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보았던 저스틴 커젤 감독의 영화 <맥베스>는 스크린 가득 풍겨나던 뿌연 안개의 이미지와 스코틀랜드의 대자연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물론 내가 애정해마지않는 대 배우, 마이클 패스벤더와 마리옹 꼬띠아르 두 주연배우의 연기는 두말 할 필요없이 훌륭했고, 같이 본 친구는 지루하다 했지만 나는 그들이 연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계속 두근거렸다.

주인공들의 대사가 원작을 그대로 반영한 것도 고전의 느낌이 물씬 나서 좋았는데 그 때문에 집에 가면 바로 원작 맥베스를 읽어보리라 다짐했지만, 그 다짐마저도 뿌연 안개 속으로 흐려져 사라지다가.... 어젯밤, 읽던 책 한권을 끝내고 조금은 뿌듯하고 조금은 허무한 마음에 갈팡질팡하던 손이 책상위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던 이 책으로 나를 인도했다.

 

예전엔 세익스피어 특유의 시적인 대사들이 좀 오글거려서 읽지 못했는데, 영화를 보고난 여운이 아직 남아 있어서 그런지 대사가 매우 리드미컬하게 울리며 비장함을 자아내었다.

 

"고운 건 더럽고, 더러운건 고웁다"는 말처럼 충신이던 코도의 영주가 역적으로 판명나 처형당하고, 믿었던 맥베스가 덩컨왕을 죽이고, 아름다울것 같던 권력이 칼로 찌르는 듯한 고통이 되는 이 삶의 아이러니! 선과 악이 뒤섞여 혼탁해지는 이 상황이 작품 속에서도 내내 안개와 바람으로 묘사되었다.

그러므로 영화에서 환상처럼, 환영처럼 시종일관 뿌옇게 깔리던 안개와 거친 자연에서 불어오던 바람은 어떤 것이 선이고 어떤 것이 악이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 없는 삶의 허무와 절망을 매우 효과적으로 표현한다. 그래서 이동진 영화평론가는 이 영화를 "대지를 붉게 물들이는 안개와 바람의 파토스"라고 평했는데 너무 적절해보인다.

 

전장에선 그렇게 강한 맥베스였는데 왕을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우면서부터 급격히 흔들리던 눈빛은 그가 양심으로부터 어떤 고통을 받고 있는지를 나타낸다. 역설적이지만 자신의 죄를 너무나 잘 알고 갈등하기 때문에 점점 더 극한 악으로 내몰리는 맥베스. 무너져가는 그를 그런 눈빛으로 보여줄 수 있는 배우가 마이클 패스벤더말고도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의 연기는 훌륭했다.(내게 올해 오스카상 수상권한이 주어진다면 남우주연상은 마이클 패스벤더에게 줄 것 같다. 지난주 <스티브 잡스>를 보고 나서 마음이 완전히 마이클에게로 넘어갔다. 디카프리오...미안...)

 

그리고 욕망앞에서는 여성성도 없애버리고 나약한 맥베스를 계속 다그치던 맥베스부인.  영화는 원작에는 없던 그들 부부의 아이 장례식으로 시작하는데 아이를 잃은 슬픔을  겪은 그녀지만 맹세한 목표앞에서라면 '젖을 빠는 아이에게 젖꼭지를 확 뽑고 머리통을 부셔버렸을거란' 단호함을 보다 더 부각하기 위해 그렇게 각색한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런 맥베스 부인조차도 거듭되는 살인에 정신줄을 놓고 결국은 자살로 생을 마감할 수 밖에 없는 건 우리는 모두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는 어쩔수 없는 인간이기 때문이고, 반대로 그런 양심의 가책조차 없다면 과연 인간일 수 있는가 하는 의문도 가지게 된다.

 

맥베스가 왕위에 오르고 복수에 집착하는 폭군이 되어갈 때 분열된 리더를 가진 조국 스코틀랜드는 절망의 나라가 되어간다. 스코틀랜드의 귀족 로스가 잉글랜드로 피신해있는 맥더프에게 전하는 스코틀랜드 상황이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는 것은 지금의 상황도 크게 다를 바 없어서일까?  책임을 느껴야 하는 자들이, 양심을 가져야 할 자들이 자기 내면의 소리를 듣지 않는다면 저 불쌍한 스코틀랜드만도 못한 나라가 아닌가.

