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목소리 1 - 남성 성악가편
유형종 지음 / 시공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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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꼬리가 먼저 올라오다.

전두환-전재국-시공사...됐나? 내가 리뷰쓰면 결국 홍보가 될 터이니 이 라인에 일정 기여를 하는 셈이다.뭐 크게 기여하지는 않겠지만...그래도 논리적으로 분명 관계는 있다..최소한 오는 명절에 아버지 '일해'선생께 들어가는 용돈의 일부로 기여되고 있을지도 모른다.1원정도.그렇다고 내가 경남 합천의 '일해공원' 명칭을 찬성해야 하는 건 아니지?... 위에 있는 자본의 흐름은 알면서 '일해공원'은 반대하니까 모순이라고....(멀뚱 멀뚱  (. . )(' ' )(. .)(' ' )...이거 내가 지금 막 만들어 본 건데 어때요? 원래 이런거 있었나요? )

진짜 시작.!!

쓰리테너의 시대는 이제 끝난 것 같다.이미 오페라계에서는 쓰리 테너의 시대가 저문지 오래 돼었다.고도비만 파바로티는 나이가 많고 언니들이 좋아할 것 같은 호세 카레라스는 병원 다녀온 후로는 소리의 빛을 잃었다.둔탁한 고음의 도밍고 만이 여전히 노익장을 과시하고 계시다.월드컵 우승 후보국 출신답게 -2002년 우리나라한테 다 졌던 팀이다-4년마다 한번씩 콘서트를 하시더니 지난 번 부터는 그나마도 보기 힘들어졌다.도밍고가 섹쉬하게 생긴 안나넵트레브코와 미스터 빈처럼 생긴 롤란도 비아존을 데리고 공연하고 말았다.

쓰리테너의 전성기는 역시 70-80년대였다.물론 그들의 공연을 한번도 본 적은 없지만 그 대단한 테너들과 동시대에 살았다는 것은 NBA의 마이클 조던,KBL의 박철순과 동시대에 살았다는 것 만큼 즐거운 일이다.하지만 오페라 팬들은 진정한 테너의 전성시대를 50-60년대로 친다..오페라야 독일도 있고 프랑스도 있고 러시아도 있다만 그래도 원조집으로 치면 이탈리아 아니겠는가.이탈리아 종마들..(사람을 말에 비유해서 좀 그렇지만 쓰다보니 영화<록키>에서 이런 표현이 나왔던 것 같다.이탈리안 종마 록키 마르시아노...ㅋㅋ) 마리오 델 모나코-주세페 디 스테파노-프랑코 코렐리-카를로스 베르곤치. 이렇게 네 명의 이름을 쓰고 보니 그리스 신전을 지키는 네 기둥마냥 무게감이 확 느껴진다.레퍼토리로 치면 모나코가 가장 무거운 쪽이고 스테파노가 가장 가벼운 편인 듯 하다.네 명을 상대적으로 비교하면 그렇다는 것이다.이들은 자기 고유의 캐릭터를 가지고 개성적인 소리를 창조해 냈다.이들 앞에도 또 대단한 테너들이 많았다.카루소-베냐미노 질리-유시비욜링정도면 20세기 초반 쓰리테너로 손색이 없을 것이다.물론 이 책에서 테너들만 다루는 것은 아니다.영원한 리트의 황제 바리톤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성격파 바리톤 세릴 밀른스,모범적이고 안정적인 베이스 니콜라스 갸우로프,20세기 최고의 보탄 베이스-바리톤 한스 호터 등... 테너가 중심이 되지만 20세기를 대표하는 목소리를 이 책에서 만날 수 있다.

<불멸의 목소리>는 사실 새로운 책은 아니다.이미 월간 <객석>에 소개되었던 글을 모아서 새롭게 낸 것이다.나 역시 <객석>을 간간이 보는 편인데 이 책에 나오는 몇 몇 그들은 이미 만난 적이 있다.글의 내용은 거의 유사한 형식을 갖는다.짧게 음악가과 관련된 기억을 떠올리고 간단한 약력 소개가 있다.음악가로서 성장과정과 몇 몇 에피소드,소리나 연기의 특징,그리고 마지막으로 은퇴와 그 후 활동등...성악가의 짧은 평전 형식이다.새로 책을 내면서 책 말미에 그 성악가가 부른,또는 모습을 만날 수 있는 CD와 DVD를 소개한다.또한 <객석> 기사를 책으로 그대로 내는 부담감을 줄이기 위해 이 책에 소개된 위대한 가수들과 동시대에 활약했던 덜 알려진 가수-그러나 유명했던-들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친절하게도 장르별,지역별,파트별로 구분해서 정리해주고 있다.예를 들면 독일권의 헬덴테너,스칸디나비아 출신의 테너,독일 리트를 빛낸 바리톤,코스모폴리탄 저음가수.... 결국 이 책에서 언급하는 가수들의 명단을 정리하면 20세기 성악사에서 나올 만한 사람은 전부 나오게되는 셈이다.

이 책을 보면서 관심이 가게된 가수가 베냐미노 질리와 카를로스 베르곤치이다.베냐미노 질리는 옛날 가수여서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았다.가끔 컴필레이션 음반에서 그의 목소리를 들을때가 있었지만 직직 거리를 소리에 묻혀 지나치기 일수였다.이 책을 읽다 다시 한 번 그의 목소리를 주의깊게 듣게 되었다.요즘 가수들에게서 만날 수 없는 순수함과 고답적인 아름다움이 가득한 목소리였다.베냐미노 질리가 출연하 오페라 전곡을 아직 만나지는 못했다.그러나 지난번에 간 음반가게에서는 그의 아리아집을 뒤적거리는데 많은 시간을 썻다.저자가 말하는 베냐미노 질리의 장점을 좀 옮겨본다.

베냐미노 질리는 성악적으로 완벽한 테너로 불린다.순수하고 아름다운 톤을 지녔으며 특히 그의 메차보체(약음의 테크닉)는 역사상 최고의 절륜이라 할 만하다.의도적인 달콤한 음색이나 흐느끼는 듯한 표현방식으로 통속성을 가미하는가 하면 그와 반대로 풍부한 성량과 극적인 힘을 드러내며 오페라의 드라마틱한 면을 충분히 살리기도 한다.

정열적인 이탈리아 남자들에 가려 조금 손해를 본 듯 한 카를로스 베르곤치도 새롭게 눈에 들어온다.카를로스 베르곤치는 다른 이탈리아 가수들에 비해 선이 조금 가는 편이다.사실 그가 선이 가늘다기 보다는 동시대 활약했던 모나코-코렐리등이 워낙 쩌렁쩌렁했다는 생각이 든다.베르곤치는 열정적인 스타일이라기 보다는 이지적인 스타일이다.찌르는 하이 C로 브라보를 외치게 하는 스타일이라기 보다는 지적인 분석와 안정적인 호흡으로 무난하게 하이C를 건드리고 내려오는 스타일이다.그래서 혹자는 베르곤치의 스타일에 호소력이 좀 부족하다는 평가를 하기도 한다.저자가 이탈리아 오페라의 특징으로 철부지 남자와 원숙한 여인상을 거론하며 스테파노나 코렐리등을 옹호했는데 이를 베르곤치에 적용하면 그는 너무 철이 든 이탈리아 남자인 셈이다.다른 측면에서 보면 카를로스 베르곤치의 발성이나 테크닉이 다른 이들에 비해 안정적이며 뛰어났다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저자가 인용한 이탈리아의 오페라 학자 첼레티의 말을 옮겨본다.

