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길의 사상가, 하이데거 그린비 인물시리즈 he-story 9
박찬국 지음 / 그린비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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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로 들어가는 어쩌면 가장 쉬운 길이다. 하이데거의 존재론과 예술철학 등을 그의 생애 연대기와 더불어 부드럽게 정리한다. 하이데거의 개념은 사전이 필요할 정도지만 이 책은 그럴 필요는 없다.


예술의 종말 이후 - 컨템퍼러리 미술과 역사의 울타리
아서 단토 지음, 이성훈 외 옮김 / 미술문화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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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 종말을 고했다. 모더니즘 미술의 종말일 뿐이다.워홀의 60년대 이후 모든 것이 예술이 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컨템퍼러리 논하지만 80년대 나온 책이다. 포스트모더니티적 조건을 이해하면서 포스트모던니즘을 기피하는 이유는 통시적,공시적 이유가 있어보인다.


요즘 버라이어티를 보면 '허세'라는 말이 종종 등장한다.

 

 '허세'라는 단어가 그리 어려운 단어가 아님에도 의외로 잘 쓰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익숙한 TV프로그램에서 이 단어가 자연스럽게 등장하니 오히려  단어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온다. (졸라 멋지게끔 '개시한다'라고 해주까...)

 

하여간 '허세'라는 단어는 음악처럼 직접적이어서 자막에 "아...이 형 허세는..." 할 때 마다 자막이 딱딱한 막대기가 되어 가슴을 쿵쿵 건드린다. 그러니까 '허세'라는 버라이어티 자막을 보면서 자기윤리적으로 되는 것이다.

 

그러다가...

 

 사람이란게 졸라 약삭 빨라서,  웃자고 만든 버라이어티의 자막이 던진 윤리의 몹쓸 덫에 걸려 나만 죽을 수 없다는 생각에, 내 주변 인근 10리에서 그 단어의 저인망에 걸리는 사람들이나 과거 행동들을 스캔한다. 그러니까 '내가 하면 사랑이요 남이 하면 불륜'의 무기로 내 드라이브는 빠른 검사로,  타인은 정밀검사로 시행하는 거다.

 

 

그 뭐시냐...

 

별로 어렵지 않은 이야기 어렵게 만드는 것도 인문병신학의 특징이다. 물론 어려운게 모두 병신학은 아니다. 어떤 건 어렵지만 파다보면 피가 되고 살이 된다. 그 점을 노린다. 어려운 것 처럼 보이면 있는 것 처럼 보인다는 허세. 결국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깊은 인문학의 범선에 무임승차. 인문병신학의 승차권 확보. (아-으 동동다리...)

 

누가 뭐라 할 지면 "유 노 왓 아 민" 하면 그냥 남들은 대충 묻어갈 수 있다. 그러다가 태클 걸리면 "왓 더 퍽..." 하면 그만.   

 

 

아...따뜻한 봄 날. 

벚 꽃이 진다. 

못 놀아 지랄병이 도진다.

 

 



 
 
 

한동안 출판계가 번역 문제로 시끄럽지 않을까 싶다. 알라딘에서도 종종 있는 번역비평이 이번에는 유명한 작품의 유명한 번역가를 상대로 스캔들을- 부정적인 의미만은 아니다.- 만들었다.

 

자극적인 제목 "우리가 읽은 <이방인>은 카뮈의 <이방인>이 아니다." 노이즈 마케팅의 간판을 제대로 걸었다. 마케팅 측면에서는 최소한 성공적이다 싶다.

당장 나 역시 까뮈의 <이방인> 새 번역본을 구매하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허핑포스트 '알베르 카뮈 번역 논쟁' :

  http://www.huffingtonpost.kr/2014/03/29/story_n_5053660.html?ir=Korea&utm_hp_ref=korea#

 

 

새움출판사의 블로그에 들어가보면 이미 지난해 부터 카뮈 연재글을 통해 번역비평이 진행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http://saeumbook.tistory.com/

 

 

 

 

 

  새로운 번역본이 맞서 싸우는 대상은

김화영 교수의 민음사 번역본이다.

 

문화권력의 측면에서 본다면

김화영-민음사 조합과의 싸움은

다윗과 골리앗의 대전과 비슷하다.

 

하지만 전쟁은 규모의 싸움이 될 때가

많지만

전투는 꼭 그렇지 많은 않다.

그리고 작은 전투의 성패가 판세를 바꿀 수도 있고...

 

 

 

 

프랑스어 번역의 abc도 모르는 독자이기 때문에 번역의 옮고 그름을 판단할 계제는 아니다. 번역이라는 것 역시 다른 예술 창작 과정과 유사하게 일종의 취사 선택 과정과 해석 작업이 필요한 것이라는 점은 안다. 단지 해석상의 문제라면 양해수준에서 봉합될 수도 있다. 하지만 '해석상의 차이'와 '오역' 이 갈라지는 지점은 미묘하며 또한 중요하다.

