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5월에 German Law Journal에 실렸던 아감벤과 울리히 라울프(Ulrich Raulff)의 인터뷰를 읽고 정리한다. 인터뷰의 제목은 “Interview with Giorgio Agamben - Life, A Work of Art Without an Author: The State of Exception, the Administration of Disorder and Private Life"이다. 원래 인터뷰는 독일어로 다른 저널에 출간되었는데 GLJ의 한 편집자가 영어로 번역을 하여 재수록하였다. 매우 짧은 인터뷰인데, 예외상태에 대한 내용은 이해가 되지만, 후반부의 작가/저자 없는 예술 그리고 주체 없는 주체성관련 이야기는 도통 감이 안온다. 따라가기엔 생략이 너무 많은 아쉬운 인터뷰이다. (원문은 http://framing.egloos.com/2372727 참조)

라울프의 첫 질문은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프로젝트에서 예외상태가 어떤 관련을 가지고 있는가이다. 아감벤은 자신이 예외상태에서 의도하였던 것은 크게 두 가지 1) 오늘 날 예외상태가 통치의 일반적 형태가 되었다. 2) 예외상태는 법과 법 없음 사이에 있는 근본적인 그러나 숨겨져있는 연결고리로서, 법 시스템을 구성한다.

두 번째 질문은 여전히 미국을 나치 정권과 비교하는 아감벤의 분석에 대한 질문인데, 간단히 말해 아감벤은 관타나모나 나치의 수용소 사이엔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주장한다. 흥미로운 건 아감벤이 자신은 역사가가 아니라고 밝히면서, 그의 작업은 패러다임 즉 모범적 실례들을 다루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가령, 푸코에게 있어서 파놉티콘이 근대라는 특정한 시공간적 배치의 중요한 특이점이 되었다면, 아감벤이 보기에 그만한 중요성 혹은 위상을 가지고 있는 특이점은 관타나모에 있는 우리 시대의 호모 사케르 그리고 예외상태와 같은 사건들이다. 아감벤은 자신의 패러다임 분석이 우리가 처한 역사적 구조를 이해하기 위한 작업이라 말하며, 이를 사회학적 분석(sociological investigation)과 혼돈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라울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그가[아감벤이] 미국을 나치와 똑같이 취급하는 것에 경악을 한다고 말한다. 아감벤은, 나치 수용소가 가능하기 위해서 유대인들은 먼저 그들의 국민으로서의 자격을 박탈당해야 했고, 그로인해 유대인들의 모든 시민권 또한 사라졌는데,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유대인들이 어떠한 법적 지위도 가지지 못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는 이와 똑같은 일이 지금 관타나모에선 행해지고 있다는 주장하고, 이런 점에서 법적으론 혹은 법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나치와 미국을 동일하게 보는 입장이 가능해진다 말한다.

라울프는 나치와 미국 혹은 유대인 수용소와 관타나모를 연결시키는 그러한 고리가 미국의 안보 전략에 어떤 식으로 관련을 맺는지, 다른 식으로 말해, 관타나모가 법에 의한 통치에서 법 없는(질서없는) 행정부의 지배로의 이행을 가리키고 있는 건 아닌가 하며 질문을 한다.

아감벤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푸코를 언급한다. 푸코는 1968년 콜레쥬 드 프랑스에서의 강의에서 안보(security)가 18세기 통치의 패러다임이 되었다는 걸 보여준다. 푸코에 따르면 안보는 기근이나 재앙을 막는 걸 목적으로 하지 않고, 차라리 기근이나 재앙을 일어나도록 하고, 이를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조정하는 걸 목표로 하였다. 그렇기에 푸코는 안보에 의한 통치를 훈육과 법에 의한 통치와 대비시켰다. 아감벤은 법과 법의 부재, 법에 의한 통치 그리고 관리에 의한 통치가 서로 대응하는 통치형태들이며, 차라리 하나의 이중구조 혹은 시스템을 부분이라고 주장한다. 이 서로 대응하는 통치형태들을 역사적인 분리-분열을 이해하기 위해선 우리는 먼저 이 이중구조, 혹은 시스템 내에서의 구조적 상호연관성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이러한 답변이 명확하지 않았는지, 라울프는 재차 직접적으로 우리 시대의 법의 지배는 끝났는지, 나아가 우리가 칙령-포고에 의해서 지배되는 세상에 살고 있는지 질문한다.

