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만에 알라딘 서재에 글을 올립니다. 알라딘에서 책은 구매하고 있지만  SNS 쪽으로 주거지를 옮긴지 오래되어서 ㅎㅎ  글을 어떻게 써야하는지 찾는데도 좀 어리둥절했어요. 오래 전 살던 옛집을 찾아 갔더니 거리도 집도 바뀌어서 헤메는 것과 비슷하군요. 


하여간 오랜만에 와서 이런 소식 전하려니 좀 쑥스럽긴 합니다. 지난 금요일 첫 책이 나왔습니다. <음악,좋아하세요>(호밀밭) 



3년 정도 중앙일보 일요판인 <중앙선데이>에 기고했던 글을 다시 수정했어요. 음악인문에세이 정도 되겠네요. 클래식 음악이 주를 이루기는 하지만 판소리,재즈,가요 등등 몇 가지 씩 세상사는 이야기들과 기타 등등


12월을 맞아 설치한 크리스마스 트리 앞에서 한번 찍어봤어요. 책 제목 <음악, 좋아하세요?>는 제가 좋아했던 만화<슬램덩크>에서 채소연이 강백호에게 처음으로 건넨 말을 패러디 했어요. 소연이가 백호에게 묻지요. "농구, 좋아하세요?"....마지막에 백호가 산왕이랑 경기할 때 큰 부상을 당해서 정신이 약간 혼미한 상황에서 어딘가에게 답합니다. "네, 좋아합니다."  혼을 담아서 말이지요. 전 이 장면이 참 좋았어요.  크리스마스 트리 아래서 찍으니 선물용으로 좋겠다 싶지 않습니까?



알라딘 서재 활동할 때도 제가 오프라인에서 뵌 알라디너가 10명 안쪽이었습니다. 갑자기 당시 이름들이 좀 생각나네요. 바람구두님, 아프락사스님(이름 바꿨는데 뭔지 잘 기억이),승주나무님,jade님,글샘님,바람돌이님...또 계시겠지만 전부 오래 전 분들이라..ㅜㅜ 하여간 어차피 책에 사진 공개한 마당에 까잇...펭수의 탈을 벗고. (쑥스) 



 오늘 저녁에 부산에서는 북토크도 해요. 저녁7시 광안리.<생각하는바다>

 시간되시는 분은 그냥 오셔도 됩니다. 


그리고 펭수처럼 당당하게 영업모드... "책 좀 사주세요.김명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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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9-12-02 1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오랜만에 나타나셔서 이런...
암튼 축하합니다. 부산은 넘 멀군요.ㅠ

드팀전 2019-12-02 17:00   좋아요 0 | URL
ㅎㅎㅎ 그러게 말입니다. 갑툭튀라 조금 쑥스럽군요.잊지 않으시고 댓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30년도 지난 기억에서 부터 시작해보겠습니다. 국민학교 저학년때 일입니다. 교회에서 단체관람 으로 찰튼 헤스톤, 율 브리너 주연의 영화<십계>(1956)를 보러 갔습니다.  영화의 클라이막스인 홍해가 갈라지는 장면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고전주의 시대의 조각같이 생긴 찰튼 헤스톤이 망망대해를 향해 두 팔을 벌렸습니다. 바닷물이 깍두기처럼 각을 잡고 갈라졌습니다. 물의 벽. 영화관 곳곳에서 "할렐루야","주여"하는 탄성이 흘러 나왔습니다. 어린 저는 공공장소에서 커다란 목소리로 탄성을 외치는 교인들이 의아했으며 창피했습니다. 



 영화<엑소더스: 신들과 왕들>를 보는 동안 어느 누구도 "할렐루야"나 "오. 주여" 를 부르지는 않았습니다. 그 점은 다행입니다. 몇 가지 추론을 해 봅니다. 단체 관람자들이 없어서 집단 행동이 없었다는 점은 아닐까. 또는 영화를 본 그 날 기독교인들이 많지 않았을 수도 있을 겁니다. 아니면 공공장소에서 종교적 색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는 내성적 기독교인들이 많았을지도 모릅니다. 기타 등등 


하지만 영화적으로는 다른 곳에서 답을 찾아야 보게 됩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영화<엑소더스>는 종교적 소재이지만 종교를 지우는 방식으로 그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리들리 스콧감독은 영화의 표면은 모세와 람세스의 갈등 구조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고 말합니다. 영화를 세속의 갈등과 스펙터클이 혼합된 헐리우드 영화로 보는 것이 맞다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영화 속에서 신의 문제가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리들리 스콧은 신의 문제를 방석 밑으로 넣어 놓은 것이지 창 밖으로 던진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모세의 정체성부터 출애굽의 해방까지 신 개념을 바닥에 깔아 놓고 있습니다.그는 대략 범신론과 회의적 유신론 사이를 오고 가고 있습니다.


먼저 리들리 스콧이 창조한 모세가 현대적 인물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크리스천 베일은 이 영화에서 부드러움과 강함,신념과 회의, 폭력과 자비, 인내와 신경증을 동시에 가진 분열적인 인물을 현명하게 연기해 내었습니다.  영화<엑소더스>의 모세는 신에 대해 끝까지 의심의 눈초리를 내려 놓치 않습니다. 신이 이해 불가능한 절대자라면 모세는 이해불가능한 신의 타자입니다.  두 모호함이 대결하는 국면은 여러 차레 등장합니다. 모세는 처음으로 난 것들을 죽이겠다는 도착적인 신의 결정에 대해 "그것만은 안된다."고 강력하게 항의합니다. 람세스가 죽은 아이를 들고 "이것이 너의 신이냐?" 고 묻는 대목에서 모세는 연민과 죄책감, 그리고 침묵의 깊은 눈으로 항의하는 자에게 정당함이 있다는 암묵적 동의를 보냅니다.


