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주교에게 죽음이 오다 열린책들 세계문학 145
윌라 캐더 지음, 윤명옥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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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라 캐더의 글쓰기 특징은 비교적 확연하다. 인물 내면과 주변에만 집착하지 않고 그들이 자리한 문화적, 자연적 배경을 폭넓게 드러내면서 역사화 내지 풍경화를 보는 듯한 착시마저 들게 한다. 읽는 이는 대개 주된 인물의 내면에 동참하여 함께 호흡하고 감정을 공유하기 마련인데 캐더의 작품에서는 그러하지 않다. 과도한 몰입과 숨 가쁜 질주는 여기서 찾아보기 어렵다. 마치 한 지방의 민담 혹은 전설을 듣는 듯한 차분하고 느긋한 진행과 개개의 미세한 묘사를 뛰어넘은 대범하고 관조적인 기술이 두드러진다.

 

캐더의 작품에서 배경을 삭제한다면 얼마나 삭막해질 것인가를 우리는 알고 있다. 전작의 네브라스카는 물론 이 작품의 뉴멕시코 지역은 단순한 배경을 떠나 인물의 성격과 작품의 전개, 그리고 주제의식과도 치밀하게 연계되어 있어 작품의 특징적 매력에 깊게 관여하고 있다.

 

하늘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구름들로 가득 차 있었고, 그 밑에 있는 사막은 단조롭고도 여전히 똑같아 보였다. 광대한 하늘은 바다보다 더 넓고 세상 그 어느 곳보다도 더 컸다. 평원이 그곳에, 사람의 발치 아래 있었지만 주변을 살펴보면 보이는 것은 찌르는 듯한 눈부신 파란 하늘과 움직이는 구름뿐이었다. 산들마저도 하늘 아래에서는 단지 개미 언덕으로 보였다. 다른 곳에서는 하늘이 세상의 지붕이었지만 이곳에서는 땅이 하늘의 바닥이었다. 누군가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살고 있을 때 그리워하는 풍경은 모든 것들 중에 단 하나, 사실 그 안에서 살고 있는 하나의 세상인 하늘, 하늘이었다! (P.259)

 

이번 소설에서 작가는 두 가톨릭 사제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실제 인물을 모델로 하고 있다지만 아마도 단순 모티브 역할 정도일 뿐 작품 내 라투르 주교와 바일랑 신부는 전적으로 작가의 펜끝에서 생명을 얻었을 것이다.

 

광활한 뉴멕시코 지역의 관구 관리와 포교를 위해 파견된 신부들 이야기. 소설이든 영화이든 선교사들을 다룬 작품은 제법 많다. 대개는 현지인의 냉대와 부정한 지방정권의 탄압에 굴하지 않는 인간적, 종교적 감동을 선사하기 위함이다. 개인적으로 현지 문화를 배척하고 획일적인 서구 중심적 가치관을 강요하는 선교 사업에 썩 동의하는 편이 아니기에 이 책을 읽을까말까 망설이기도 했다는 점을 언급한다.

 

두 사제는 이미 여러 곳에서 선교활동을 같이 하였으며 학창시절부터의 친구이므로 상대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라투르 주교는 차분하고 지적이며 온화한 반면 바일랑 신부는 감정과 행동의 진폭이 크다. 두 사람이 정반대 성향이라는 점은 선교활동에서 득으로 작용하는데, 바일랑 신부는 남다른 친화력으로 현지인들 사이에 쉽사리 융화되어 개척 사업에 커다란 성과를 보인다. 라투르 주교는 가톨릭 본부와의 관계 및 현지 가톨릭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정착될 수 있도록 관리하는데 주력한다.

 

두 인물의 사고와 행동방식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일화는 올리바레스 부인, 즉 도나 이사벨라 재판 건이다. 죽은 남편의 유산은 합법적으로 물려받기 위해 본인의 나이를 밝혀야 하는 입장에 처한 부인. 하지만 그녀는 유산을 포기할지언정 나이를 밝히기를 거듭 거부한다. 딱한 그녀를 돕고자 하는 심정을 동일하지만 바일랑 신부는 유산을 놓쳤을 때의 암담한 현실을 강조하며 그녀를 윽박지른다. 라투르 주교는 다르다.

