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의 봉투는 우편함에 있던 다른 우편물들과 함께 배달되어 있었다.

 

그것은 봉투라는 단순한 단어가 아닌, 젠체하며 영어로 엔빌로프(envelope)’라고 해야 할 것 같은 이국적인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연보라색의 종이에는 펄의 광택이 있었고, 두껍고 단단한 종이로 만들어져서 고급스러웠다. 크기는 양형 1호로 업체의 인사장이나 초대장 등으로 사용되는 크기였다.

 

결혼식 청첩장인가?

 

아파트 공동 현관에 있는 우편함에 잔뜩 쌓여 있던 광고 우편물이나 전단지들을 꺼내 비우던 이마무라 가즈키는 이 봉투의 정체가 과연 무엇일까 궁금했다.

 

잠시 후 그녀는 양손에 우편물을 가득 든 채 여행 가방을 밀면서 로비를 가로질러 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맨 꼭대기 층인 8층의 버튼을 누른 후, 도착할 때까지 출장 간 사이에 쌓여 있던 우편물을 대충 확인해 보았다. 왜 이렇게 무겁나 했더니 백화점이나 통신 판매 업체의 카탈로그가 상당히 많았다.

 

집을 비운 사이에 우편함에 이런 것들로 가득 차 버리면 곤란한데. 그만 좀 보냈으면.

중원(中元) 이나 연말뿐만 아니라 절분(節分)은 물론이고 밸런타인데이에 할로윈까지, 1년 내내 이렇게 카탈로그가 오는 것은 가즈키가 우수 고객이기 때문이다.

 

논픽션 작가로 활동하게 되면서 그녀는 관련된 출판사와 동료 작가, 사진작가나 일러스트레이터, 취재 협조자에게 줄 선물은 꼭 챙겼다. 아무리 이름이 알려져 있어도 자신은 이 업계에서 음식의 향신료 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으며, 중요한 식재료는 그들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한 권의 책이 만들어지려면 여러 사람들의 협조가 필요하다.

 

중원을 지낸 지 얼마 안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10월 초순임에도 불구하고 카탈로그는 벌써 연말 선물을 안내하고 있었다.

 

정신없이 지나가는 계절에 한숨을 내쉬면서, 가즈키는 카탈로그 사이에 끼어 있는 봉투들을 후루룩 넘기며 확인했다. 신용 카드 회사, 출판사, 은행…….

 

문득, 손이 멈췄다. 아까 살짝 보였던 연보라색 봉투의 한쪽 면에는 꽃무늬가 양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받는 사람 이름은 붓이나 볼펜이 아닌 잉크와 펜으로 썼는지 유려한 맛이 느껴졌다. 글자색은 봉투보다 세 단계 정도 진한 보라색이었다.

 

받는 사람의 주소나 이름이 한자로 쓰여 있는데도 불구하고 어딘지 모르게 외국에서 온 편지 같은 느낌이었다. 누가 보낸 거지 하고 봉투를 뒤집어 보려고 한 순간, 손끝에 무언가가 닿았다. 그것은 봉랍(封蠟)이었다. 봉투를 접착제로 붙이고 봉랍을 녹여 떨어뜨린 다음, 그 위에 인새(印璽) 같은 것을 양각으로 찍은 것이었다.

 

이렇게 멋지게 장식되어 있는 봉투는 청첩장밖에 없겠지.

 

결혼과 인연이 없는 상태로 40대가 되어 버린 가즈키는 난감함에 고개를 저으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이윽고 현관문 앞에 도착한 그녀는 열쇠로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1주일 만이다. 그녀가 사는 곳은 세워진 지 10년 된 2DK의 아파트였다. 도심에서 대중교통으로 40분 정도 걸리며, 제일 가까운 역으로부터 도보로 13분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가즈키는 5년 전에 이 집을 샀다. 방의 배치나 채광이 특별히 좋다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당시 둘러봤던 집들 중에서 그나마 가장 적당한 곳이었다.

 

신발을 벗어 던지고 가방을 현관에 놓은 채 집 안으로 들어갔다. 갈증이 나서 들고 있던 우편물들을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고 냉장고를 열어 맥주 캔을 하나 꺼냈다.

 

이 시기의 홋카이도는 이미 추운 계절이었다. 북방 영토 문제에 관한 취재를 하느라 그곳에서 1주일 동안 머물렀던 가즈키는 오래된 민박집에서 매일 밤 난로를 켜고 추위에 떨었었다. 도저히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런 곳에서 맥주를 마시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 자리에 선 채로 캔에 입을 대고 꿀꺽꿀꺽 맥주를 마신 가즈키는 ~.” 하고 소리를 냈다. 이거 완전히 아저씨네, 하는 생각이 들면서 쓴웃음이 나왔다.

 

그녀는 두 번째 맥주 캔을 꺼내 들고 소파에 앉으면서, 더 귀찮아지기 전에 영수증을 정리해 둘까 하고 생각했다. 이번에는 취재비가 선금으로 50만 엔이 지급되었다. 취재에는 여비, 식비, 취재 대상에게 주는 사례비 등의 경비가 소요되지만 대체로 원고를 다 쓴 다음에 정산하면 된다. 가즈키가 이런 특별 대우를 받을 수 있게 된 것은 5년 전에 권위 있는 다케시타 요이치 논픽션 상을 수상했기 때문이었다.

