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철학자 에티엔 발리바르의 [마르크스의 철학] (배세진 옮김, 오월의 봄) 이 얼마전에 출판됐습니다.


1995년 우리말로 처음 번역된  이 책은 그동안 오랫동안 절판되었다가, 이번에 훨씬 두툼한 책으로 


다시 출판되었습니다. 2011년 프랑스에서 이 책의 2판이 출간될 때 발리바르가 부친 2판 [서문] 및 [부록]과 


께 역자가 선별한 발리바르의 중요한 논문들이 부록으로 추가되어, 프랑스어판과 또 다른 독자적인 가치를 


지닌 한국어판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이번 한국어판 [마르크스의 철학]에 해제를 써달라는 요청을 받고 쓴 글을 여기에 올려둡니다. 


이 책이 독자들에게 많이 사랑받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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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엔 발리바르는 마르크스주의자인가?: 하나의 과잉결정에서 다른 과잉결정으로

 

 

1


에티엔 발리바르는 마르크스주의자인가? 20여 년 전 우리나라에 초판이 번역된 바 있는 발리바르의 마르크스의 철학의 새로운 번역본에 대한 해제를 쓰면서 내 머릿속을 계속 맴도는 질문 중 하나가 이것이었다. 이 질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답변이 가능할 것이며, 그 답변에 대한 그럴 듯한 이유들이 각각 존재할 것이다.


우선 발리바르는 더 이상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고 답변할 수 있는 이유들이 존재한다. 마르크스주의가 무엇인가라는 질문 자체가 다양한 답변을 산출할 수밖에 없는 매우 논쟁적인 (그리고 이제는 별로 관심을 끌지도 않는) 질문이라는 점을 일단 제쳐둔다면, 발리바르 자신이 예전에 (그가 마르크스주의자라는 것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던 시기의 저작인) 역사유물론 연구(1974)[Etienne Balibar, Cinq études du matérialisme historique, François Maspero, 1974(한국어판: 역사유물론 연구, 이해민 옮김, 푸른산, 1989). 이 책의 원래 제목은 역사유물론 5연구인데, 한국어판에는 3장 부록인 <레닌, 공산주의자, 이민Lénne, communistes et l’immigration>5<마르크스주의 이론사에서 유물론과 관념론Matériaisme et idéalisme dans l’histoire de la théorie marxiste>이 번역에서 빠졌다.] 민주주의와 독재(1976) [Etienne Balibar, Sur la dictature du prolétariat, François Maspero, 1976(한국어판: 민주주의와 독재, 최인락 옮김, 연구사, 1988). 이 책의 원래 제목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하여.]에서 제시했던 관점에 따른다면,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 착취 과정 및 계급지배의 근거로서) 잉여가치 분석과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적 사회성으로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이라는 두 가지 핵심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지난 1990년대 이후 이 두 가지 요소는 더 이상 발리바르의 이론적 작업의 근간을 이루지 않으며, 실로 그 용어들 자체가 그의 저술에서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이는 정치경제학 비판 및 사회주의혁명론이 그의 작업의 중심을 이루지 않는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증거라고 할 만하다. 아울러 이제는 비단 마르크스주의자들만이 아니라 웬만한 인문사회과학도라면 흔히 사용하는 신자유주의라는 용어 자체도 그의 저술에서는 매우 드물게 찾아볼 수 있다.


그 대신 지난 30여 년간 전개된 발리바르의 작업은 <인간의 권리와 시민의 권리 선언>에서 추출해낸 평등자유명제,[Etienne Balibar,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PUF, 2010. 발리바르의 평등자유명제에 대해서는 진태원, 을의 민주주의: 새로운 혁명을 위하여(그린비, 2017)4장 및 5장을 참조.] 시민권/시민성citizenship과 국민사회국가 이론,[Etienne Balibar, Les frontières de la démocratie, La Découverte, 1992 우리, 유럽의 시민들? 세계화와 정치의 재발명(진태원 옮김, 후마니타스, 2010), 정치체에 대한 권리(진태원 옮김, 후마니타스, 2011) 등을 참조.] 인종주의와 국민주의/민족주의nationalism 분석,[Etienne Balibar & Immanuel Wallerstein, Race, nation, classe: Les identités ambiguës, La Découverte, 1988.] 극단적 폭력과 시민다움 개념을 중심으로 한 폭력에 대한 분석,[Etienne Balibar, Violence et civilité, Galilée, 2010; 부분 번역이 수록되어 있는 한국어판으로는 폭력과 시민다움(진태원 옮김, 난장, 2012)을 참조.] 그가 인간학적 차이들이라고 부르는 성적 차이, 지적 차이, 문화적 차이 등에 대한 인간학적 분석 등이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특히 Etienne Balibar, Citoyen sujet et autres essais d’anthropologie philosophique, PUF, 2011 참조.현실 정치에 관해서도 유럽 공동체 구성이라는 쟁점을 중심으로 국민적 시민성에 기반을 둔 근대 민주주의를 넘어서는 관국민적 시민성에 대한 모색 또는 민주주의의 민주화에 대한 탐구가 발리바르 이론적 작업의 초점을 이룬다고 말할 수 있다.[유럽 공동체 구성과 관련된 분석으로는 우리, 유럽의 시민들?이외에도 Etienne Balibar, Europe: crise et fin?, Le Bord de l’eau, 2016을 참조.] 그렇다면 발리바르는 훌륭한 민주주의 이론가일 수는 있어도 더 이상 마르크스주의자라고 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하지만 반대로 발리바르는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들도 적지 않다. 1990년대 이후 발리바르 작업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주요 주제(잉여가치, 자본, 사회계급, 프롤레타리아 독재, 공산주의 )가 더 이상 전면에 나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이는 이 책 및 이 책에 수록된 부록들이 입증해주듯이 그릇된 인상이다),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는 늘 발리바르 작업의 주요 준거로 작용하고 있다.


