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은 시시때때로 비곤 한다. 빈집이 되는 것이다. 그럴 때 나는 아무도 없는 거실 한복판에서 목청껏 노래를 불러보기도 하고, 아무도 안 들을 테니까 음치여도 상관 없어, TV를 혼자 보면서 박장대소를 하기도 하고, 냐하하하 짱웃겨, 어디에라도 가만히 앉아 아무 데나 조용히 응시하기도 한다, 정지해있는 사물은 빈집에서 마치 가족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게 가끔 우리 집은 빈집이 된다. 그러면 나는 혼자 남아 더 두꺼워지는 것 같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날개는 옆으로 더 길게 뻗을 수 있어도 날아오를 수 없을 만큼 구멍이 나있음을 발견하곤 한다. 빈집에서 나는 아름다운 사물을 처음 보는 신비로움에 젖어든다. 나라는 사람이 더 선명하고 맑은 색깔로 도화지 위에 그려지는 기분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다시 빈집이 채워지는 순간, 나는 일정한 파도에 다시 떠내려간다. 그리고 집이 가득 채워지는 순간 나는 다시 비어버리는 그런 느낌이 드는, 이건 참 이상한 불협화음 같다. 그래서 나는 집이 비는 걸 두려워하면서도 그 아스라함을 고대한다.

 

눈치 챘겠지만, 지금 우리 집은 비어있다. 엄연히 말해서 내가 있으니 빈집은 아니다. 아, 누가 들어왔다. 집이 엉망진창이야, 라며 들어오는 걸 보니 누군가를 데려온 모양이다. 제발 이곳에까지 침투해오지 않기를. 빈집에 누가 들어오면 갑작스레 짜증이 확 치솟는 때가 있다. 어떤 때는 누구라도 (도둑이든 길 잃은 고양이든 상관없다) 반갑게 여겨진다. 아무튼 이제 우리 집은 빈집이 아니게 되었다. 나는 빈 집, 이라고 쓰는 대신 빈집, 이라고 쓰기를 고집하고 싶다. 떨어져 있으면 왠지 더 외롭고 쓸쓸할 거 같아서. 그래서 나는 빈집, 이라고 쓰기로 했다.

 

며칠 전에 본 영화 하나가 생각난다. 사실은 그 영화를 생각하며 이 글을 시작하던 참이었다. 영화 이름은 말하지 말아야지. 남자는 빈집에 들어가 고장난 기계를 고쳐주고 음식을 만들어 먹고 샤워를 하고 잠을 잔다. 며칠을 묵은 뒤 다시 또 다른 빈집을 찾아 집으로 덕지덕지 둘러싸인 거리를 맴돈다. 여자는 빈집에 혼자 남겨져 있다가, 남자와 마주친다. 언제나 그곳은 빈집이었다. 빈집 숙박객은 남자 하나에서 두 사람으로 늘어난다. 이제 그들이 묵는 곳은 더 이상 빈집이 아니게 된다.

 

생각해보면 나는 오래도록 빈집이었던 것 같다. 나도 모르는 사이 누군가 다녀가기도 했는데, 그 종종걸음이나 조심스런 두드림 소리는 잘 듣지 못했다. 시끌벅적한 대저택의 무리들에게서 결코 기대할 수 없는 어떤 내밀함을 위해서는 집은 비어있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누군가 올 수 있고, 누구라도 올 수 있으니까. 지금도 그런 생각에는 크게 변함이 없다. 다만 이제는 빈집의 내부 풍경보다는 빈집보다 더 외로울지 모르는 굳게 닫힌 문에 대해서 신경을 많이 써주고 싶다. 아, 이건 너무 추상적인 거 같기도. 하지만 빈집 자체가 참말이지 추상적인 곳이다. 어떻게 집이 빌 수가 있나. 그곳에는 어떻게든 누구라도 무엇이라도 어디서라도 존재하고 소리내고 살고 있을 텐데. 그러니 결국 문을 열고 닫는 안팎의 마음, 혹은 기다란 손 몇 가닥 정도가 더 중요한 건지도 모른다. 초인종은 고장난 지 오래여도 문은 두드리면 소리가 나게 되어 있으니 말이다.

