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도 지난 기억에서 부터 시작해보겠습니다. 국민학교 저학년때 일입니다. 교회에서 단체관람 으로 찰튼 헤스톤, 율 브리너 주연의 영화<십계>(1956)를 보러 갔습니다.  영화의 클라이막스인 홍해가 갈라지는 장면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고전주의 시대의 조각같이 생긴 찰튼 헤스톤이 망망대해를 향해 두 팔을 벌렸습니다. 바닷물이 깍두기처럼 각을 잡고 갈라졌습니다. 물의 벽. 영화관 곳곳에서 "할렐루야","주여"하는 탄성이 흘러 나왔습니다. 어린 저는 공공장소에서 커다란 목소리로 탄성을 외치는 교인들이 의아했으며 창피했습니다. 



 영화<엑소더스: 신들과 왕들>를 보는 동안 어느 누구도 "할렐루야"나 "오. 주여" 를 부르지는 않았습니다. 그 점은 다행입니다. 몇 가지 추론을 해 봅니다. 단체 관람자들이 없어서 집단 행동이 없었다는 점은 아닐까. 또는 영화를 본 그 날 기독교인들이 많지 않았을 수도 있을 겁니다. 아니면 공공장소에서 종교적 색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는 내성적 기독교인들이 많았을지도 모릅니다. 기타 등등 


하지만 영화적으로는 다른 곳에서 답을 찾아야 보게 됩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영화<엑소더스>는 종교적 소재이지만 종교를 지우는 방식으로 그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리들리 스콧감독은 영화의 표면은 모세와 람세스의 갈등 구조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고 말합니다. 영화를 세속의 갈등과 스펙터클이 혼합된 헐리우드 영화로 보는 것이 맞다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영화 속에서 신의 문제가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리들리 스콧은 신의 문제를 방석 밑으로 넣어 놓은 것이지 창 밖으로 던진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모세의 정체성부터 출애굽의 해방까지 신 개념을 바닥에 깔아 놓고 있습니다.그는 대략 범신론과 회의적 유신론 사이를 오고 가고 있습니다.


먼저 리들리 스콧이 창조한 모세가 현대적 인물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크리스천 베일은 이 영화에서 부드러움과 강함,신념과 회의, 폭력과 자비, 인내와 신경증을 동시에 가진 분열적인 인물을 현명하게 연기해 내었습니다.  영화<엑소더스>의 모세는 신에 대해 끝까지 의심의 눈초리를 내려 놓치 않습니다. 신이 이해 불가능한 절대자라면 모세는 이해불가능한 신의 타자입니다.  두 모호함이 대결하는 국면은 여러 차레 등장합니다. 모세는 처음으로 난 것들을 죽이겠다는 도착적인 신의 결정에 대해 "그것만은 안된다."고 강력하게 항의합니다. 람세스가 죽은 아이를 들고 "이것이 너의 신이냐?" 고 묻는 대목에서 모세는 연민과 죄책감, 그리고 침묵의 깊은 눈으로 항의하는 자에게 정당함이 있다는 암묵적 동의를 보냅니다.


 영화 속 유대의 유일신 야훼(여호와)는 영화<십계>에서처럼 모세와의 대화를 통해 음성으로 존재하는 신입니다. 영화<엑소더스>는 신의 이해불가능성을 표면에 드러내는 방식으로 신의 존재를 보여줍니다. 영화에서는 어린 아이의 형상을 한 신이 등장합니다. 리들리 스콧이 드러내는 신의 가시성은 오히려 신의 줄어든 영향력에 대한 역설적 표현에 가깝습니다.  신이 모호성을 유지하려고 애쓰지만 하지만 결국 모호성의 심연에는 신의 불능성이 있다는 것 입니다. 그렇게 신은 이제 자신을 직접적으로 재현할 수 밖에 없습니다. 무능을 가리기 위한 방편이었겠지요. 영화<엑소더스>에서 신은 이집트에 내리는 재앙의 출처를 설명하기 위한 설정 이외에 영화에서 비껴 서 있습니다. 왜 유대인을 구하려하는지, 왜 모세를 선택했는지 설명이 없습니다. 오히려 급한 성질의 모세를 자극하거나, 그를 몰아세우곤 하는 신경증적인 신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영화는 모세가 낙상한 이후 일종의 후유증 속에서 신을 만나는 듯이  설정함으로써 신은 망상 속에서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불러 일으키게 합니다. 신과 이야기하고 있는 모세를 바라보는 시선은 분열증 환자의 대화같아 보이기까지 합니다.리들리 스콧은  신을 축소한 빈 공간에 이 현대적인 모세를 기입함으로써 이 영화를 주도해나가게 합니다. 이 지점을 예리하게 공략한 것은 리들리 스콧이 홍해의 기적을 영화<십계>와는 다른 방식의 사실주의적 방식으로 재현한 것만큼이나 탁월합니다. 물론 그 역시 영화의 가장 강력한 하이라이트인 갈라졌던 홍해가 다시 봉합되는 장면에서는 판타지를 100%활용합니다.