 영화 속 유대의 유일신 야훼(여호와)는 영화<십계>에서처럼 모세와의 대화를 통해 음성으로 존재하는 신입니다. 영화<엑소더스>는 신의 이해불가능성을 표면에 드러내는 방식으로 신의 존재를 보여줍니다. 영화에서는 어린 아이의 형상을 한 신이 등장합니다. 리들리 스콧이 드러내는 신의 가시성은 오히려 신의 줄어든 영향력에 대한 역설적 표현에 가깝습니다.  신이 모호성을 유지하려고 애쓰지만 하지만 결국 모호성의 심연에는 신의 불능성이 있다는 것 입니다. 그렇게 신은 이제 자신을 직접적으로 재현할 수 밖에 없습니다. 무능을 가리기 위한 방편이었겠지요. 영화<엑소더스>에서 신은 이집트에 내리는 재앙의 출처를 설명하기 위한 설정 이외에 영화에서 비껴 서 있습니다. 왜 유대인을 구하려하는지, 왜 모세를 선택했는지 설명이 없습니다. 오히려 급한 성질의 모세를 자극하거나, 그를 몰아세우곤 하는 신경증적인 신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영화는 모세가 낙상한 이후 일종의 후유증 속에서 신을 만나는 듯이  설정함으로써 신은 망상 속에서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불러 일으키게 합니다. 신과 이야기하고 있는 모세를 바라보는 시선은 분열증 환자의 대화같아 보이기까지 합니다.리들리 스콧은  신을 축소한 빈 공간에 이 현대적인 모세를 기입함으로써 이 영화를 주도해나가게 합니다. 이 지점을 예리하게 공략한 것은 리들리 스콧이 홍해의 기적을 영화<십계>와는 다른 방식의 사실주의적 방식으로 재현한 것만큼이나 탁월합니다. 물론 그 역시 영화의 가장 강력한 하이라이트인 갈라졌던 홍해가 다시 봉합되는 장면에서는 판타지를 100%활용합니다.


 모세가 가진 현대적 속성와 그 정치적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잠시 철학적 사유를 활용해야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모세-신-유대교가 중심 주제어가 될 것입니다. 슬라보예 지젝은 <죽은 신을 위하여>에서, 유대교와 이교, 그리고 기독교의 차이를 설명합니다. 그 중 유대교가 가진 특징은 신을 가시적 영역에서 몰아냅니다.십계명에 있는 형상의 금지입니다. 이것이 이루어지는 과정은 신의 의도 자체의 불투명성과 만나는 지점에서 발생합니다. 지젝은 '불투명한 타자의 욕망과의 대면' 이라고 말합니다. 지젝은 인간이 자유로와지는 지점이 이런 대면을 통해서라고 말합니다. 니체적으로 말하자면, 신의 섭리라는 안정감 보다는 자유의 불안을 향유하는 위치를 얻게 된다고 보면 됩니다. 리들리 스콧에 의해 다시 아이의 옷을 입은 신에게 영화<엑소더스>에서 모세는 여러번에 걸쳐 신의 욕망, 의도를 묻습니다. 그 때마다 신은 질문에 다시 질문하기 방식 또는 모호하게  답을 피해가는 우회 전략을 택합니다. 전능한 신이 드러내는 것은 일종의 '무능함'이었습니다. 400년 이상의 유랑 세월을 한 번에 구제해내지 못하는 무능, 또 몇 번의 재앙이 실패로 돌아가는 허약한 전술 , 구해낸 민족이 환락과 쾌락에 빠지게 되는 모순 등은 신이 무언가 계속 실패하고 이를 그 때 그 때 수습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유대인의 구출 역시 궁극적으로는 람세스라는 법의 이름을 통하지 않고 불가능 했습니다. 법을 매개하지 않고는 이루어지지 못하는 역능은 결국 무능이라는 단어로 밖에는 설명하기 힘듭니다. 


 전능의 신에게는 이 모든 게 단 한 번의 재앙으로도 가능했을텐데 말입니다. 지젝이 보기에 유대교가 다른 종교와 달랐던 첫번째 차이는 유대인들이 '신의 무능'이라는 비밀을 알아내었다는 것입니다. 영화 속에서 모세 역시 신의 무능에 대해 이해하고 있었다고 추론해보게 됩니다. 모세가 끝까지 신의 충직한 신민이 되기 보다는 무언가 고독한 반항아, 회의주의적 배가본드로 보이는 이유는 그래서입니다. 지젝은 구약의 욥이 깨우친 것이 신이 내리는 고통이 가진 무의미함이었다고 말합니다.  '최초의 이데올로기 비판'이 되는 것이지요. 통상적 해석에서는 고통은 시험이라거나, 더 큰 행복을 위한 과정이라는 식의 원인-결과론이 존재하는 반면 고통의 이데올로기 비판에서 고통은 무의미합니다. 오로지 고통 그 자체가 자연주의적 의미로만 남는 것이지요. 고통이 신의 사랑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면  고통이 무의미한 것이라면 신의 의미조차 의문이 됩니다. 영화 속에서 모세는 신이 가한 고통이 결국 무의미한 행위의 반복에 지나지 않았음을 이해하고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지점은  정치-신학적 비판요소가 자리잡게되는 영토가 될 수 있습니다.


비록 유대교가 신이라는 이해불가능한 타자의 욕망과의 접촉을 통한 자유를 얻었다고 하더라도 유대교는 대리 보충물들을 이용하게 됩니다.유대인들의 관례나 의례등이 그것이겠지요. 논의에서 조금 벗어나지만, 반면 기독교는 모든 것을 말한 종교, 즉 계시의 종교가 됩니다. 지젝에게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이 계시된 '사건' 이후를 충족 시켜 나아가는 일종의 결단주의적 성격이 기독교가 가진 윤리성과 보편성의 근원이 된다는 점입니다. 이것을 보증하는 강력한  언설은 신 스스로의 자기 부정이었습니다. 즉 이 구약의 불명확성의 신은 이제 스스로를 부정하는 유래없는 방식을 취합니다.("주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라는 십자가 칠언을 통해 )대단히 독창적이고 또한 도착적입니다. 기독교가 보편성을 재획득하는 방식은 메시아를 실재계로 남겨두는 유태의 방식이 아니라 메시아의 재림 이후의 삶을 우리가 살고 있고, 그것을 꾸려나가는 공동체적 윤리적 보편성이 이를 추동하며 또한 그 재림의 결과를 완성할 수있다는 태도입니다.