 

다시 집이 빈 것 같다. 마트에 갔나보다. 누구를 따라갔거나. 의미 없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면 아득해진다. 그것이 바로 지금의 나이거나 그 옆의 무엇이기 때문이다. 화살을 저 멀리 허공 위에다 쐈는데 그게 마치 날카로운 부메랑처럼 훅 꽂히는 기분. 빈집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크게 노래를 부르거나, 크게 웃거나, 가만히 앉아 무언가를 쳐다보는 것 말고도 더 많을 게 분명하다. 문을 열고 나가는 일도, 그 수 많은 가능성 중의 하나다. 문을 잠시 닫아둔 채 휴식을 취하는 것도. 빈집은 유폐된 공간이 아니라 언제라도 다시 채울 수 있고 언제라도 다시 빌 수 있는 공간이다. 그래서 나는 빈집을 사랑한다. 그 안의 나도 사랑해주어야 마땅하다고, 나는 이제 생각한다.



 
 
댈러웨이 2013-05-18 18:36   댓글달기 | URL
ㅋㅋ 나도 영화이름은 얘기하지 말아야지. 이제 그물 다 고친 건가요? 봄 다 갔어. ㅠ.ㅠ

구차달 2013-05-18 18:40   댓글달기 | URL
빈 집. 빈집. 빈집은 왠지 비어 있지 않은 느낌이에요.

아이리시스 2013-05-22 15:59   댓글달기 | URL
수다쟁이님 나와라, 오바.
안나오면 쳐들어간다, 오바.
또 언제올거냐, 오바.
 

소속. 나의 소속은 어디인지 요 근래 참 궁금하다. 사람들은 누구든지 벗어나려고 하면서도 되려 어딘가에 귀속되려는 본능을 지니고 있다. 어떤 방식으로든 소속이 되는 순간,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고 믿는 걸까. 이 거대한 세상 속에서 나라는 사람을 콕, 굵은 동그라미로나마 점을 찍기 위해서는 소속이라는 게 어쩔 수 없이 필요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학교에 다니고 직장에 다니고 동호회에 참가하며 친구들을 만나러 모임에 간다. 그 순간 나라는 사람은 학생이 되고 직장인이 되고 동호회인이 되며 친구 한 사람이 된다. 그리고 안도의 한숨이 자연스레 뒤따라 올 수 있게 된다. 너도 그렇게, 그 와중에 나도 그렇게, 그러니 세상의 굴러가는 바퀴 한 톱니조각엔 내가 유유히 앉아 있다. 그렇게 우리는 쳇바퀴 다람쥐가 되는 일에 몹시 질색하면서도, 똑같은 틀에 얼려지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결국에는 다람쥐처럼 달리고 얼음처럼 꽁꽁 얼려지기를 원한다. 이건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숙명일 것이다. 나는 이곳에 던져졌고, 이름표 하나 달지 않고 시작되었으니.

 

이상한 것은 그 두 가지 세계가 꼭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점이다. 나라는 독립적이고 온전한 존재는 따로 있고, 어떤 공간 속에 투입되는 나라는 존재는 그 완벽한 순수함과는 조금 다른 어떤 복사본이나 대체물로 기능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꿈과 현실이 분리되어 곧잘 설명되듯이 말이다. 흐트러짐 없이 죽 늘어진 대열 속에 있으면서도 나는 저 빈 공터를 향해 뜀박직을 하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달리기 시작함과 동시에 그러나 두려움에 다리가 축 늘어져 대열의 맨 뒤꽁무늬에서 하염없이 선두 무리를 바라보고 있다. 하늘은 자주빛이고 구름은 하늘색이다.

