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옥수수섬>(Corn island) (2014)



섬이 있었다. 작은 섬이다.


 어쩌면 섬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저 잠시 모습을 드러내고 사리지는 일식같은 땅이다. 드러냄과 숨김을 내재하는 강 위의 검은 대지. 해마다 강이 범람하면 반복되는 시간의 퇴적물이 작은 섬을 만든다. 인근의 농부들은 이 곳에 옥수수를 심는다. 그리고 수확이 끝나면 농부들은 떠난다. 섬도 다시 범람 하는 물 아래로 사라진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진리의 심연이 드러냄과 숨김을 반복하듯이.


영화는  새로 생긴 섬에 도착하는 늙은 농부의 모습을 따라간다. 특별한 움직임은 없다. 마치 밥을 먹기 위해 숟가락을 찾듯 일상적인 움직임들이 포착된다. 농부는 손으로 흙을 비벼본다. 땅을 조금 파본다. 작은 파이프 조각 하나를 줍는다. 배를 묶기 위해 나무를 박는다.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에 나오는 나무처럼 섬 가운데 잎을 떨군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이제 당분간 거처하게 될 집을 짓기 위한 노력이 시작된다. 집터를 잡는다. 네 귀퉁이에 나무를 놓는다. 사각의 공간에 잠시 누워서 하늘을 보고 잠이 든다. 다시 일어나 기둥을 세운다. 수평을 잡는다. 마치 세트를 만들듯이. 일련의 모든 과정이 마치 흘러가는 강물처럼 무심하게 진행된다. 카메라는 섬 안에서 또는 섬 밖에서 도도한 강물처럼 어떤 생색도 내지 않는 일련의 동작들을 포착한다. 자연의 무심함과 농부의 무심함이 교차한다.  진화적으로 오래된 이 관계에서는 오로지 침묵만이 소통의 언어가 된다. 영화의 첫 번째 대사는 20분이 지나서이 등장한다. 대화라고 하기에는 짧고, 독백이라고 하기에는 긴. 할아버지와 소녀의 단답형 대화. 침묵을 깨는 첫번째 대사가 나오기 까지 영화는 이미지들의 이야기로 시공간을 채운다. 마치 '말씀' 이전에 이미지가 있었던 것 처럼 관객들을 이미지의 다이얼로그 속에 놓여진다. 풍부한 시각 이미지와 청각 이미지들...그리고 고요함 속에 무수한 진동을 이루어내고 있는 운동하는 이미지들까지. 조금도 첫 인간의 목소리를 빌린 대화가 기다려지지 않는다. 20분의 이미지들의 느린 충돌 속에 짧은 대화, 그리고 또 다시 침묵이 이어진다. 다음 번 대화도 20분 정도 뒤에 나온다. 두 번째 침묵은 이제 이미지들의 향연보다는 이미지로 표현되는 내러티브를 예견한다. 


 '옥수수섬'은 영화속 배경이자 유일한 공간이다. 그리고 극의 주인공이다. 이 공간은 마치 연극의 무대와도 같다. 영화는 인위적일 수 있는 공간 설정을 자연의 흐름과 반복성이라는 유장함 속으로 희석 시킨다. 그리하여 공간적 폐소라는 한계를 시공간을 초월하는 보편성의 무대로 바꾸어 놓는다. 예를 들어, 주인공들은 영화 내내 단 한번도 이 섬을 벗어나지 않는다. 시선 조차 이 섬을 넘지 않는다. 모든 내러티브와 서사와 인물, 그리고 과거와 현재가 이 섬에 봉인된다. 할아버지를 따라 섬으로 들어온 손녀, 그녀의 시선만이 유일하게 섬 너머를 단 한번 힐끗 바라본다. 외부로 향한 시선은 그것이 유일하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들은 종종 섬 바깥으로 나간다. 목재를 가져오기 위해, 음식물들을 가져오기 위해 밖으로 나간다. 이 섬은 잠시 머무는 곳이고 이들은 인근 마을 어딘가에서 온 것이다. 이들은 밖으로 나가지만 이어지는 숏은 섬으로 들어오는 배의 모습이다. 마치 외부 세계는 연극 무대의 뒤 쪽처럼 존재한다. 관계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사라지는 곳이다. '옥수수섬' 인근에는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이웃이 있다. 영화 속에는 등장하는 그 타자들은 섬 건너편에 있는 군인들이다. 이들의 존재 역시 총소리라는 청각이미지로 또는- 본격적인 사건이 발생하기 이전에는- 일상적인 순시라는 행위들을 통해 존재한다.