 모세가 가진 현대적 속성와 그 정치적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잠시 철학적 사유를 활용해야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모세-신-유대교가 중심 주제어가 될 것입니다. 슬라보예 지젝은 <죽은 신을 위하여>에서, 유대교와 이교, 그리고 기독교의 차이를 설명합니다. 그 중 유대교가 가진 특징은 신을 가시적 영역에서 몰아냅니다.십계명에 있는 형상의 금지입니다. 이것이 이루어지는 과정은 신의 의도 자체의 불투명성과 만나는 지점에서 발생합니다. 지젝은 '불투명한 타자의 욕망과의 대면' 이라고 말합니다. 지젝은 인간이 자유로와지는 지점이 이런 대면을 통해서라고 말합니다. 니체적으로 말하자면, 신의 섭리라는 안정감 보다는 자유의 불안을 향유하는 위치를 얻게 된다고 보면 됩니다. 리들리 스콧에 의해 다시 아이의 옷을 입은 신에게 영화<엑소더스>에서 모세는 여러번에 걸쳐 신의 욕망, 의도를 묻습니다. 그 때마다 신은 질문에 다시 질문하기 방식 또는 모호하게  답을 피해가는 우회 전략을 택합니다. 전능한 신이 드러내는 것은 일종의 '무능함'이었습니다. 400년 이상의 유랑 세월을 한 번에 구제해내지 못하는 무능, 또 몇 번의 재앙이 실패로 돌아가는 허약한 전술 , 구해낸 민족이 환락과 쾌락에 빠지게 되는 모순 등은 신이 무언가 계속 실패하고 이를 그 때 그 때 수습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유대인의 구출 역시 궁극적으로는 람세스라는 법의 이름을 통하지 않고 불가능 했습니다. 법을 매개하지 않고는 이루어지지 못하는 역능은 결국 무능이라는 단어로 밖에는 설명하기 힘듭니다. 


 전능의 신에게는 이 모든 게 단 한 번의 재앙으로도 가능했을텐데 말입니다. 지젝이 보기에 유대교가 다른 종교와 달랐던 첫번째 차이는 유대인들이 '신의 무능'이라는 비밀을 알아내었다는 것입니다. 영화 속에서 모세 역시 신의 무능에 대해 이해하고 있었다고 추론해보게 됩니다. 모세가 끝까지 신의 충직한 신민이 되기 보다는 무언가 고독한 반항아, 회의주의적 배가본드로 보이는 이유는 그래서입니다. 지젝은 구약의 욥이 깨우친 것이 신이 내리는 고통이 가진 무의미함이었다고 말합니다.  '최초의 이데올로기 비판'이 되는 것이지요. 통상적 해석에서는 고통은 시험이라거나, 더 큰 행복을 위한 과정이라는 식의 원인-결과론이 존재하는 반면 고통의 이데올로기 비판에서 고통은 무의미합니다. 오로지 고통 그 자체가 자연주의적 의미로만 남는 것이지요. 고통이 신의 사랑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면  고통이 무의미한 것이라면 신의 의미조차 의문이 됩니다. 영화 속에서 모세는 신이 가한 고통이 결국 무의미한 행위의 반복에 지나지 않았음을 이해하고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지점은  정치-신학적 비판요소가 자리잡게되는 영토가 될 수 있습니다.


