 되며, 제국주의가 부패 속에서 발전하게 되는 등의 일이 일어나는, 결정의 문턱이라는 관념은 견뎌내지 못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Ibid., p. 217; 156. 번역은 수정했다.]

 

이 대목에서 결정의 문턱이라는 말에 주의한다면, 내가 이 글에서 사용한 과소결정이라는 개념의 일차적인 의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혁명이 일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혁명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결정 내지 조건이며, 더욱이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만이 아니라, 사회주의 자체 내에서 혁명의 진전, 공산주의의 실천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결정 내지 조건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더 나아가 내가 또한 주목하고 싶었던 것은 모순의 과잉- 그리고 과소-결정이라는 표현이다. 알튀세르는 과잉결정 또는 과소결정이라고 하지 않고, “과잉-결정 그리고 과소-결정이라고 하지도 않으며, “과잉- 그리고 과소-결정이라고 표현한다. ‘과잉-’과소-’라는 두 개의 접두어를 함께 사용한 것은 내가 보기에 첫째, 모든 결정은 항상 과잉과 과소를 함께 수반함을 뜻한다. 사실 모순이 과잉결정의 개념 속에서만 사고되면, 그것은 결국 목적론적 관점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다. 모순의 과잉결정은 구조화된 복잡한 전체의 위계화된 결정 관계라는 의미에서 최종 심급에서의 결정과 연결하여 사고되며, 또한 알튀세르는 그것을 통해서만 헤겔 변증법과 구별되는 유물론적 성격을 획득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는 다른 말로 하면 유물변증법이야말로 역사의 우연성(contingence) 또는 예외, 이질성, 다양성 등을 설명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렇게 전체가 복잡화되고 결정 관계가 다중적으로 전개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항상 기본 모순에 의한 최종 심급에서의 결정에 따라 지휘되는 것이고, 결국 공산주의로의 이행의 필연성에 따라 규정되는 것이다. 따라서 과잉결정이 표현하는 우연성의 계기는, 발리바르가 다른 글에서 쓴 표현을 빌리면, 우연의 필연-(devenir-nécessarie de la contingence) 과정 속으로 포섭되는 것이다. 반면 단지 모순의 과잉결정만이 아니라 모순의 과잉결정이면서 동시에 과소결정이 문제가 되면, 역사는 우연의 필연-화가 아니라, 필연의 우연-(devenir-contingent de la nécessité), 또는 우연성의 우연[Etienne Balibar, “Avant-propos pour la réédition de 1996”, in Louis Althusser, Pour Marx, p. XIII; 󰡔마르크스를 위하여󰡕, 34. 강조는 원문.]의 계기도 포함하는 것으로, 더 나아가 전자에 비해 이 후자가 존재론적으로 우선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 내 생각에는 이것이 알튀세르 말년의 이른바 마주침의 유물론 내지 우발성의 유물론의 한 가지 이론적 핵심이다.


둘째, 이렇게 우연성의 우연의 계기를 사고한다는 것은, 현존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 이후 우리나라 마르크스주의 연구자들의 최대 공약수라고 할 수 있는 절합의 문제설정, 곧 자본주의의 기본 모순을 중심으로 하여 성적 차이 내지 젠더 간 적대, 인종 및 국민주의, 생태적 적대 등을 그것과 절합하려는 문제설정을 넘어선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에 내재해 있는 공산주의의 경향 내지 잠재력을 실현하려고 하는 것은 다른 것들의 쟁점을 과소결정하는 것(또는 다른 말로 하면 배제하거나 주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가 마지막 문단에서 염두에 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정세또는 콩종크튀르에 관해 간략하게 언급해두자. 나는 심사위원 BC의 생각과 달리 알튀세르에게 conjoncture 개념은 그의 사상의 전개과정 속에서 상이한 의미를 부여받고 있다고 본다. 과잉결정된 모순이 폭발하는 혁명적 정세, 또는 어쨌든 기존 질서가 위기에 빠지는 예외적 상황이 첫 번째 의미라면, 󰡔자본을 읽자󰡕에서는 좀 더 엄밀한 존재론적 의미를 부여받는다. 특히 다음 대목이 주목할 만하다.