감독의 입장에서 일종의 축약도로서 압축된 섬이라는 공간은 결국 감독이 전달하고 싶은 이야기를 그릴 수 있는 캔버스가 된 셈이다. 



그렇다면 감독은 어떤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싶었던 것일까?

우선 영화의 초반부와 후반부를 이끄는 것은 거대서사는 일종의 자연과 인류사의 압축도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반복되는 순환구조 위에 작은 섬이 놓여있다. 이 섬은 현재 유일한 존재자이고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지만 또한 원형질의 기억을 담고 있는, 즉 과거를 보편성의 이름으로 포괄하고 있는 공간이다. 초반 시퀀스는 그래서 수렵에서 농경으로 돌아온 인류의 태초 문명사를 상징하는 듯 진행된다. 퇴적으로 만들어진 섬 위에서 원형의 시간으로 부터 그리 멀리 떨어져 나오지 않았을 농부의 시간이 포개어진다. 두 층의 시간을 것은 무심함이다. 마치 태양이 뜨고 다시 떨어지는 것처럼, 생을 마친 생명이 꺼지고, 그 시간에 또 다른 꽃이 피는 것처럼 말이다. 자연주의적 무심의 공존. 시간의 영원성이 만들어내는 심연의 숭고가 작은 섬의 이미지 속에 들어가 있다. 그리고 압도적인 영화의 결말은 영원한 심연이 만드는 파국과 생성의 영원한 실천이다. 파국의 시퀀스에서 카메라는 단 한번도 인물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다. 자연에 대응하는 어떤 시급한 즉물성만이 남는다. 예를 들어 섬을 떠나가는 소녀의 모습은 멀어지는 뒷모습만으로 남는다. 화면의 좌측에서 천천이 사라진다. 클로즈업이나 인물에 다다가는 카메라는 없다. 사건은 남지만 감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애상도 애련도 애도도. '야생의 것들이 자신에게 미안해 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라고 말하는 D.H 로렌스의 싯구처럼 카메라는 이들의 상황을 긴박하지만 담담이 그려낸다. 생장과 욕동으로 충만했던 섬은 흐르는 물로 사라진다. '모든 굳어진 것들이 사라지듯'  대지의 파국, 대지의 흩어짐을 이렇게 사실적으로 잡아낸 장면도 드물 듯 하다. 인간의 내러티브가 다시 섬의 내러티브, 자연의 거대한 서사로 돌아 온것이다. 그리하여 영화의 주인공이 진정으로 섬이었음을 재인한다. 즉 파국-소멸- 생성의 섬만이 유일한 주인공이 된다. 영화는 거대한 소멸 이후에도 다시 삶은 시작되고 반복될 것임을 알려준다. 일종의 영원회귀다. 또다른 분산과 이합 그리고 다른 시공간에서 이들의 삶과 기억은 또 자연과 역사라는 무한한 익명의 이름으로 포개어진다.