 유태인 모세는  홍해를 건너고 나서도, 신의 능력을 보고 나서도 새로운 세계에 대해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습니다모세는 그런 면에서 신의 죽음까지는 아니어도 신의 무능과 그 이후에 대한 역사적 고민이 투여된 현대적 모세상입니다. 영화<다크나이트>에서 선/악의 본질에 대한 존재론적 고민에 빠진 영웅이라는 새로운 캐릭터를 잘 표현해낸 크리스천 베일은 이 영화<엑소더스>에서도 심연에 어떤 모습이 숨겨져 있는 지를 드러내지 않는 영웅상을 잘 소화해내었습니다. 모세-신 관계 속에서 베일의 깊은 눈 속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없습니다. 어쩌면 모세는 신과의 끊임 없는 줄타기 속에 -본인 스스로도 확신 할 수 없었던- 존재했던 해방의 리더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하지만 리들리 스콧이 줄곧 회의적 유신론자의 태도를 취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현대적 모세 속에 신의 양태를 범신론적으로 해소시키려는 단면이 드러나곤 합니다. 범신론에서는 신이 세계의 창조와 더불어 세계의 사물에 투여되는 방식으로 자신을 소멸시킵니다. 그리하여 신을 뜻하는 "모든 곳에 있으며 어디에도 없는" 존재가 만들어 질 수 있습니다. 모세가 스스로 유태인임을 인정하는-내적으로 공감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장면에서 범신론적 신의 존재가 드러납니다. 람세스는 어린 시절 유모의 팔을 자르는 폭력적인 예비 행위를 통해 모세의 정체성을 입증하라고 합니다. 왕족으로 자라났고, 수 많은 전투에서 살육을 했던 모세에게, 노예 신분인 유태인 하녀는 하나쯤 죽어도 별반 상관없는 사람입니다. 설령 그가 친누나일지 아닐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모세는 여기서 그녀의 죽음을 "그렇다. 나는 유태인이다."라는 선언을 통해 막아 냅니다. 영화 속에서 이 장면은 불필요한 죽음을 막기 위한 모세의 윤리적 행동으로 그려지기는 합니다만, 이 선언은 또한 모세를 이집트 왕자에서 유태인으로 바꾸는 전환점이 됩니다. 모세는 끈임없이 자신의 정체성을 의심하지만, 이 선택에 대한 충실성이라는 윤리적 결단주의의 방식으로 자신을 추동해냅니다. 우리가 영화 속에서 만나는 모세는 유태인이 아니었을 수도, 또는 유태인일 필요도 없었을, 신이 선택한, 또는 신의 선택을 충실하게 이행을 통해 완성하려고 한 정치가였을지도 모릅니다. 


모세를 굳이 유태인으로 볼 필요가 없다는 해석은 프로이트의 것입니다. 종교적인 방식으로 수용하지 않는다면 <성경>은 가장 잘 보관된 인류학,또는 신화학의 보고입니다. 모세의 이야기는 그 중에서도 드라마틱한 성격과 스펙터클을 내재하고 있어서 영화하는 입장에서는 한 번쯤 도전하고 싶은 과제일 것입니다. 모세의 이야기를 아시는 분들은 이 이야기의 서사구조가 고대 영웅 신화의 많은 것들과 겹쳐진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아이의 유기- 구조- 성장- 자기 정체성 확인- 모험- 고난의 극복-영웅의 귀환" 이런 반복되는 서사가 모세의 이야기에도 들어있습니다. (모세는 '강에서 주운 아기'라는 뜻입니다.) 즉 가장 오래된 내러티브 형식인 셈입니다.

 

프로이트는 <모세와 일신교>에서 모세가 이집트 말기 유일신(태양신)을 섬기는 이집트 귀족이었다고 분석합니다. 그리고 다신교를 전통으로 하는 이집트 기득권 세력과의 투쟁 중 일종의 지지기반으로서 억압 받는 유태 민족을 포섭하여 새로운 땅으로 향한 것이라고 파악합니다. 즉 유태인의 유일신 사상은 이집트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거죠. 그리고 모세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일종의 초기 국가건설을 위한 일종의 시원적 폭력의 공동체적 희생양(르네 지라르)으로 해석될 여지를 둡니다. 공동체의 구성에는 두 가지의 과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전통과의 동일시이고 또 다른 하나는 외상적 판타지의 공유입니다. 영화 <엑소더스>와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브레드 피트의 영화<퓨리>를 보면, 탱크 분대장인 브레드 피트가 선량한 신입 병사 로건 리먼에게 강제로 나치를 살해를 종용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리고 점점 이 신입은 탱크 부대의 일원이 됩니다. 전장의 공동체에 필요한  외상을 공유하지 않는다면 타자에 의한 살해되든지, 공동체 내부에서의 살해되든지 어쨋거나 생존을 도모할 수 없는 것이지요. 이처럼 프로이트의 논리로 가면 이집트인 모세는 정치적 결합을 통해 유대인을 해방할 수 있는 리더였고 공동체의 전통을 수용할 수도 있었지만, 깊고 깊은 외상적 판타지까지 유태인과 공유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세는 결국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 일은 공동체 내부 출신인 여호수와의 것이지요. 모세를 죽인 그 시원적 국가건설의 폭력에 대한 보완물이 바로 모세를 일종의 선지자로, 신의 대리자로, 신화의 주인공으로 만들었다는 것이 프로이트의 모세에 대한 신화적 분석의 요체입니다.


 이런 해석으로 보자면 굳이 모세를 현대적 인물상으로 재현하지 않더라도 모세라는 인간 자체가 대단히 외부적이고, 이질적인 존재였다는 점은 충분히 설명 가능할 것입니다. 그런면에서 모세를 영화<십계>처럼 충실한 하나님의 전달자로만 바라보는 관점보다 리들리 스콧의 복합적이면서,경계에 선 인물, 끊임없는 회의 속에 살아야 하는 인물로 그린 것은 좋은 선택이었다는 생각이듭니다. 거기에 거대한 스케일을 누구보다 잘 요리할 줄 아는 헐리우드의 거물인 그가 여기에 손을 댄 것은 신의 축복을 받을 만한 일입니다. 영화 속에서 리들리 스콧은 압도적 스케일로 출애굽기를 완성합니다. 그는 스페인 등지에  거대한 세트장을 만들고 이집트의 신전이나 조형물들을 고증에 입각해 재현합니다. 이집트 의상이나 장식품들의 화려함 역시 꼼꼼히 살펴볼 필요가 있을 만큼 아름답습니다. 또한 마차를 비롯하여 무기류 등의 소품 역시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의 CG 역시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하지만 사실성의 구현을 우선으로 생각합니다. 만화<슬램덩크>의 명명대사를 인용하자면.. "CG는 거들 뿐입니다."  현대의 발전된 CG기술 덕분에 60년 전 영화<십계>에서 생략했던 개구리 떼나 메뚜기 떼같은 재앙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재앙들이 대단히 스펙터클함에도 그 비주얼을 지나치게 강조하지 않는 방식들도 효과적입니다. 욕심을 제어할 줄 아는 태도는 오랜 경험이 만들어낸 거장의 복식호흡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족) 1. 종교에 대한 논쟁이나 종교적 해석의 정당성을 다루는 이야기가 아니니까 종교인들께서는 그다지 분개하실 필요 없습니다. 참고로 저는 종교가 없고, 거기에 더하여 유물론자이기까지 합니다. 물론 종종 기분을 깨고 싶어하지 않는 이들 앞에서는 범신론자 행세를 할 때도 있습니다. 범신론자인 척 행세하면 괜히 너그럽고 포용력이 강해보이는 -완전히 대중문화 현상일 뿐인데도- 그런 효과를 발휘할 수 있습니다. 