 

여러 공간 속에 나는 퍼져있다. 한때나마 과열될 정도로 순식간에 빠져든 곳도 있었다. 그런 곳이 이제는 추억이 되었다. 지금 속해 있는 공간에서 나는 찰싹 붙어있기를 거부한다. 그렇다고 붕 떠있기는 몹시 무섭다. 찰싹 붙어있다 금세 섞여들어 녹아버릴지도 모른다는 조바심, 공중에 떠 미미한 바람 한 점에도 금세 날아가버릴 수 있다는 불안감이 나를 땅 바닥에도 고공 하늘에도 자유롭게 있지 못하게 만든다. 줄타기 같은 몸짓. 줄타기 명수는 줄 위에만 앉아 있다간 관객들의 야유를 받을 것이오, 날아올라 줄 위에 착지하지 못한다면 그저 얄궂은 새 한 마리 밖에는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줄을 타다 하늘을 적시다, 두 갈래 길을 정신없이 오갈 수 밖에 없다.

 

이런 글을 여기에 남기는 것도 참 처량한 마음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니, 그렇다기보단 마치 빳빳한 휴지가 물에 흠씬 몸을 적시고 조심스레 다시 휴지통으로 들어가는 그런 몸짓 같다. 구태의연한 말이지만, 사람의 삶이란 자신의 존재를 어떻게든 그 안에서 증명해보이고자 고군분투하는 슬프고도 격정적인 선율 한 자락이 아닐까 싶다. 제발 음표를 모을 수 있기를. 삐뚤빼뚤해진 악보 위엔 폭발한 콩나물 대가리처럼 음표가 여기저기 피를 튀기듯 찍혀있다. 미미미도. 레레레시.

 

끝이 보이지 않는 연주를 하고 싶다.

 

 



 
 
hnine 2013-05-17 20:37   댓글달기 | URL
아름다운 글이네요.
'맴돈다'는 말에는 다시 돌아올 수 있음을 전제하고 있는 것 같아서 떠난다는 말만큼 쓸쓸하지 않아요.
미미미도 레레레시 솔솔솔 라라라라솔미미미도...

말없는수다쟁이 2013-05-18 15:23   URL
그러고 보니 정말 그렇네요. 다시 돌아올 수 있음을 전제하고 있다... hnine님, 오랜만이이에요 :)

역시 글에는 평소의 생각과 일상이 어쩔 수 없이 들어가나봐요.
심지어는 꾸며내거나 만들어낸 이야기도 그러니, 새삼 신기하단 생각이.
이제 빛나는 글을 좀 써보고 싶어요. 탁탁 튀기는 글도 써보고...

붉은 꽃이 아름답네요.

2013-05-17 22:22   댓글달기 |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18 09:36   댓글달기 |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13-05-18 18:54   댓글달기 | URL
수다쟁이님 오랜만이죠 ^^ 봄날에 반가워요. 우린 모두 서툴어도 멈출 수 없는 연주자들. ^^
 

아무 소일거리 없이 집에만 있은 지도 벌써 두 달 째다. 방학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쥔 세계챔피언은 우렁차게 링 밖으로 몸을 던지기보다는 사각의 조그만 링 안에서 아늑하고 내밀한 자기만의 방을 만들기를 택했다. 그의 이름은 타이슨도 알리도 아닌, 바로 집요정이다.

 

 

집에만 있으면서 집요정이 불가피하게 겪은 수난의 핵심은 바로 '그럴 듯하게 사는 삶'에서 빗겨난 삶의 형태였다. 방학을 막 시작할 무렵, 나는 책으로 세계일주를 하겠다는 포부를 선전했었다. 오늘은 이 책을 읽고 내일은 이 책을 읽고... 그런 식으로 지내면 하루하루가 행복을 넘어서 극도의 만족 그 자체일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집에서 책을 탁 펼치고 앉아 있을 때 내 마음은 급류를 타고 헤엄쳐온 전기뱀장어처럼 찌릿찌릿했다. 마치 하루하루가 밀려나가는 듯한 느낌.