지난 40년 동안 테너는 물론 바리톤과 베이스 중에도 베르곤치만큼 권위있는 베르디를 만나보지 못했다.(그는)리듬의 흐름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호흡하는 법을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관객이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감쪽같이 호흡하는 기술도 갖고 있었다.그는 작곡가가 요구하는 세세한 프레이징을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존재였다.

저자는 이렇게도 말한다.

그의 스타일.극히 정제되고 귀족적인 광채를 뿜는 베르곤치의 특유의 개성을 일컫는 것이다.나는 베르곤치보다 아름다운 테너를 들어본 적은 있어도 그보다 더 우아한 테너는 알지 못한다.

어린 시절 세상에서 기타를 가장 잘치는 사람이 누구이냐를 가지고 자율학습 시간을 논쟁의 시간으로 대체해버린 적이 있었다.흔히들 말하는 '세계 3대 기타리스트'니 뭐니 하는 그런 되먹지 않는 논쟁이었다.오페라 가수들도 마찬가지다.흔히들 쓰리테너라고 말들은 하지만 그들이 모든 오페라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몇 번 도전했다가 참패를 거둔 적도 있고 아예 시도하지 않는 역들도 있다.그럼에도 무림 최고수를 가리듯 누가 넘버 3이고 누가 TOP 10인지 가려내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호세카레라스는 서정적이나 목소리가 바랬다.파바로티는 기량적으로는 찬란하나 표현력과 레퍼토리가 한정적이다.도밍고는 안정적이 중저음과 표현력 그리고 넓은 레퍼토리는 높게 평가할 수 있으나 고음과 소리의 답답함은 늘 아쉽다.이 셋 뿐만이 아니다.주세페 디 스테파노의 고음은 불안불안하다 코렐리는 쩡쩡 울리지만 힘에 너무 의존한다.그럼 어떻게 하나?  간단하다 네거티브 리스닝에서 포지티브 리스닝으로 바꾸면 아주 편안하다.

파바로티의 청량한 딕션과 깨끗한 고음은 얼마나 사랑스러우며 피셔 디스카우의 학구적이며 심오한 리트 해석은 또 어떠한가? 돌이킬 수 없는 목소리 프리치 분덜리히의 미성은 천국에서 훔쳐내고 싶을 정도다.

뱀꼬리가 앞으로 가는 바람에 뒤로 밀린 사두...

나는 이 책을 또 화장실에서만 읽었다.화장실에서 최고로 많이 애용하는 읽을 거리는 신문이나 잡지.이 책의 글들도 잡지 기사였으니 잡지 읽듯 책을 읽었다.그리고 지금은 2권에 해당하는 오페라 디바들을 화장실에 초대해 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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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7-01-18 13:20   좋아요 0 | URL
숨은 글이 두 군데 있어요.(으이구 친절하기도 하지.) 원래는 전부 안보이게 해봤는데..^^ 당황해 하실까봐^ ^ (으이구 소심하기도 하지)

글샘 2007-01-19 00:08   좋아요 0 | URL
어째도 전두환은 죽일놈이죠. 나쁜넘.
재미있습니다. 뱀꼬리와 뒤바뀐 뱀 대가리도... ㅋㅋ
 
청중의 탄생 - 청중의 자리에서 본 클래식 신화의 탄생과 해체
와타나베 히로시 지음, 윤대석 옮김 / 강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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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어렵다.예술의 장르 중에서 가장 형이상학과 가까운 것이 음악이다. 미학자들 중에는 음악을 가장 순수한 형태의 예술 장르라고 일컫는 사람들도 있다.음악은 기호들의 내적 관계이며 그 음표들의 연관이 음악의 형식이 된다.이러한 일렬의 기호들의 관계가 인간에서 정서적 경험을 불러 일으킨다.또한 그 음들이 축적된 인간정신의 한 부분을 표현하는 것이다.음악 자체를 언어로 표현해내는 것은 어려울지 모르지만 음악을 둘러싼 사회상을 살펴보는 것은 그것보다 수월할 지 모른다.

일본에 포스트 모던 열풍이 불었던 1980년대 중반 <청중의 탄생>이 소개되었다.책은 음악 수용자들의 변용을 중심으로 살펴본 음악 사회사라고 할 수 있다.거칠게 말하자면 저자는 음악 수용사를 세 단계로 구분한다.전 근대,근대,그리고 탈근대이다.와타나베 히로시는 각 시대 구분에 조응하는 예를 찾는다.먼저 전근대와 근대로의 전환기로 19세기의 예를 든다.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클래식 음악의 수용형태가 결정된 시기이다.다음으로 기술 혁신의 시대인 1920년대 미국.이 시기는 19세기 안착된 음악계가 기술 문명의 변화에 맞추어 변화를 시도하던 시기이다.마지막으로 1980년대 일본의 음악계가 탈근대화한 수용자들의 예로 제시된다.저자는 책의 서문과 증보판 후기를 통해 이러한 시대 구분과 지역적 특수성을 무시한 배열이 인위적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독자의 이해를 구한다.구 대륙과 신 대륙의 사회경제적 발전 단계,구성원들의 계급적 성취단계,각 국가별 독자적 문화 수용의 부분이 무시된 부분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에 대한 저자의 사전 양해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거친 비교는 클래식 음악 수용자가 클래식 음악계의 판도를 어떻게 바꾸어 왔는지 살펴 볼 수 있는 좋은 예가 된다.이 책이 음악팬들이나 예술 애호가들에게 유의미하게 읽히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클래식 음악 공연장을 생각해보자.대개 몇 가지 이미지가 떠오른다.높은 지붕,스팟 조명,조심스러운 기침소리,눈을 감고 곡에 심취한 음악팬.....와타나베 히로시는 이러한 클래식 청취의 스테레오타입화가 19세기 부르주아 계층의 등장과 연관이 있다고 말한다.바흐나 하이든,모차르트 시대는 음악회가 지금처럼 '진지한 감상의 공간'이 아니라 '사교의 장'이었다.당시 음악 소비자는 명확하다.곡을 의뢰하고 음악가의 패트런이 되어준 귀족층과 그의 친구들이다.음악가들은 도자기나 장식품을 만드는 도공처럼 음악을 작곡하고 그들을 위해 공연했다.거기에는 현재 너무나도 당연히 되는 '작품의 통일성'이라는 개념은 희박했다.저자는 그 예로 모차르트의 공연 팜플랫을 든다.공연 목록을 보면 교향곡이 한번에 연주되지 않는다.1악장이 연주되고 다른 타펠뮤직(식탁음악)들이 들어간다.그리고 공연 마지막쯤되서 다른 악장이 연주된다.음악 수용 태도는 '사교의 장'에 걸맞게 시끌벅적하다.물론 그 중에는 진지한 관객들도 있었을 것이고 그들을 위한 차분한 음악회도 있었을 것이다.영화 <아마데우스>에서도 이러한 두 종류의 공연장 모습이 연출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이러한 음악계의 풍토는 18세기에서 19세기로 넘어오면서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고착되게 된다.우선 음악 소비층의 변화가 그 원인이다.특수제작을 요구하던 귀족층에서 일반상품을 구매하는 부르조아지가 음악계의 중심 세력으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흔히들 베토벤을 작가 내부적 자율성에 의해 창작하는 예술가의 첫번째 세대로 기억한다.이러한 사회적 변화와 관련있다.또 다른 하나는 음악계내의 '예술로서 음악'에 대한 정착 노력이다.18세기 미의 원리로 가장 중요시되었던 것은 '감성'과 '정신'의 종합이었다.예술가들은 예술이 감성과 정신이라는 모순된 영역의 조정자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다.그러나 불행하게도 음악은 다른 장르에 비해 '정신성'이 낮은 것으로 평가 받았다.음악은 '감각'의 영역이지 고도의 정신성을 담보한 장르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18세기의 음악 소비형태를 생각해보면 이러한 판단은 자연스럽다.그저 귀족들의 식사 시간 배경음악이 어떻게 정신성을 갖춘 '예술'로 대접받을 수 있겠는가.저자는 슈폰호이어의 주장을 인용하여 '음악'의 예술로의 편입을 위한 인정투쟁을 설명한다.슈폰호이어는 미학이 음악에 부여한 좋지 못한 평가를 불식하고 자기정당화를 도모하기 위한 전술로서 음악미학이 이러한 요구에 맞지 않는 음악을 '저급'이라고 떨쳐버리는 방식을 취했다고 본다.즉 산만한 청취,식탁음악,감각성에만의 의존등을 배제하므로써 음악이 예술로 편입되는 방식이다.이제 음악은 '진지한 음악' '정신성 있는 예술'로 바뀌었다.연주회에서 떠들거나 개를 데리고 오는 짓은 무식한 비교육층이 하는 짓이 되었다.세이퍼는 이를 '진지한 청취'라고 말한다.19세기에 정착된 이러한 '진지한 청취'는 현재까지 클래식 공연의 가장 규범적인 청취방식으로,전통으로 자리잡았다.19세기의 진지한 음악가와 음악팬들은 굳히기 작업이 필요했다.그들은 리스트류의 비르투오조에 대해 비판하며 고전 작곡가들을 신화화 해나가기 시작한다.즉 연주자의 비르투오시티는 감각적인 열광일 뿐이며 진짜 음악은 바흐,베토벤등 정신적 영역을 담보하고 있는 거장들에게 있다는 것이다.'신에 헌신하는 바흐' '불굴의 인간의지 베토벤' '가난하지만 청순한 모차르트' 등의 이미지들이 19세기에 만들어진다.이 이미지 역시 이후 역사적 검증과 논쟁이 있었지만 지금까지 유효하다.결론적으로 '저급음악의 배제,진지한 청취,고전 거장들에 대한 신화화,연주회 윤리의 확립' 등을 통해 비로소 '근대적 청중'이 만들어진다.

