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을 겹겹이 껴입고 있어도 몸이 으슬으슬 떨리는 건 나만 그런 건 아니겠지 싶은 겨울, 이제 곧 방학이다. 지금껏 대학을 다니면서 방학이라는 것을 세 번 겪었다. 그리고 그 세 번의 쉼표는 모두 흐리멍텅한 회색조를 이루었다. 느즈막이 일어나 늦게 잠드는 늘보의 생활. 이번만큼은 말끔하게 빛나는 쉼표를, 되도록이면 물음표에 이은 느낌표까지 만들어보자는 마음으로 겨울방학 계획을 세우려고 했는데, 생각나는 것이라고는 무슨 책을 읽을까 하는 것 뿐이다. 집구석에 처박혀 또 책만 읽는 건 아니겠지, 하는 마마몬의 불호령이 들리는 듯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조금 생각을 바꿔볼까 한다. 늘 그랬던 것처럼 책을 읽는 건 똑같지만,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책을 읽어볼 테다. 이태원에 가면 세계여행을 떠난 것처럼 여러 국적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것처럼, 책 역시 그 국적이 다양하니까 여기 나라 책 읽어보고 저기 나라 책 읽어보면 그게 바로 세계여행이 되지 않을까 싶은 뭐 그런, 집요정의 알량한 속셈이다.
먼저 국내여행부터 시작해야겠지.
얼마 전에 문득 정영문의 [목신의 어떤 오후]가 생각나서 다시 찾아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십대 소년이 어느 가정집에 강도를 들었는데, 집주인한테 배고프니까 피자를 시켜도 된다고 자기가 돈은 부담하겠다고, 덜덜 떨면서 화장실이 어디냐고 물어보는 장면이 떠오른다. 처음 읽는 정영문에 대한 기억은 낯설고도 슬픈, 그래서 가만히 껴안아주고 싶은 그런 느낌이다. 다시 그 느낌을 체험해보고 싶다.
그리고 이름만 들어보았지 제대로 읽어본 적 없는 작가들의 책을 몇 권 골랐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씨가 '훌륭한 작가는 모국어를 외국어처럼 쓴다'는 누군가의 말을 인용하며 추천한 책, 배수아의 [철수]와 감동과 칭찬이 자자해서 몇 번이나 손을 가져다댔다가 거두어들였던(왜 거두어들였는지 모르겠다) 황정은의 [百의 그림자], 그리고 저번 수업 시간에 참고 도서라며 사뒀다가 한 장도 읽지 않은 [이상 소설 전집]. 마지막으로 도서관에서 기웃거리며 빼든 책의 어느 부분을 읽고 감탄해서 관심을 가지게 된 김주영 작가의 [빈집].
- 김주영 작가의 어떤 책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대목은 이랬다. 사탕을 훔친 아이가 집에 가기 전에 훔친 사탕을 다 처리해야 되는데 어떻게 해야될지를 몰라서, 입안에 한 알 한 알 잔뜩 집어넣고 이빨이 녹아 없어질 지경에 이를 때까지 울면서 사탕을 우적우적 씹어먹는 장면. 귀엽고 또 애달파서 오래 기억에 남는 대목이다.
그 다음에는 아시아를 여행할 계획이다.
아시아에는 엄청나게 많은 나라가 있겠지만... 일단 잘 알려진 작가들부터 여행을 시작하기로 했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은 건 단 한 번 뿐이다)와 쑤퉁, 그리고 오르한 파묵을 만나볼 테다. 일본의 추리소설들 중 괜찮은 작품이 있다면 중간중간 경로를 이탈할 소지도 충분히 있다.
문득, 고등학생 때 도서관에 가면 항상 일본소설 코너 책장 앞에 서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태엽 감는 새]를 읽던 남자 아이가 떠오른다. 부리부리한 눈의 소유자였는데, 말하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쑤퉁의 [나, 제왕의 생애]는 내가 읽지도 않았으면서 어디선가 추천한 글을 보고 감동을 받아서, 읽은 척하고 다른 아이들에게 많이도 추천했던 작품이다. 오르한 파묵은 [하얀 성]을 읽은 뒤 꽤 오랜 시간 방치해두었던 작가이기에 다시 한 번 들춰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 꼽았다. 이번에 새로 출간된 파묵의 첫 작품이라는 소설은 쪽수만 장장 1000쪽을 넘어서 다음에, 다음에 시도해보기로 했다. 아참, 그리고 운 좋게 얻어 걸린 꽁돈으로 내 품에 안착하게 된 [소설과 소설가]도 휴게소 들르듯 잠시 다녀와보기로 한다.
