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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하 : 세기말의 보헤미안 - 새롭게 만나는 아르누보의 정수 
장우진 지음 / 미술문화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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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고향에서 떠나온 지 겨우 몇 개월. 그는 직장도 잃고 돈도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별로 걱정은 되지 않았다. 


"나는 매우 흥분되는 한 순간에 놓여 있었다. 당황스러운 것도 두려운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호기심이 일었다. 이 모든 일 뒤에 어떤 일이 닥쳐올 것인가? 모든 일이 다시 좋아지거나 혹은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나는 계속 그림을 그릴 것이다."(중략)




알폰스 마리아 무하 Alphonse Maria Mucha.


이 책의 저자는 그를 <누구나 보았지만 누구도 제대로 알지 못했던 화가><무척이나 낯설고 생소한 이름의 화가>라고 소개합니다. 그 문장을 처음 봤을 때는 고개를 갸웃했습니다. 그의 그림을 좋아하는 저의 경우, "아르누보"하면 자동으로 "알폰스 무하"를 연상할 정도로 그의 그림이 매우 널리 알려져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를 무척 좋아한다고 열성적으로 말하던 제가 정작 아르누보 양식에 대한 이해도 전무하고, 알폰스 마리아 무하라는 사람에 대해서도 아는 게 거의 없었다는 것을, 이 책을 모두 읽고 난 다음에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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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하의 이름이 생소한 사람이라도 그의 그림을 보면 "아, 이 그림!"하고 알아보거나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적어도 "그 양식이 아주 낯설지는 않다"고 느낄 것입니다. 그의 작품은 그 자체로, 혹은 응용되어 굉장히 다양한 분야에서 러브콜을 받아왔기 때문입니다. 그가 살았던 시대에도 그랬고, 1세기 가까이 지난 현재에도 변함없이 그의 작품은 다양한 분야에서 재생되어 수많은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있습니다.


가장 널리 알려진 그의 작품들은 가히 전성기라고 불러도 좋을 파리시절의 그림들입니다. 그가 유명해지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배우 사라 베르나르의 포스터가 그의 전성기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19세기의 가장 유명한 배우로 평가되는 사라 베르나르는 당시 이른바 국민 배우와 다름 없었고, 그런 그녀와 전속 계약을 맺었다는 것은 그의 인생 역시 탄탄대로였다는 뜻이 됩니다. 그는 포스터 뿐만 아니라 보석 디자인, 광고, 건축, 의상 등 많은 "상품"을 생산해냈고, 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마찬가지로 성공을 거뒀습니다. 그리고 조국으로 돌아가서는 필생의 역작을 완성해내기도 했습니다. 


...위와 같은 단편적 소개로 봤을 때 그는 참 굴곡 없는 인생을 산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전성기 시절 작품이 단 한 점의 캔버스가 아닌 인쇄였다는 점은 희소가치를 떨어뜨립니다. 아마도 그래서 그는 <아르누보의 별>이라는 화려한 수식어에도 불구하고 그리 알려지지 않았는가 싶습니다. 뭔가 회자될 만한 드라마가 부족하니까요. 하긴 저도 이 책 이전에 무하에 관련된 책을 두어권 봤습니다만, 그의 아름다운 그림에 혼이 쑥 빠졌다는 점을 빼면 그다지 인상 깊게 남은 에피소드가 없었습니다. 좀 특별하게 기억되는 거라곤 그가 제작한 사라 베르나르의 첫 포스터가 당시 다른 석판화들의 일반적 양식에 비하자면 비상식적으로 컸다는 점 하나 뿐이었을 정도니까요. 그나마도 사라 베르나르의 '간택'이 아니었다면 의미없는 무모한 도전으로 그쳤을 작품. 그래서 그의 성공은 사라 베르나르가 준 행운이라는 인식이 강했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런 점에서 이 책의 저자는 무하를 <누구도 제대로 알지 못했던 화가>라고 명명했던 것입니다. 그런 식의 이해는 무하를 절반도 알지 못한 것이라는 일침이었고, 실제로도 그러했습니다. 무하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고 그의 인생 전체를 들여다본 저자의 책은 저에게도 마찬가지로 무하에 대한 깊은 존경과 애정을 갖게 했습니다. 그래서 무하를 처음 접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무하를 단순히 아르누보의 별로만 알고 있던 저 같은 사람에게 이 책을 적극 추천합니다. 의외로 너무나 편협하게 저평가되고 있는 무하의 전생애를 그리고 있는 이 책은, 단순히 무하 한 사람의 인생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살았던 시대까지 조명해 그를 진정으로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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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예술은 상업과 동떨어져야만 진정한 것이라고 보는 시선이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전성기에 인쇄를 통해 여러 점을 "생산"해낼 수 있는 석판화를 주로 했던 무하의 작품은 진정한 예술이 아니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또한 예술은 박물관과 같은 엄숙하고 고상한 곳에서 감상해야 한다는 시선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는 생활 속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무하의 대중성을 폄하했을 것입니다. 또 회화와 디자인을 분리하여 생각하는 이들에게 무하는 그저 유행을 선도한 장식 디자이너 정도로만 생각되었을 것입니다. 그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사라 베르나르의 후광 덕분이라고 그 명성을 깎아내리며.