 

라투르 신부가 엄격하게 주교 대리를 흘낏 보았다. 그만 두세요.그가 재빨리 말했다. 그는 요셉 신부가 놓아준 부인의 작은 손을 잡고 몸을 숙여 정중하게 손에 입을 맞추었다. 우리는 이 문제를 더 이상 강요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이 문제는 올리바레스 부인과 그분 자신의 양심에 맡겨 두도록 합시다.(P.215)

 

이렇게 말하다보면 꽤나 지루할 것 같지만 읽는 재미가 제법 쏠쏠한 것은 우선 이 둘을 그려내는 작가의 필치가 상당하다. 이국적인 뉴멕시코 지역의 자연환경과 인디언들, 멕시코인들의 문화와 관습이 주는 흥미로움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며, 작가가 이따금씩 삽입하는 현지인들의 전래담도 양념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이 한데 어우러지면서 전혀 이질적이지 않고 작품 본래의 전개에 이바지한다면 과장일까.

 

바일랑 신부의 은근슬쩍 술수에 넘어가 졸지에 노새 두 마리를 사제들에게 바치게 된 루혼 씨는 현지인들의 순진한 신앙과 인성의 한 본보기다. 노새를 잃게 된 걱정과 슬픔은 품지만 그것이 사제에 대한 원망과 분노로 이어지지 않으며 오히려 자신의 공여로 사제들이 선교활동을 더 잘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 자긍심을 품는 대목은 눈물겹기조차 하다.

 

발타차 신부에 대한 전설은 초기 가톨릭 사제들의 선교와 그네들이 현지인들에 대해 품은 종교적 인종적 우월감과 지배욕을 잘 보여준다. 가톨릭이 서구 유일의 지위에서 몰락하여 종교개혁의 된서리를 맞은 것은 결국 종교인들의 타락과 부패가 원인이었던 것처럼. 역사를 돌이켜보아도 신앙 자체가 문제시 된 경우는 별로 없다. 라투르 주교가 폐허가 된 수도원 자취에서 품었던 감상도 여기서 멀지는 않았으리라.

 

그는 초목 하나 없는 사막의 바위산 위에서 석기 시대에 있던 그 자신과 같은 종족, 그 자신의 시대에 대한 향수, 유럽인에 대한 그의 영광스러운 욕망과 꿈의 역사에 대한 향수를 느끼고 있었다. 세계 속에 존재하는 그 자신의 일부가 동틀 무렵의 하늘처럼 변화하는 모든 세기 동안 내내 그러고 있는 것 같았다...... (P.119-120)

 

성선설에 따르면 인간은 선하게 태어났지만 환경에 물들어 점차 악하게 된다. 성경의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도 비슷한 입장이다. 세상사가 대개 그러하다. 의도와 취지의 순수성에 힘입어 활동을 시작하였는데 어느 순간 이해가 개입하고 갈등이 발생하여 본래 진로에서 벗어나 엉뚱한 곳을 향해 달려가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마티네즈 신부의 경우도 그러하다. 그는 가톨릭 사제이지만 로마 가톨릭을 거부하고 독자적 세력화를 추구한다. 백번 양보해서 그럴 수도 있다. 새로운 종교 내지 분파는 이렇게 생기는 법이니까. 다만 마티네즈 신부는 종교적 변질과 함께 개인적 탐욕과 타락으로 이어졌기에 라투르 주교가 고민하였던 것이다.

 

조국과 수만 리 떨어진 낯선 이방의 외딴 곳. 주위에 유럽인이라고 눈을 씻고 찾아봐도 달랑 요셉 신부 하나뿐인데, 그나마도 근자엔 이웃 교구에서 선교활동을 벌이느라 얼굴을 못 본 지가 수개월도 넘었다. 겸허하면서 의연한 소신을 갖고 교구 관리에 헌신하지만 주교도 인간인 이상 고뇌와 번민에 무관하지 못하다. 그 점이 오히려 더욱 인간적이다.