비록 유대교가 신이라는 이해불가능한 타자의 욕망과의 접촉을 통한 자유를 얻었다고 하더라도 유대교는 대리 보충물들을 이용하게 됩니다.유대인들의 관례나 의례등이 그것이겠지요. 논의에서 조금 벗어나지만, 반면 기독교는 모든 것을 말한 종교, 즉 계시의 종교가 됩니다. 지젝에게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이 계시된 '사건' 이후를 충족 시켜 나아가는 일종의 결단주의적 성격이 기독교가 가진 윤리성과 보편성의 근원이 된다는 점입니다. 이것을 보증하는 강력한  언설은 신 스스로의 자기 부정이었습니다. 즉 이 구약의 불명확성의 신은 이제 스스로를 부정하는 유래없는 방식을 취합니다.("주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라는 십자가 칠언을 통해 )대단히 독창적이고 또한 도착적입니다. 기독교가 보편성을 재획득하는 방식은 메시아를 실재계로 남겨두는 유태의 방식이 아니라 메시아의 재림 이후의 삶을 우리가 살고 있고, 그것을 꾸려나가는 공동체적 윤리적 보편성이 이를 추동하며 또한 그 재림의 결과를 완성할 수있다는 태도입니다.


 유태인 모세는  홍해를 건너고 나서도, 신의 능력을 보고 나서도 새로운 세계에 대해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습니다모세는 그런 면에서 신의 죽음까지는 아니어도 신의 무능과 그 이후에 대한 역사적 고민이 투여된 현대적 모세상입니다. 영화<다크나이트>에서 선/악의 본질에 대한 존재론적 고민에 빠진 영웅이라는 새로운 캐릭터를 잘 표현해낸 크리스천 베일은 이 영화<엑소더스>에서도 심연에 어떤 모습이 숨겨져 있는 지를 드러내지 않는 영웅상을 잘 소화해내었습니다. 모세-신 관계 속에서 베일의 깊은 눈 속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없습니다. 어쩌면 모세는 신과의 끊임 없는 줄타기 속에 -본인 스스로도 확신 할 수 없었던- 존재했던 해방의 리더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하지만 리들리 스콧이 줄곧 회의적 유신론자의 태도를 취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현대적 모세 속에 신의 양태를 범신론적으로 해소시키려는 단면이 드러나곤 합니다. 범신론에서는 신이 세계의 창조와 더불어 세계의 사물에 투여되는 방식으로 자신을 소멸시킵니다. 그리하여 신을 뜻하는 "모든 곳에 있으며 어디에도 없는" 존재가 만들어 질 수 있습니다. 모세가 스스로 유태인임을 인정하는-내적으로 공감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장면에서 범신론적 신의 존재가 드러납니다. 람세스는 어린 시절 유모의 팔을 자르는 폭력적인 예비 행위를 통해 모세의 정체성을 입증하라고 합니다. 왕족으로 자라났고, 수 많은 전투에서 살육을 했던 모세에게, 노예 신분인 유태인 하녀는 하나쯤 죽어도 별반 상관없는 사람입니다. 설령 그가 친누나일지 아닐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모세는 여기서 그녀의 죽음을 "그렇다. 나는 유태인이다."라는 선언을 통해 막아 냅니다. 영화 속에서 이 장면은 불필요한 죽음을 막기 위한 모세의 윤리적 행동으로 그려지기는 합니다만, 이 선언은 또한 모세를 이집트 왕자에서 유태인으로 바꾸는 전환점이 됩니다. 모세는 끈임없이 자신의 정체성을 의심하지만, 이 선택에 대한 충실성이라는 윤리적 결단주의의 방식으로 자신을 추동해냅니다. 우리가 영화 속에서 만나는 모세는 유태인이 아니었을 수도, 또는 유태인일 필요도 없었을, 신이 선택한, 또는 신의 선택을 충실하게 이행을 통해 완성하려고 한 정치가였을지도 모릅니다. 


