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크 청춘 3부작
김혜나 지음 / 민음사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작가의 전작과 여러모로 대비되면서 유사한 맥락을 지닌 작품이다. 표제 정크는 쓰레기라는 의미. 표준적 시각에서 볼 때 작가 김혜나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사회의 쓰레기로 분류되어야 마땅하다. 쓰레기에 대응하는 손쉬운 방식은 우선 싹 쓸어버린 후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묻거나 치워버린다. 시각적으로도 심미적으로도 깔끔하고 상쾌하다. 쓰레기의 존재를 일체 거부한다. 반면 작가의 생각은 다른 듯하다. 생활에서와 마찬가지로 쓰레기의 발생은 불가피하다. 사람과 사회가 존속하는 한 쓰레기의 완전 배제는 불가능하므로 차라리 쓰레기를 인정하고 본질이 무엇인지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다.

 

엄마와 아버지 모두 나 때문에 인생을 망쳤다는 생각이 확고해 보였다. 나에게는 늘, 무언가를 망쳐 버리는 힘이 있었다. 처음부터 나는 아무 필요도, 쓸모도 없이 인생을 망쳐 버리기만 하는 쓰레기 같은 새끼로 태어났으니까 말이다. (P.221)

 

전작의 이름 없는 지방야간대학의 여대생은 이제 성재라는 번듯한 이름의 젊은 남성으로 대치되었다. 전작에서 가족 관계의 부재는 여전하다. 성재의 어머니는 첩이고, 성재의 아버지는 성재를 글자그대로 결연하게 절대적으로 외면한다. 노래방 도우미로 일하는 성재의 어머니와 성재는 단순한 동거인 이외에 아무런 관계도 아니다. 그래도 성재는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하기 위해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등 적극적인 행동 면모를 보인다. 전작에서 음주와 피어싱, 그리고 섹스가 작품을 이끌어가는 동인이었다면 여기서는 물뽕과 화장술, 그리고 다른 유형의 섹스가 동일한 역할을 맡는다.

 

작가는 사회적 일탈 내지 성적 소수자의 현상에 관심을 지닌 듯하다. 전작에서 여주인공과 노래방 남성도우미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더니 여기서는 성재와 성재의 애인 민수 형이 작품 전체를 구성하는 골격을 형성한다. 그렇다, 남성 동성애 관계. 책을 읽다 보면 막연히 상상만 했던 그들의 구체적인 역할과 성행위, 관계망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어 의도치 않은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성재의 민수 형에 대한 감정과 바램은 대상이 동성이란 점을 제외하면 이성에 대한 감정 못지않게 진지하고 열렬하다. 일찍부터 이성보다는 동성에 사랑과 성욕을 느끼는 사람들. 그들을 비난하기는 쉬운 일이지만, 인류 역사에서 동성애의 역사가 상당히 오래되었음을 염두에 두면 자연현상은 다수의 정상 가운데 소수의 비정상 현상을 언제나 병치시키고 있음을 알게 된다. 따라서 이 소설은 동성애의 말초적 호기심 자극을 넘어서 인간 본질에 연관된 질문 제기다.

 

성재는 철저한 비주류다. 탄생의 비밀도, 가족 관계도 그러하며, 그가 좋아하고 하고 싶어 하는 일도 그러하다. 어디 그뿐이랴, 굳이 이성을 거부하고 동성에서만 욕정을 느낀다. 그가 세상에 당당하게 드러낼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는 자신의 표현 그대로 쓰레기 같은 존재다. 그가 이따금씩 약물을 흡입하는 이유 또한 친구 형민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나를 잊어야만, 겨우 존재할 수 있었다. 쓰레기 같은 인생길 위에서 쓰레기처럼 살아가고 있는 거나, 쓰레기 같은 길바닥을 애써 외면한 채 화려하고 번듯하게 살아가는 거나 다 마찬가지였다. 잘났거나 못났거나, 이러나저러나, 어차피 우리 모두가 다 쓰레기인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P.112)

 

성재가 꿈꾸고 바라는 것은 언뜻 대단찮은 일이다. 독립을 할 수 있을만한 적당한 일자리를 구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고자 하는 것. 젊은 남성에게 메이크업 아티스트의 자리는커녕 길거리 화장품가게의 아르바이트 점원에 불과하다. 사랑하는 남자는 결혼한 사람이었다. 아이까지 두고 있다. 어디에도 그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존재하지 않는다. 구질구질한 현상을 깨뜨리려는 시도는 헛된 실패만을 반복한다.

 

어디를 가도 다 마찬가지이고, 어디에 있어도, 무엇을 해도, 현실은 절대로 끊이지 않고 이어지게 마련이었다. 아무것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달라지는 것도, 나아지는 것도 없었다. (P.77)

 

문득 성재와 민수의 관계가 궁금하다. 성재의 감정만큼 민수도 절실하게 성재를 그리워하는 모습은 작중에서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헤어지자고 한 것도 다시 만나자고 한 것도 성재이다. 민수는 사회적 활동을 위해서 직업도, 가정도 정상적으로 유지한다. 성재가 없어도 별로 아쉬워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아니, 어쩌면 사회적 가면을 뒤집어써야 하므로 민수 자신도 성재 못지않게 고통스러울지도 모르겠다. 성재와는 달리 민수는 포기하기엔 너무나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성재와 민수의 차이점일 수도. 여기에서 두 사람의 감정은 조금씩 엇갈리게 된다.

 

구질구질하고 외롭고 두려운 현실로부터 떠나고 벗어나고 달아나고 싶었지만, 사랑과 구직의 뼈저린 실패를 겪은 성재는 현실로부터 안녕을 고할 수 있는 유일한 절대적 방법을 택한다. 죽음을 쉽게 결심한 사람은 없겠지만 죽음을 정면으로 마주 대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사는 것보다 어려운 게 죽는 일이다. 안 그렇다면 무수한 사람들이 손쉬운 길을 택하였을 것이므로. 죽음을 목전에서 경험하면 인생관이 뒤바뀐다고들 한다. 죽음 앞에서 하찮치않은 것이 무엇이겠는가.

 

민수 형은, 어디에 있던 사람일까. 내가 사랑하던 그는 오로지 내 안에만 존재했던 환상이었다......그래, 그랬구나. 이제 진짜, 이별하는 거구나. 내 사랑과,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내 안의 당신과, 헤어지는 거구나. 눈물이 조금 흘렀지만, 아프고 괴롭기보다는 편하고 담담한 느낌이 들었다. (P.237)

 

작품의 마지막은 화장장이 배경이다. 성재는 사고로 죽은 아버지를 찾아간다. 단 한 번도 들어 보지 않았고 소리 내지 않았던 말, 아빠, 아버지를 읊조리며 소설은 끝을 맺는다. 작가는 상실한 부성과 성재 삶의 왜곡을 바로잡으려고 시도한다. 그의 가슴 깊숙이 드리워진 원초적 슬픔과 그리움은 아버지의 부재와 불인정으로 기인한다. 여기서 성재와 아버지를 화해시킨다. 건전한 작별, 그래야 성재의 앞날은 정크에서 벗어나 정상으로 복귀할 수 있는 토대가 구축되므로. 일말 아쉽기도 하다. 작가가 다소 서두르는 감이 들었다. 성재와 민수 형의 관계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버지와의 관계마저 조급하게 화해시키려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되었다. 오래전 아버지의 몸속에 있었고 탄생에 빚을 졌다는 사실이 이십년 간 남남으로 살아왔던 그들 부자지간이 일거에 회복되지는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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