2. 브레드 피트의 영화<퓨리>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점은... 퓨리 분대의  캐릭터가 우습게도 곧 개봉하는- 저와 저희 집 아이들이- 너무나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마다가스카의 펭귄>과 그대로 닮아 있었다는 점입니다. 두고 보시면 곧 패러디물 나올겁니다. 아시는 분은 이 우스운 비교에 고개를 끄덕이실 겁니다. 영화<퓨리>속에서 단순 무식한 포탄장착병은 애니메이션<마다가스카의 펭귄>에서는 니코입니다. 신입병사 로건 리먼은 당연히 착한 프라이빗이죠ㅋㅋ, 과학자 코왈스키는 퓨리에서는 독실하고 진지한 샤이아 러버프가 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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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14-12-08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지내시죠? 오랫만에 머리 아픈 글 읽으니 좋습니다.
다 읽는다고 허덕거렸습니다. ^^
아이들은 이제쯤 초등학교 들어갈 나이가 되었나요?

드팀전 2014-12-09 18:05   좋아요 0 | URL
아....네..잘 지내고 있습니다. 요즘은 알라딘에 아주 가끔씩 들어오고 있어요.ㅎㅎ 페북에서 놉니다.ㅋㅋㅋ 거기서 바람구두를 비롯해서 아는 분들을 꽤 만나고 있습니다. 첫째 아이는 2학년이고 둘째는 6살입니다.

바람돌이 2014-12-09 23:51   좋아요 0 | URL
아 벌써... 아이들 크는 걸 볼때 세월이 가는걸 느껴요. 저는 늘 청춘인듯, 마음만..... ㅎㅎ
바람구두님도 보고프네요. 하율이였죠. 예쁜 딸이 태어났다는 소식만 들었었는데 많이 컸겠네요. 제가 중간에 핸드폰을 완전히 날려먹어서 데이터를 다 날리는 통에 기존에 있던 전화번호랑 다 잃어버렸어요. 복구가 안되더라구요. ㅠ.ㅠ
바람구두님 블로그를 몇 번 들락거렸던듯한데 그것도 한동안 다잊고 게으르게 살았네요. ㅠ.ㅠ
아 페이스북은 저는 도저히 안맞더라구요. 그래서 패스....

비로그인 2016-02-12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세를 분석하는 데에 라캉부터 프로이트까지, 그리고 스피노자의 범신론...등등, 제가 알지 못하는 다른 거장의 텍스트가 있겠지요. 아뭏든 오랜만에 철학적,정신분석학적 텍스트를 보는 것 같아 흥미로웠습니다. 이 정도의 리뷰를 쓸 정도면 얼마나 공부를 해야할까라는 부러움이 앞서네요. 사실, 아는 것은 많아도 정작 글을 쓰려면 말문이 막혀 말이 안 나오는 것처럼 글이 써지지 않는 경우가 많지요. 필력이 대단하네요. 항상 건강하고 건필하세요. *^^

드팀전 2016-02-17 15:40   좋아요 0 | URL
^^ 요즘은 여기 잘 안들어오긴 하는데. 덕분에 저도 제가 뭐라 썻는지 다시 봤습니다. 잡글에 건필은 과한 말씀이신 것 같구요. 가까운데 계시는 시인님께서 건필하셔서 좋은 글 많이 써주세요. ㅎㅎ
 

북플인 뭔가 하고 있는데...알라딘 상단 오른쪽에 가입을 신청하는 배너가 떠있다.

아래로 동그란 원 안에 아는 서재인들의 이름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계속 스크롤된다.


아래 한 가지씩 금메달을 달고 있다.


서양철학의 1위 달인...동양고전의 1위 달인...000의 1위 매니아...


 매니아란 말은 내게 '덕후' 같이 들려서 섬찟하다.

예전에도 있었던 서재 무슨 무슨 순위 같은 것을 조금더 분화하고 자극적으로 만들었다

그러니까...이제 각자 열심히 달려 보세요.


 1위는 1위를 고수하기 위해서, 2위는 한 번쯤

 전교 1등 이겨보기 위해서....


최소한 나는 다시 고등학교로 돌아가고 싶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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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나를 찾아줘>(Gone girl, 2014) 


스릴러의 주인공은 인물이 아니다. 사건이다. 사건들의 씨실과 날실이 주인공이다. 영화의 오프닝 크레딧이 등장하면서 베틀이 삐꺽거리며 움직인다. 욕망이 사건의 이름으로 몸을 부르르 턴다.  곧이어 영화는 인물들의 시선과 욕망에 따라 숨가쁜 교차 운동을 진행할 것이다. 데이비드 핀처의 <나를 찾아줘>는 160분이 넘는 시간동안 관계의 강박에 대한 타피스트리를 엮어 낸다. 시끄러운 데뷔작이었던 <에이리언3>에 이어,  <쎄븐>,<파이트 클럽> 등의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으로 장르계의 장인 반열에 올랐던 그이다. 이번 영화< 나를 찾아줘>에서 핀처는 현대인의 욕망과 타자성 그리고 강박증을 스릴러의 형식을 통해 풀어 낸다. 그가 찾아낸 장소는 가장 가까우면서도 또한 가장 먼 거리를 가진 부부라는 이중성의 공간이다. 어떤 이들에게 이 공간은 -비록 매우 소수이겠으나- 베아트리체의 천국이 될 것이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연옥으로 오인된 곳이거나, 또는 림보(limbo)이거나, 더 많은 사람들에겐 지옥 그 자체이다. 안타깝게도 주인공 닉 던(벤 에플랙)은  단테 알레기리와 다른 방향으로 이를 경험하게 된다.  