하지만 일견 행운인 듯 보이는 그 모든 일련의 일들은 사실 무하 스스로의 성실함과 재능, 그리고 배려가 빚어낸 결실이었습니다. 모두가 쉬는 크리스마스 연휴에 친구 대신 인쇄소의 일을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그 인쇄소에서 새해 첫날 붙어야 하는 포스터를 제작할 디자이너가 없으니 급히 도와달라는 갑작스런 주문에 응하지 않았더라면, 극장에 출입할 변변한 복장을 갖추지도 못한 무하가 사라 베르나르의 연극을 보지 않고 대충 상상만으로 작업을 했더라면, 연극에서 보았던 사라 베르나르의 신비롭고 숭고한 느낌을 살리기 위해 당시 일반적인 석판화 양식에서 크게 벗어나는 디자인과 크기의 포스터를 제작하지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아르누보의 별 무하는 존재하지 않았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무하는 모두 휴가를 떠난 크리스마스 연휴에 친구를 대신하여 일을 하러 갔고, 촉박하고 갑작스런 작품 의뢰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제대로 완성하기 위해 급히 연미복을 빌려 입고 연극을 감상하러 갔으며, 그 당시 선정성이 난무하던 포스터의 유행에 따르지 않고 온전히 사라 베르나르가 연극에서 표현하고자 했던 바에 집중해 포스터를 완성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라 베르나르는 무하와 당장 전속을 맺고 싶을 만큼 감명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 어디에도 사라 베르나르의 일방적인 후광은 없습니다. 무하는 사라에게, 사라는 무하에게─ 두 사람은 훌륭한 파트너이자 사업동료였습니다.


이후에도 그는 필생의 역작을 완성하는데 필요한 후원자 크레인을 만나 자신의 소명을 이루는데 성공하는데, 이와 같이 어찌보면 시기적절하게 찾아온 듯한 그 모든 것들은 단순한 우연이나 행운이 아닙니다. 그의 신념과 성실함이 만들어낸 필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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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식 패널, 책의 표지며 삽화, 엽서, 가구와 식기, 광고, 보석, 달력 등... 세기말 파리는 무하의 그림으로 가득했습니다. 이토록이나 놀라운 유행은 단순히 예쁜 그림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무하에게 어떤 점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지 감성을 캐치하는 마케터적 안목이 빼어났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사람들은 그러한 무하에게 마음껏 사로잡혔습니다. 물론 어쩌면 당시의 누군가는 무하의 그림으로 점령된 파리를 지겨워했을 지도 모릅니다. 무하 또한 살인적인 주문량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스타일을 실은 드로잉북을 제작하는 등 교육도 게을리 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그와 유사한 스타일이 아닌 무하 그 자체의 스타일이었습니다. 당시 그 누구도 무하를 능가하는 기량을 보일 수 있는 자는 없었습니다. 사람 좋은 무하는 어마어마한 주문량을 거절하지도 못했지만, 그 작품들 중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한 것이 없었고 그런 바쁜 와중에도 새로운 도전을 했으며,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발전과 철학에도 집중했습니다. 


다시 되짚어봐도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엄청난 성공과 명성을 누렸으면서도 무하는 단 한순간도 나태해지지 않았고 그 부를 누리기 보다는 친구들에게 나누어주었으며, 이러한 대가에게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요란한 스캔들 역시─현재까지는─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또한 그는 작품에 골몰하느라 주변을 방치하는 고독한 예술가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가족에게 충실했으며, 그의 자녀들이 사후 아버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노력을 한 것을 보면 무하가 아버지와 화가로서 가족들에게 충분히 존경받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아틀리에가 사교의 장이 될 만큼 다양한 사람들을 열린 마음으로 만나고, 또 그만큼 다양한 사상을 받아들였으며 여러가지 분야에서 자신의 재능을 시험하고─또 그것이 대부분 성공적이었고─, 어떤 고난에서도 늘 긍정적이었으며 인생의 목표는 변함없이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던 알폰스 무하. 파리에서는 파리에 어울리는, 미국에서는 미국에 어울리는, 그리고 조국에서는 조국에 어울리는, 이른바 상대를 생각하고 배려하는 그림을 그렸고 언제나 성실한─심지어 그는 신혼여행 중에도 부인과 함께 앞으로의 행복을 기원하며 그림을 그렸습니다!─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화가. 하지만 그의 진정 위대한 업적은 전성기를 누렸던 파리가 아니라 조국 체코에서의 활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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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렇게 믿는다. 모든 국민의 발전이 성공리에 끝나는 것은 그것이 국민 자신의 근원으로부터 유기적으로 계속 성장했을 때 뿐이다. 또 이 계속성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역사적인 과거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는 안된다." 


