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하하... 이런 걸 뭐라고 해야할까? ^^  

한동안 안보이다가 뒷북처럼 다시 나타난 음반이다.

요즘 클래식음반계는 박스로 과거 거장들의 명연을 재고정리하고 있다. 요즘 한참 열심히 뛰고 있는 현역 연주가들은 그래서 이래저래 힘들다. 과거 쟁쟁한 명연주가들의 녹음들이 다음 달에 출시되는 자기 음반과 경쟁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가격 경쟁력면에서도 그들이 앞서 있으니 말이다.  

재고정리 덤핑과 함께 과거 명연들로 먹고 사는 메이저 클래식음반사들이-그런면에서 음질과 실험정신,레퍼토리면에서의 확장을 도모하는 클래식 마이너 레이블들이 20세기를 건너 살아남고 있는 진정 클래식 음반사가 아닐까 싶을 정도다- 지난 십여년 동안 재미를 본 것은 복각 시리즈다. 복각전문 레이블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 LP판을 복각음원으로 하는 레이블도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위의 음반- 장 막스 클레망의 바흐 무반주 첼로모음곡-을 내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90년대 말이다.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자리에 가면 저 음반이 있었다. 몇 몇 평가들도 읽었던 기억이 나지만 사실 그다지 눈이 많이 가진 않았다. 이후 저 음반은 절판 되었고 수많은 원전 연주 음반들이 대신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최근 LP를 전문으로 복각하는 일본레이블에서 장 막스 클레망이라는 이름을 다시 바흐 무반주 목록에 복원시켰다. 

 스펙트럼사운드의 왼쪽 음반이다. 그러니까 위의 데카 음반과 스펙트럼 사운드의 음반은 같은 음원이다. 스펙트럼 사운드는 전체적으로 자연스럽고 풍요로운 음향-물론 기계 구동상의 노이즈가 있긴 하지만-을 품고 있다는 평가다. 가격도 만만치 않다. 

내가 클레망을 들은 것은 이 스펙트럼 음반을 통해서다.10여년 전 그냥 자킷이 차라리 나았는 걸 하면서 멋대가리 없는 스펙트럼 음반을 들었다. 40자평 하듯이 한 두 줄로 말하자면 연주는 요즘 연주자들처럼 매끈하지 않으나 고졸하면서도 개성적이다. 아날로그적 감성이 만드는 새로운 감성의 환기 같은 것. (나는 이 음반을 구매할 때 앙드레 레비의 동곡 음반도 동시에 구매를 했었다. 비슷한 시기에 같은 곡에 이렇게 많은 돈을 쓰다니...) 

스펙트럼의 복각음반이 나름 반향을 일으키자 데카에서 한국판으로 부랴부랴 과거 클레망의 음반을 다시 찍어내기로 결정했나 보다. 이와 유사한 예가 피에르 푸르니에의 바흐 무반주 음반이다. 

 

이 음반도 10여년전에 반짝 나온 적이 있다. 그 때도 이 음반을 살까 말까 고심하다가 그만 두었다. 이유는 당시 열심히 보던 클래식 잡지에서 기존의 푸르니에 DG해석과 큰 차이가 없다는 리뷰를 보았기 때문이다. (교과서는 한 종이면 족하다!) 최근에 나온 푸르니에의 음반도 클레망의 것처럼 로컬버전으로 나온 것인데 뒷이야기를 들어보니 모 클래식 매장에서 지속적으로 요청했다고 한다.( 기본 수요에 대한 확신을 주었겠지.) 

하여간 나는 그냥 DG에서 나온 푸르니에 음반으로 (이건 LP로도 CD로도 가지고 있기때문에) 만족하기로 하고 이 라이브 음원은 앞으로도 접을 셈이다. 

그나저나 이런 과거 명연들의 복각음반이 나올때마다 홍보문구들은 참으로 거창하게쓴다.  

대게의 요지는 희귀성 그리고 일회성이다. "일생일대 최고의 명연" "이번이 아니면 다시 없을...." 나 역시 가끔 속는 셈치고 속는다만 그런 말들에 이명까지 겪을 필요는 없다.^^    

오늘 올리는 연주는 파올로 판돌포...^^ 이것도 내가 가진 거랑 음반 자켓이 다르다. 내건 민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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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엔 재밌는게 많다. 

음악을 눈으로 보는것. 마치 무슨 게임기 같기도 하다.그런데 집중해서 듣게 된다. 

좀 더 친숙한 음악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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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비의 고비>   

고비에서는 고비를 넘어야 한다 / 뼈를 넘고 돌을 넘고 모래를 넘고/ 고개 드는 두려움을 넘어야한다// 

고비에서는 고요를 넘어야 한다/ 땅의 고요 하늘의 고요 지평선의 고요를 넘고/ 텅 빈 말대가리가 내뿜는 고요를 넘어야 한다// 

고비에는 해골이 많다/그것은 방황하던 업덩어리들의 잔해// 

고비에서는 없는 길을 넘어야 하고/ 있는 길을 의심해야 한다/ 사막에서 펼치는 지도란/ 때로 모래가 흐르는 텅 빈 종이에 불과하다// 

길을 잃었다는 것/ 그것은 지금 고비 한복판에 들어와 있다는 것이다  

 

.....최승호, 시집<고비> 중에서     

나는 지금 사막의 한복판을 건너고 있는 것일까? 사구로 추락하지 않고 능선의 날카로운 선을 따라 위태롭게...