 

처음에는 그 불편한 느낌의 원인을 사회적인 편견으로 치부했다. 놀고먹을 시간에 차라리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벌든지 도움이 될만한 체험을 하든지. 어른들은 그런 이야기를 곧잘 하니까. 개미와 베짱이 동화를 읽으며 개미는 성실한 노동자, 베짱이는 재능 있는 예술가로 여기기보단 그저 베짱이 녀석은 놀고먹기나 좋아하는 한량으로 인식하는 사회 시스템의 과열된 분위기 탓에 나의 달콤한 휴식을 나 스스로 편안히 즐기지 못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또 다시 다가올 파릇파릇한 시간의 코앞에서 나는 그간의 불편함이 바로 두려움이었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해야겠다.

 

두려움에는 여러 얼굴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번 방학은 지나갔다. 흔히 생각하기에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공포로 반응되며 회피라는 행동으로 명징하게 그 징후가 나타난다지만, 두려움의 또 다른 얼굴에는 무심함과 게으름이 숨어있다. 어떤 일에 극도로 무심한 사람은 그 일에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정말로 두려워하기 때문에 무심함을 가장하는 것일 수 있다. 또 게으름은 자연스러운 회피를 조장하여 나는 피하지 않았고 단지 그 일이 나를 지나쳤을 뿐이야, 라고 합리화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이렇게 두고 보면 결국 무심함과 게으름은 두려움의 친구들이자 그의 조력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몇 년 간(아주 길게 잡아서 생각해 보면 몇 년이라는 세월이 통째로 범주에 속한다) 나는 게으르고 무심했다. 스스로 이상주의자의 탈을 쓰고 게으름을 속물의식과의 대결이라고 자부하기도 했고, 남들이 아등바등하는 일을 두고 나는 정작 뛰어들기 두려워하면서도 짐짓 무심한 척 연기를 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런 나의 심리를 반증하는 아주 상징적이고도 유일한 소일거리는 바로 '책 읽기'였다. 여태껏 나의 운명이라고 여겼던 책 읽기는 따지고 보면 나의 게으름과 무심함을 합리화하는 데 아주 유용한 도구로 사용되기도 했다. 나는 책을 읽어, 독서를 한단 말이지. 저 멀리 떠 있는 별을 주머니에 숨기고 있다는 듯이 착각하고 있는 별잡이꾼의 알량한 자부심이라고나 할까.

 

두 달 간의 세계일주는 엉망이었다. 티켓팅은 아주 그럴싸하게 해두었지만 공항 앞에까지 세차게 나아갔던 발걸음은 비행기 탑승 시간에 어김없이 굳어버리기 일쑤였고, 내가 본 것이라고는 황망하게 멀어져만 가는 비행기의 뒤꽁무니에 불과했다. 겨울잠 자듯이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며 보낸 시간, 이라고 표현하면 나의 방학을 거의 완벽하게 묘사한 문장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둥둥 떠다니는 시간을 통틀어 내가 발견한 유일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나의 두려움이다.

 

지난 세월을 비관만 해서는 아무 짝에도 쓸모 없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무턱대고 앞으로는 이럴 것이다, 하는 뻔뻔한 샌님 같은 호기로운 선전도 무색하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새로운 시작을 열망한다. 그 시작을 너무나 과도하고 특출난 것으로 여기다가는 다시 고꾸라질 것이요, 아무렇지도 않게 흩뿌렸다간 그저 도돌이표의 연속 재생이 될 것이다. 두려움을 발견한 지금 이 시점에서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은 무엇일까 고민중이다.  일단은 두려움의 절친들, 무심함과 게으름과 절교하기로 했다. 오랜 습관이 한 번에 싹 달아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탈탈 털어내면 언젠가는 자취를 감추리라고 믿어봐야지.

 

 

글을 쓰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는데, 그래도 이런 글이나마 써서 다행스럽다.

그리고 본격적인 글도 곧 완성하고 싶다. 



 
 
소이진 2013-02-21 22:21   댓글달기 | URL
수다쟁이님의 글을 읽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는데, 좋군요. 좋아요.
저도 글을 쓰려고 노트를 펼때마다 이런 생각이 밀려와요. 혹 내가 공부 회피용으로 작가의 길을 걷겠다고 마음 먹은 것은 아닐까. 공부하는 게 싫어서, 수학 문제 붙들고 고민하는 것이 싫어서 쉬워 보이는 글의 길을 걷겠다고 다짐한 것은 아닐까. 이것도 사회적 시선의 하나의 결과물이겠지만 제가 써내는 한심한 글을 읽을 때마다 이 생각의 부피가 커져가네요.