- 20년에 걸친 필생의 작업 <슬라브 서사시> 완성 후, 알폰스 마리아 무하


민족의 역사를 그려내면서 무하가 꿈꾸었던 일은 모든 슬라브 민족이 현재 겪고 있는 고통과 억압에서 벗어나 이상적인 화합을 이루는 것이었다. 그것은 당시 팽배해 가던 범게르만주의의 폭력성에 대한 대항이었고 민족의 독립을 고취하는 선창가였다.(중략)게슈타포가 첫 번째로 심문한 인물 중에는 무하도 포함되어 있었다. 무하는 당시 나치가 가장 눈에 거슬려하는 애국 인사 중 한 명이었다. 지난해 앓았던 폐렴과 나치의 심문은 이미 고령의 무하에게 죽음을 불러들였다.(중략)세기말 한 시대의 양식을 선도하고 뜨거운 애국심과 인류애를 가슴에 품었던 한 거장의 죽음에 사람들은 깊은 애도의 눈물을 흘렸다. 그의 장례에는 서슬 퍼런 나치의 감시와 위협에도 많은 인파가 모였다. 부슬부슬 내리는 빗속에서 사람들은 체코를 사랑한 한 거장에게 안녕을 고하였다.


<무하 세기말의 보헤미안(저자 장우진/미술문화 출판사)> 중 발췌




한 세기의 양식을 선도했고 단순히 감상하는 예술이 아닌 생활 속에 스며들었으며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이면서 전세계에서 사랑을 받은 거장, 알폰스 무하. 그리고 마침내 사랑하는 자신의 조국과 그 민족의 화합과 독립을 위해 자신의 재능을 모두 쏟아부은 위대한 거장. 그는 무엇보다 조국을 사랑한 화가였으며, 어떤 화려한 시류 속에서도 언제나 자신이 체코인임을 잊지 않았습니다. 예컨대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의 전시에 관련된 수많은 주문을 받던 중, 자신의 조국의 역사와 관련된 일은 결코 가벼이 넘기지 않고 민족의 자긍심을 심는 방향으로 디자인을 했습니다. 또한 다른 민족에게도 그들 각자의 조국을 사랑하고, 모방이 아닌 민족성을 갖춘 미술을 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가르침을 스스로도 실행하고 완성한 사람이 바로 알폰스 무하입니다. 


모두가 파리에서의 성공을 보고 무하를 그저 성공한 예술가의 한 명으로 쉬이 판단하고 끝내기 일쑤지만, 무하가 완성하고자 했던 화가로서의 정체성은 조국을 위한 봉사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조국에서는 성공한 이방인이었고, 젊은이들에게는 한물간 상징주의 화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흔들리지 않는 신념과 의지로 조국과 슬라브인에 대한 봉사에 남은 생을 바치기로 결심하였고, 그렇게 완성한 것이 20여년에 걸쳐─1차 세계대전을 겪으며─완성한 <슬라브 서사시>, 소수 민족의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당시 팽창해 가던 범게르만주의에 대항하는 범슬라브주의의 이상을 담은 역사화는 무하의 바람대로 조국에 기증되었습니다.