가령 발리바르 폭력론의 출발점과 중심에는 마르크스(주의)가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그의 폭력론의 문제의식은 마르크스주의가 폭력 문제와 맺고 있는 역설적인 관계[에티엔 발리바르, 폭력과 시민다움, 15]에 대한 성찰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곧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의 착취를 둘러싼 계급투쟁이 현대 정치의 조건과 쟁점을 구성한다는 점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지만,[발리바르는 이를 루소 등이 대표하는 근대 정치(정치의 자율성)와 구별되고 또한 그것을 넘어서는 마르크스주의 정치(정치의 타율성)의 기여라고 밝힌 바 있다. <정치의 세 개념: 해방, 변혁, 시민다움>, 대중들의 공포, 서관모·최원 옮김, 도서출판b, 2007. 이 한국어 번역본의 제목은 <정치의 세 개념: 해방, 변혁, 시민인륜>인데, 이 중 시민인륜시민다움으로 수정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와 폭력이라는 대립물들의 결합이 함축하는 정치의 비극적 차원을 인식하는 데 실패했으며, 이는 20세기 사회주의혁명의 실패 및 역사적 마르크스주의의 몰락과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다.

 

세계를 변혁하지못한 사회주의혁명들의 무기력의 근본 원인들 중 하나(또한 그 수수께끼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인과관계에는 아무런 합리성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는 정확히 말하면 이러한 혁명들이 발생했던 폭력 상황의 반작용 및 도착적 효과를 이론적·실천적으로 통제하지 못한 절대적 무능력에 있다고 보는 것이 개연성이 있다. 혁명운동이 직면했던 반혁명적 폭력만이 아니라 혁명운동 자신이 행사했던 폭력, 특히 혁명 국가의 틀 속에서 정당화되고 제도화되었고 혁명의 내부의 적을 일소하기 위해 확장됐던 폭력 같은 것들이 바로 그 반작용 및 도착적 효과들인데, 이것은 장기적인 외상적 효과를 낳았지만 대부분 그 자체로 부인되곤 했던, 진정으로 자살적인 과정이었다. [Etienne Balibar, Violence et civilité, op. cit., p.157.]


따라서 발리바르가 보기에 새로운 혁명(만약 이런 것이 여전히 가능하다면)의 근본 쟁점 중 하나는 어떻게 혁명운동을 내부로부터 문명화할 것인가, 어떻게 내가 시민다움이라고 부르는 이러한 반폭력을 사회 변혁의 폭력의 중심에 도입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문제[Etienne Balibar, Ibid. p.158.]라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발리바르 작업의 지속적인 주제 중 하나가 공산주의의 문제라는 점 역시 발리바르가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자로 남아 있다고 판단할 수 있게 해주는 유력한 근거가 된다. 역사유물론 연구민주주의와 독재같은 1970년대 저작에서는 사회주의와 구별되는 공산주의에 대한 모색이 발리바르 공산주의론의 주요 주제였다면, ‘현실 사회주의체제가 붕괴한 이후에는 역사적 공산주의의 형상들(중세 급진 프란치스코파의 공산주의, 근대 부르주아 공산주의, 마르크스주의의 프롤레타리아적 공산주의)을 넘어서는 새로운 공산주의, 예측 불가능하게 생성되고 있는 공산주의()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그 핵심을 발리바르는 공산주의는 또한 일종의 개인주의이기도 하다는 점을 극한적으로 사고하는 것[Etienne Balibar, “Quel communisme après le communisme?”, in Eustache Kouvélakis ed., Marx 2000: actes du Congrès Marx international II, PUF, 2000, p.82. 강조는 발리바르. 서교인문사회연구실에서 운영하는 웹진 인무브에서는 이 글을 포함하여 2000년대 이후 공산주의에 관한 발리바르의 여러 글들을 번역·소개한 바 있다. 인무브 홈페이지(http://en-movement.net)발리바르, 공산주의를 사고하다카테고리 참조.]에서 찾는다)이 중요한 주제가 된다. 더 나아가 공산주의란 무엇인가?”보다는 누가 공산주의자인가?”라는 질문의 우위 아래에서 공산주의를 사고하는 것 [Etienne Balibar, “Remarques de circonstance sur le communisme”, Actuel Marx, no. 48, 2010 참조.] 또는 말하자면 외적인 공산주의(과거의 사회주의 국가나 공산당 같이 공산주의라는 이름 아래 조직된 현실적 준거에 기반을 두는)보다는 내적인 공산주의(공산주의라는 명칭을 고수하는가 여부와 무관하게 환원 불가능한 복수의 해방들을 옹호하고 그 운동들에 참여하는)를 추구하는 것이 발리바르 작업의 또 다른 중심축을 이룬다고 말할 수 있다. [Etienne Balibar, “Communisme et citoyenneté: Sur Nicos Poulantzas”,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op. cit. 참조.]