 

강건너 불구경 하는 기분이기는 하지만, 이런 논쟁이 벌어지는 것은 독자 입장에서 결코 나쁘지 않다. 누가 이기고는 관심의 동심원 밖의 일이다. 이런 논쟁 과정이 벌어질 수 있느 풍토가 번역가에게, 출판사에게 일종의 내적인 규제 원리로 영향을 미친다면 더 좋은 번역들을 만날 수 있는 것은 결국 독자다.

 

25년 전 쯤 , 집에 있던 70년대 초반에 나온 문고본  카뮈의 <이방인>을 읽었다. 오래전이었지만 강렬한 느낌을 받았었다. 태양 빛 때문이었나. 이 참에 다시 집어도 좋을 것 같다.



 
 
그렇게혜윰 2014-03-31 16:31   댓글달기 | URL
이런 정면 승부는 좀 멋진 것도 같아요...^^ 저도 멸치볶음 밖엔...

드팀전 2014-04-01 08:58   URL
전 멸치볶음도...ㅜㅜ 외적으로 보자면, 권위에 대한 도전과 노이즈 마케팅이니 정치적 올바름의 측면에서 보자면 절묘하게 결합되어 있지요.

비연 2014-03-31 22:13   댓글달기 | URL
흠... 상당히 놀라운 도전이네요. 카뮈하면 김화영이고 민음사인 게 오래된 일이었는데.
어쨌든 한번 사서 볼 마음이 확 생기긴 합니다..

드팀전 2014-04-01 08:59   URL
그렇죠.ㅎㅎ 출판사 입장에서는 판매에 덕을 볼 수 있는 건 확실합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그렇다. "예술은 사기다." 

 

코끼리표 전기 밥솥이나 삼성전자 컬러 TV 만큼이나 진부한 이 말은 영화<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도 적용된다. 영화가 진부하다는 것이 아니다. 영화<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뻥으로서의 예술, 사기로서의 이야기, 판타지로서의 영화' 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영화는 팀 버튼의 <빅피쉬> 나 타셈 싱의 <더 폴 :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의 연장선 속에 있다. (이 정도 이야기하면 이미 다 아는 사람들은 "아...뭔 풀 뜯어 먹는 소리하려는지 알겠군." 할테지만) 두 영화 모두 '이야기에 대한 아름다운 영화' 이다.  팀 버튼과 타셈 싱 모두 헐리우드의 스타일리스트이다. 그들이 만드는 시각적 이미지는  동화적이고 환상적이다. 독보적인 시각 이미지로 영화의 식욕을 높인 사람들이다. 이런 스타일리쉬한 영상은 21세기에  분홍빛 셔츠를 입고 헐리우드를 활보할 것 같은 웨스 앤더슨에게로 이어진다. (사랑스러운 영화 <문라이즈 킹 덤>을 보라.)

 

영화를 비롯하여 모든 예술은 일정 정도 숙성된 이후 자기반영적인 속성을 갖는다. 자기반영이라는 건 쉽게 말하면 '되먹이는 것'이다. 이것은 놀이가 될 수 도 있고, 성찰이 될 수도 있으며, 또한 전제가 된 개념에 대한 도전이 될 수도 있다. 즉 예술이 예술 자체를 소재로 삼고, 영화가 영화 자체를 대상으로 삼아 노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글로리아 스완슨이 나오는 영화<선셋대로>)는 헐리우드 무성 영화에 대한 오마주이자, 스튜디오 시스템에 대한 자기 성찰 또는 영화 자체의 의미를 되짚는 자기 반영성을 보여주는 고전적인 작품이다.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역시 동화적인 시각이미지와 코믹 스릴러 양식을 전면에 내새우고 있다. 하지만 영화의 한 겹 아래에는 앞서 말한 뻥으로서의 '이야기'와 '예술' 또는 '영화' 에 대한 경이와 존경을 담고 있다. 

 

영화는 먼저 선명한 색상과 잘 짜여진 화면 구성으로 마음을 빼앗아 간다. 단 한 장면도 건성으로 찍은 샷이 없을 정도로 프레임으로 통해 들어오는 시각이미지는 완벽히 감독의 의도와 통제하에 놓여 있다. 장인이 한 땀 한 땀 눌러 찍듯 한 장면 속의 색상과 소품, 세트, 조명 등이 일관된 흐름 속에서 진행된다. 빨간 색 엘리베이터, 보라색 유니폼, 분홍색 케이트샵, 푸른 빛의 감옥, 하얀 설원. 감독의 게이적인 아지자기함이 사랑스럽다. (대단히 키치적인 색 분포아닌가? 키치가 뭐?) 