아감벤은 일견 관리와 행정에 의한 통치가 주된 경향이며, 법에 의한 지배는 하락 국면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며, 우리는 질서 없는 (법 없는) 행정기관 혹은 관리국의 승리를 보고있다 말한다. 하지만 흥미로운 건, 그에 따르면 이 두 대립되는 축은 오늘 날 극단으로 치닫고 있고, 우리는 극대화된 무질서와 혼돈이 역시 극대화된 입법-법률행위와 공존하는걸 목도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시대는 일종의 양극화로 나아가고 있는 것인가? 아감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이해하기를 원한다. 시스템은 항상 이중적이다. 시스템은 항상 대립을 통해서 작동한다. 사적인/공적인, 집과 도시, 예외와 규칙, 지배와 통치 기타등등. 그러나 진정으로 중요한 문제는 이 대립이 이분법(di-chotomies)이 아니라 두개의 극성(di-polarities)을 가지고 있다는 점, 즉 실체적인 대립이 아닌, 긴장관계의 대립이라는 점에 있다. 극성은 존재하고, 각각의 필드에서 작동한다 그러나 우리는 갑자기 결정불가능한 지대를 조우하게 되기도 한다. 예외상태는 그러한 결정불가능한 지대 중 하나이다.”

아감벤은 자신의 4부작인 될 호모 사케르 프로젝트의 마지막은 역사적 고찰이 아닌,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forms of life"의 개념에 대한 작업이라 밝히다. 그가 a form-of-life것은, form 으로 부터 결코 분리 될 수 없는 삶, 그렇기에 그 안에서 결코 헐벗은 삶을 끄집어낼 수없는 삶이다. - 모든 이가 헐벗은 삶이 되고, 공적영역과 사적영역의 구분이 사라지는 예외 상태에서, 다시금  사적이라는(privacy) 개념이 중요해진다: ”What I call a form-of-life is a life that can never be separated from its form, a life in which it is never possible to separate something such as bare life. And here too the concept of privacy comes in to play."

라울프는 아마도 모든 철학자들은 저마다의 철학하는 삶에 있어서의 선과 옳음에 대한 생각-이상이 있을 듯한데, 당신은 어떠한가 질문한다. 아감벤은 철학자의 삶을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만든다는 생각은 아마도 오늘 날 푸코와 그의 자기 돌봄(the care of the self)이라는 생각에 유래한다고 말한다.

Pierre Hadot는 푸코의 the care of the self를 비판하면서 고대 철학자들에게 자기 돌봄(수양?)이란 삶을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종의 자기 버림(dispossession of the self)라 주장한다. 그런데, 사실 푸코에게 삶을 예술 작품으로 만드는 일이나, 자기 버림은 일치한다: 푸코의 급진적인 authorship에 대한 거부를 생각해보라. 이런 점에서 철학적 삶, 좋은 아름다운 삶이란 뭔가 다른 것인데, 당신의 삶이 하나의 예술이 될 때, 그것은 당신에 의해 만들어진게 아니다. 달리 말해, 당신의 삶과 당신 자신을 먼가 생각했던 것으로 느낄 때, 주체, 저자는 더 이상 거기에 없다. 삶을 구성한다는 건 푸코가 말한, 자기 자신으로 부터 일탈하는 것과 동일하다. 그리고 이게 바로 니체가 말하는 예술가 없는 예술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