그런데 우리가 발리바르가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자라는 점을 인정한다고 해도 다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해볼 수 있다. 그런데 그는 어떤 마르크스주의자인가? 우리는 어떤 마르크스주의의 이름으로 발리바르가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는가? 왜냐하면 한편으로 발리바르는 지속적으로 마르크스주의의 주요 주제들을 탐구하고 공산주의의 가능성을 모색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대개 마르크스주의의 주제가 아니라고 간주되는 인권의 정치, 시민성/시민권, 국민사회국가, 인종주의, 국민주의, 이주, 국경의 민주화 같은 주제들을 면밀하게 탐구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웅변적으로 집약해주는 글이 <공산주의와 시민성>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풀란차스Nicos Poulantzas에 관한 글이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그는 마르크스주의자, 적어도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마르크스주의자라고 하기에는 너무 비마르크스주의적인 주제들에 관심을 많이 기울이면서 역으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주로 몰두하는 주제들(노동운동, 자본의 착취, 신자유주의, 금융 세계화 등)에는 너무 적은 논의를 할당하는 사상가인 셈이다. 그렇다면 그는 일종의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자라고 할 수 있는가? 그렇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역시, 만약 그렇다면 그는 어떤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자인가라는 질문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질문들은 발리바르는 여전히 알튀세리앵인가? 만약 그렇다면 그는 어떤 알튀세리앵인가라는 질문과 분리될 수 없다. 그리고 이 질문을 통해 우리는 이 책의 내용 및 편제와 관련된 핵심 논점에 다가서게 된다.

 

2

 

주지하다시피 발리바르는 20세기 마르크스주의의 대표적인 이론가 중 한 사람이었던 루이 알튀세르의 제자이자 동료였으며, 알튀세르 사후에는 그의 사상의 주요 계승자 중 한 사람으로 널리 인정받아온 인물이다. 알튀세르 사상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점 중 하나는 그가 20세기 후반의 마르크스주의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철학자 중 한 사람이었지만, 그의 사상은 정확한 의미에서 학파를 형성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는 알튀세르 사후死後는 물론이거니와 생존 당시에도 사실이었다. 학파를 구성하는 것은 고사하고 알튀세르는 그의 사상의 전성기에서부터 늘 여러 방향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가 정통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고 의심하는 공산당 내부의 비판가들이 한편에 있다면, 다른 한편에는 그가 너무 공산당에 가까운 마르크스주의자, 따라서 기껏해야 타협적인 인물이거나 아니면 체제 옹호자에 불과하다고 비난하는 이들, 더욱이 과거 그의 제자들이었던 알랭 바디우, 자크 랑시에르 같은 젊은 마오주의 지식인들이 있었다. 알튀세르는 1970년대 내내 그의 작업을 충실하게 따르는 몇몇 제자들(발리바르, 미셸 페쉬Michel Pêcheux, 도미니크 르쿠르Dominique Lecourt )과 더불어 그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정신병과 싸우면서 이들의 비판에 맞서 자신의 작업을 추구해야 했다.