 

# 아, 불쌍한 나라!

  못 알아볼 지경이오. 어머니가 아니라

  무덤이라 할 수밖에 없는 그곳에선

  무지한 자 말고는 어떤 것도 웃지 않고

  탄식과 신음과 대기 찢는 비명을 토해도

  아무도 주목하지 않으며, 격렬한 슬픔은

  흔해 빠진 감정 같소. 조종을 듣고도

  누구인지 안 물으며, 착한 사람 목숨이

  모자 위의 꽃보다 더 빨리 시들어

  병들기도 이전에 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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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벌레 2016-01-29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어릴 때 읽어서 주인공의 심리를 깊이 읽어내지 못하고 난해하게 느꼈던 기억이 있어요~
오로라님의 글을 읽고 나니, 영화로 한번 보고 싶어지네요^^

살리미 2016-01-29 18:08   좋아요 0 | URL
영화를 보고나면 책읽기가 수월해지실 거예요. 저도 이 책 오래전에 사놓긴 했지만 읽고 싶진 않았거든요 ㅋㅋ
영화가 원작의 대사를 거의 사용하고 있어서 영화한편 보는게 소설 한권 읽는 느낌을 주더라고요.

해피북 2016-01-29 18: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오~~오로라님. `삶의 아이러니`라니요 (봐야할 영화와 읽어야 할 책 추가되는 소리가 들려요ㅋ) 오로라님 덕분에 눈이 충혈 되도록 봐야할 영화가 넘쳐나고 손가락이 짓물도록 읽어야할 책들이 장바구니에 넘쳐나고 있어요 ㅋ 오로라님은 북플을 물들이는 안개와 바람같은 존재신거같아요. ㅎㅎㅎ

살리미 2016-01-29 19:55   좋아요 0 | URL
하악!! 무슨 말씀을 ㅋ 철저히 주관적인 제 느낌이라 저는 책임질 수 없습... 같이 간 사람은 내내 졸았다고요 ㅋㅋ

초딩 2016-01-29 1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또 슬쩍 담아 갑니다~

살리미 2016-01-29 19:56   좋아요 0 | URL
ㅎㅎ 저도 그렇게 주워담아온 책들이 도토리처럼 한가득이에여^^

2016-01-29 18: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1-29 19: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01-29 2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이스 페인팅 때문인지 북플로 사진을 보니까 주연배우가 눈을 감은 줄 알았어요. ㅎㅎㅎ

살리미 2016-01-29 20:14   좋아요 0 | URL
ㅎㅎㅎ 저도 그렇게 보입니다. 의도적인 것인지 영혼없는 좀비 같아보이기도 하네요. 이중적으로.

지금행복하자 2016-01-29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극장에서 못보고 다운만 받아놓고 또 못보고 ㅎㅎ
꼭 봐야겠어요...불끈!!

살리미 2016-01-29 23:20   좋아요 0 | URL
장엄한 영상미가 돋보이는 영화였어요. 큰 화면으로 보면 더 좋지만 저도 다운받아서 다시 한번 더 보고 싶어요^^

프레이야 2016-01-30 0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영화를 놓쳤어요. 찾아서 봐야겠습니다.^^

살리미 2016-01-30 07:32   좋아요 0 | URL
개봉당시 워낙 상영관도 없었고 영화도 금방 내려버렸었죠. 놓치기 쉬웠습니다. 이 정도급의 영화가 그렇게 홀대받아서 되나 싶더라고요. 즐거운 관람되시면 좋겠습니다^^

유부만두 2016-01-30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영화 보고 책 다시 펼쳤어요!! 영화 번역이 훨씬 멋졌지요. 아 그 안개 경치.. 그 중후한 대사들!
영화에서 마지막 처리...노을이 내리는 장면과 그 소년의 뒷모습으로 재해석되는 게 정말 멋졌어요!

살리미 2016-01-30 13:43   좋아요 0 | URL
보셨군요!!! 저도 영화에서 새롭게 각색된 부분까지도 영화가 훨씬 더 좋았던 것 같아요. 사실 책만 읽었을땐 그런 감동을 못받았을뻔했어요. 마지막 엔딩씬도 원작엔 없던 것이더군요. 다시금 피바람이 불것이라는 암시처럼 붉게 일렁이는 화면...
이렇게 이야기하다보니 다시 한번 더 보고싶어져요!!

비로그인 2016-01-30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베스가 영화로도 재밌다고하니 한번 시도해보싶네요~

살리미 2016-01-31 00:44   좋아요 0 | URL
네, 꼭 보실 기회가 생기셨음 좋겠어요^^ 원작과 다른 점도 좀 있으니 비교하면서 보셔도 재밌을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