영화에서 부부의 공간은- 영화적으로도 상징적으로도- 중요하다. 영화의 중심적 배경이 되면서, 또한 욕망과 관계의 엇갈림이 만드는 거리감이 생성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부모가 쓴 '어메징 에이미'라는 성장소설의 주인공이기도 한 에이미 던(로자먼드 파이크) .그녀는 소설의 모델로 어려서부터 셀레브레티였다. 그런 그녀가 매력적이지만 성공과는 거리가 멀어보이는 닉과 결혼한다. 그리고 뉴욕에서 닉의 고향인 미주리로 이사한다. 이 둘은 아름다운 2층 집에 산다. 하지만 해자( 垓字) 건너편  동경의 시선으로만 존재하는 중세 성의 내밀성처럼, 이 부부의 공간은 절대적 타자들의 공간이다. 자유주의적  개인주의가 만든 근대 세계에서 우리는 흔히 사생활이라는 이름하에 가족의 공간을 할당 받고 보호받는다. 즉 이 곳은 생의 욕망 피라미드에서 가장 기초적인 안정의 욕구를 채울 수 있는 곳이다. 또한 노동력의 안정적 재생산의 요체로서 일종의 침범할 수 없는 배타적 공간이다. 이 절대적 공간 속에는 두 명의 남녀, 즉 친밀성과 거리감이 하루에도 수 없이 교차할 수 있는 또 다른 절대적 타자가 존재한다. 사건을 추동하는 강박증적 욕망의 시선은 이 집 내부에서 있는 두 명의 타자들 속에서 1차적으로 발생한다. 그리고 2차적인 시선은 이 집 자체를 -즉 에이미의 실종사건- 바라보는 여론이라는 시선 속에서 발생한다. 즉 욕망이 집이라는 공간을 두고 내부/외부 사이에 충돌하고 있으며 이 둘이 상호참조적으로 반응한다. 사건의 중심 인물인 에이미는 이 자신과 타자들의 욕망이 가진 상호참조성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다. 그녀의 범죄는 약간의 클리쉐처럼 범죄소설을 탐독한 결과이고, 그 결과물은 사건과 사건의 해결방식이 결국 욕망의 거대 서사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발적 사건을 통해 사건의 방향이 바뀌게 되었을 때도 그녀는 지속적으로 일종의 대타자와의 상호참조를 놓치지 않는다.  


핀처가 이 두 욕망의 매개를 각자의 시점을 통해, 그리고 미디어의 시선이라는  부부의 타자가 되는 시선을 통해 교직하는 방식은 뛰어나다. 특히 매력적인 지점은 이 수많은 타자들의 시선이 가진 희극성을  메인 요리 위에 뿌리는 검은 후추처럼 블랙 유머의 요소로 끌어들인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영화 <나를 찾아줘>의 식감이 완성된다. 이 살짝 살짝 씹히는 검은 후추의 맛은 이 영화의 전체적 긴장감을 이완시키는 요소이면서 또한 장인의 손 맛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매혹의 포인트이다. 


영화 속에서 욕망의 가장 중심인물은 에이미다. 그녀의 삶은 베스트셀러 소설 속에 이미 선행되어 있었다. 영화 중반부 '어메이징 에이미가 실제 에이미보다 앞서간다.'는 대사가 나온다.  에이미의 삶은  어머니의 욕망- 영화 속에서 아버지의 존재는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즉 그녀의 존재는 일종의 '어메이징 에이미'라는 상상계 속의 거울 안에 머물러 있다. 영화는 이 상상적 관계성의 일치가 일종의 절대적 타자를 만나게 되면서 강박증으로 드러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녀의 모든 연애는 일종의 타자와의 접촉이고 이것은 늘 실패로 끝났다. 물론 스릴러의 모든 역사가 그렇듯이, 에이미의 증상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에이미에게 상징질서들은 적응하고 내면화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다. 오로지 저항하거나 이용해야하는 도구들일 뿐이다. 그녀는 거울 속으로 프레임화된 자신의 모든 욕망에 최대한 충실하다. 사랑 또는 결혼이라는 이름으로 타자와의 접촉이 생겼을 때 발생하는 변화들에 대해 강력한 자기생존의 저항선을 긋는다. 즉 라캉식으로 말하자면, 상징 질서의 주체는 빗금쳐져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상상계 속에서 그 상상계를 유지하기 위해 타자에 빗금을 긋는 방식을 택한다.  


그녀가 여기에  동원하는 것은 더 큰 타자의 욕망과 시선이다. 그녀의 이러한 태도는 그녀가 어린 나이부터 셀레브레티였다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또한 실종 첫 날부터 기자회견이라는 방식을 통해 에이미의 실종을 스펙터클화하는 부모들의 태도로 부터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녀에게는 불특정 다수의 시선은 삶을 이루는 중요한 무엇이 될 수 있겠으나, 구체적 개인들은 소거된다. 에이미는 영화 속 현재 속에서 어떤 누구와도 관계를 맺지 않는다. 관계의 기호성 지수 0 이다. 그녀가 관계를 얻을 수 있는 방식은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도망가 있던 때뿐이다. 퍼팅 연습하는 아주 짧은 장면이다. 모르는 두 남녀와 잠시 함께 있는 이 장면에서 핀치는 에이미의 유일한  타자와의 접촉을 -익명성으로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내 영화적 터닝포인트로 활용하고 그녀의 접촉을 재앙화시켜 버린다. 즉 그녀는 애처롭게도 어떠한 관계성 자체도 맺을 수 없는 존재로 남게 되는 것이다. 그녀는 이제 절박해진다. 영화의 분기점이 되는 사건이다. 비로소 그녀는 상상계의 환상을 유지시킬 수 있었던 유일한 방식 즉 '죽음충동' 의 낭만성을 포기한다. 그녀는 이제 냉정하게 상징질서와 상상계 사이를 순환하는 뫼비우스의 띠를 발견한다.