 

만약 우리가 역사 속에서 본질적 단면을 구현할 수 없다면, 우리는 전체의 복잡한 구조의 종별적 통일성 속에서 이른바 지체, 선행, 잔재, 불균등 발전 같은 것들의 개념을 사고해야 하는데, 이것들은 현실적인 역사적 현재, 콩종크튀르(conjoncture)의 현재의 구조 속에서 공동-실존한다(co-existent). 따라서 이러한 지체 및 선행을 측정할 수 있는 토대의 시간에 준거하게 되면, 상이한 역사성들의 유형들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다. [Louis Althusser, “L’objet du Capital”, in Lire le Capital, p. 293. 강조는 원문.]

 

여기서 콩종크튀르는 표현적 총체성에 입각한 라이프니츠-헤겔 식의 역사철학적 현재 개념과 대비되는 현실적인 역사적 현재로서 제시된다. 이러한 의미의 콩종크튀르는 그 속에서 지체, 선행, 잔재, 불균등 발전 같은 것들 ... 이 공동-실존하는 것이다. 따라서 콩종크튀르는 본질의 단면으로서가 아니라 이질적이고 불균등한 것들이 공존하는 역사적 현재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이질적이고 불균등한 것들이 어떻게 공동-실존할 수 있는지, 그것들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질문이 제기될 수 있는데, 알튀세르는 이를 다원적인 역사적 시간들의 공동-실존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하려고 한다.


그런데 주 4)에서 언급했듯이, 󰡔자본을 읽자󰡕에는 나오지 않지만, 비슷한 시기에 쓰인 발생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알튀세르는 “‘마주침의 이론내지 콩종시옹이론”(‘théorie de la rencontre’ ou théorie de la ‘conjonction’)에 관심을 기울인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표현이 콩종시옹이라는 개념이다. ‘연결내지 연접또는 연계등으로 옮길 수 있는 이 개념은 알튀세르가 사건을 이질적인 요소들 내지 힘들 사이의 마주침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이러한 마주침을 다른 말로 표현하여 콩종시옹으로 사고하려 했음을 잘 보여준다. 왜 하필이면 콩종시옹일까? 그것은 이 콩종시옹과 같은 어근을 갖고 있는 것이 바로 콩종크튀르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콩종크튀르는 이행이나 변혁을 위해서 서로 마주쳐야 하는 것들이 마침내 마주치고 융합하게 되는, 또는 그것을 기대할 수 있는 상황 내지 시기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주지하다시피 말년의 우발성의 유물론이나 마주침의 유물론에 가면 콩종시옹이나 콩종크튀르는 훨씬 더 급진적인 함의를 갖게 된다. [Louis Althusser, Sur la philosophie, Paris: Gallimard, 1994; Écrits philosophiques et politiques, tome I, op. cit.에 수록된 여러 글 참조. 국역본으로는 서관모백승욱 옮김, 󰡔철학에 대하여󰡕, 서울: 동문선, 1997; 서관모백승욱 옮김, 󰡔철학과 맑스주의: 우발성의 유물론을 위하여󰡕, 서울: 새길, 1996 참조.] 여기에서는 이미 구조(자본주의 같은)가 존재하고, 그 구조 내에 존재하는 또는 그것에 의해 결정되는 어떤 요소들 사이의 마주침이나 콩종시옹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 또는 구조에 선행하는 어떤 마주침과 콩종시옹이 문제가 된다. 허공 속에서 서로 수직으로 낙하하는 원자들이 어떤 우발성에 의해 클리나멘(clinamen)을 겪게 되고, 이로써 원자들의 마주침 또는 연접이 지속되면 거기에서 세계 또는 구조가 생겨나게 되며, 일단 생겨난 구조는 자신의 고유한 근거와 법칙, 질서에 따라 자신을 재생산하게 된다. 따라서 󰡔마르크스를 위하여󰡕󰡔자본을 읽자󰡕에서는 구조의 우위가 전제된 가운데 정세로서의 콩종크튀르를 사고하는 것 또는 구조와 콩종크튀르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 문제였다면, 우발성의 유물론에서는 오히려 콩종시옹 내지 콩종크튀르야말로 세계 내지 구조의 발생을 설명하는 일차적인 것으로 제시된다. 더 나아가 단순히 구조의 발생만이 아니라 구조의 재생산변혁 역시 마주침 내지 콩종크튀르에 달려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극히 도식적이고 간략하기는 하지만, 이러한 일별만으로도 초기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 알튀세르는 똑같은 정세개념을 갖고 있었다고 하기 어렵지 않을까?