 

STILLCUT

 

영화는 늙은 작가(톰 윌킨스) 의 나레이션으로 시작한다. 늙은 작가의 영화 속 이름은 없다 !!<흥부전>이나 <해와 달> 이야기의 원작자가 없듯이. 태초에 이야기가 시작될 때 거기에 작가란 존재하지 않았다. 가장 오래된 형태의 문학인 구비 문학이란 것이 무명씨들의 것이 아니었던가? 그렇기

때문에 영화 속 젊은 작가 역시 이름이 없다. 

 

카메라를 응시한 무명의 작가는 자기의 스토리를 시작한다. 영화는 피카레스크 구성을 따른다. 이제 수 십년 전 벚꽃 피는 오늘처럼 젊은 날의 그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젊은 작가(주드로)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기 좋아하는 사람들 머무는  - 우리 현대인들이 그러하듯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어슬렁 거린다.  젊은 작가의 눈에 한 명의 노인이 들어 온다. 엄청난 부호이자 호텔의 주인인 무스타파(머레이 에브라함)이다. 그는 좋은 방을 놔두고 로비 보이의 숙소로나 적당한 자기 호텔의 작은 방에 머문다. 무스타파는 "오래되어 운치가 있다는 목욕탕" 에서 자신의 지난 이야기를 젊은 작가에게 들여준다. 로비 보이로 이 호텔에 오게 된 이야기와 그의 스승이자 상사였던 구스타브(랄프 파인즈)와의 오래된 추억을 말이다.

 

잠시 정리해보자. 관객은 늙은 작가가 이야기하는 젊은 시절의 이야기를 듣는데, 작가가 어렸을 때, 어떤 늙은이가 해 준 자신의 젊은 날의 이야기를 듣는 셈이다. (이야기가 좀 헷갈려 보이지만 의도한거다. 즉 '이야기'에 대한 영화라는 걸 말하기 위해서다.)  영화는 보다시피 두 번의 화자를 통해, 즉 두 번의 액자를 통과하여 메인 스토리에 도달한다. 액자 속의 또 다른 액자.  자...좀 전에 영화의 색감을 이야기하며 장면이나 씬이 아니라 '프레임'이라는 단어를 왜 썼는지 눈치 챘어야 한다.  영화는 프레임의 예술이다. 액자는 다른 말로 하면 창이고 프레임이다. 우리는 영화관에서 카메라의 프레임을 통해 촬영된 스크린이라는 창문을 통해 경험한다.

 

이 영화에서 눈에 띌 정도로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구도가 바로 창문이미지이다. 창문(프레임)을 통해 호텔 내부를 보고, 창 틀에 서서 이야기하는 주인공들이 나온다. 창문과 관련된 이미지가 너무 너무 자주 등장한다. 공원의 비둘기 똥만큼 많다. 창을 중심으로 수평 패닝을 한다거나 창문을 통과하여 줌 인, 줌 아웃한다. 반복에는 이유가 있다. 물론 감독은 쿨하게 "난 그게 좋았을 뿐이고"라고 말할 터이지만. 감독의 의도가 영화를 보는 해석의 종착역은 아니다. 그런 수직적 비평관은 '작가를 죽여버린'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창문의 이미지는 영화 프레임에 대한 상징적 기표인 셈이다. (이제는 진부한 상징아닌가?) 

 

우리는 벌써 두 번의 '액자'에 대해 말했다. 하나는 '액자 소설'의 액자, 그리고 '프레임'으로서의 액자이다. 영화의 중심사건은  '사과를 든 소년'이라는 명화를 유산으로 받게 된 호텔 지배인이 겪게 되는 소동이다.

 

그렇다. 그림이다.그림.

 