1920년대에 들어서면 19세기에 안착된 근대적 청중의 모습에 동요가 일어난다.근본적인 원인은 '기술문명'의 발전과 자본주의 광고의 '이미지화'작업 때문이다.저자는 음악관련 기술 발전의 예로 '자동피아노'를 든다.자동 피아노는 피아노롤에 펀칭을 해서 연주자 없이 피아노를 재생하는 장치이다.요즘도 아이들 장난감으로 이와 유사한 것들이 있다.손잡이를 돌리면 펀칭된 골을 따라서 예쁜 멜로디가 나오고 그 위에 인형이 빙글빙글 도는 형태인....이 책에 등장하는 자동피아노는 실제 연주자들의 연주를 피아노 롤로 저장하는 것들도 있다.고도프스키,모이세비치 같은 연주자들도 이 자동 피아노에 녹음하기도 했다.저자는 자동피아노의 발달로 청취 형태의 변화가 공연장에서 일반 가정으로 바뀌어 가는 점에 주목한다.물론 1920년대의 상업주의 광고가 만들어준 '풍요로운 가정'이미지도 주요했다.이 시점에서 기업의 상업주의와 클래식 음악계가 손을 잡게된다.음악을 둘러싼 정치,경제학적 변화는 당연히 수용방식의 변화를 이끌어낸다.우선 예술 체험의 일회성이 사라지면서 -즉 아우라의 상실-공연 공간과 일상이 뒤섞이게 된다.이 현상을 현재로 끌어올리면 거장의 연주를 CD라는 복제기술을 이용해서 아침에 이닦으면서도 들을 수 있게 된 것을 말한다.여기에 '음악의 정신성'에 대한 반격이 시작된다.음악의 정신성은 다른말로 하면 음악이 가진 정신적 영역에 대한 표현성이다.이 '표현성'에 대한 공격은 현대의 '미니멀음악''환경음악'과 같은 종류의 음악을 만들어낸다.이 책에서는 1920년대 전위음악가들이 시도하던 '표현성'에 대한 소거를 에릭 사티의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이는 19세기에 음악전문가들에게 강제로 배제된 '음악의 감각성''음악의 사회성'에 대한 복원으로 볼 수도 있다.

이제 와타나베 히로시의 이야기는 일본의 현재(1980년대)까지 오게 된다.저자는 이 시기를 포스트모던한 음악 수용자들의 도래기로 파악한다.일단 청중의 형태를 '분중'이라는 말로 정리한다.즉 '나누어진 청중'이라는 것이다.수용자의 분중화 현상으로 우선 '음악의 카탈로그화' 가 지적된다.과거 바흐,베토벤 등에 한정된 음악목록이 대폭 넓어진다.이 책에서는 베토벤의 연주 횟수와 말러 연주 횟수를 비교한다.이는 거장을 한축으로 햇던 클래식음악계의 변화로 받아들여진다.구심적인 음악 소비구조가 증식하여 원심적인 상황으로 바뀌는 것이다..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음반가게 카탈로그를 한번만 둘러 봐도 금새 알 수 있다. 바흐-베토벤 사이에 얼마나 많은 작곡가들이 있는지 쇼팽과 라흐마니노프 사이에 또 얼마나 이름도 낯선 작곡가들이 있는지.현대의 음악가와 팬들은 이렇게 사이 사이에 있는 작곡가들의 음악을 연주하고 소비한다.이 책에서 거론했던 말러는 음악팬들 사이에서는 자주 찾는 거장의 반열에 올라 있다.저자는 '카탈로그화'현상이 학자적 발상이 대중화된 것이라고 말한다.즉 '전국민의 음악학자화'라는 것이다.학문적 지식의 대중화는 사실 음악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교육 수준의 확산과 정보매체의 다양화는 일반인들에게 전문가적 안목 내지는 그와 유사해지고픈 심리는 붇돋았다.그러나 저자는 음악계에서 이러한 현상이 상업주의와 결합되며 선정적인 방향으로 흘렀다고 조심스럽게 지적한다.현대의 음악팬들은 상업주의와 결함된 '차이'를 소비하는 것이다.리프킨의 바흐 합창인원 논쟁이나 모차르트 교향곡 발견 같은 예들은 음반 판매 마케팅과 오버랩되기 때문에 그런 지적을 피할 수 없어보인다.저자는 포스트 모던 시대의 청취층의 변화 양상으로 '부닌현상'과 '9번교향곡열풍'을 들고 있다.부닌은 쇼팽콩쿠르 우승자로 우리나라에서도 한때 인기가 높았다.일본에서는 이례적인 성공을 거두었나보다.저자가 보기에 이것은 19세기 배제된 '비르투오조'에 대한 -다른 의미에서는 '진지성'에 대응하는 '오락성'의-복원으로 바라본다.베토벤 9번 교향곡을 일반인들이 일본어로 음차하여 합창단에 참가하는 현상 역시 '대중의 저변확대'라 바라보는 것이 저자의 시각이다.