모세를 굳이 유태인으로 볼 필요가 없다는 해석은 프로이트의 것입니다. 종교적인 방식으로 수용하지 않는다면 <성경>은 가장 잘 보관된 인류학,또는 신화학의 보고입니다. 모세의 이야기는 그 중에서도 드라마틱한 성격과 스펙터클을 내재하고 있어서 영화하는 입장에서는 한 번쯤 도전하고 싶은 과제일 것입니다. 모세의 이야기를 아시는 분들은 이 이야기의 서사구조가 고대 영웅 신화의 많은 것들과 겹쳐진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아이의 유기- 구조- 성장- 자기 정체성 확인- 모험- 고난의 극복-영웅의 귀환" 이런 반복되는 서사가 모세의 이야기에도 들어있습니다. (모세는 '강에서 주운 아기'라는 뜻입니다.) 즉 가장 오래된 내러티브 형식인 셈입니다.

 

프로이트는 <모세와 일신교>에서 모세가 이집트 말기 유일신(태양신)을 섬기는 이집트 귀족이었다고 분석합니다. 그리고 다신교를 전통으로 하는 이집트 기득권 세력과의 투쟁 중 일종의 지지기반으로서 억압 받는 유태 민족을 포섭하여 새로운 땅으로 향한 것이라고 파악합니다. 즉 유태인의 유일신 사상은 이집트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거죠. 그리고 모세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일종의 초기 국가건설을 위한 일종의 시원적 폭력의 공동체적 희생양(르네 지라르)으로 해석될 여지를 둡니다. 공동체의 구성에는 두 가지의 과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전통과의 동일시이고 또 다른 하나는 외상적 판타지의 공유입니다. 영화 <엑소더스>와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브레드 피트의 영화<퓨리>를 보면, 탱크 분대장인 브레드 피트가 선량한 신입 병사 로건 리먼에게 강제로 나치를 살해를 종용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리고 점점 이 신입은 탱크 부대의 일원이 됩니다. 전장의 공동체에 필요한  외상을 공유하지 않는다면 타자에 의한 살해되든지, 공동체 내부에서의 살해되든지 어쨋거나 생존을 도모할 수 없는 것이지요. 이처럼 프로이트의 논리로 가면 이집트인 모세는 정치적 결합을 통해 유대인을 해방할 수 있는 리더였고 공동체의 전통을 수용할 수도 있었지만, 깊고 깊은 외상적 판타지까지 유태인과 공유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세는 결국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 일은 공동체 내부 출신인 여호수와의 것이지요. 모세를 죽인 그 시원적 국가건설의 폭력에 대한 보완물이 바로 모세를 일종의 선지자로, 신의 대리자로, 신화의 주인공으로 만들었다는 것이 프로이트의 모세에 대한 신화적 분석의 요체입니다.


 이런 해석으로 보자면 굳이 모세를 현대적 인물상으로 재현하지 않더라도 모세라는 인간 자체가 대단히 외부적이고, 이질적인 존재였다는 점은 충분히 설명 가능할 것입니다. 그런면에서 모세를 영화<십계>처럼 충실한 하나님의 전달자로만 바라보는 관점보다 리들리 스콧의 복합적이면서,경계에 선 인물, 끊임없는 회의 속에 살아야 하는 인물로 그린 것은 좋은 선택이었다는 생각이듭니다. 거기에 거대한 스케일을 누구보다 잘 요리할 줄 아는 헐리우드의 거물인 그가 여기에 손을 댄 것은 신의 축복을 받을 만한 일입니다. 영화 속에서 리들리 스콧은 압도적 스케일로 출애굽기를 완성합니다. 그는 스페인 등지에  거대한 세트장을 만들고 이집트의 신전이나 조형물들을 고증에 입각해 재현합니다. 이집트 의상이나 장식품들의 화려함 역시 꼼꼼히 살펴볼 필요가 있을 만큼 아름답습니다. 또한 마차를 비롯하여 무기류 등의 소품 역시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의 CG 역시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하지만 사실성의 구현을 우선으로 생각합니다. 만화<슬램덩크>의 명명대사를 인용하자면.. "CG는 거들 뿐입니다."  현대의 발전된 CG기술 덕분에 60년 전 영화<십계>에서 생략했던 개구리 떼나 메뚜기 떼같은 재앙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재앙들이 대단히 스펙터클함에도 그 비주얼을 지나치게 강조하지 않는 방식들도 효과적입니다. 욕심을 제어할 줄 아는 태도는 오랜 경험이 만들어낸 거장의 복식호흡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족) 1. 종교에 대한 논쟁이나 종교적 해석의 정당성을 다루는 이야기가 아니니까 종교인들께서는 그다지 분개하실 필요 없습니다. 참고로 저는 종교가 없고, 거기에 더하여 유물론자이기까지 합니다. 물론 종종 기분을 깨고 싶어하지 않는 이들 앞에서는 범신론자 행세를 할 때도 있습니다. 범신론자인 척 행세하면 괜히 너그럽고 포용력이 강해보이는 -완전히 대중문화 현상일 뿐인데도- 그런 효과를 발휘할 수 있습니다. 