수다쟁이님 좋은 밤 XD

2013-02-22 2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22 20: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22 20: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22 22: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22 00:36   댓글달기 |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22 2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22 01:00   댓글달기 |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22 20: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24 01: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아 2013-02-22 01:33   댓글달기 | URL
뭐에요? 말없는수다쟁이님???응???
이렇게 물어도 대답은 안 하시겠지만 격하게 반갑습니다.^^

말없는수다쟁이 2013-02-22 21:13   URL
나비님, 정말 반가워요!! :)

2013-02-22 08:55   댓글달기 |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22 21: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구차달 2013-02-22 13:28   댓글달기 | URL
무의미해 보였던 그 시간들도 결국 유의미의 다른 한 개 형식이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라는 문장을 쓰시는 날이 오시길. ㅋ 본격적인 글이라니 멋지십니다.

말없는수다쟁이 2013-02-22 21:35   URL
무의미해 보였던 그 시간들도 결국 유의미의 다른 한 개 형식이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아, 멋지네요. 꼭 그 날이 오기를!

하루 2013-02-23 17:16   댓글달기 | URL
말없는 수다쟁이님의 글을 정말 읽고 싶었다구요!!!!!

2013-02-23 22: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보슬비 2013-02-25 21:19   댓글달기 | URL
수다쟁이님이 수다스러우셨어야했는데, 조용해서 궁금했었어요.^^

사실 저도 주변 어른들에게 많이 들어요. 뭐 배우고 있냐고? 그럼 전 대답하죠. 꼭 뭘 배워야하냐고? ^^;;
가끔 주어진 시간에 가만이 있는것을 두려워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쳇바퀴 돌듯이 계속 뛰어야 마음이 놓이는...
그래서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보면 한마디씩하시지요.

마음을 놓다가도 가끔씩 그런분들을 보면 불안해지는것이 어쩔수는 없나봐요.^^;;

말없는수다쟁이 2013-02-26 22:12   URL
보슬비님, 오랜만이네요! 그저 가만히 있고 싶은 날에도 불안해지는 건 어쩔 수 없나봐요. 그래도.. 가끔은 쉬고 가끔은 달리고 그러면서 지내고 싶어요. 그네가 왔다갔다거리는 것처럼요~ :)
꼭 무엇을 배워야하냐고 되묻는 보슬비님의 답변, 멋지네요 ㅋ
 

옷을 겹겹이 껴입고 있어도 몸이 으슬으슬 떨리는 건 나만 그런 건 아니겠지 싶은 겨울, 이제 곧 방학이다. 지금껏 대학을 다니면서 방학이라는 것을 세 번 겪었다. 그리고 그 세 번의 쉼표는 모두 흐리멍텅한 회색조를 이루었다. 느즈막이 일어나 늦게 잠드는 늘보의 생활. 이번만큼은 말끔하게 빛나는 쉼표를, 되도록이면 물음표에 이은 느낌표까지 만들어보자는 마음으로 겨울방학 계획을 세우려고 했는데, 생각나는 것이라고는 무슨 책을 읽을까 하는 것 뿐이다. 집구석에 처박혀 또 책만 읽는 건 아니겠지, 하는 마마몬의 불호령이 들리는 듯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조금 생각을 바꿔볼까 한다. 늘 그랬던 것처럼 책을 읽는 건 똑같지만,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책을 읽어볼 테다. 이태원에 가면 세계여행을 떠난 것처럼 여러 국적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것처럼, 책 역시 그 국적이 다양하니까 여기 나라 책 읽어보고 저기 나라 책 읽어보면 그게 바로 세계여행이 되지 않을까 싶은 뭐 그런, 집요정의 알량한 속셈이다.

 

 

먼저 국내여행부터 시작해야겠지.