그렇다면 발리바르 자신은 계속 충실한 알튀세리앵으로 남아 있었는가? 어떤 점에서는 그렇고 어떤 점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할 수 있다. 1976년 프랑스 공산당 22차 당 대회를 통해 이루어진 유로코뮤니즘으로의 전환, 곧 프롤레타리아 독재 강령의 폐기와 사회주의로의 평화적 이행 노선의 채택은 알튀세르의 최후의 이론적정치적 투쟁의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알튀세르와 발리바르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을 옹호하면서 당의 새로운 유로코뮤니즘 노선에 맞서 싸웠는데,[Louis Althusser, Le 22e Congrès du Parti Communiste Français, François Maspero, 1977; Ce qui ne peut plus durer dans le parti communiste, François Maspero, 1978 참조. 이 글들은 다음 책에 편역되어 있다. 루이 알튀세르, 당 내에 더 이상 지속되어선 안 될 것, 이진경 옮김, 새길, 1992. 또한 에티엔 발리바르, 민주주의와 독재, 앞의 책 참조.] 이러한 공동의 투쟁 내에 이론적 갈등의 요소들이 존재한다는 것이 곧 드러났다. 간단히 말하면 발리바르가 보기에 알튀세르는 공산당을 비롯한 혁명 세력이 국가 바깥에 존재하고 또한 존재해야 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지만(자본주의 국가에 대한 혁명 세력의 외재성), 이는 노동자계급을 비롯한 혁명 세력 자체가 이데올로기 내에서만 구성되고 재생산될 수 있다는 알튀세르 자신의 테제와 모순되는 것이었다.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의 이러한 이론적 입장의 차이는 1980년대 이후 발리바르 작업의 방향을 상당 부분 규정하게 된다. 우선 알튀세르 자신은 국민 형태, 국민국가, 국민주의/민족주의 및 인종주의 문제에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에 비해 발리바르는 이매뉴얼 월러스틴과의 공동 작업을 통해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탐구한 바 있다. [Etienne Balibar & Immanuel Wallerstein, Race, nation, classe: Les identités ambiguës, op. cit.] 이는 “‘일반적자본주의란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다수의 자본주의들 사이의 해후와 갈등을 통해 만들어진 역사적 자본주의만이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보편사란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독특한 역사성들만 존재한다는 발리바르의 새로운 관점에 입각한 것이다.


또한 알튀세르는 유대인 문제에 대하여의 마르크스를 따라 평등자유를 지배적인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인 법적 이데올로기라고 규정한 바 있지만, 발리바르 자신은 1989년 프랑스혁명 200주년을 맞아 처음 발표한 <평등자유명제>라는 글에서 프랑스혁명 당시 <인간의 권리와 시민의 권리 선언> 텍스트에서 표현된 평등한 자유의 이념은 (폄하하는 의미에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로 치부될 수 없으며 프랑스혁명 이후 모든 해방운동의 상징적 준거로 작용해왔다는 점을 평등자유égaliberté’라는 신조어를 통해 강조했다. 이는 마르크스주의 역시 그것이 하나의 해방운동인 한에서 평등자유명제를 기반으로 삼아야 함을 뜻하는 것이었다. 알튀세르의 작업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폭력의 문제, 특히 극단적 폭력과 시민다움의 문제가 1990년대 이후 발리바르 사상의 주요한 작업장중 하나가 된다는 점 역시 중요한 차이점이라고 할 만하다.


그렇다면 발리바르가 알튀세르와 절단했다고 말해야 할까?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의 관계를 절단coupure의 관계로 지칭하는 것은 여러 모로 적절하다고 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발리바르는 알튀세르 자신의 모순과 난점들을 비판하고 더 나아가 알튀세르가 제기하지 않았던 문제들을 제기하고 새로운 개념들을 고안하면서 독자적인 사상의 길을 개척해왔지만, 그의 작업의 저변에는 늘 알튀세르의 문제설정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발리바르는 알튀세르의 문제설정을 전과학적인 것으로 또는 비유물론적인 것으로 배격하거나 폐기하기보다는(이것이 알튀세르나 발리바르가 사용하는 절단이라는 개념의 핵심 의미다) 바로 그 문제설정 위에서 알튀세르 자신의 이론적 작업의 한계 및 아포리아, 그리고 공백을 분석하고 새로운 정세에 입각하여 그 문제설정을 독자적으로 발전시켜왔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발리바르는 알튀세르와 절단했다기보다는 단절했다(‘rupture’‘refonte’라는 의미에서), 또는 알튀세르의 문제설정에 입각하여 그것을 부단히 개조해왔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하지만 발리바르의 작업을 알튀세르와의 관계 속에서만 이해하고 평가하는 것 자체가 부적절할 수 있다는 점을 덧붙여두고 싶다. 발리바르는 그렇게 하기에는 너무 독창적이고 폭넓은 사상가다).


이는 이 책의 주제 및 편제에서도 뚜렷하게 드러나는 점이다. 나는 특히 네 가지 측면을 지적해두고 싶다.