우리말의 정세는 여러 뜻을 갖고 있는데, 알튀세르와 관련된 맥락에서는 일이 되어가는 사정이나 형편이라는 뜻(한자로는 情勢)이나 정치상의 동향이나 형세”(한자로는 정세)라는 뜻이 어울린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과연 이런 두 가지 뜻으로 이해된 정세라는 번역어가 알튀세르가 사용하는 콩종크튀르라는 개념의 함의를 다 표현할 수 있을까? 말년의 우발성의 유물론이나 마주침의 유물론에서 제시되는 개념적 의미는 고사하고, 󰡔자본을 읽자󰡕에서 제시된 존재론적시간이론적 함의조차 제대로 표현할 수 있을까? 나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며, 이 때문에 머리말에서 모순과 과잉결정같은 글에 나오는 용법을 고려하면 정세라는 번역어를 쓸 수 있다고 해도 이 개념의 전체적인 용법과 의미를 고려하면 당분간은 콩종크튀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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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mb 2018-08-07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생님 좋은 글 감사히 읽고 갑니다. 멋지십니다!ㅋㅋ

balmas 2018-08-08 00:46   좋아요 0 | URL
ㅎㅎ 감사합니다.

disjunction 2021-11-05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선생님, 좋은 글 항상 잘 읽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 예전에 읽고 쉽게 지나쳤던 부분이 있었는데, 어쩌다 관련 논의를 하다보니 제가 이해를 못 한 부분이 있어서 질문을 드리게 됐습니다. 과소결정에 대한 부분인데요, 혼자 이해해보려고 했지만 국내의 관련 자료들이 오래돼서 선생님 글 이외에는 구하기가 쉽지 않아 도저히 답이 안 나와서 질문을 드립니다.

선생님이 인용하신 알튀세르의 글에는 과소결정이 ‘혁명이 일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혁명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결정 내지 조건이며, 더욱이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만이 아니라, 사회주의 자체 내에서 혁명의 진전, 공산주의의 실천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결정 내지 조건’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대목을 볼 때, 모순의 과소결정이 혁명의 불가능성만을 의미하는 소극적 개념인지, 아니면 과소결정이 혁명의 특정한 방향성을 최소로 지시한다고 보아야 할지 궁금해집니다.

모순에 대해 모든 구성적 요소들의 모순의 다양성과 복잡성, 혁명 이후의 회귀 가능성을 내포하는 것이 그 모순의 과잉결정이라면 이 과잉결정과 접두어를 공유하는 과소결정은 그 모순의 최소치일테고 그래서 알튀세르 자신이 문턱이라고 표현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알튀세르는 혁명을 가능하게 만드는 최소한의 결정 내지 조건이라고 말하지는 않고 있어서 혼란스럽네요. 선생님이 ‘자본주의에 내재해 있는 공산주의의 경향 내지 잠재력을 실현하려고 하는 것은 다른 것들의 쟁점을 과소결정하는 것’이라 하셨을때에는, 과소결정을 혁명을 불가능/가능하게 만드는 최소한의 결정 내지 조건의 양가성으로 보는 것을 염두에 두고 계신 것 같은데 제가 잘못 생각한 것인지요?

추가로, 저는 이 대목을 이란 혁명과 관련해서 생각해보았는데 어떠한 이해가 알튀세르의 관점에서 합당한지 궁금합니다. 이란 혁명 역시 모순의 과잉결정 속에서 발생했고, 또 과잉결정된 요소로 인해 퇴행적 이데올로기들이 강화되고 작동했다고 말할 수 있겠죠. 그런데 과소결정에 주목한다면, 이란 혁명이 공산주의 혁명이 아니었던 까닭은 1) 종교적 모순의 과소결정에 의해 경제 모순은 부차적인 것이 되었다 2) 경제 모순의 과소결정의 문턱에 의해 경제 모순이 부차적인 것이 되었다 3) 1,2에서 시도하는 구분 자체가 과잉-그리고 과소결정을 이해하는데 적절하지 않고 과잉-그리고 과소결정 개념에 대한 이해가 어긋나있다. 셋 중 어떻게 이해하는 쪽이 옳을까요?

짧게나마 답변해주시면 정말 감사 할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