와타나베 히로시는 결론에서 '대중의 경박화 '를 포스트 모던 사회의 긍정적인 특징으로 설명한다.'진지함'에 갇혀 버린 음악의 한 쪽 날개를 펼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말러 음악에 현대 관객들이 열광하는 이유도 그때문이다.말러 음악의 난해함과 들쭉날쭉한 비통일성은 다양한 음의 이미지를 쫓는 대중들에게 어필할 수 있다는 것이다.사티의 음악도 마찬가지로 '전체에서 세부로의 관심'이라는 포스트 모던한 시대상에 어울린다고 할 수 있다.근대 사회는 음악 예술을 일상으로부터 분리시켰다.그러나 포스트 모던한 시대에 관객들은 예술과 오락에 대해 그동안 확립되어온 틀을 무너뜨리고 있다.그들은 이것들을 다시 '일상생활'로 끌어들이고 있다.저자의 결론은 근대의 '의지''이성'에 포박된 음악을 풀어해치는 탈근대적 정신을 옹호하고 있다.

저자도 증보판 후기등에서 밝혔던이 이 책 <청중의 탄생> 첫 판이 나온 것은 20년 전이다.일본의 포스트모던 열풍도 가라앉았다.물론 한국 역시 비슷한 행보를 보인고 있다.저자는 증보판에서 책을 집필할 당시와 그 이후의 변화에 대해서도 쓰고 있다.이 책의 아킬레스건과도 같은 시대적 삼분법과 그에 대한 반성이 주를 이룬다.저자의 변화된 관점은 각 시대가 이후 시대의 맹아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으로 수렴된다.그리고 그런 관점에서 근대라는 프로젝트 역시 허구가 아닐까 의심한다.근대라는 것은 공론의 장에서만 있어왔던 것이고 모든 문화 현상이라는 것이 굳이 표현하자면 포스트모던 한 것이 아닐까 하는데 까지 생각이 이어진다.저자는 이런 말로 결론 짓는다.

진정한 '역사적 사실'따위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고 각각의 시대마다 다르게 이해된 '사실'이 있을뿐이며 그러한 '사실'이 시대 속에서 다양하게 변화하면서 문화를 형성해왔다고 생각하는 편이 이치에 맞다.

근대의 '신화화'와 포스트 모던의 '탈신화화' 작업에 대한 저자의 절충적이며 설득력있는 조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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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leinsusun 2006-11-20 20:38   좋아요 0 | URL
오....이 리뷰는 음악 잡지에 칼럼으로 실려야 할 것 같아요!^^

2006-11-20 2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도톰 2007-01-16 16:19   좋아요 0 | URL
재미있게 잘 봤습니다. ^^
 
의미가 없다면 스윙은 없다 - 하루키가 말하는 '내가 사랑한 음악'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윤성원 옮김 / 문학사상사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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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년 전 쯤 기억이다.몇 몇 사람들이 나를 보고 하루키를 닮았다고 했다.당시 나는 하루키를 접하지 않았던 상태였다. 그래서 그 말이 칭찬인지 놀림인지 알 지 못했다.시간이 조금 흐른 후에 서점에서 그의 사진을 보았다.그 사람들이 한 말은 분명 외모를 뜻한 것은 아니었다.하루키와 나는 제비와 참새처럼 확연히 구분된다.

남들 보다 늦게 하루키의 소설을 읽었다.나름대로 재미는 있었지만 왜 독자들이 열광하는지 알 수는 없었다.그의 재즈에세이도 보았다.그의 책을 읽으면서도 나는 '내가 어디가 하루키랑 닮았지?'라는 생각을 여러번 했다. 내게 유리한 쪽으로 그 유사성을 찾아보고자 했다.나는 당시 사람들이 그런 말을 했던게 두가지 이유에서가 아니었나 하고 추론해 본다.하나는 음악에 대한 '잡식성 성향'이다. <의미가 없다면 스윙은 없다>에도 나오지만 하루키의 음악감상은 j-pop(물론 그가 열심히 듣는다고 하진 않았지만)에서 부터 락,재즈,클래식으로 넘나든다.다음으로 추론해 본 것은-이것은 자랑이라 할 수 없는데-하루키의 소설 속 인물들과 비슷한 분위기 때문이다.이런 류의 동질성에 대해서는 사실 나 역시 긴가민가하다.그러나 결코 아니라고 부정하기도 어려운 구석이 있다.뭐라 딱히 집어서 하루키의 어느 소설 ,어느 주인공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그러나 내 젊은 날의 방황이 가진 기억 중에는 하루키 소설 속 인물들과 유사한 경험 내지는  비슷한 뉘앙스가 배여있던 것도 사실이다.내 경험에 한정 지을 수 밖에 없겠지만 -하루키적이냐 아니냐로 놓고 보면- 내가 만났던 내 주변 사람들 중에서는 내가 가장 '하루키적'이었던 것 같다.

<의마가 없다면 스윙은 없다>는 하루키가 쓴 잡식성 음악 에세이다.등장하는 인물만 보더라도 그의 잡식성 메뉴는 확인된다.재즈 피아니스트 시드월턴,비치보이스의 브라이언 윌슨,클래식 피아노의 거장 루돌프 제르킨과 아루투르 루빈슈타인,내가 잘 모르는 j-pop의 스가시카오...그리고 마지막은 미국 포크의 원류 우디 거스리... 중국집 메뉴 보다 다양하다는 생각도 든다.(사실 중국집에서 주문하는게 늘 거기서 거기라서 그렇지.실제는 중국집 메뉴가 더 많긴 할 것이다.)

하루키 음악 에세이의 장점-곧 단점이기도 한-은 순음악적 전문 지식이 그다지 많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그의 음악계에서의 계급은 애호가이지 전문적인 음악평론가이거나 연주가가 아니다.그러므로 하루키는 인문학적이며 감성적인 음악론을 펼친다. 결코 악보를 들이대며 '32번째 마디부터의 디크레센도를 이런 식으로 처리하면 곤란하다.' 는 투로 이야기 하지 않는다.물론 분석적이고 순음악적 평론도 아주 필요하고 중요하다.그런게 없다면 음악이 칵테일바에서 등장하는 여흥을 달래주는 다양한 종류의 칵테일 수준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그리고 또한 칵테일용 음악도 삶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여하튼 하루키의 음악론은 그저 음악가에 대해 조그만 사전 지식이 있고 그들의 음반을 몇 장 들어본 수준이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고 이야기에 동참할 수 있는 수준의 것이다.

 하루키 에세이의 또다른 장점은 하루키의 표현력에 있다.같은 음악도 '좋다/나쁘다' 라고 말하고 마는 평범한 수준의 일반 청취자에게 하루키의 표현력은 감탄을 불러일으킨다.가끔은 '맞아.내가 그 음악을 들으며 꼭 하고 싶었던 이야기야.' 하는 류의 대리만족의 경험을 주기도 한다.(그와 반대로 '나는 같은 느낌을 갖고도 왜 이렇게 표현하지 못했을까 하는 좌절감도 동시에 주기도 한다.) 이 책에서 언급된 윈튼 마설리스에 대한 하루키의 평가는 내게 '어쩜 나도 이런 생각을 했었는데..이렇게 표현하고 싶었었는데..' 하는 씁슬함을 건네주었다. 윈튼 마설리스에 대한 하루키의 평가 중에 이런 것들이다.

(윈튼 마설리스는)'이봐요,난 이것도 할 수 있다고요,이런 것도 할 수 있고요' 라는 듯 사뭇 득의양양한 태도가 다소 거슬리게 된다... <스탠더드 타임 vol6 Mr 제리롤> 이 앨범이야말로 윈튼 마설리스의 '공부 증후군'의 좋은 예이다...' 어때? 잘하지?' 라는 메시지만이 빤히 들여다보여 그 결과 어이없을 정도로 깊이가 없는 음악이 만들어지고 만다.그의 오리지널 작품은 역시 들을 만하지만 그 이외의 스탠더드곡의 완성은 정확히 말해 비참하다.....그렇기에 감탄은 해도 감동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또한 잘 알여지지 않은 피아니스트 시드 월턴에 대한 이런 표현은 정말 압권이다.