 

1) 절단과 단절이라는 주제


우선 절단과 단절이라는 주제가 주목할 만하다. 주지하다시피 알튀세르 작업의 출발점에는 인식론적 절단이라는 주제가 존재한다. 간단히 말한다면, 알튀세르는 마르크스를 위하여에서 청년 마르크스와 장년 마르크스 사이에는 인식론적 절단이 존재한다는 테제를 제시함으로써 당대에 큰 파문과 논쟁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초기 마르크스, 독일 이데올로기이전의 마르크스는 아직 마르크스가 아닌 마르크스, 곧 헤겔과 포이어바흐의 문제설정에 사로잡혀 있는 좌파 청년 헤겔주의자로서의 마르크스였다. 독일 이데올로기가 하나의 단절 지점이 되는데, 이는 이 책에서 처음으로 생산양식, 이데올로기 같은 역사유물론의 핵심 개념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 이후 자본을 통해 마르크스는 비로소 마르크스로서의 마르크스가 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마르크스 역시 완전한 마르크스가 아니라, 여전히 불완전하고 공백들 및 애매성들을 포함하고 있는 마르크스라는 점이다. 따라서 마르크스 사상이란 청년기부터 노년기에 이르기까지 단일한 총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성숙한 마르크스의 사상 역시 완성된 어떤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이 때문에 지속적인 개조 작업(알튀세르가 마르크스로 돌아가기라고 부른)의 필요성이 나오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알튀세르의 기여는 정초자 내에 균열과 갈등, 심지어 모순을 도입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 비판가들은 이러한 균열이나 모순을 마르크스 사상을 기각하고 부정하기 위한 논거로 삼는 반면, 마르크스주의 옹호자들은 어떻게든 이러한 균열과 모순을 축소하거나 제거하기 위해 애썼다. 반면 알튀세르는 그것을 마르크스 사상의 본질적 사실로 간주했다. 더욱이 그는 이러한 균열이나 공백, 갈등을 마르크스 사상의 역사성의 문제와 결부시켰다. 곧 우리가 마르크스 사상이라고 알고 있는 것은 불변적이거나 동질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초기부터 후기까지 지속적으로 오류를 범하고 정정하면서 변화해나간 미완의 과정의 산물이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알튀세르에 따르면 이러한 마르크스 사상의 역사성은, 넓은 의미의 노동자운동이라고 부를 수 있는 당대의 해방운동과의 부단한 조우의 산물이었다.


발리바르는 이 책에서 알튀세르의 절단의 문제설정을 수용하면서 동시에 그러한 절단 내에서 두 차례의 단절이 존재했음을 강조한다. 그것은 1848년 유럽혁명의 실패와 1871년 파리 코뮌의 비극적 경험의 결과였으며, 이러한 정치적역사적 사건들은 마르크스의 이론적 작업의 중요한 정정으로 이어졌다는 것이 마르크스 사상의 전개 과정을 이해하는 발리바르의 기본 관점이다. 이런 점에서 발리바르는 충실한 알튀세리앵으로 남아 있다고 말할 수 있다.

 

2)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에 대한 독해


내가 볼 때 이 책의 중요한 이론적 기여 중 하나는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이하 <테제>로 약칭)에 대한 매우 심층적이고 독창적인 독해에서 찾을 수 있다. <테제>는 수많은 논평과 분석의 대상이 되어왔지만, 발리바르는 이 책의 2<세계를 변화시키자: 프락시스에서 생산으로>에서, 특히 새로 추가된 <재판 후기>에서 이 <테제>인간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관계론적 존재론 또는 관개체성transindividuality에 입각한 철학적 인간학으로 재해석함으로써 파르메니데스의 비의적秘義的 경구나 스피노자의 이른바 평행론명제 또는 비트겐슈타인의 아포리즘과 비견될 만한 서양철학사의 기념비적 텍스트로 격상시키고 있다.


<재판 후기>에서 제시된 <테제>에 대한 발리바르의 재해석은 문헌학적 엄밀함이라는 점에서, 또한 텍스트가 지닌 다양하고 이질적인 의미들 및 그 갈등적 양상을 극단에 이르기까지 발굴해낸다는 점에서 자크 데리다의 탈구축적 독해를 연상시킨다. <테제>에 대한 대개의 해석은 유명한 열한 번째 테제를 중심으로 삼지만, 발리바르 독해의 초점은 인간 본질을 사회적 관계들의 앙상블로 규정하는 여섯 번째 테제에 놓여 있다. 이는 여섯 번째 테제에서 규정하는 인간의 본질을 혁명적 프락시스의 관점에서 장래 도래할 객관적 가능성으로 전환하는 에른스트 블로흐의 해석과 더불어 이론적 반인간주의의 관점에서 여섯 번째 테제를 인간의 본질에 관한 종래의 철학적 담론을 사회적 관계에 대한 과학적 분석으로 대체하려는 것으로 이해하는 알튀세르의 해석을 넘어서기 위한 것이다.