영화 전체를 이끌어가고 있는 것이 이러한 니체적인 순환론 구조라면 영화 중반부의 긴장과 사건을 만들어내는 것은 프로이드적 리비도다. 영화 초반부 등장하는 사춘기 손녀는 이 영화의 긴장감이 어디서 발생하게 될 지 예견하게 한다. 그녀가 하는 일상적인 행동,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물과 섬의 경계에서 하는 시소놀이, 섬 바깥을 바라보는 아련한 시선, 섬 너머에서 들리는 총소리, 종종 지나가는 경비선... 영화에서는 아이에서 여인으로 성장하고픈, 또는 성장하게끔 되어 있는 소녀의 '생의 약동'이 억압된 리비도의 형태로 드러나고 있다. 예를 들어, 강을 건너온 사슴이 사냥꾼들에게 살해되는 장면이 있다. 그녀는 죽은 사슴의 핏방울 위에 주저앉는다. 노골적으로 초경과 가임의 가능성을 상징하는 장면이다. 소녀가 가지고 온 인형은 이제 벽에 걸린다. 즉 소녀 옆의 자리는 이제 아이의 것이 차지해서는 안된다는 일종의 선언과도 같다. 영화 속에 성적 긴장감은 소녀의 일상적인 행동을 통해서 그리고 군인들의 존재를 통해 드러난다. 그 남성적인 시선들은 폭력적 성의 예감으로 영화 전체에 불안감을 불러일으킨다. 영화 속에서 군인들은 일종의 '절대적 타자'이다. 그 이웃은 '하나의 사물'이고 또한 침입자이다. 하지만 군인들의 시선은 좀 더 근원적인 원초적 불안감을 야기할 뿐 소녀의 리비도의 왜곡된 반향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들은 서서히 거리를 좁혀오지만 직접적인 폭력의 이름으로 침입하지는 않는다. 그런면에서 이웃이라는 군인들의 존재와 시선은 성적 메타포의 맥거핀에 지나지 않는다. 욕망의 흘러넘침으로 인해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외부의 것이 아니다. 그 중심, 또는 고정점에는 소녀가 있다. 그런면에서 이 영화를 소녀의 시점으로 해석한다면, 일종의 성장영화가 될 수도 있다. 탈영병에게 먼저 성적 에너지를 보내는 것도 소녀다. 하지만 이는 좌절된다. '아버지의 이름' 의 이름을 달고 있는 농부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최종적으로 그녀가 택할 수 있는 방식은 이 섬을 모두 파멸시키는 것이다. 즉 엔딩부문의 섬의 무너짐은 일종의 부친 살해- 영화 속에서는 할아버지-인 셈이다. 이것은 욕망을 저지하는  법의 이름을 파괴하고픈 소녀의 욕망이 자연의 법칙의 힘을 빌어 이루어내는 존속 살해인셈이다. 소녀의 시점에서 보자면 세계의 파괴는 새로운 성장, 새로운 세계를 위한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가 어떠한 애도와 애상의 클로즈 업도 없이 사라지는 것은 정치적으로 올바르다. 그녀는 살아 남는다. 흐릿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던 강의 저편, 산 뒤의 그 곳으로 나아 갔을 것이다. 




이 영화는 19회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된 작품다. 조지아-과거명 그루자아-출신의 게오르게 오바슈빌리 감독이 만든 영화다. 카를로비바리 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은 작품이다.이미 여러 영화제에 초청작으로 소개되었다. 영화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대화 대신 침묵을, 언어 대신 이미지를 앞세운다. 하지만 침묵과 이미지가 훨씬 많은 메시지를 건넨다. 이를 한정된 공간 속에서 매우 유려하게 구현해낸 점은 감독의 뛰어난 점이다. 특정한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사건이기 때문에 장면 구축에 심여를 기울인 흔적이 보인다. 또한 전체 문명사의 축도를 그려내고, 자연과 인간의 관계 또는 그 너머에 대한 생각할 거리들을 영상화한다. 이 점도 훌륭하다. 하지만 영화를 빠져나오며 드는 한 가지 생각은 앞서 이야기한 자연성으로 포장된 연극적 인위성 이다. 즉 영상과 메시지의 영화적 전략에 어떤 의도적인 견인에의 의지가 느껴진다는 것이다. 영화는 시종일관 조용하며, 관조적인 자연을 대상으로 하여 연출되고 있지만 오히려 그 안에 거대한 의지를 독파해내겠다는 감독의 주지주의적 향기가 표면화된다는 점에서 오래된 모더니즘의 전략들이 느껴진다. 영화제는 이런 영화들을 좋아한다.  영화보는 즐거움을 느끼게 해주는 수작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