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락방님의 책을 방금 다 읽었다. 너무 재밌어서 최대한 아껴가며 두고 두고 읽고 싶었는데 어느새 마지막 페이지다. 저녁에 남편이랑 운동을 하러 갔다가 잠시 앉아서 쉬는 틈에 책을 펼쳤는데 하필 그 때 읽은 부분이 너무 재밌어서 혼자 피식 피식 웃는 걸 들켜서 민망해지기도 했다. <영국 남자의 문제>라는 하워드 제이콥슨의 소설을 소개한 글이었다. 제목은 `설거지는 미룰 수밖에 없다` ㅎㅎ

일단 제목부터 아주 맘에 든다. 주인공 트레스러브는 그간 마른 여자들을 사귀었는데 지금 사귀고 있는 헤프지바는 덩치가 아주 크다. 이름도 왠지 맘에 드는 헤프지바!! 그녀는 과식 후에는 설거지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부분에서 다락방님은 격한 공감을 하는데^^ 나 역시도 완전 공감이다. 싱크대에 설거지를 쌓아놓아서 주전자에 물을 채우는 것도 불가능할 상태임에도 당당하다니! 나도 자주 설거지를 쌓아놓고 더이상 그릇을 쌓을 수 없을 지경이 되어야 마지못해 씻을 때가 있는데 이젠 죄책감 따윈 버리고 헤프지바처럼 바로 설겆이 하지 않을 권리를 당당히 누려야겠다. 게다가 다락방님은 더욱 당당하게 선언한다.(속이 다 시원하다)

— 설거지를 하다가 아, 먹고 사는 게 너무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어 설거지를 마치자마자 집을 뛰쳐나가 시장을 한바퀴 돈 적도 있다. 이 허무한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서. 그런데 헤프지바는 과식 후의 설겆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아. 정말 존경스럽다. 멋지다! 나도 이렇게 살고 싶다. 혹여 내가 독립하게 된다면 과식한 후에는 결코 설거지를 하지 않을테다. 한껏 미뤄둘 테다. 혹여 내가 결혼을 하게 된다면 설거지는 남편 몫이다. 내가 하지 않을 테다. 번번이 인생의 허무함을 느끼고 싶진 않으니까. (245쪽)

아이들이 어렸을 땐 매일 쓸고 닦고 식기도 소독하고 한시도 살림에서 손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늘 집은 엉망이었다. 그때는 언제 애들 다 키워서 집 좀 단정히 정리해 놓고 살아보나 했다. 그러다 아이들이 점점 커가고 정리정돈할 시간은 많아졌는데 우리집은 아직도 예전처럼 어수선하다. 주방에 설겆이가 쌓여있기 일쑤고 여기 저기 책들이랑 제자리를 찾지 못한 못한 물건들이 돌아다닌다. 내가 바뀐 까닭이다. 이젠 시간이 나면 청소나 살림을 하는 것 보단 조용히 앉아 나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진다. 언젠가 책에서 읽은 기억이 나는데 주부의 노동은 제로를 만드는 노동이라서 열심히 해도 티가 안나고 조금이라도 소홀하면 바로 티난다고 했다. 기껏 애써봐야 제자리로 돌려 놓는 노동인 것이다. 그래서 주부들은 곧잘 우울해진다. 나는 하루종일 정리하고 치웠지만 식구들이 돌아와 밥을 해먹고 생활을 하고 나면 또 설거지가 쌓이고 바닥엔 빨래가 굴러다닌다. 열심히 일을 할수록 허무해진다. 그래서 나는 그 허무를 치료할 처방으로 너무 불편한 상황이 아니면 바로 바로 치우는 것보다 치우고 싶을때 몰아 치우는 걸 택했다. 대신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맘껏 하기로.
그래서 아침에 남편이랑 애들이 다 나가고 나면 거의 하루종일 책을 읽다가 저녁에 몇시간 몰아서 일을 하곤 한다. 설거지를 잔뜩 쌓아놓고 책을 보다보면 명색이 전업주부인데 이래도 되는 걸까 싶은 때가 많았는데 오늘로서 그런 죄책감도 안녕~이다! 설거지 안해서 멋지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한명이라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더욱 기가 막힌 건 다음장면이다.

— 그는 헤프지바가 움직일 때 매트리스가 크게 출렁이는 것이 좋았다. 그녀가 끼어들면 모든 것이 거대해졌다. 그가 그녀와 함께하는 처음 그 순간부터 땅은 움직이고 바다는 들썩이고 하늘은 한데 모여서 검게 변했었다. 그녀와 사랑을 나누는 것은 심한 뇌우 속에서 살아남는 것과 같았다.(소설352~353쪽)

— 그나저나 덩치 큰 여자와 사랑한다는 건, 심한 뇌우 속에서 살아남는 것과 같은 거구나! 멋지다. 뇌우 속에서 살아남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여자라니. 헤프지바는 정말 멋지다! (245쪽)

ㅋㅋㅋㅋㅋㅋ 다락방님 정말 멋지다! 헤프지바를 소개해 주시다니! 하루에 서너시간씩 운동을 하며 지내던 내가 몇년전부터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운동도 끊고 살림도 끊고 많은 시간을 앉아서만 지내다 보니 살이 여기저기 붙어서 우울해졌다. 그래도 가만히 앉아서 책읽는 시간이 제일 행복하니까 책을 많이 읽는 사람들은 대부분 통통하더라고 이상한 논리를 펴가며 버티고 있었는데 (책 많이 읽는 날씬하고 이쁜 여자들을 볼때마다 좌절했다) 이제 그럴 필요도 없어졌다. 자꾸 혼자만 살이 쪄서 남편한테 미안했는데 그럴 필요도 없어졌다! 심한 뇌우 속에서 살아남은 기분이라지않는가. 나는 천군만마를 얻은 듯한 기분이 되어 남편한테 이 부분을 읽어보라고 책을 줬다. 킥킥대며 읽는 걸 보니 동의하는 건가. 차마 동의하는 거냐고 묻지는 못했지만 나는 다락방님의 책을 읽으며 마음의 짐들을 다 씻어낸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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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15-10-04 0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 캐공감!

2015-10-04 08: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0-04 08: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수이 2015-10-04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책장에 꽂아만 놓고 아직 읽지 않았는데 오로라님 글 읽으니 읽어야겠어요. 더 이상 미루지 말고 ^^;;

살리미 2015-10-04 09:32   좋아요 0 | URL
앗! 야나님. 반가워요^^ 야나문 오픈 준비하시는거 보면서 부러워하고 있었거든요. 근처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저도 야나님 카페에서 하이볼 한잔 하면서 책 읽고 싶어요^^

수이 2015-10-04 09:52   좋아요 0 | URL
서울 오실 있으면 한번 들려주세요 오로라님 ^^
일요일 즐겁게 보내시구요 :)

살리미 2015-10-04 10:36   좋아요 0 | URL
네^^ 기회가 되면 꼭 들를게요^^ 아니 기회를 만들어서라도요~~

스윗듀 2015-10-04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어요, 히히. 오로라님도 멋진 남편을 두신 거 같은데요!

살리미 2015-10-04 13:45   좋아요 0 | URL
lovelydew님 반가워요^^ 제 남편은 그저 평범하고 착하고 조금은 불쌍한 대한민국 40대 중년 남자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