사실 파리에서의 성공 이외의 무하의 이야기와 작품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확실히 겉보기에 체코에서의 작품들은 파리에서 그린 그림들에 비해 화려함이 덜하고 민족적 채색이 짙습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주목해야 할 부분이 바로 조국에서 그가 이루어낸 업적─업적이라고 표현해도 손색이 없다고 생각합니다─들입니다. 그는 단순히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내는 화가가 아니라, 민족성을 고취시켜주는 애국 인사였으며 전쟁의 참혹함을 알리는 평화주의자였습니다. 낙천적 성격과 흔들리지 않는 강인함, 눈부신 재능과 놀라울 정도의 성실함, 안주하지 않는 발전과 노력, 뛰어난 포용력과 박애, 그리고 애국심과 평화적 인류애까지... 이 모든 성품을 한 몸에 품고 있었던 알폰스 무하. 이토록 훌륭한 위인이 지금까지 조명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그리고, 지금이라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어서 무척이나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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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불호를 떠나 그의 작품은 보는 순간 아름답다는 감탄사를 자아냅니다. 더욱 굉장한 것은 그 모든 것이 오롯이 한 사람이 이루어낸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엄청난 자료조사를 통한 디자인과 타이포그래피는 마치 컴퓨터 그래픽으로 한 것마냥 깔끔하고, 건축/가구/의상/보석/스테인드글라스/조각 등 다양한 분야를 섭렵한 그의 재능은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자신의 스타일을 유지하면서도 각 나라에 걸맞는 느낌을 살린 것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토록이나 예술적 재능이 뛰어난 화가가 상업적과 대중적인 면에서도 큰 사랑을 받는 일도 흔치 않은 일이고, 그렇게 타국에서 성공을 했음에도 단 한순간도 조국을 잊지 않고 종국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그때까지 쌓아온 모든 것을 조국을 위해 헌신한 애국자라는 것 또한 존경할 만한 일입니다. 


책을 읽는 내내 무하라는 위인에게 탄복하고, 감명을 받았습니다. 살면서 수많은 위인들에게 크나큰 감명을 받아왔지만, 그 인생 자체를 닮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존경심이 들었던 건 저에겐 이 사람이 처음었습니다. 만일 무하가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다면 어떤 예술로 만인의 가슴에 스며들고 또 민족적 자긍심을 심어줬을지를 생각하면, 한 개인으로서나 나라의 구성원으로서나 우두커니 무능하게 주저앉은 채 하릴없이 공상만 하고 있는 저 자신을 반성하게 됩니다. 지금 느끼는 감동과 자기반성이 퇴색되지 않도록 이 책을 항상 손에 닿는 곳에 두고 거듭 반복해 그의 그림을 보고 그의 인생을 읽으면서 조금이라도 본받게끔 노력하고 싶습니다. 이토록 훌륭한 위인의 이야기를 들려준 저자 장우진님과 이 책을 출판해준 미술문화, 그리고 이 책을 볼 수 있게 선정해준 해준 알라딘에게 큰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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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디자인 산책 
김지원 지음 / 나무수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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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터를 바른 듯 혀에서 굴러가는 미국식 영어와는 달리 다소 단단한 발음, 한때 대영제국을 이루고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까지 일컬어졌던 초강대국, 왕실이 현존하고 전통을 고수하는 신사의 나라, 영국.


이것이 제가 영국이란 나라에 대해 갖고 있던 팩트이며, 동시에'한 때 번영을 누렸다는 건 현재는 과거의 영광을 되짚는 고루한 나라라는 뜻'이라는 편견을 갖게 하는 기준이었습니다. 영국이 자랑스레 여기는 '전통과 매너'를 섣불리 '고리타분하고 경직된' 것으로 치환하게 만든 그 편견이 제 안에서는 은연 중에 꽤 오랫동안 자리를 잡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러한 영국의 수도 '런던'과 참신한 발상의 대명사(네, 디자인에 대해서도 은근한 편견이 있었음을 인정합니다)인 '디자인'이 조합된 이 책의 제목만으로 참 특이하다고 생각한 것을 보면 말입니다.




디자인이란 무엇인가. 사전적인 의미가 아닌 그 단어 자체에서 사람들은 대개 흔치 않은/새로운/놀라운 무언가를 기대합니다. 평범하기보다는 돋보이길 바라고 똑같아 보이기보다는 남달라보이기를 기대하며 디자인을 선별합니다. 하지만 런던의 디자인은 사람들이 쉽게 간과하는 진실을 일차적으로 중시합니다. 디자인은 보고 감탄하는 것에 그칠 게 아니라 곁에 두고 사용하는 것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하지만 흔히들 잊어버리는 그 진실. 런던의 디자인은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과 자신이 존재하는 사회─ 즉 환경을 한 순간도 잊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런던의 디자인은 그들과 유기적으로 한 몸이 되어 사람과 사회를 유지하는 한 축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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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제게 있어 영국에 대한 팩트이자 편견이었던 '오랜 전통'에 관련된 이야기부터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케케묵은 옛날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 자체가 역사의 산 증인이며 현재까지 융화되어 지속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단지 맷집과 기술만으로 옹고집 노인처럼 악착같이 살아남은 게 아니라, 함께 하는 사람과 시간, 그리고 환경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생활의 일부가 되고, 파도의 격랑에 휩쓸려 처지지 않기 위해 기울이는 끊임없는 노력과 보다 먼 미래까지 바라보는 현명한 안목, 그리하여 그것을 소유하는 이들에게 자부심마저 갖게 하는 힘. 그렇게 사용하는 이와 사회를 생각한 정신은 나아가 다양함을 아우르는 배려와 환경까지 품에 안은 디자인을 낳았습니다. 사람과 환경과 흘러가는 역사를 기억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정신. 그것이 바로 런던의 디자인이 품고 있는 혼입니다.


