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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제2회 블로거 문학 대상 한국소설 5위]
박민규 지음 / 예담 / 2009년 7월
평점 :
박민규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읽었다. 첫 장을 읽어 나가는 순간부터 소설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비록 어색한 쉼표, 사소한 사실 관계들이 미심 적었지만 (가령 80년대와 요가는 쉽게 매치가 되지 않는다), 그래도 난,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심혈을 기울여 책을 읽어나갔다. 얼마 만에 읽는 한국 소설인가. 족히 반년은 넘었으리라. 모국어로 쓰여진 소설을 읽는 일은, 사전을 찾지 않아도 된다는 편리함이 주는 그 이상의 즐거움을 던져준다.
아마도 반쯤 읽었을 때, 깨닳았으리라. 내가 이 소설을 좋아하는 건, 박민규를 좋아해서 혹은 이 소설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이 작품에서 하루키의 그늘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라는 걸.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에릭 사티의 짐노페디, 비틀즈, 그리고 밥 딜런을 들으며, 맥주를 마시는 20대 청춘이란 나에게 하루키의 주인공들이다. 조금, 아니 많이 불공평하지만, 하루키는 이러한 청춘들에게 강력한 저작권을 걸어 두었다. 적어도 나의 기억과 추억의 자장 안에선 말이다.
작품을 다 읽었을 때엔, 약간의 실망이 떠올랐다. 이때 떠오르는 사람은 마루야마 겐지와 존 가드너였다. 겐지가 떠올랐던 건, 단순히 엇박자 비스듬하게 문단을 나누는 방식 때문만은 아니었다. 차라리 소설가의 각오에서 그가 말하던, “소설이 너무 많이 팔려도 문제이지만, 너무 안팔려도 문제이다” 혹은 그와 비슷한 문장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박민규의 소설은 당연히 전자일 것이다. 너무 많이 팔린 소설이다. 무엇이 문제일까?
당연히 추녀를 사랑하는 미남이라는 문제적인 설정이 문제이리라. 소설 속의 소설의 편집자가 말하듯이, 추녀를 사랑하는 설정이란, 있어 본적이 없다. 작가는 사회를 관통하고 있는 자본의 흐름보다도 더 강력한 거의 초역사적인 것처럼 느껴지는 미/아름다움에 과감히 도전한다. 박민규는 이렇게 언제나 용감하고 무모하다.
허나 그 도전방식은 어떠하였는가? 작품에서 추녀는 배경들에 의해서만 결정된다. 추녀에 대한 묘사는 어디에도 없다. 미추란 실상, 텅 빈 기표, 가공된 혹은 조작된 의미란 것을 보여주는 것은 좋지만, 이건, 미추에 대해서 끊임없이 토를 다는, 그로 인해 미추를 실체화 하는 일상의 경험과 습속에 반한다. 우리는 미와 추에 대해서 너무나도 깔끔한 정의와 감각을 공유하고 있다.
그로 인해 주인공은 추녀를 사랑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추녀를 사랑하지 않는 역설에 빠지게 된다. 이 역설이 추녀를 사랑하는 남자의 이야기, 그렇기에 팔리지 않을 이야기, 편집자도 출판을 포기하는 작품이, 베스트셀러가 되게 한 힘이다. 추녀가 추녀가 아닌 공백이 되었기에, 그리고 그 추녀를 사랑이란 아름다움으로 포장하였기에, 이 소설은 결코 아름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가드너를 떠올린 건, 작품 구성의 문제인데, 우리는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이 작품이 1) 요한에 의해 쓰어진 소설일 수도 있고, 2) 이름 없는 화자에 의해서 씌어진 소설일 수 도 있고, 3) 그 모두를 포함하는 소설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일단 소설 안에 소설, 액자소설이란 구조 때문에 주인공의 교통 사고, <평범한 기적>, 과 해피앤딩이란 입에 담기도 싫은 구태의연한 극적 장치와 결론이 용납이 될 수 도 있으리라. 즉 소설 속의 소설은 박민규와는 다른, 재능 없는 작가(요한이나 주인공)에 의해서 쓰여진 소설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문제는 그러한 구성을 마지막에 Writer’s Cut에서 밝히는 것인데,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깐깐한 글쓰기 선생인 가드너나라면 작품을 이해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요소를 작가는 무슨 권리로, 심지어 작품 속에도 집어 넣지 않고, 끝까지 감추다, Writer’s Cut이란 “보충”의 형태로 들어 내었는가라고 질문하지 않았을까? 작가는 자신도 쑥스러워 하는 “해피앤딩”을 어떠한 방식으로든 무마 시키고자 하였던 것일까. 알 수 없다.
마지막으로 거울에 반사되지 않는, 표상되지 않는, 다른 삶의 방식은 어떻게 가능한가? 라는 질문에 들어오면 소설의 주인공은 더 옹색해진다. 백화점 주창장 알바로 근무하면서도 매일 같이 호프집에서 맥주를 마신다는 건, 누군가가 이미 집세와 밥값을 해결해 주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군만두는 자기에 대해서 투자를 한다는 명목으로 과소비를 정당화한다. 요한과 주인공들의 과소비(?)는 어떻게 정당화 될 수 있을까? 사실 그들은 자신의 과소비를 정당화하려고 하지도 않고, 사실 이에 대한 아무런 자각도 없다. (그러니까… 소설에서 맨날 맥주를 마시는 주인공들이 나오면서도, 그들이 한 번도 술 값에 대해 고민을 하지 않을 때, 난 질투와 화가 난다.)
물론 그런 한가한, 나긋나긋한 삶 역시, 미친 경쟁 시대에선 삶의 다른 방식이 될 수 는 있겠다. 허나 밥 벌이의 어려움은 언제나 부모나 주변인의 환대에 의해서 해결되고, 그러한 비굴한 삶의 연속은 어느 날, 글쓰기의 어려움도 없이, <평범한 기적>으로 해결 된다. 어려움이 없지는 않았으리라, 꼼꼼히 자신의 원고를 읽으면서, 문장 부호나, 맞춤법을 체크하던 사람이라면, 어려움이 없는 것처럼 말을 했을 뿐이리라. 그러나, 도대체 왜 항상 그런 식인가. 다른 삶을 살고 싶은 사람들의 삶이란 건, 사실 주변인의 은덕, 정부나 기관의 펀드로 유지되다, 어느 날 문득 대박을 터트리는 삶이란 건가?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결국 로또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