 

 

 

 

 

 

 

 

 

 

 

 

얼마 전에 문득 정영문의 [목신의 어떤 오후]가 생각나서 다시 찾아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십대 소년이 어느 가정집에 강도를 들었는데, 집주인한테 배고프니까 피자를 시켜도 된다고 자기가 돈은 부담하겠다고, 덜덜 떨면서 화장실이 어디냐고 물어보는 장면이 떠오른다. 처음 읽는 정영문에 대한 기억은 낯설고도 슬픈, 그래서 가만히 껴안아주고 싶은 그런 느낌이다. 다시 그 느낌을 체험해보고 싶다.

 

그리고 이름만 들어보았지 제대로 읽어본 적 없는 작가들의 책을 몇 권 골랐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씨가 '훌륭한 작가는 모국어를 외국어처럼 쓴다'는 누군가의 말을 인용하며 추천한 책, 배수아의 [철수]와 감동과 칭찬이 자자해서 몇 번이나 손을 가져다댔다가 거두어들였던(왜 거두어들였는지 모르겠다) 황정은의 [百의 그림자], 그리고 저번 수업 시간에 참고 도서라며 사뒀다가 한 장도 읽지 않은 [이상 소설 전집]. 마지막으로 도서관에서 기웃거리며 빼든 책의 어느 부분을 읽고 감탄해서 관심을 가지게 된 김주영 작가의 [빈집].

 

- 김주영 작가의 어떤 책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대목은 이랬다. 사탕을 훔친 아이가 집에 가기 전에 훔친 사탕을 다 처리해야 되는데 어떻게 해야될지를 몰라서, 입안에 한 알 한 알 잔뜩 집어넣고 이빨이 녹아 없어질 지경에 이를 때까지 울면서 사탕을 우적우적 씹어먹는 장면. 귀엽고 또 애달파서 오래 기억에 남는 대목이다.

 

 

 

그 다음에는 아시아를 여행할 계획이다.

 

 

 

 

 

 

 

 

 

 

 

아시아에는 엄청나게 많은 나라가 있겠지만... 일단 잘 알려진 작가들부터 여행을 시작하기로 했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은 건 단 한 번 뿐이다)와 쑤퉁, 그리고 오르한 파묵을 만나볼 테다. 일본의 추리소설들 중 괜찮은 작품이 있다면 중간중간 경로를 이탈할 소지도 충분히 있다.

 

문득, 고등학생 때 도서관에 가면 항상 일본소설 코너 책장 앞에 서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태엽 감는 새]를 읽던 남자 아이가 떠오른다. 부리부리한 눈의 소유자였는데, 말하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쑤퉁의 [나, 제왕의 생애]는 내가 읽지도 않았으면서 어디선가 추천한 글을 보고 감동을 받아서, 읽은 척하고 다른 아이들에게 많이도 추천했던 작품이다. 오르한 파묵은 [하얀 성]을 읽은 뒤 꽤 오랜 시간 방치해두었던 작가이기에 다시 한 번 들춰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 꼽았다. 이번에 새로 출간된 파묵의 첫 작품이라는 소설은 쪽수만 장장 1000쪽을 넘어서 다음에, 다음에 시도해보기로 했다. 아참, 그리고 운 좋게 얻어 걸린 꽁돈으로 내 품에 안착하게 된 [소설과 소설가]도 휴게소 들르듯 잠시 다녀와보기로 한다.

 

 

 

이제 북태평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으로!

 

 

 

 

 

 

 

 

 

 

 

 

 

잘 알려졌음에도 읽지 않은 작품이 이렇게나 많을 줄이야. '인생은 짧고 읽을 책은 많다'는 문구가 와락 실감이 되는 순간이다. 이 문구를 어떻게 하면, 언제쯤에야 '인생은 짧았지만 읽은 책은 많다'로 바꿀 수 있을까.