(시드 월턴은) 퍼시픽 리그의 하위 팀에서 2루수를 보고 있는 6번 타자 같은 존재다.

<의미가 없다면 스윙은 없다>에서 새로 알게 된 사람이 스가시키오였으며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된 사람이 시드 월턴이었다.시드 월턴의 음반은 복사판이 하나 있었는데 거의 듣지 않아서 있는지도 가물 가물했다.이 책을 보고 카피본 CD를 살펴봤다.이 책에도 소개되어 있는  스티플 체이스 레이블에서 나온 음반이다.이 음반에는 4곡이 들어있는데 그것도 마지막 곡은 곡이라고 할 수도 없는 1분 남짓한 멤버소개 테마음악이다.존 콜트레인의 <블루 트레인>이 첫번째 곡이다.테너 색소폰 밥 버그와 함께 동일한 멜로디를 연주하는 부분이 아주 인상적이다.시드 월턴의 피아노 스타일은 하루키가 지적한것처럼 그다지 전면에 나서지 않으면서도 즉흥연주의 피아노 턴이 되면 중용적이면서도 격조 있는 연주를 들여준다.하루키가 칭찬했던<달콤한 모음곡> 에서 역시 네명의 멤버가 서로를 존중하며 제각기 기량을 펼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준다.하루키 덕분에 시드 월턴의 피아노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니 더 좋게 들렸는지도 모르겠다.

비치 보이스의 브라이언 윌슨의 곡들은 서핑 음악 말고도 가끔 라디오에서 흘러 나온다.퇴근길에 가끔 듣는 배철수의 음악캠프에서도 비치보이스의 비-서핑음악이 간혹 선곡되었던 걸로 기억된다.<펫 사운드> 음반은 90년대에 재발매 되었다.당시 브라이언 윌슨은 이 음반에 대한 라이너 노트를 찍접 썻다.브라이언 윌슨에게 영향을 준 음반은 -내가 무척 좋아하는-비틀즈의 음반이었다.비틀즈의 음반을 듣고 브라이언 윌슨에게도 무언가 영감이 왔나보다.Don't talk, God only know, Caroline no 같은 곡들에서 초기 비틀즈의 실험성이 언뜻 언뜻 보인다.물론 이 음반에서 국내 가장 많이 알려진 곡은 민요였던 sloop john B였다 .우리말로 번안되어서 불려지기도 했던 걸로 알고 있다.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17번에서 피아니스트들에 대한 하루키의 표현도 재미있다.

브렌델의 경우는 여느 때처럼 지적이며 음악의 논리가 분명하다.이는 물론 바람직한 현상이나 안타까운 건 설정된 논리에 설득력이 없다는 점이다.네 악장을 통틀어 들어봐도 결국 남는 것은 품격있는 지적인 지루함뿐이다...(리히터,길레스의 연주에 대해) 어디까지나 심각하고 진지하게 농담 같은 건 처음부터 낄 자리도 없다는 듯이 보여 왠지 공산국가의 매스게임 같은 두려움이 앞선다.이런 타입의 연주는 오늘날에는 역사라는 서랍장 속에 살며시 넣어두는 것이 현명할지도 모른다.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17번은 하루키가 말하는 그의 '개인적인 서랍장'에 들어 있는 음악이다.모든 사람들이 다 좋아할 만한 그런 곡은 아니다.음반을 뒤적여 보니 다른 슈베르트 소나타들 사이에 딱 한장의 연주가 있었다.에밀 길레스의 리빙스테리오 레이블에서의 연주.다시금 들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스탄 게츠에 대한 하루키의 편애는 유명하다.따로 언급이 필요없을 것 같다.나같은 경우에는 스탄게츠를 하루키만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그의 전성기 버브 시절 녹음보다 오히려 마지막 음반인 <피플 타임>음반이 마음에 남는다.스탄 게츠의 마지막 녹음이며 또한 투병 중의 연주라는 외적 이유가 더 인상적이기 때문이다.백조의 노래처럼 스탄 게츠는 케니 바론의 피아소 선율에 마지막 색소폰 소리를 얹는다.하루키도 지적했듯이 완벽한 테크닉은 결코 아니다.마치 깁스하고 연주하는 사람같기도 하다.어떨 때는 다음 프레이징을 넘길수 있을까 하고 조마조마하게 만들기도 한다.실제로 연주를 본 사람들은 더했을 듯 하다.마지막 음반에 들어있는 찰리 헤이든의 <퍼스트 송>은 원곡보다 스탄 게츠의 덜컥이는 연주가 훨씬 마음 속 깊이 들어온다.색소폰이 숨을 헐떡이는 소리가 들릴 정도여서 코 끝이 찡해진다.오늘처럼 가을 비가 내리는 밤,이 곡을 듣고 있으면 오랫동안 끊었던 담배 한 개피를 들고 창가로 나가고 싶어진다.

루돌프 제르킨과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은 정말 뜻밖의 비교이다.스파게티 집에서 된장찌게를 떠올리는 기분이었다.대개 연주가들의 비교는 하이페츠/오이스트라흐,리히테르/길레스,칼라스/테발디,토스카니니/푸르트뱅글러,파바로티/도밍고...뭐 이런 식이 익숙하다.그런데 제르킨과 루빈스타인이라니...독특하다.물론 비교대상을 누구로 잡냐에 따라서 비교하지 못할 연주가가 어디있겠는가? 제 각가의 특색이 있기때문에 어떤 식으로도 이야기는 만들어진다.그럼에도 제르킨과 루빈스타인을 비교하는 글은 이 책에서 처음 만났다.그래서 신선하다.대개의 피아니스트들은 제르킨과 유사한 철학자,수도자 같은 스타일이다.자기 자신에게 엄격하고 또한 연습에 충실하다.음악에 대해서는 완벽주의적 성향을 갖는다.그 완벽주의가 약간의 기벽으로 보이기도 한다.오히려 음악계에서는 루빈스타인같은 스타일이 독특한 사람이다.루빈스타인은 음악을 즐기는 사람이었으며 대중적 취향에 적당히 야합(?)하기도 했던 사람이다.워낙 한량이어서 노는 것도 좋아했으니 말썽도 많았다.하루키가 이 책에서 언급한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2번> 연주는 루빈스타인 스타일을 보여준다.(내가 클래식 음반을 모으기 시작하던 초창기에 누가 누구인지도 모를때 샀던 음반이다.) 루빈스타인의 연주는 유들 유들하다.드라마틱한 연주를 즐기는 피아니스트들이 포르테로 힘을 모으는 지점에서도 루빈스타인은 '툭 툭' 샌드백 두드리 듯 치고 지나간다.요셉 크립스의 반주 역시 그다지 용을 쓰지 않기 때문에 밸런스가 크게 무너지진 않는다.제르킨의 연주...하루키가 지적한 바와 똑같은 걸 간혹 느낀다.어떨때는 무척 좋지만 또 어떨 때는 듣기 힘들어진다.

하루키가 좋아한다는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두 장의 음반<리버>와<네브라스카> 는 락팬들이 인정하는 브루스의 최고명반이다.그릭고 풀랑의 음악은 기묘하다.독특한 소스 맛이 나는 음악이다.나는 주로 그의 피아노 음악과 실내악곡을 즐겨 듣는데 하루키의 초대로 풀랑의 가곡집에도 손을 댈 듯 하다.부드러운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를 들려 주었던 제랄드 수제의 음반이 눈에 들어 온다.