발리바르는 마르크스가 앙상블ensemble’이라는 프랑스어 단어를 인간 본질에 대한 규정 속에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지금까지의 마르크스주의적인 관점이 포착해내지 못했고 또한 포착할 수 없었던 여섯 번째 테제의 세 가지 실정적 의미, 곧 사회적 관계들의 수평성’ ‘계열성’ ‘다수성이라는 의미를 이끌어내고 있다. 발리바르에 따르면 이는 서양 형이상학에서 상속받은 개인성과 주체성이라는 다양한 통념들에 대한 하나의 일반적 대안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면서 동시에 이를 존재-신학적인 보편 이론으로 체계화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따라서 발리바르가 스피노자를 염두에 두면서 말하듯이 <테제>속성들의 다수성을 갖고서 하나의 총체성을 형성하기 위해 이 속성들의 다수성을 통합하는 대신에 (……) 역사적 변환과 변형의 한계 지어지지 않은 장을 열어젖[힌다]”고 말할 수 있는데, 이는 알튀세르가 스피노자 철학의 유례없는 독창성이라고 말한 바 있는 경계 없는 전체un Tout sans clôture”[Louis Althusser, Éléments d'autocritique, Hachette, 1974]의 사상을 <테제>에서 더 풍부하게 이끌어내려는 발리바르의 의도를 표현해준다.


하지만 발리바르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테제>가 표현하는 철학적 인간학의 세 가지 아포리아를 지적한다. ‘사회적 관계들의 앙상블로서의 인간 본질에 대한 정의에서 나타나는 집합성과 개인성 또는 보편성과 차이들의 내적 연관성(따라서 정의 그 자체의 차원에서조차 인간이 아니라 인간들이라는 복수의 표현이 요구된다)과 관련된 아포리아는 또한 개인주의이기도 한 공산주의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발리바르의 관심과 연결되어 있다. 아울러 헤겔의 내적 관계들이라는 개념과 관련된 두 번째 아포리아는 기계적이고 자연주의적인 표상 그 자체로 단순히 되돌아가지 않으면서도 어떻게 정신주의적인 동시에 목적론적인 이런 헤겔의 구축물을 비판할 수 있을까?”라는 문제의식을 담고 있는데, 이는 <테제>에서, 또한 독일 이데올로기의 중심 개념 중 하나인 ‘Verkehr’ 개념에서 20세기 후반 유럽 비판철학의 두 전통을 대표하는 프랑스의 구조주의 및 독일의 상호주관성 이론의 난점을 넘어설 수 있는 이론적 잠재력을 발굴하려는 노력의 표현이다. 하지만 마르크스 자신의 이론에는 이러한 잠재력과 더불어 본질주의적인 노동의 인간학의 한계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는 아포리아적인 것으로 남아 있다. 발리바르는 세 번째 아포리아에서 마르크스의 <테제>가 사회적 관계의 복수성과 이질성을 사고할 수 있는 이론적 가능성을 열어놓았지만, 동시에 이후의 이론적 작업에서 이를 생산관계로 환원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있다.


따라서 그 자신의 관개체성 이론에 기반을 둔 <테제>에 대한 발리바르의 독해는 한편으로 기계적 인과성과 표현적 인과성을 넘어서는 구조적 인과성에 입각하여 역사유물론을 재구성하려는 알튀세르의 문제설정을 계승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알튀세르 자신이 이론적 반인간주의라는 이름 아래 배제했던 철학적 인간학의 잠재력들을 찾아내려는 노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3) 이데올로기와 물신숭배


<테제>에 대한 재독해와 더불어 이 책의 또 다른 백미는 물신숭배 개념에 대한 독창적인 확장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점에서 이 책은 프랑스어 원서가 갖지 못한 독자적인 이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 책에는 모두 4편의 글로 이루어진 부록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 중 <오히려 인식하라>라는 짧은 글을 제외한 나머지 세 편의 글은 모두 직간접적으로 물신숭배 이론과 관련되어 있다. 이 글들을 함께 읽어보면, 1993년 이 책의 초판이 나온 이래 발리바르의 이론적 작업에서 물신숭배 이론은 잘 눈에 띄지 않지만, 지속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었음이 명백히 드러난다. 어떤 의미에서 이는 발리바르 이론적 작업의 도둑맞은 편지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문제의 중요성을 포착하고 한국의 독자들을 위해 이를 체계적으로 배열하여 포함시킨 옮긴이의 통찰력 덕분에 우리는 발리바르가 (어떤) 마르크스주의자인지, 또한 어떤 알튀세리앵인지 더 분명히 인식할 수 있 수 있게 되었다.


20세기 마르크스주의 역사에서 물신숭배론 이론은 주로 죄르지 루카치의 역사와 계급의식에서 발원한 베버 마르크스주의’(모리스 메를로-퐁티) 전통에서 발전되었다. 루카치 자신의 사물화Verdinglichung’ 개념 자체가 물신숭배 이론에 대한 독창적인 재구성이거니와 그 이후 특히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이론가들이 각자 나름대로 이 개념을 발전시켜왔다.[최근의 작업으로는 악셀 호네트, 물화, 강병호 옮김, 나남, 2015 참조.] 반면 알튀세르는 물신숭배 개념을 불신했는데, 이는 인간 노동의 산물인 상품들의 관계가 인간들 사이의 관계를 은폐하고 오히려 인간들의 관계를 지배한다는 물신숭배 이론의 기본적 틀 자체가 인간 대 상품의 대립이라는 소외론적 문제설정을 강하게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잘 알려져 있다시피 알튀세르는 물신숭배 이론을 발전시키는 대신 그것에 대한 대안으로 이데올로기 개념을 체계적으로 발전시킨 바 있다.