 

필립 로스의 [울분]을 먼저 꼽았다. 퓰리처상을 받은 작가라는데, 얼마 전에야 그의 이름을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피츠제럴드. 무라카미 하루키의 어떤 소설에 [위대한 개츠비]를 몇 번 읽었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등급(?)을 매기는 대목이 있다고 들었는데, 다시 읽어보면 어떨지 궁금하다. 처음 이 소설을 읽었을 때는 무슨 소리인지 당최 몰랐다. 고등학생 때였고,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꽤 충격적으로 읽은 직후였다. 그런데 그 유명하고 명불허전이라는 [위대한 개츠비]는 그때의 내게는 와닿지 않았다. 지금 다시 읽으면 어떨까 매우 궁금하다. 그리고 단편집도 읽을 거다.

 

아메리카 여행이라고 미국만 들를 수는 없는 법. 콜롬비아에 들러 커피 내음도 살살 맡아보고 돌아다니다가 '이야기위해 살았다'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을 만나볼 예정이다. 수 없이 많은 이야기를 들은 책인데도 아직 읽지 않았다. 그리고 보르헤스의 [셰익스피어의 기억]을 읽고, 체 게바라와도 잠깐이지만 안면을 틀 생각이다.

 

 

 

다음 행선지는 유럽이다.

 

 

 

 

 

 

 

 

 

 

 

 

 

 

 

 

 

 

 

두서 없이 이곳저곳을 점찍어보았더니 다녀갈 곳이 너무도 많다. 먼저 와인의 고장이라는 프랑스부터 시작해서 르 클레지오의 [타오르는 마음]과 아멜리 노통브의 [아버지 죽이기]로 달큼한 향내를 맡아보고 싶다. 르 클레지오는 처음 만날 예정이라 마음이 두근두근, 조마조마하다. 아멜리양이야 이번이 벌써 스무 번째 만남이니 익숙하지만, 결코 긴장을 놓을 수 없는 그녀다. 그리고 체코에 들려 체코인 특유의 유머를 대표하는 밀란 쿤데라를 만나볼 예정이다. [느림]을 읽고 너무나 멋진 할아버지라고 생각하게 된 쿤데라씨, [농담]에서는 어떤 모습을 보여주실지 무척 궁금하다.

 

그 다음으로는 세계 여행을 한다면, 이라는 상상에서 한 번도 떠올리지 못했던 헝가리를 찾아가볼 것이다. 헝가리 태생 작가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어제]를 읽을 계획이다.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으로 워낙 유명하고, 몇 년 전에 독주 삼키듯이 그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이번에는 보다 짧은 책을 읽어보기로 했다. 이탈리아에서는 이탈리 칼비노를 만나보려고 한다. 마술적 리얼리즘이라고 했나, 환상성이라고 했나, 아무튼 이 작가의 작품이 독특한 빛깔을 발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번만큼은 결코 놓치지 않아야지.

 

그 외에도 독일과 러시아를 들러 굵직굵직한 작가들을 만나볼 생각이다. 열린책들에서 출간된 카프카 전집을 잠들기 전에 한 편씩 읽고(정신 건강에 좋을지는 모르겠지만), 러시아의 대문호들 - 도스또예프스끼와 푸쉬낀과의 뜨뜻미지근한 만남이 예정되어 있다. 뜨뜻할지 미지근할지는 순전히 내 태도에 달려있다. 그리고 잘 알려지지 않은 독일의 작가 크리스토프 하인의 [낯선 여인]을 끝까지 읽어보기로 했다. 전반부와 중반부가 너무나 마음에 들어서 끝까지 읽고 싶지 않았고, 그렇게 번번히 반납해버린 책. 그리고 핀란드(를 생각하면 늘 지상 낙원이 떠오르는 이유는 뭘까?)에서 [기발한 자살 여행]의 작가 아르토 파실린나와도 만나볼 것이다. 어떤 사람일까, 은근히 기대된다.

 

 

 

그리고 아프리카 대륙과 오세아니아 대륙이 남았는데, 아직 어디를 다녀와야 할지 결정을 못한 상황이다. 여행을 하다보면 충동적으로 가고 싶은 데가 생기겠거니, 하고 천천히 계획을 세우기로 한다. 지금까지 꼽은 여행지만 해도 숨이 벅차니까!