 

흥미로운 것은 닉이다. 닉은 아름다운 아내 덕에 살고 있는 평범한 남자처럼 보여진다. 상황파악 못하는 곳에서 썩소도 날리고, 어린 제자와 불륜도 저지르고, 결혼생활의 불만도 극도에 닿아 있다. 그렇다고 목을 매달아야 되는 정도의 인물은 아니다. 하지만 곧 그렇게 될 운명에 처해진다. 약간 허당기 있어 보이는 이 인물은 사건의 과정에서 반짝이는 몇 몇 모습을 보이기는 한다. 하지만 그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수동성이다. 필름 느와르의 남자 주인공들이 가진 우수와 우울증은 보이지 않는다. 그는 사건의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를 오고 가지만, 영화 초반부를 제외하면 영화는 그를 고군분투하는 피해자의 시선에서 접근한다. 영화에서 가장 큰 아쉬움 중에 하나는 바로 닉의 수동성이 그 일관성이다. 물론 이 인물은 마지못한 상황에 소극적 방식으로 대처하기는 한다. 허나 그가 가진 내적 일관성을 위해서 포기해야 했던 것은 인물인 만들어내는 극적 긴장감이다. 일종의 거세당한 현대의 남성성을 포여주는 것 같은 인물로서 드러나는 닉은 사건에서 단 한번을 제외하면 능동적 주체가 되지 못한다. 그가 불리한 상황에서 인터뷰를 통해 분위기를 전환하는 것이다. 그가 택한 전략은 에이미에게 까지 효과를 발휘한다. 그것은 에이미의 깨어진 상상계의 거울에 새로운 거울을 들어주는 방식이었다. 닉이 가진 유일한 일격이자, 닉의 입장에서 보자면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던 방식이다. 그렇지만 그의 전략이 가진 효과는 결국 다시 그를 더욱 강하게 옮아매는 방식으로 돌아온다. 그런면에서 그의 유일한 능동성은 그를 더 깊은 수동성으로 포획하는 자승자박의 실패한 전술이 된 셈이다. 


영화의 서사는 결국 에이미의 실종과 에이미의 귀환의 과정을 그리고 있는 셈이다. 녹록치 않은 실종이며 또한 쉽지 않은 귀환이다. 이타카로 돌아오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닌 법이다. 하물며 자아/타자를 동시에 파괴하려는 원대한 욕망을 가졌던 이의 귀환이라면 더더욱 만만치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사이에 사건들의 연쇄가 있었다.사건을 바라보는 수많은 시선들 있다.  이들은 집 앞에 모인 수 많은 중계차들, 선정적인 TV 토크쇼, 에미미를 찾기 위한 자원봉사자들의 모임 등으로 존재한다. 즉 구체적인 개인으로 호명되는 경우는 단 한번도 없다. 에이미가 도구적으로 이용한- 좀 더 친숙하게 말하자면, 호구로 이용한 사람들을- 이들을 제외하면 말이다. 이렇게 구체성을 띠지 않은 인물들은 존재하지만 포획될 수 없는, 유동적인 대중의 욕망 그 자체 상징한다. 닉은 시니컬하게 "좋아하다가, 증오하다가, 사랑한다."라고 이 욕망의 속성을 표현한다. 상황주의자 기드보르는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스펙터클에 대해  "사람들로 하여금 다양한 전문화된 매개체들에 의존해서 세계를 바라보게 하는 경향" 이라는 정의한다.  에이미의 욕망과 대중의 욕망이 만나는 지점이 바로 그곳이다. 에이미 귀환 과정이 이루어지는 결정적 계기에서 그녀는 자기가 도구적으로 활용하고 계획했던, 스펙터클의 이미지를 스스로 참조하는 방식을 택한다. 그녀의 세계는 상상적으로 완결된 세계이다. 즉 그녀에게는 절대적 타자라는 개념이 없다는 뜻이다. 오로지 그녀에게 존재해는 타자란 스펙터클화된 타자, 즉 자신의 존재 자체를 스펙터클화하고 또 세계 그 자체를 이미지화한 그곳의 주민들이다. 이 만남이 만들어내는 환상의 강박 그리고 구체적인 내밀성까지 침입한 그곳에서 '그녀는 사라졌다.'


대단히 긴 영화 시간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그다지 지루하지 않다. 시점의 교차가 중요한 역할을 맡기도 했고, 핀처가 군데군데 깔아 놓은 시니컬한 유머코드들도 재미를 더했다. 스릴러 영화가 가져야 하는 사건 전개의 논리적 빈틈들은 꽤 있어보인다. 약간 허당까가 있다. 영화에서 논리적 빈틈을 찾는 것은 사실 좀 허접해보이기는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사건 자체가 주인공이라면 사건의 얼개가 좀 더 치밀했어야만 했다. 에이미가 자살 결정을 번복하는 과정이나, 그녀의 배치물들이 효과를 발휘하고 또는 의심을 사는 과정들이 치밀하지 않다. 어떤 심리적 변화요인들을 이미지화하지 않는다. 종종 등장하는 축약형 나래이션처럼 그렇게 사건 자체를 압축시키는 요소가 있다. 마지막 중요한 사건에서 에이미의 살해동기와 과정 역시 인과율이 떨어진다. 그녀의 악행을 드러내기 위한 그녀의 노력만이 부각되고 있다. 살인의 추억이 없는 셀레브레티가 마치 <원초적 본능>의 얼음 송곳녀처럼 단호하고 확실하다. 또한 CCTV 알리바이 조작 장면은 인과율 측면에서는 거의 치명적이다. 초호화 주택의 CCTV는 필요한 살인 장면만 찍는다는 말인가?  FBI가 바보도 아닌데 전국민적 관심사가 된 인물과 연관된 살해 사건이 일어난 집에 그 수많은 CCTV 화면을 스캐닝도 하지 않을 수 있는가...그녀가 납치되었었다는 한 달간 CCTV 녹화 장면 확인하면 그녀는 곧 구속될 것 같다. 핀처는 블랙 코미디 스릴러를 만들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영화 속 두 주인공 벤 에플랙은 약간의 허당 이미지를 잘표현해 냈다. 그의 넓은 어깨는 단단하고 강인한 무엇이 아니라 아내와 쌍동이 여동생, 어린 제자, 그리고 흑인 변호사에게 조언을 받아야만 생존할 수 있는 어른-아이의 모습 그 자체다. 스릴러 영화에 나온 심각한 아담 샌들러 동생쯤으로 보인다.  에이미 역의 로자먼드 파이크는 데이비드 핀처덕에 계 탓다. 희대의 악녀라는 샤론 스톤은 파이크에 비하면 너무 천박했다. <보디 히트>의 캐서린 터너급이다. 로자먼드 파이크는 떡이라도 돌려야될 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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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옥수수섬>(Corn island) (2014)



섬이 있었다. 작은 섬이다.