하루키의 삶에서 부러운 점은 그가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작품을 쓰면서 음악을 즐긴다는 것이다.런던에서 하루키는 이렇게 살았다고 한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집중해 소설을 쓰고 지치면 오후에는 산책을 하고 찻집에서 홍차를 마시면서 독서를 하고 날이 저물면 윗도리를 걸치고 음악을 들으러 갔다." ... "상쾌한 일요일 아침 커다란 진공관 앰프가 따뜻해지기를 기다리고 (그동안 물을 끊여 커피라도 준비하고) 천천히 턴테이블에 풀랑크의 피아노곡이나 가곡 LP를 얹는다.이런게 하나의 행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루키 자신도 이런 행복이 모든 행복의 척도라고 생각치는 않는다고 말한다.그러나 이 세상 어딘가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종류의 행복이라고 말한다.

다른 모든 복잡한 생각은 잠시 접어둔다. 그냥 그 상황을 그려봤다.행복해 보인다.좋아하는 일과 자유로움과 음악이 하루안에 빼곡하게 들어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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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12 14: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DJ뽀스 2007-01-04 14:46   좋아요 0 | URL
빌려 읽은 책이라 반납하려니 아쉬운데 리뷰 너무 잘 쓰셨네요. ^^: 퍼갑니다.
 
로버트 카파 - 그는 너무 많은 걸 보았다
알렉스 커쇼 지음, 윤미경 옮김 / 강 / 2006년 8월
평점 :
품절


나는 사진에 그다지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사진 찍히기 싫어하는 습성때문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초등학교때 사진 중에는  사진찍기 싫어서 정면을 바라보지 않고 고개 돌린 사진이 몇 컷 된다.고등학교때 찍은 사진은 대게 어쩔수 없이 찍어야 했던 단체 사진이 전부다. 한 해 통틀어 딱 2장의 사진이 있는 셈이다.봄, 가을 단체 소풍 사진..요즘 같은 디카 시대는 나를 좀 곤혹스럽게 한다. 내겐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어디서나 카메라를 들이대고 남을 찍는, 또는 자신을 찍는 사람들이 가끔 이상하게 보인다.

왜 그렇게 사진 찍히기 싫었을까? 일단  사진의 피사체가 되어 어색한 웃음을 지어야하는 그 몇 초가 싫었던 듯 하다.특히 바보같이 웃음을 지으라고 '김치,치즈' 하는 소리에 따라 웃어야 하는게 곤욕이었다.결국 남들 다 웃고 있는데 나는 삐죽거리고 있게 된다.또 하나 혐의를 둔다면- 나의 주장이지만- 사진빨이 영 안받는 다고 믿기 때문이다.몇 몇 친구들과 동료들이 내 주장에 동의를 해주면서 기정사실처럼 받아들여지고 말았다.

사진에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찍은 적도 없다.대학교 시절 캐논 AE 1을 들고 몇 몇 시위 장면과 몇 몇 인물 사진을 찍은 적이 있지만 이내 관심을 잃었다.사진을 잘 찍기 위해서는 약간의 기술적 공부가 필요했는데 연애 하느라 거기까지 공부하긴 싫었나보다.

어쨋건 내게 사진은 인스턴트 음식과도 같았다.그저 대충 빨리 찍고 찍히는게 편안한.가끔 유명한 사진 작가의 사진들을 보면서 ' 잘 찍었네 ' 하는 정도의 느낌을 갖는 정도였다.미술 작품을 보면 애써 그림과 화가의 이름을 기억하려고 애썻지만 사진은 그런 대접을 받지 못했다.로버트 카파는 그나마 좀  나은 편이었다. 카파는 나의 전공 분야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기에 조금 더 친숙했다는 정도다.나는 '카파이즘'이라는 저널리즘의 한 신념으로 먼저 그를 만난 셈이다. 

이 책 <로버트 카파>는 아주 잘 만들어진 TV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 하다.책의 구성이나 적절한 인터뷰등은 이 책을 토대로 다큐멘터리 대본을 써도 문제가 없을 정도로 잘 만들어져 있다.프롤로그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참전 용사이야기 부터 시작한다.참전 용사들을 만나서 인터뷰를 하면서 카파가 찍은 유명한 오마하 사진들을 보여주고 감회를 듣는 것이다.이 사진들을 본 사람들의 소감을 소개하며 카파에 대한 보편적 관심을 불러 일으킨다.

'카파의 작품을 보고난 후 폭력의 상흔은 보이지 않고 아름다움과 슬픔만 보인다고 말한 사람들도 있었다.그들은 모두 자신들의 삶에거 가장 잊지 못할 순간들을 흑백의 사진으로 담아낸 이 사람에 대해 더 많은 걸 알고 싶어 했다.인간 정신의 순수성을 보여주는 시각적 유산을 남긴 이 도박꾼은 과연 누구였단 말인가?'

이제 참전 용사들의 감회어린 시선과 함께 독자들도 자연스럽게 카파의 삶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책 속으로 들어가면 1948년 헝가리로 돌아가고 있는 카파를 만나게 된다.17년만의 고국 방문이다.전쟁으로 인해 모든 것이 처참하게 변해 버린 부다페스트.낯익은 골목길은 유령이나 나옴직한 곳으로 바뀌었다.카파의 참담한 시선은 이제 시간을 따라 거꾸로 거슬러 올라 간다.

프롤로그부터 카파의 일대기를 끌어오기 까지 과정이  TV 다큐멘터리적이다.적절한 구성을 통해서 카파의 이야기로 독자를 조금씩 조금씩 몰아가는 방식이 즐겁다.

이 책은 저자의 발품이 그대로 느껴진다.저자는 카파의 일대기를 총체적으로 구성하기 위해 기존의 많은 자료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다.그리고 적절한 시점에서 그 자료들에 묘사된 카파의 모습과 사람들의 기억속에 남은 카파의 인상을 그대로 배치한다.TV 다큐멘터리로 지차면 나레이션으로 스토리를 이끌어가다가 필요한 시점에 적당한 컴퓨터 그래픽과 적당한 인터뷰를 넣어서 주는 것과 유사하다.이것은 영상세대에게 어필할 수 있는 구성이다.영상세대들은 이러한 방식에 익숙해져 있다.인용된 인터뷰나 내용들 역시 아주 세밀하고 사적인 것들이어서 흥미롭다.카파가 교류했던 사람들의 면면 역시 화려하다.그들과 카파의 관계를 그리다 보면 마치 20세기 초반으로 시간을 거꾸로 돌려 놓은 듯 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앙리 카르티에 브레송,베르너 비쇼프,존 스타인벡,어니시트 헤밍웨이,존 휴스턴,하워드 휴즈.....

카파의 오랜 친구였던 작가 존 허시는 그를 '스스로를 만들어낸 사람'이라고 말했다.이 표현은 카파를 한마디로 요약한 가장 유명한 말로 아직도 기억되고 있다.초보 사진가 앙드레 프리드만이 만들어낸 이름 '로버트 카파' , 자기 내부에 있는 전쟁의 공포를 넘어서려 했던 사람,언제나 쾌활함을 잃지 않았지만 내면에는 황폐함과 상실감이 자리잡고 있던 사람,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삶 속으로 자신을 기꺼이 밀어넣고 인생을 즐긴 사람....'로버트 카파'로서 '로버트 카파'보다 더 훌륭하게 그 삶을 만들어 낸 사람.