 

그의 영혼은 불모지가 되어 있었다. 그는 그의 교구 사제들과 교구민들에게 마음으로부터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하는 일은 피상적인 것처럼 보여서 모래 위에 짓는 집 같았다. 그의 거대한 대주교는 아직도 이교도의 지방이었다. 인디언들은 공포와 어둠의 옛길을 여행하며 악의 징조와 옛날 미신의 그림자와 싸우고 있었다. 멕시코인들은 종교를 갖고 장난을 치는 아이들이었다. (P.236-237)

 

하지만 한 인간으로서 그는 오랜 친구가 조금도 주저 없이 자기를 떠나야 한다는 사실에 약간 마음이 아팠다. 그에게는 이것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그들의 삶이 여기서 헤어지고 말지도 모른다는, 그들이 결코 다시는 함께 일을 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마치 계시처럼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자기 집에서 그런 준비를 하느라 야단법석을 떠는 것이 그에게는 고통스러웠다. 그는 밖으로 나가 교구들을 돌아다니는 게 차라리 더 나았다. (P.281)

 

젊은 주교는 세월의 흐름에 따라 늙은 대주교가 되어 은퇴하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의 여생도 오래 남지 않았음을 스스로 의식한다. 선교사가 된 이후 고국보다는 타향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추억을 지닌 그가 뉴멕시코로 귀향을 선택함은 자못 당연하다. 그곳은 친구도 추억도 있는 진정한 고향이므로.

 

그곳에는 부드러우면서도 야생적이고 자유로운 어떤 것이 있었다. 베개 위에서 귀에 대고 살며시 속삭이며 마음을 가벼이 해주고 슬그머니 열쇠를 돌려 빗장을 빼내고 감금된 정신을 바람 속으로, 파란색의 금빛 대기 속으로, 아침 속으로, 아침 속으로 풀어 놓아 주는 그 어떤 것이! (P.307)

 

반평생을 뉴멕시코 사제로 바친 라투르 대주교의 삶은 시종일관 올곧다. 삶은 감동적일지언정 소설적 형상화로서는 단조롭고 지루할 수도 있는 우려가 있지만, 작가의 다양한 노력에 힘입어 대단히 다채롭고 풍성한 문학적 향유를 누릴 수 있다. 가톨릭 사제의 사고와 삶, 원주민들의 기이하고 이채로운 토속적 신앙과 문화상이 대비를 이루는 가운데 이미 언급했다시피 뉴멕시코 지방의 독특한 자연환경과 결부되어 폭과 깊이가 한층 심화되었다.

 

무엇보다 두 사제의 문화적 다원성에 대한 관용이 인상적이다. 유럽 선교사들이 세계 각지에서 문화적 갈등과 충돌을 일으키는 주된 원인은 문화적 오만성과 배타주의라는 것을 감안하면 특히 주교의 문화상대주의적 사고는 한층 두드러진다. 참다운 신앙과 순수한 자연의 원리는 같은 곳을 지향하는 게 아닐까.

 

표제 <대주교에게 죽음이 오다>만을 놓고 볼 때 언뜻 죽음과는 무관하게 영생과 부귀를 누릴 줄 알았던 대주교도 죽게 된다는 식으로 오해하기 십상이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오기 마련인데 굳이 대주교로 한정지을 필요가 없을 테니 말이다. 한 사람의 일생은 죽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올바로 평가받는다. 면할 수 없는 죽음이지만 기꺼이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는 삶과 세속에 미련이 남아 필사적으로 발버둥치는 삶. 대주교는 분명 전자의 삶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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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7-02-14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상 읽고 싶다고 생각해오던 책이었는데
리뷰로나마 만나게 되어 반갑네요.

멋진 리뷰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