  

 

 

 

 

Abdullah Ibrah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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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울한 어젯밤 문득 듣고 싶어졌다. 음반장을 뒤졌다.하지만 찾지 못했다. M라인에 두었는지 R라인에 두었는지 조차 생각이 나지 않았다.  작은 불빛에 행여 예찬이가 깰까봐 불을 켤 생각은 아예 떠오르지도 않았다. 손전등을 어디에 두었을까? 하나를 찾기 위해 또 다른 하나를 먼저 찾아야 하는 건 무척이나 귀찮은 일이었다. 결국 듣겠다는 마음을 접었다.  

영국 작곡가 로빈 밀포드의 "Fishing by moonlight" 라는 곡이다.  왜 어젯밤 생각이 났을까? 가끔 플래쉬 커트처럼 떠오르는 영상이나 이미지, 또는 그와 관련된 욕구는 미스테리다. 가끔은 개연성을 갖기도 하지만.마치 공포 영화 속에 일상적인 장소에 홀연 등장하는 유령처럼 그렇게 어떤 욕망들이 지나가는지.  

 제목이 낭만적이다. 앨범 자켓은 나사렛 호수같다. 앨범 자킷에 그렇게 나왔던가?  하여간 우울함이 뭔가 감상적인 상태를 만든다. 이 상태는 분명 좋지 않다. 그런데 모래 구멍처럼 자꾸 이리로 미끌어져 가는 것 같다. 하여간 감상적인 건 설사 밖에 못만드는데 지금 내가 하고 있는게 결국 감상주의가 만든 감정의 설사같은 건 아닌가 반문해본다.

 2. 테리 이글턴의 근작 <반대자의 초상>에는 감상주의와 감성을 구분하는 글이 한 줄 나온다.  '감상주의를 감성과 착각하는 것은 예술가를 보헤미안이라고 착각하는 것과 진배없다.'  혼자 씨익하고 웃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예술 관련된 글 중 얼마나 많이'감성'과 '감상주의'를 혼동하면서 보게 되는지. 쉽게 말하자면 '감상주의자'를 툭하면 '감성주의자'로 착각한다는 것이다.  

로쟈님은 테리 이글턴이 마르크스주의자보다 유머리스트가 되기로 한 것 같다고 말씀하셨는데, 유머러스한 마르크수주의자가 아마 정답일게다. <현대성의 경험>의 저자인 마샬 버먼의 책,<맑스주의의 향연>을 보면 세상에는 유머러스한 마르크스주의자가 한명 만은 아닌게 확실하다.  

3.음악 이야기하다가 잠깐 딴데로 갔다. 뭔가 두서가 없는게 지금의 특징이기도 하다. 잠시도 오래 집중하지 못한다.  

몇 년전에 나는 하이페리온에서 나오는 영국 작곡가들의 음반을 좀 많이 듣고 있었고 로빈 밀포드도 그렇게 알게 되었다. 당시 이 음반을 국내에 소개하고 팔아치운건 음반가게 <풍월당>이다. 내게는 이중적인 감정을 느끼게 만드는 곳이다만 아이 둘 낳은 실장하고 오랜 인연이 있어서 서울가면 한번 씩 꼭 들르곤 한다.

오늘 유투브에서 다시 듣다보니 모차르트 피아노협주곡 23번의 2악장과 첫 도입부의 분위기가 매우 유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4.깊은 슬럼프다. 한 달 이상 이어지고 있다. 현실적인 탈출구가 별로 없어보인다. 원래 그런거 아닌가 싶기도 하다. 탈주선이란건 누가 만들어주는게 아니라 내가 스스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지만... 하여간 회사 옮기고 싶은게 요즘 1순위 고민이다.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일이긴하지만 이번엔 좀더 강도가 세다. 당장 때려치고 싶지만 그게 그렇게 쉬운일만도 아니고. 배를 바꾸어 타려고 해도 일단 오는 배가 있어야 하는거고 오는 배가 있다손치더라도 이런 상황이 반복되지 않으려면 잘 골라 타야 하는거다 보니.

우울하네. 



 

 5. 신학철 선생의 예전 작품이 생각난다. <중산층 연작, 따봉> 

사실 내 이럴 줄 알았다. 이것의 무서움을 그만큼 몰랐을 뿐이다. '따봉'을 외치는 위치에 가기 위해  이것 저것 반쓰까지 내리고 자처해서 물구나무를 서던지,-그 뒤에는 또 뭐가 없겠나?-  지젝이 언급한 <파이트클럽>의 노튼 처럼 자기구타라는 단절을 통한 해방으로 가던지... 그런데 그냥 '이건 아니다'하면서 물구나무만 100년째 서고 있다.  

대략 300년쯤 앉은뱅이 의자에서 기다리면 성 베드로가 성문이라도 열어줄지 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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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왜이리 많은 슬픔이 있는가?   

이 말을 하고 있는 순간에도... 

평화로움 속에 드리워진 슬픔의 데생들... 

지금은 그저 당신 차례가 아닐 뿐이라는 

슬픔의 이유있는 자신감. 

 

언젠가 사건의 이름으로, 또는 삶의 이름으로 자기를 증거하게 될  

무한한 슬픔의 이파리들... 

그래도... 

삶은 계속되어야만 하고... 

 

아이야.. 

무정한 시간이 너를 위로해주길  

그리고   

운명의 눈동자가 너를 아는체 하지 않고  

그저 모른척 지나가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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