그는 5번의 전쟁에 참가했다.그는 항상 자극을 원했던 듯하다.종군 기자들이 전장에서 느끼는 목숨을 건 흥분같은 것이다.카파는 전장을 찍었지만 언제나 전쟁을 증오해 왔다.'실직한 종군기자'가 되길 원했지만 세상은 그의 뜻대로 발 맞추진 않았다.그는 수많은 죽음을 목격하며 일종의 '심리적 외상'을 입었던 듯 하다.국제 분쟁이 있거나 대규모 난민이 발생하는 곳에서  일하는 국제 기구 요원들은 정기적으로 심리 상담을 받아야 한다고 들었다.인간의 잔혹함과 충격적 죽음에 수시로 노출되어 일을 하다보면 정신적 외상을 입게 된다고 한다.로버트 카파는 5차례에나 걸쳐 죽음이 즐비한 현장에 있었다.강인하고 낙천적인 사람이었다 하더라도 그 역시 심리적 상처를 받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카파가 사진과 자신에 대해 매너리즘에 빠져 있을 때 일본으로 초청을 받게 되면서 한 말은 그가 얼마나 힘들어 했는지 보여준다.그는 조카에게 "다시 전쟁에 가야한다면 난 총으로 자살을 해버릴 거야.난 너무 많은 걸 봤어." 1951년 함께 일했던 작가 어윈 쇼 역시 카파를 이렇게 말했다. '비틀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난 아침이면 카파는 비로소 자신이 통과해온 비극과 슬픔이 그에게 흔적을 남겼다는 사실을 보여준다.창백한 얼굴,불길한 꿈에 쫓겼던 나른한 눈.카메라를 통해 그토록 많은 죽음과 악을 들여다봤던 남자가 마침내 여기에 있다.절망과 고통 속에서 후회를 하고,세련되지도 유쾌하지도 않은 남자가 여기에 있다.카파는 거품이 이는 진한 술을 들이켜고 몸을 부르르 떨며 실험을 하듯 오후의 미소를 지어본다.괜찮다.' 카파는 슬픔과 비극을 잊기 위해 가면을 써야했다.본인 스스로도 완벽하게 속을 만한 가면이 필요했다.술과 여자 그리고 도박이 언제나 그의 안주머니에 들어있었다.그를 얼핏 아는 사람들은 그를 '유쾌한 보헤미안'이라고 말했지만 그를 조금 더 깊이 아는 사람들은 그가 얼마나 고통받고 있었는지 증언한다.    

나는 이 책을 컴퓨터 앞에서 '매그넘' 홈페이지를 띄워 놓고 읽었다.이 책에는 중요한 몇 개의 사진 밖에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이 책은 연대기 순으로 씌어져 있기 때문에 사진집을 순서대로 살펴보면 책에 등장하는 내용과 그 당시 카파가 찍었던 사진을 그대만 만날 수 있다.20세기를 '야만의 시대'라고 한다면 로버트 카파는 언제나 그 한복판에 서서 셔터를 눌렀다.그의 사진에서는 전쟁의 절규 소리가 들리고  얼핏 핏내음도 난다.그의 작품을 보다가 다른 매그넘 작가들의 사진을 살펴봤다.사진의 기술이나 구도라는 측면에서 로버트 카파보다 뛰어난 작품들은 수 도 없이 많다.그러나 카파의 사진에는 어떤 예술적인 사진에서도 느낄 수 없는 강한 힘이 있다.그것은 외롭고 고독했지만 유쾌함을 잃지 않았던 한 인간의 힘이며 또한 진실의 힘이다.로버트 카파에게 진실보다 더 뛰어난 사진 구도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카파는 말했다."만약 당신의 사진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그건 충분히 가까이에서 찍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말을 정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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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너 니벨룽의 반지
버나드 쇼 지음, 유향란 옮김 / 이너북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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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대륙에서 나는 바그너와 반대 편 대륙에 살고 있었다. 자의적으로 구분을 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나는 기악파다.그렇다고 성악을 나몰라라 하는 것은 아니다. 바흐의 수난곡이나 칸타타,슈베르트,슈만등의 가곡을 즐겨듣는다.또 베르디,푸치니등의 오페라도 듣는다.그러나 음악 대륙에서 패권을 두고 기악파와 성악파가 핏빛 전쟁을 치룬다면 나는 기악파로 투항할 수 밖에 없다.바그너는 성악 쪽에서도 왼쪽 끝에 있는 극좌파다.(그런데 다른 시각으로 보면 바그너야말로 기악과 성악은 물론 드라마까지 총체적으로 이루려한 것 아닌가?) 달콤한 멜로디와 비교적 단순한 줄거리를 가진 모차르트,푸치니,베르디 등이 오페라 우파에 서있다면 바그너는 오페라 좌파의 수장이다.바그너의 뒤를 따르는 오페라 좌파들은 드뷔시,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등이 있을게다.(그런데 써 놓고도 이런 구분이 억지라는 생각이 든다.)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새로운 경험을 찾아 다니는 것과 같은 말이다.결국 노선이 달랐지만 나는 바그너에까지 이를 수 밖에 없었다.이제는 잠시 미루어 두었던 그를 만나고 있다.세상은 풍요로운 음악의 보고이고 바그너도 그 중 하나이다.

 바그너는 문제적 인간이다.총체적 모순투성이다.남녀간의 사랑을 만병통치약으로 믿는 프로이트 실험실의 연구교재감이다.그의 인간성과 연애행각 대해 길게 논할 바는 아니다.짧게 내 사견을 밝히지면 '딱 내 스타일'이다.내가 별로 매력을 못느끼는 캐릭터들은 스테레오 타입화 되어 있는 사람들이다.가장 나쁜 스트레오 타입화되어 있는 인간은 '남들 하는 것에 별 의구심없이 그냥 따라하는' (형편없는 의미의)일상인이다.좀 더 좋은 쪽으로 보면 그들은 안정감이 있고 타의든 인식하지 못하는 자의든 방향성이 있다고 해 두자...하여간 인간적으로 내 눈에 별로 멋있어 보이진 않는다.바그너는 자기모순의 종합선물세트다.나는 종합선물 세트 같은 인간형을 좋아하기 때문에 일단 그의 사적 경거망동에 대해서는 눈감아 버린다. 여자를 등쳐먹든 등쳐먹은 여자가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 되었든 알 바 아니다.

역사적으로 바그너 음악과 땔래야 땔 수 없는 사람이 히틀러이다.덕분에 바그너 음악이 오랫동안 편견의 먹물을 뒤집어?그리고 그 먹물의 흔적은 많이 희석되긴 했지만 여전히 남아있다.이스라엘에서 바그너 음악이 금지된건 충분히 이해가 간다.음악이 뭔 죄냐며 항의할 수도 있지만 끔찍한 집단 기억의 악령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그리고 그 충격의 희생양이 되었던 사람들의 마음도 이해해 줘야 한다.