 

논픽션이란 장르는 이 업계에서 결코 메이저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다케시타 요이치라는 이름은 일반인에게도 알려져 있기 때문에, 그 상의 이름을 명함에 박아 두면 취재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게 사실이었다.

 

이 상을 수상했던 책, 어둠 속에서 꿈틀거리는 돈은 영화로도 제작되어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강연회나 에세이 집필의 의뢰도 잇따랐고, 아주 가끔은 해설자로서 보도 프로그램 등에 나가기도 했다. 이와 같은 수상 경력으로 가즈키의 인생은 크게 바뀌게 되었다.

 

가즈키는 바쁜 삶 때문에 전부터 간신히 가지고 있었던 여자로서의 자존심을 지킬 새가 없어서, 새치 머리를 염색하는 것도 포기했고 화장도 별로 안 하게 되었다. 콘택트렌즈도 귀찮아서 두꺼운 안경을 끼고 지냈으며, 복장도 언제나 편한 티셔츠에 청바지, 그리고 운동화 차림이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키가 컸었고 중학생 때는 육상 선수도 했기 때문에 체격도 탄탄한 편이었다.

 

물론 전에는 남자를 사귄 적도 있었다. 하지만, 취재로 며칠이고 집을 비우거나 밤새 원고를 쓰고 낮에는 소파에 뻗어 있는 생활을 하다 보니 어느새 곁을 떠나 버리고 말았다. 남들처럼 결혼을 동경했던 시기도 있었지만 이제는 거의 포기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맥주를 마시며 테이블 위로 시선을 돌리던 가즈키의 시야에 우편물 더미 사이에 끼어 있는 연보라색 봉투가 들어왔다.

 

  

이렇게 청첩장 같은 것을 받을 때면, 아무리 포기하고 살았지만 마음이 조금은 씁쓸했다. 아직도 내게 여자의 부분이 남아 있기는 한 건가, 하는 생각이 든 가즈키는 자조적인 기분에 살짝 코웃음이 나왔다.

 

그래서인지, 어떤 청첩장이라도 뜯어서 열어 보면 악의가 느껴지고 부정적인 생각이 들었다.

 

이것 때문에 주말이나 공휴일은 물론, 연휴도 제대로 쉴 수 없잖아. 돈이 나가는 것도 그렇고……. 그녀에게 청첩장은 그 자체가 독이 포함된 것이었다.

 

두 번째 맥주를 다 마시고 세 번째로 마실 맥주를 냉장고에서 꺼낸 가즈키는 답답했던 청바지를 벗어 던지고 티셔츠 한 장만 걸친 채 테이블 앞에 앉았다. 집게손가락으로 봉투의 가장자리를 스윽 훑었다.

 

이번에 대체 누가 결혼을 한다는 거지? 출판사 사람인가? 아니면 다른 지인일까? 결혼식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하는 걸까?

 

행복을 모두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라고 하지만, 이제까지 참석해서 행복을 나누어 받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 결코 적지 않는 축의금에 남들에게는 전혀 재미없는 그들의 첫 만남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누군가의 주례사나 연설에 감동한 척하다가 여흥에 맞춰 억지웃음을 짜내고, 감회에 젖어 눈물 짓는 신부와 그 어머니가 웨딩드레스나 전통 혼례복을 입은 모습도 보지 못하고 돌아가신 그들의 할아버지 할머니를 아쉬워하는 게 흔한 레퍼토리라고 할 수 있지.

 

신세를 진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청첩장을 보낸다고 하지만, 정말 신세를 졌다고 생각한다면 부르지 않는 것이 돈도 시간도 허비하지 않게 해 주는 거잖아.

 

노처녀 히스테리로 인상을 쓰고 있던 가즈키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갑자기 천재지변이 일어나서 내가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면, 그때는 보란 듯이 호화스럽게, 행복한 듯 동네방네 자랑하며 결혼 피로연을 해야지, 라고.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인 가즈키는 한 모금 깊이 들이마셨다 천천히 내뱉었다. 테이블 위의 재떨이에는 오래된 담배꽁초가 소복이 쌓여 있었다. 가즈키는 개의치 않고 그 위에 담뱃재를 떨구었다.

 

그녀는 드디어 그 봉투를 우편물 더미에서 꺼내 눈앞에 들고 싸움이라도 걸 것처럼 노려보았다. 꽃 모양의 우표가 붙어 있는 것을 보니 더욱더 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하트가 그려진 우표보다 나으려나. 그런데 도대체 누가 보낸 거지?

 

자판을 치기 좋게 항상 짧게 깎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손톱 끝으로 봉투를 집고 딱지치기를 하듯이 힘 있게 뒤집었다. 그리고 발신인의 이름을 본 순간, 그녀는 갑자기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다가키 노리코

 

가즈키는 온몸이 얼어붙었다. 연보라색 봉랍에는 N의 이니셜이 찍혀 있었다.

아니야.

이건 말도 안 돼.

어떻게 노리코가…….

머리에서 핏기가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손이 차가워지면서 호흡이 가빠지고 얕아졌다.

산소가 옅어진 가즈키의 뇌리에 노리코의 얼굴이 떠올랐다.

분명히 제 손으로 죽였던 노리코의 얼굴이.

 

~ 2회에 계속 ~


*출간 전 연재는 총 10회까지 진행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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