 어쩌면 섬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저 잠시 모습을 드러내고 사리지는 일식같은 땅이다. 드러냄과 숨김을 내재하는 강 위의 검은 대지. 해마다 강이 범람하면 반복되는 시간의 퇴적물이 작은 섬을 만든다. 인근의 농부들은 이 곳에 옥수수를 심는다. 그리고 수확이 끝나면 농부들은 떠난다. 섬도 다시 범람 하는 물 아래로 사라진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진리의 심연이 드러냄과 숨김을 반복하듯이.


영화는  새로 생긴 섬에 도착하는 늙은 농부의 모습을 따라간다. 특별한 움직임은 없다. 마치 밥을 먹기 위해 숟가락을 찾듯 일상적인 움직임들이 포착된다. 농부는 손으로 흙을 비벼본다. 땅을 조금 파본다. 작은 파이프 조각 하나를 줍는다. 배를 묶기 위해 나무를 박는다.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에 나오는 나무처럼 섬 가운데 잎을 떨군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이제 당분간 거처하게 될 집을 짓기 위한 노력이 시작된다. 집터를 잡는다. 네 귀퉁이에 나무를 놓는다. 사각의 공간에 잠시 누워서 하늘을 보고 잠이 든다. 다시 일어나 기둥을 세운다. 수평을 잡는다. 마치 세트를 만들듯이. 일련의 모든 과정이 마치 흘러가는 강물처럼 무심하게 진행된다. 카메라는 섬 안에서 또는 섬 밖에서 도도한 강물처럼 어떤 생색도 내지 않는 일련의 동작들을 포착한다. 자연의 무심함과 농부의 무심함이 교차한다.  진화적으로 오래된 이 관계에서는 오로지 침묵만이 소통의 언어가 된다. 영화의 첫 번째 대사는 20분이 지나서이 등장한다. 대화라고 하기에는 짧고, 독백이라고 하기에는 긴. 할아버지와 소녀의 단답형 대화. 침묵을 깨는 첫번째 대사가 나오기 까지 영화는 이미지들의 이야기로 시공간을 채운다. 마치 '말씀' 이전에 이미지가 있었던 것 처럼 관객들을 이미지의 다이얼로그 속에 놓여진다. 풍부한 시각 이미지와 청각 이미지들...그리고 고요함 속에 무수한 진동을 이루어내고 있는 운동하는 이미지들까지. 조금도 첫 인간의 목소리를 빌린 대화가 기다려지지 않는다. 20분의 이미지들의 느린 충돌 속에 짧은 대화, 그리고 또 다시 침묵이 이어진다. 다음 번 대화도 20분 정도 뒤에 나온다. 두 번째 침묵은 이제 이미지들의 향연보다는 이미지로 표현되는 내러티브를 예견한다. 


 '옥수수섬'은 영화속 배경이자 유일한 공간이다. 그리고 극의 주인공이다. 이 공간은 마치 연극의 무대와도 같다. 영화는 인위적일 수 있는 공간 설정을 자연의 흐름과 반복성이라는 유장함 속으로 희석 시킨다. 그리하여 공간적 폐소라는 한계를 시공간을 초월하는 보편성의 무대로 바꾸어 놓는다. 예를 들어, 주인공들은 영화 내내 단 한번도 이 섬을 벗어나지 않는다. 시선 조차 이 섬을 넘지 않는다. 모든 내러티브와 서사와 인물, 그리고 과거와 현재가 이 섬에 봉인된다. 할아버지를 따라 섬으로 들어온 손녀, 그녀의 시선만이 유일하게 섬 너머를 단 한번 힐끗 바라본다. 외부로 향한 시선은 그것이 유일하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들은 종종 섬 바깥으로 나간다. 목재를 가져오기 위해, 음식물들을 가져오기 위해 밖으로 나간다. 이 섬은 잠시 머무는 곳이고 이들은 인근 마을 어딘가에서 온 것이다. 이들은 밖으로 나가지만 이어지는 숏은 섬으로 들어오는 배의 모습이다. 마치 외부 세계는 연극 무대의 뒤 쪽처럼 존재한다. 관계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사라지는 곳이다. '옥수수섬' 인근에는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이웃이 있다. 영화 속에는 등장하는 그 타자들은 섬 건너편에 있는 군인들이다. 이들의 존재 역시 총소리라는 청각이미지로 또는- 본격적인 사건이 발생하기 이전에는- 일상적인 순시라는 행위들을 통해 존재한다.

감독의 입장에서 일종의 축약도로서 압축된 섬이라는 공간은 결국 감독이 전달하고 싶은 이야기를 그릴 수 있는 캔버스가 된 셈이다. 



그렇다면 감독은 어떤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싶었던 것일까?