이제 북태평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으로!
잘 알려졌음에도 읽지 않은 작품이 이렇게나 많을 줄이야. '인생은 짧고 읽을 책은 많다'는 문구가 와락 실감이 되는 순간이다. 이 문구를 어떻게 하면, 언제쯤에야 '인생은 짧았지만 읽은 책은 많다'로 바꿀 수 있을까.
필립 로스의 [울분]을 먼저 꼽았다. 퓰리처상을 받은 작가라는데, 얼마 전에야 그의 이름을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피츠제럴드. 무라카미 하루키의 어떤 소설에 [위대한 개츠비]를 몇 번 읽었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등급(?)을 매기는 대목이 있다고 들었는데, 다시 읽어보면 어떨지 궁금하다. 처음 이 소설을 읽었을 때는 무슨 소리인지 당최 몰랐다. 고등학생 때였고,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꽤 충격적으로 읽은 직후였다. 그런데 그 유명하고 명불허전이라는 [위대한 개츠비]는 그때의 내게는 와닿지 않았다. 지금 다시 읽으면 어떨까 매우 궁금하다. 그리고 단편집도 읽을 거다.
아메리카 여행이라고 미국만 들를 수는 없는 법. 콜롬비아에 들러 커피 내음도 살살 맡아보고 돌아다니다가 '이야기위해 살았다'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을 만나볼 예정이다. 수 없이 많은 이야기를 들은 책인데도 아직 읽지 않았다. 그리고 보르헤스의 [셰익스피어의 기억]을 읽고, 체 게바라와도 잠깐이지만 안면을 틀 생각이다.
다음 행선지는 유럽이다.
두서 없이 이곳저곳을 점찍어보았더니 다녀갈 곳이 너무도 많다. 먼저 와인의 고장이라는 프랑스부터 시작해서 르 클레지오의 [타오르는 마음]과 아멜리 노통브의 [아버지 죽이기]로 달큼한 향내를 맡아보고 싶다. 르 클레지오는 처음 만날 예정이라 마음이 두근두근, 조마조마하다. 아멜리양이야 이번이 벌써 스무 번째 만남이니 익숙하지만, 결코 긴장을 놓을 수 없는 그녀다. 그리고 체코에 들려 체코인 특유의 유머를 대표하는 밀란 쿤데라를 만나볼 예정이다. [느림]을 읽고 너무나 멋진 할아버지라고 생각하게 된 쿤데라씨, [농담]에서는 어떤 모습을 보여주실지 무척 궁금하다.
그 다음으로는 세계 여행을 한다면, 이라는 상상에서 한 번도 떠올리지 못했던 헝가리를 찾아가볼 것이다. 헝가리 태생 작가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어제]를 읽을 계획이다.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으로 워낙 유명하고, 몇 년 전에 독주 삼키듯이 그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이번에는 보다 짧은 책을 읽어보기로 했다. 이탈리아에서는 이탈리 칼비노를 만나보려고 한다. 마술적 리얼리즘이라고 했나, 환상성이라고 했나, 아무튼 이 작가의 작품이 독특한 빛깔을 발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번만큼은 결코 놓치지 않아야지.
그 외에도 독일과 러시아를 들러 굵직굵직한 작가들을 만나볼 생각이다. 열린책들에서 출간된 카프카 전집을 잠들기 전에 한 편씩 읽고(정신 건강에 좋을지는 모르겠지만), 러시아의 대문호들 - 도스또예프스끼와 푸쉬낀과의 뜨뜻미지근한 만남이 예정되어 있다. 뜨뜻할지 미지근할지는 순전히 내 태도에 달려있다. 그리고 잘 알려지지 않은 독일의 작가 크리스토프 하인의 [낯선 여인]을 끝까지 읽어보기로 했다. 전반부와 중반부가 너무나 마음에 들어서 끝까지 읽고 싶지 않았고, 그렇게 번번히 반납해버린 책. 그리고 핀란드(를 생각하면 늘 지상 낙원이 떠오르는 이유는 뭘까?)에서 [기발한 자살 여행]의 작가 아르토 파실린나와도 만나볼 것이다. 어떤 사람일까, 은근히 기대된다.
그리고 아프리카 대륙과 오세아니아 대륙이 남았는데, 아직 어디를 다녀와야 할지 결정을 못한 상황이다. 여행을 하다보면 충동적으로 가고 싶은 데가 생기겠거니, 하고 천천히 계획을 세우기로 한다. 지금까지 꼽은 여행지만 해도 숨이 벅차니까!
한 달, 두 달 뒤에 부디 세계일주를 완주했다는 소식을 내 손으로 직접 전하게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