 

한 달, 두 달 뒤에 부디 세계일주를 완주했다는 소식을 내 손으로 직접 전하게 되었으면 좋겠다.



 
 
소이진 2012-12-17 22:33   댓글달기 | URL
꺄! 수다쟁이님! 일단 반가움에 댓글 먼저 달고 글 읽으러 갈게요.

2012-12-17 22: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19 19: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19 22: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12-12-18 14:20   댓글달기 | URL
와우~ 말없는수다쟁이님이닷! 나도 댓글 달고, 이따 저녁에 오께요.

말없는수다쟁이 2012-12-19 19:10   URL
:)

프레이야 2012-12-18 20:01   댓글달기 | URL
책으로 세계일주 아주 좋은 걸요. 갖고 있는 게 제법 보여 반가워요. 소설과 소설가는 아무래도 얼른 사야겠어요. ㅎㅎ 오늘 라디오에서도 책소개 나왔어요. 우연한 만남의 겹침^^ 아주 오랜만이라 더 반가워요.

말없는수다쟁이 2012-12-19 19:12   URL
프레이야님도 눈독 들이고 계신 [소설과 소설가] 얼른 읽어봐야겠네요. 책으로 이어진다는 건 참 신기해요... 따뜻한 겨울보내세요! 저도 조만간 오랜만에 서재 들려봐야겠어요!

poptrash 2012-12-18 21:14   댓글달기 | URL
재미있는 책들이네요. 좋은 여행 되시길! ㅎㅎ

말없는수다쟁이 2012-12-19 19:11   URL
팝님, 오랜만이에요! 세계 여행 잘 다녀오겠습니다. 물론 거북이 여행이 될 것 같기는 하지만... ^^;;

단발머리 2012-12-19 08:47   댓글달기 | URL
우아, 말없는 수다쟁이님, 여행지는 다양하고, 작가들은 위대하고, 책들은 모양나고, 수다쟁이님은 너무 멋지네요. 즐거운 겨울 여행 되세요, 감기도 조심~~~~~

말없는수다쟁이 2012-12-19 19:11   URL
얼마 전에 도서관에서 샬롯 브론테의 [교수]라는 책을 봤는데, 읽다가 실망하면 어쩌나 싶어서 그냥 다음에 빌리기로 하고 돌아왔어요. 아메리카 여행에 제인 오스틴과 샬롯 브론테는 없네요. 제인 오스틴도 한 번 깜짝 방문해봐야겠네요! 이제 곧 연말이에요, 따뜻한 겨울 지내시길 :)

블루데이지 2012-12-19 10:36   댓글달기 | URL
아주 스마트한 세계여행이예요~~기분좋은여행되셔요!

말없는수다쟁이 2012-12-19 19:13   URL
네, 옆구리 시린 이번 겨울은 책보따리와 함께 나렵니다... :)
블루데이지님도 기분 좋은 크리스마스, 연말 보내시길!!

구차달 2012-12-28 17:23   댓글달기 | URL
이 책들을 다 읽는 것 보다 더 훌륭하고 섬세하며 가치있는 방학 계획이란 이 세계에 있을 수 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건투하기를 기원합니다.

2012-12-29 14:36   댓글달기 |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29 15:49   댓글달기 | URL
비밀 댓글입니다.

Jeanne_Hebuterne 2013-01-03 11:42   댓글달기 | URL
기마상의 뒷모습을 보며 바츨라프 광장에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몇 번이고 읽었습니다. 갈 때 마다, 바가지 씌우려는 상인들이 가득한 거리도, 황금소로도, 블타바 강도 늘 그대로였으나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었어요.제게 늘 프라하는 텅 빈 듯한 흥분이 있는 끓어오르는 도시.세계여행을 가거든 엽서를 잊으시면 안됩니다. 먼 훗날의 발판이 되거든요.

처키예쁜구두 2013-01-10 10:48   댓글달기 | URL
우와 이런 알뜰한 여행계획! 잘 세우셨네요
여기저기 돌면 따뜻한 곳도 가겠지요~
알찬 여행으로 올해 스타트 잘 하길 바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