우선 영화의 초반부와 후반부를 이끄는 것은 거대서사는 일종의 자연과 인류사의 압축도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반복되는 순환구조 위에 작은 섬이 놓여있다. 이 섬은 현재 유일한 존재자이고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지만 또한 원형질의 기억을 담고 있는, 즉 과거를 보편성의 이름으로 포괄하고 있는 공간이다. 초반 시퀀스는 그래서 수렵에서 농경으로 돌아온 인류의 태초 문명사를 상징하는 듯 진행된다. 퇴적으로 만들어진 섬 위에서 원형의 시간으로 부터 그리 멀리 떨어져 나오지 않았을 농부의 시간이 포개어진다. 두 층의 시간을 것은 무심함이다. 마치 태양이 뜨고 다시 떨어지는 것처럼, 생을 마친 생명이 꺼지고, 그 시간에 또 다른 꽃이 피는 것처럼 말이다. 자연주의적 무심의 공존. 시간의 영원성이 만들어내는 심연의 숭고가 작은 섬의 이미지 속에 들어가 있다. 그리고 압도적인 영화의 결말은 영원한 심연이 만드는 파국과 생성의 영원한 실천이다. 파국의 시퀀스에서 카메라는 단 한번도 인물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다. 자연에 대응하는 어떤 시급한 즉물성만이 남는다. 예를 들어 섬을 떠나가는 소녀의 모습은 멀어지는 뒷모습만으로 남는다. 화면의 좌측에서 천천이 사라진다. 클로즈업이나 인물에 다다가는 카메라는 없다. 사건은 남지만 감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애상도 애련도 애도도. '야생의 것들이 자신에게 미안해 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라고 말하는 D.H 로렌스의 싯구처럼 카메라는 이들의 상황을 긴박하지만 담담이 그려낸다. 생장과 욕동으로 충만했던 섬은 흐르는 물로 사라진다. '모든 굳어진 것들이 사라지듯'  대지의 파국, 대지의 흩어짐을 이렇게 사실적으로 잡아낸 장면도 드물 듯 하다. 인간의 내러티브가 다시 섬의 내러티브, 자연의 거대한 서사로 돌아 온것이다. 그리하여 영화의 주인공이 진정으로 섬이었음을 재인한다. 즉 파국-소멸- 생성의 섬만이 유일한 주인공이 된다. 영화는 거대한 소멸 이후에도 다시 삶은 시작되고 반복될 것임을 알려준다. 일종의 영원회귀다. 또다른 분산과 이합 그리고 다른 시공간에서 이들의 삶과 기억은 또 자연과 역사라는 무한한 익명의 이름으로 포개어진다.


영화 전체를 이끌어가고 있는 것이 이러한 니체적인 순환론 구조라면 영화 중반부의 긴장과 사건을 만들어내는 것은 프로이드적 리비도다. 영화 초반부 등장하는 사춘기 손녀는 이 영화의 긴장감이 어디서 발생하게 될 지 예견하게 한다. 그녀가 하는 일상적인 행동,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물과 섬의 경계에서 하는 시소놀이, 섬 바깥을 바라보는 아련한 시선, 섬 너머에서 들리는 총소리, 종종 지나가는 경비선... 영화에서는 아이에서 여인으로 성장하고픈, 또는 성장하게끔 되어 있는 소녀의 '생의 약동'이 억압된 리비도의 형태로 드러나고 있다. 예를 들어, 강을 건너온 사슴이 사냥꾼들에게 살해되는 장면이 있다. 그녀는 죽은 사슴의 핏방울 위에 주저앉는다. 노골적으로 초경과 가임의 가능성을 상징하는 장면이다. 소녀가 가지고 온 인형은 이제 벽에 걸린다. 즉 소녀 옆의 자리는 이제 아이의 것이 차지해서는 안된다는 일종의 선언과도 같다. 영화 속에 성적 긴장감은 소녀의 일상적인 행동을 통해서 그리고 군인들의 존재를 통해 드러난다. 그 남성적인 시선들은 폭력적 성의 예감으로 영화 전체에 불안감을 불러일으킨다. 영화 속에서 군인들은 일종의 '절대적 타자'이다. 그 이웃은 '하나의 사물'이고 또한 침입자이다. 하지만 군인들의 시선은 좀 더 근원적인 원초적 불안감을 야기할 뿐 소녀의 리비도의 왜곡된 반향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들은 서서히 거리를 좁혀오지만 직접적인 폭력의 이름으로 침입하지는 않는다. 그런면에서 이웃이라는 군인들의 존재와 시선은 성적 메타포의 맥거핀에 지나지 않는다. 욕망의 흘러넘침으로 인해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외부의 것이 아니다. 그 중심, 또는 고정점에는 소녀가 있다. 그런면에서 이 영화를 소녀의 시점으로 해석한다면, 일종의 성장영화가 될 수도 있다. 탈영병에게 먼저 성적 에너지를 보내는 것도 소녀다. 하지만 이는 좌절된다. '아버지의 이름' 의 이름을 달고 있는 농부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최종적으로 그녀가 택할 수 있는 방식은 이 섬을 모두 파멸시키는 것이다. 즉 엔딩부문의 섬의 무너짐은 일종의 부친 살해- 영화 속에서는 할아버지-인 셈이다. 이것은 욕망을 저지하는  법의 이름을 파괴하고픈 소녀의 욕망이 자연의 법칙의 힘을 빌어 이루어내는 존속 살해인셈이다. 소녀의 시점에서 보자면 세계의 파괴는 새로운 성장, 새로운 세계를 위한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가 어떠한 애도와 애상의 클로즈 업도 없이 사라지는 것은 정치적으로 올바르다. 그녀는 살아 남는다. 흐릿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던 강의 저편, 산 뒤의 그 곳으로 나아 갔을 것이다. 




이 영화는 19회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된 작품다. 조지아-과거명 그루자아-출신의 게오르게 오바슈빌리 감독이 만든 영화다. 카를로비바리 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은 작품이다.이미 여러 영화제에 초청작으로 소개되었다. 영화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대화 대신 침묵을, 언어 대신 이미지를 앞세운다. 하지만 침묵과 이미지가 훨씬 많은 메시지를 건넨다. 이를 한정된 공간 속에서 매우 유려하게 구현해낸 점은 감독의 뛰어난 점이다. 특정한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사건이기 때문에 장면 구축에 심여를 기울인 흔적이 보인다. 또한 전체 문명사의 축도를 그려내고, 자연과 인간의 관계 또는 그 너머에 대한 생각할 거리들을 영상화한다. 이 점도 훌륭하다. 하지만 영화를 빠져나오며 드는 한 가지 생각은 앞서 이야기한 자연성으로 포장된 연극적 인위성 이다. 즉 영상과 메시지의 영화적 전략에 어떤 의도적인 견인에의 의지가 느껴진다는 것이다. 영화는 시종일관 조용하며, 관조적인 자연을 대상으로 하여 연출되고 있지만 오히려 그 안에 거대한 의지를 독파해내겠다는 감독의 주지주의적 향기가 표면화된다는 점에서 오래된 모더니즘의 전략들이 느껴진다. 영화제는 이런 영화들을 좋아한다.  영화보는 즐거움을 느끼게 해주는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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