반면 발리바르는 이 책의 본문 3장에서 물신숭배 개념에는 이데올로기 개념으로 환원할 수 없는 고유한 이론적 독자성 및 강점을 지니고 있음을 역설한 바 있다. 그리고 부록에 수록된 세 편의 글에서는 그 함의를 훨씬 더 풍부하고 정교하게 발전시키고 있다. 그것은 한편으로 잉여가치론으로 환원되지 않는 노동의 이중적 성격 및 여기에 기반을 둔 일반화된 상품화로서의 자본주의라는 문제설정이며(<마르크스의 두 가지 발견’>), 다른 한편으로는 상품의 일반화, 일반적 등가물의 구성을 상품들의 사회계약으로 재해석하고 여기에서 더 나아가 이러한 일반적 등가물이 화폐로 육화되었을 때 나타나는 신비함의 성격을 화폐의 초과권력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로 나타난다(<상품의 사회계약과 화폐의 마르크스적 구성>). 세계시장의 형성에 상응하며, 물질화되고 탈물질화(디지털화’)될 수 있는 표상력을 지니고 있고, 스스로 상품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한 화폐의 이러한 초과권력은 말하자면 국가의 주권적 권력으로 환원되지 않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을 넘어서는 또 다른 종류의 주권적 권력[“‘주권자의 주권자로서 (특히 경제 위기의 시기 동안) 국가를 지배하기 위해 국가에 대한 우위를 점하는 주권적형상]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이러한 주권적 권력은 살아 있는 노동자의 노동력을 초객체적인 사물로 변형할뿐더러, 그 이전에 이러한 권력에 대한 인간 주체들/신민들subjects의 자발적 복종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초주체적 폭력을 산출하기도 하다. 화폐의 초과권력이 산출하는 극단적 폭력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물신숭배론에 대한 발리바르의 분석은 알튀세르와의 단절의 측면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지만, 이것이 이데올로기에 관한 알튀세르의 문제설정과 양립 불가능한 것은 아닐 것이다(다시 한 번 말해두지만, 이 때문에 절단이라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양자는 모두 주체화/복종sujétion’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으며, ‘주체화/복종의 문제가 알튀세르(및 푸코)가 이론화한 예속적 주체화assujettissement’ 개념에 기반을 두고 있는 한에서 이는 다른 한편으로는 알튀세르 문제설정의 개조이자 확장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4) 자본주의의 역사성들



자본주의의 역사성들에 대해서는 더 간략하게만 언급해두겠다. 초기의 과잉결정surdétermination, overdetermination 개념에서 말년의 우발성의 유물론에 이르기까지 알튀세르의 이론적 작업을 관통하는 핵심 주제는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을 선형적 목적론 내지 진화론적 목적론에서 벗어나 그 구체적 조건 속에서, 더욱이 예측 불가능성 속에서 해명하려는 시도였다고 말할 수 있다. 과잉결정 개념에 더하여 과소결정sousdétermination, underdetermination 개념을 사고하려는 노력이 그렇거니와, 기원의 우발성, (재생산) 과정의 우발성, 그리고 이행 자체의 우발성이라는 3중의 우발성의 관점에서 역사적 과정을 사고하려는 우발성의 유물론의 시도에서 이를 엿볼 수 있다.[이점에 관해서는 진태원, <과잉결정, 이데올로기, 우발성: 알튀세르와 변증법의 문제>, 진태원 엮음, 알튀세르 효과, 그린비, 2011 참조.] 이 책 4<시간과 진보: 또 다시 역사철학인가?>에서 발리바르가 세 가지의 인과성 도식(역사의 나쁜 방향, 자본주의 생산양식 내에서 두 가지 사회성의 대립, 독특한 대안적 발전의 경로들)을 통해 마르크스의 저작들 안에서 역사적 인과성의 다양한 측면들을 발굴하고자 하는 것 역시 이러한 문제설정과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수탈자의 수탈에 관하여>에서 연장된 사회 전쟁이라는 정치적 시나리오와 총체적 포섭/복종이라는 허무주의적 시나리오를 동시에 읽어내려는 노력에서도 엿볼 수 있는 점이다.