히자만  주인공은 그림을 숨기거나 옮기지 않는다. 그림이 걸린 액자를 옮긴다. 뭔 말 장난이냐고.? 잠시 나와서 좀 보자.   잠시 삼천포를 들렀다가. 과문해서 그런건지 모르지만, '사과를 든 소년'은 처음 보는 그림이다. 피카소의 '파이프를 든 소년'은 안다. (정말 '사과를 든 소년'이란 그림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상관없다. 뻥이니까) '사과를 든 소년'  대신 벽에 걸렸다가 결국 분노 폭발한 아들(애드리언 브로디)에게 발각되어 부셔지는 그림은 누구나 알 만하다. 에곤 쉴레다. 영화<파란 대문>에서 김기덕이 하숙방에 졸라 떡하고 걸어 놓은 것도 에곤 실레였다. 하여간 우리는 그림을 옮긴 것 같지만, 사실 액자를 옮긴 것이다. 이건 말장난 같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데리다는 예술작품에 있어서 에르곤과 파레르곤의 관계를 설명한다. 우리는 흔히 말하는 작품, 예술의 내적가치를 담지하고 있는 그것은 '에르곤'이다. 그리고 부차적인 그것, 즉 액자와 같은 것은 '파레르곤'이다. 데리다는 이 에르곤과 파레르곤의 경계를 해체한다. 오히려 그동안 외면당했던, 인식에 포함되지 않았던 파레르곤과의 위상, 침투, 넘나듦, 경계에 주목한다. 이렇게 세 번째 '액자'가 등장했다.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 파르레곤은 화면비이다. 관객은 뭔가 변화한 것 같은데, 그게 뭔지 잘 모를 수 도 있다. 아니면 "아 왜 갑자기 화면이 줄었지?" 정도로 파악하고 넘어갈 수도 있다. 영화 속에서는 화면비가 1: 1.37 1: 1.85 , 1: 2.35 등으로 변화한다. 스토리의 시간에 따른 변화인 셈이다. 화면비의 변화는 영화의 역사를 통시적으로 상징하는 한가지 오마주인셈이다. 영화에 대한 관객의 미학적 경험은 분명 시대를 따라 변화해 왔다. 영화 <그래비티>의 시각적 이미지의 변화가 놀라운 것이 듯, 화각의 변화, 스타일의 변화, 색깔의 변화 등 영화의 기술적 시지각의 변화 역시 영화라는 예술 체험에 있어서 거대한 변화를 의미한다.  파르레곤으로서의 영화 프레임의 변화. 우리의 영화적 체험은 그런 파르레곤의 변화와도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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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언급했던 영화 <더 폴>의 도입부에는 베토벤 교향곡 7번의 장중한 울림 속에 멋진 흑백 오프닝씬을 만날 수 있다. 그 장면은 감독 타셈 싱이 무성영화 시대의 영화인들에 대한 존경으로 포함시킨 장면이다. 영화<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어떠한가? 

 

 영화 속 주인공들의 모든 연기와 액션은 그야말로 버스트 키튼이나 해롤르 로이드의 그것 아니던가?  유산 발표장에서의 주먹다짐, 감옥에서의 도주씬, 호텔에서의 총격전 등등등... 현대의 코미디에서는 결코 만날 수 없는 올드한 ,그렇지만 향수를 자아내는 고전 코미디에 대한 감독의 애정이 묻어나는 장면들이 아닐수 없다.

 

영화 속 마지막 대사에서 호텔 주인 무스타파는 '구스타브는 그 당대에도 이미 오래전 사람이었으나, 그의 환상 속에서 살았다.' 라는 말을 한다.(정확히 기억아지 않는다.) 

 처음부터 무스타파가 로비 보이였는지 의문이 갔다. 외모가 다르지 않은가? 그리고 그게 별로 중요한 건 아니다. 중요한 건 무스타파가 결국 구스타브이며 로비 보이 제로라는 것이다. 아니 그것이 아니어도 상관이 없다. 이 영화가 그 문제를 밝히는 스릴러는 아니지 않은가?  궁극적으로 이 영화가 '이야기'와 '영화'라는 환상에 대한 이야기라면 주인공은 구스타브여도 제로로 불러도 상관이 없다.

 

한가지 주목할 필요가  있는 점이 있다. 인도 소년으로 보이는 로비 보이의 이름. 그의 이름은 '제로'(ZERO)다. 그는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은 이민자, 난민이다. 그래서 '제로'이다. 수학에서 '제로'의 의미는 무엇인가 알면 그 '제로'라는 기표가 환상이라는 기표와 대단히 상동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제로는 '없는 것이며 있는것이다' '없음으로 있음을 보장하는 것이며 있지만 그 실체를 규정할 수 없는 무엇'이다.  우리가 예술이라는 것, 영화라는 것. 이야기라는 것. 그것이 바로 '제로' 와 같은 도상에 서있는 것은 아닐까?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이야기와 영화에 대한 '벚꽃 예찬' (우리 아들 이름이다.)이다.   

 

**  엘리베이터 타고 열심히 멀티플렉스 영화관 올라가서- 예전엔 대개의 영화관이 1층에 있었다- 뒤적여봐도 확 꼽히는, 볼 만한, 그런 영화 찾기 쉽지 않은 시즌이다.

그런데 웨스 앤더슨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외면 한다고...당신은 미세 먼지때문이거나, 봄날의 멜랑꼴리때문에 제 정신이 아닌게 분명하다. 아님 말고 홍홍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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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 2014-03-29 07:20   댓글달기 | URL
비행기 조종보다 더 힘든 운전을 하셨으니 비행기 조종쯤이야 아무 것도 아니게 편하실 것입니다.

손님 2014-03-29 07:29   댓글달기 | URL
꽃동네 주변에서도 예술이 나치즘의 시간이었고 춘화의 시간이었고 뻥이었던 시간들을 간직하셨을 테니까요. 되풀이 되지는 않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