바그너 음악에 대한 일종의 편견은 히틀러의 바그너에 대한 과도한 애정때문이다.바그너 입장에서 억울한 일이다.열혈 팬 하나때문에 팬 집단 전체가 욕먹고 그의 음악까지 욕먹는 결과를 낳게 했다.최강의 바그너 매니아 히틀러.그는 <로엔그린>의 백조기사처럼 자신을 인식했다.독일 제국은 물론 세계를 구원할 기사의 운명이 바그너의 신화와 음악속에 자리잡고 있었다고 믿은 것이다.히틀러가 은빛 갑옷을 입고 백조의 기사처럼 분한 그림은 유명하다.히틀러는 레니 리펜슈탈이 찍어 유명한 뉘른베르크 전당 대횡서 '리엔치''로엔그린'의 서곡등을 연주해댔다.제 3제국의 각종 행사에서 바그너 음악은 빠질 수 없었다.1933년 히틀러는 '바이로이트 음악제는 바그너와 제 3제국의 혼을 엮는 행사'라고 말했다.골수 매니아 때문에 '바그너 음악=나치 선전음악' 처럼 이미지화 되어 버렸다.물론 바그너가 반유태주의와 독일 국가주의에 경도된 것은 사실이다.그러나 그것 때문에 바그너를 히틀러와 동일시 해버리는 것은 잘못이다.골수 바그네리안때문에  가장 큰  편견의 감옥에 갖혀 버린게 또 바그너이다. 

버나드 쇼가 쓴 <니벨룽의 반지>는 지금부터 약 100년 전에 쓰여진 또 다른 바그네리안의 바그너 해설서이다.버나스 쇼는 노벨문학상 수장자이자 대표적인 영국 페이비언 사회주의자이다.페이비언 사회주의를 짧게 말하자면 점진적 변화를 추구하는 '개량 사회주의자'정도로 생각하면 된다.버나드 쇼는 그의 정치적 입장에 기대서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가 담은 신화의 의미를 해석한다.버나드 쇼의 독설이 담긴 글쓰기는 당대에도 유명했다고 한다.이 책에서도 그는 독설과 자화자찬의 글쓰기를 보여준다.그러나 별로 미워보이지는 않는다.오히려 촌철살인의 한방을 보여줄 때가 많아서 혼자 큭큭 거리고 웃게 만든다.

책은 <니벨룽의 반지> 4부작 <라인의 황금><발퀴레><지크프리트><신들의 황혼>순으로 줄거리를 소개하고 신화적 인물과 그들의 관계가 근대사회에서 갖는 우의성을 설명한다.(스토리를 조금 알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인데)...일단 주인공들에 대한 버나드 쇼의 해석은 이렇다.신들의 왕으로 등장하는 보탄은 질서와 법을 상징한다.그는 이 질서와 법의 집행자이면서 또 예속자이기도 하다.존재를 부정할 수 없는 모순에 빠진 보탄은 편법과 새로운 파괴를 구상한다.톨킨의 작품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골룸과도 같은 존재인 알베르히는 자본가를 상징한다.버나드 쇼는 극에 등장하는 자본가를 두 부류로 나누고 있다.황금을 움켜쥐고 용으로 변신에 이를 수호하는데 급급한 파프너는 전통적인 농경자본가이다.반면 알베르히는 산업혁명 이후 급속도로 확산된 부르주아 자본가이다.버나드 쇼는 드레스덴 봉기에 참여했던 바그너와 사회주의 혁명을 꿈꾼 마르크스가 예측하지 못한 알베르히들의 개량 대해 언급한다.즉 성공으로 얻은 자존심과 사회적 존경심은 알베르히가 자신의 성격을 개선해 나간다는 것이다.이 알베르히들은 결국 질서와 법을 상징하는 보탄과 이성과 계략을 상징하는 로게를 장악하게 된다.돈 지갑을 가진 자들이 모든 것을 장악하게 된 다고 버나드 쇼는 말하고 있다.그는 알베르히에 종속된 노예들을 근대 시민들로 읽는다.사람들은 난쟁이 알베르히를 마음 속에 품고 산다.그렇기 때문에 난쟁이들이 훌륭하고 제대로 된 존재라고 믿는다.그들이 착취를 통해 여기 저기 해악을 행하고 다녀도 그저 바라볼 뿐 의심하지 않게 된다.버나드 쇼는 알베르히를 통해 배금주의에 빠진 자본주의와 자본가들의 착취구조를 읽고 있다.

<니벨룽의 반지>의 히로인인 지크프리트는 그럼 어떨까? 버나드 쇼는 지크프리트를 니체의 초인,또는 바그너와 함께 드레스덴 봉기에 가담했던 아나키스트 미하일 바쿠닌으로 치환하여 생각한다.즉 현존하는 사회적 제도와 습관 등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의 존재가 지크프리트이다.보탄이 자기 모순에 빠진 신들의 세계를 마감하고 새로운 세계를 구상하기 위해 필요했던 것이 바로 그러한 인간 존재였다.니체가 말하는 위버멘쉬가 바로 지크프리트적 존재이다.버나스 쇼는 지크프리트의 상징적 의미에다가 약간의 사회적 옷을 입힌다.바그너읽기의 사회성을 강조하기 위해 그는 바그너가 이상적 사회주의자로서 드레스덴 봉기에 참여한 것,그리고 그후 12년간의 망명생활을 거친 것에 대해 강조한다.그러면서 지크프리트를 아나키즘적 인간으로도 설명한다.버나드 쇼는 아나키즘의 발전 척도가 그 사회의 정치적 수준을 말해 준다고 할 정도로 아나키즘이 가진 인간화 세계에 대한 혁명에 매력을 느낀다.하지만 어느 것도 만병통치약이어서는 안된다는 말도 잊지 않는다.그는 다음 장에서 마르크스식의 혁명론에 부정하는 점진적 사회개혁자로서의 입장도 밝히고 있다.

100년전의 바그너 해석이 현재와 같을 수는 없다.음악이나 무대면에서도 그렇고 바그너 텍스트를 해석하는데고 그렇다.전통을 고집하던 바이로이트도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고 있다.또한 헤리 쿠퍼같은 연출가들은 바그너 무대를 미니멀하게 바꾼 현대적 해석으로 이름을 높이기도 했다.바그너의 텍스트 또한 다양한 읽기가 가능하다.버나드 쇼의 사회주의적 해석 역시 그 중 하나이다.설령 그와 같은 잣대를 가지고 바그너를 읽더라도 그의 시간과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은 다르다.그러므로 또다른 해석도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총제적 인간으로서 바그너와 그의 음악이 가진 매력은 그의 음악과 텍스트가 무한대로 열려있다는 것이다.

바그너 텍스트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지만 음악에 대한 부분도 없는 것은 아니다.라이트 모티브에 대한 설명도 들어있다.또한 바그너 음악이 가진 모티브반복을 통한 구조완결성을 바흐나 베토벤 수준으로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버나드 쇼의 주장을 발전시키면 베토벤 사후 베토벤 계승 논쟁의 적자는 브람스가 아니라 바그너이다.단 브람스가 베토벤 수호자 였다면 바그너는 베토벤 개혁자였던 셈이다.베토벤이 가진 디오니스소적 성향과 음악적 개혁성에 촛점을 맞춘다면 바그너의 위상 또한 다시 한번 되짚어 볼 수 있는 부분이다.

버나드 쇼가 만약 기록 매체의 발달로 집에서도 바이로이트페스트벌을 만날 수 있는 후세들을 본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그의 독설로는 통조림 음악은 집어치우라고 했을 수도 있다.그래도 그 독설가는 후대 바그너입문자들에게 용기를 주는 말을 몇 개 남기는 예의는 잊지 않는다.

 "<니벨룽의 반지>와 우리가 평소에 접하는 연주나 오락 음악 사이에는 많은 공통점이 있다......<니벨룽의 반지>음악은 정말 쉽고 단순하다.고리타분한 학교에서 음악을 배운 음악가들이야말로 머릿속에 버려야할 것들로 가득하다.나는 그런 사람들이 일말의 동정심도 얻지 못한 채 제 갈 길을 가도록 내버려 둘 작정이다." .....영국의 문필가,바그네리안 버나드 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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