독특하고 환원 불가능한 자본주의의 복수적 역사성들에 대한 강조는,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 따라서 새로운 (공산주의) 혁명의 가능성을 모색하되, 그것을 새로운 정세에 입각하여 마르크스(및 마르크스주의자들을 포함한 다른 사상가들)의 텍스트에 대한 면밀한 독해를 통해 사유하려는 수십 년에 걸친 발리바르의 작업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3

 

이제 끝으로 우리가 처음 제기한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발리바르는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자인가? 그렇다면 그는 어떤 마르크스주의자인가? 나는 우리가 알튀세르의 과잉결정 개념을 다른 식으로 이해함으로써 이 질문에 답변할 수 있다고 믿는다.


주지하다시피 알튀세르는 왜 20세기 초반 유럽에서 가장 후진적이었던 러시아에서 사회주의혁명이 일어났는가라는 질문에 답변하기 위해 과잉결정 개념을 고안해냈다. 알튀세르의 논점은 사회주의혁명과 이행을 사고하기 위해서는 역사의 좋은 측면에만 의지해서는 안 되고 나쁜 측면을 고려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의 모순 또는 자본과 임노동 사이의 모순이라는 가장 단순하고 기본적인 모순만 사고해서는 혁명에 관해서 구체적으로 사고할 수 없으며, 모순을 그것이 전개되는 상황 속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어떻게 자본주의의 기본 모순이 항상 다른 모순들 속에서만 표현되는지, 어떻게 이러한 다른 모순들이 기본 모순을 과잉결정하거나 과소결정하는지 이해하는 것이 알튀세르 작업의 주요 측면 가운데 하나였다.


이러한 의미의 과잉결정 개념은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한 이후 마르크스주의를 재건하거나 개조하려고 노력했던 거의 모든 연구자들의 공통의 기반이라고 할 수 있다. 1990년대 이후 마르크스주의 연구자들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마르크스주의의 경제중심주의에서 벗어나되, 여전히 노동자운동의 중심성을 견지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노동자운동을 중심으로 한 여성운동, 환경운동 등과의 접합이 논의의 초점에 있었다. 또는 학문적으로 본다면 어떻게 자본주의의 계급적 착취의 문제를 여성에 대한 가부장제적인 지배, 생태계 위기의 문제, 인종차별주의 내지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 등과 연결시킬 것인가의 문제가 중심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자본주의의 계급적 착취 및 지배 구조를 가부장제적인 여성 지배의 문제, 인종차별주의 및 민족주의 문제 또는 환경문제가 어떻게 과잉결정하는지 이해하는 것이 핵심 쟁점이었다.


반면 내가 보기에 발리바르의 작업은 오히려 과잉결정 개념을 역의 방향에서 이해하는 것에 기반을 두고 있다. 곧 계급적 착취와 지배의 문제가 어떻게 가부장제적인 여성 지배 문제, 환경 문제, 인종차별 및 민족주의 문제 등에 의해 과잉결정되는가 여부가 아니라, 오히려 어떻게 계급적 착취 및 지배가 다른 문제들을 과잉결정하는지 탐구하는 것이 발리바르 작업의 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


가령 우리가 오늘날 세계 도처에서, 또한 우리나라에서 목격하듯이 여성에 대한 지배 내지 혐오의 문제에서도 자본주의적 불평등 구조가, 가령 비정규직 문제를 비롯한 노동고용의 차별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고, 환경 문제에서도 자본 축적 운동에서 비롯되는 과잉개발과소비라는 방식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고, 인종차별 내지 민족차별의 문제는 세계 경제 내부의 위계화된 노동 질서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극단적 폭력의 문제는 자본주의의 구조적 폭력의 문제와 분리될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다양한 쟁점과 문제들은, 고전적인 의미의 과잉결정 개념에 의거할 경우 그렇게 생각될 수 있는 것처럼 자본주의적 착취 및 지배의 문제를 해결해야 비로소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과잉결정에 대한 새로운 이해 방식에 의거할 경우 마르크스주의에서 중시하는 자본주의적 계급착취와 지배의 문제는 더 이상 다른 문제들의 해결의 (유일한) 조건 내지 관건이 아닐뿐더러, 다른 문제들, 다른 쟁점들 내에서만, 그것들과 결부될 경우에만 자신의 존재론적 의미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동시에 페미니스트가 아닌 마르크스주의자, 동시에 민주주의자가 아닌 마르크스주의자, 동시에 환경운동가가 아닌 마르크스주의자, 동시에 인권의 정치가가 아닌 마르크스주의자는 존재할 수 없을뿐더러 마르크스주의 자체의 쟁점을 해명하고 그 목표를 달성하는 데 무력할 수밖에 없다.


나는 이 책의 저자가 바로 이러한 의미의 마르크스주의자이며, 그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마르크스는 다른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그려내는 마르크스보다 훨씬 불명확하지만, 그럼에도 마르크스주의적전통에서 제시했던 마르크스보다 훨씬 더 풍부한 그런 마르크스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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