2. 브레드 피트의 영화<퓨리>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점은... 퓨리 분대의  캐릭터가 우습게도 곧 개봉하는- 저와 저희 집 아이들이- 너무나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마다가스카의 펭귄>과 그대로 닮아 있었다는 점입니다. 두고 보시면 곧 패러디물 나올겁니다. 아시는 분은 이 우스운 비교에 고개를 끄덕이실 겁니다. 영화<퓨리>속에서 단순 무식한 포탄장착병은 애니메이션<마다가스카의 펭귄>에서는 니코입니다. 신입병사 로건 리먼은 당연히 착한 프라이빗이죠ㅋㅋ, 과학자 코왈스키는 퓨리에서는 독실하고 진지한 샤이아 러버프가 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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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14-12-08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지내시죠? 오랫만에 머리 아픈 글 읽으니 좋습니다.
다 읽는다고 허덕거렸습니다. ^^
아이들은 이제쯤 초등학교 들어갈 나이가 되었나요?

드팀전 2014-12-09 18:05   좋아요 0 | URL
아....네..잘 지내고 있습니다. 요즘은 알라딘에 아주 가끔씩 들어오고 있어요.ㅎㅎ 페북에서 놉니다.ㅋㅋㅋ 거기서 바람구두를 비롯해서 아는 분들을 꽤 만나고 있습니다. 첫째 아이는 2학년이고 둘째는 6살입니다.

바람돌이 2014-12-09 23:51   좋아요 0 | URL
아 벌써... 아이들 크는 걸 볼때 세월이 가는걸 느껴요. 저는 늘 청춘인듯, 마음만..... ㅎㅎ
바람구두님도 보고프네요. 하율이였죠. 예쁜 딸이 태어났다는 소식만 들었었는데 많이 컸겠네요. 제가 중간에 핸드폰을 완전히 날려먹어서 데이터를 다 날리는 통에 기존에 있던 전화번호랑 다 잃어버렸어요. 복구가 안되더라구요. ㅠ.ㅠ
바람구두님 블로그를 몇 번 들락거렸던듯한데 그것도 한동안 다잊고 게으르게 살았네요. ㅠ.ㅠ
아 페이스북은 저는 도저히 안맞더라구요. 그래서 패스....

비로그인 2016-02-12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세를 분석하는 데에 라캉부터 프로이트까지, 그리고 스피노자의 범신론...등등, 제가 알지 못하는 다른 거장의 텍스트가 있겠지요. 아뭏든 오랜만에 철학적,정신분석학적 텍스트를 보는 것 같아 흥미로웠습니다. 이 정도의 리뷰를 쓸 정도면 얼마나 공부를 해야할까라는 부러움이 앞서네요. 사실, 아는 것은 많아도 정작 글을 쓰려면 말문이 막혀 말이 안 나오는 것처럼 글이 써지지 않는 경우가 많지요. 필력이 대단하네요. 항상 건강하고 건필하세요. *^^

드팀전 2016-02-17 15:40   좋아요 0 | URL
^^ 요즘은 여기 잘 안들어오긴 하는데. 덕분에 저도 제가 뭐라 썻는지 다시 봤습니다. 잡글에 건필은 과한 말씀이신 것 같구요. 가까운데 계시는 시인님께서 건필하셔서 좋은 글 많이 써주세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