낡은 것을 낡다고 괄시하지 않고 현재와 어우르게 하는 디자인. 당장의 수익성을 위해 온갖 최신식 장난감에게 자리를 내어주기보다는 모든 이들이 한결같이 사랑하는 테디베어를 위해 언제나 가장 넓고 좋은 홀의 자리를 지켜주는, 유럽에서 가장 큰 장난감 가게. 가격을 높이기 위한 방책이나 시간이 지나면 퇴색될 한시적 유행으로서의 디자인을 쫓지 않고 타임머신처럼 컬렉션의 소장가치를 머금는 디자인을 고수하는 펭귄 북스. 환경을 생각하라고 가르치거나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함께 하자고 말하는─예를 들면 "젖소에게 먹이를 주세요"라는 캐치프레이즈로 사람들의 호응을 사 트레이드 마크까지 획득하기에 이르른 젖소무늬 재활용수거함 '카우빈'이나 도시형 텃밭 가꾸기 프로젝트 '메타볼리시티'와 같은 것─환경 캠페인. 생활과 동떨어진 전시용 디자인이 아닌 생활 속에서 누리는 디자인을 만끽하는─"눈으로만 감상하세요"가 아니라 "우리 가구에 앉으세요"라고 말하는 가구 전시─디자인 페스티벌 등등...


결론적으로 이 책은 제가 영국과 디자인에 대해 가지고 있던 무지한 편견을 산산히 흩어뜨려주었습니다. 이 책에서 보여주는 런던의 디자인은 결코 고루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남한테 보이기 위해 숨가쁘게 몰아치는, 당장 겉보기만 화려한' 서울의 디자인이 반드시 배웠으면 싶을 만큼 인간적이고 따뜻하며 일상생활에 스며드는 배려의 감성을 런던의 디자인은 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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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말하는 런던의 디자인은 평소 저 자신이 꿈꿔왔지만, 비현실적이라고 냉소적으로 생각해왔던 것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책 전반에서 펼쳐지는 에피소드를 볼 때마다 눈물 나도록 부럽고, 먼 나라의 환상처럼 손에 잡히지 않을 신비로만 느껴졌습니다. 한적한 시골이 아닌 정신없이 돌아가는 것이 마땅할 한 나라의 수도가 이토록이나 여유롭고 친환경적일 수 있다니! 이 책을 보는 내내 그 따스하고 친밀한 감성에 사로잡혀 상상 속에서나 존재할 것 같은 곳이 실제로 존재하는 런던에 대한 부러움과 시기가 교차했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런던에 대한 시기 어린 질투와 동경만을 심어준 채 끝맺지 않습니다. 이 책의 가치는 단순히 그러한 런던 디자인의 면모를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정신을 알려주었다는 점에 있습니다. 오래도록 정성껏 품은 알이 비로소 부화하듯, 저자의 의도는 맺음말인 <서울의 길 위에서>에서 그 빛을 발합니다.


이 책은 저자가 런던에 한참 흥취해있을 때 쓴 것이 아닙니다. 책의 절반은 런던이 아닌 서울에서 썼으며, 집필하는 내내 런던을 그리워했다고 밝힙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저자는 런던과는 다른 활기로 가득찬 서울의 일상 또한 만끽했습니다. 그렇게 정신적/육체적으로 런던과 서울을 오가면서 저자는 머나먼 이국인 런던 뿐 런던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서울의 유쾌한 일상에 흠뻑 젖어들었음을 고백합니다. 한국을 떠나보지 않았다면 느끼지 못했을지 모를 아주 사소한 일상, 오히려 너무 가까웠기에 미처 몰랐던 서울의 매력을. 


이 책이 소중한 이유는 바로 그 한 마디 때문입니다. 만일 저자의 맺음말이 아니었다면 저는 아마도 런던을 맹목적으로 부러워하고 또 그 반작용으로 서울을 맹목적으로 무시하는 오류를 범하게 되었을 지도 모르니까요. 한국을 떠나게 된다면 아무리 이상적인 도시라고 해도 그곳이 타국인 이상 한국이 그리울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삶과 디자인이 있다고 해도 한국적 정신이 배제된다면 한국인인 저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겠죠. 제가 부럽다 여긴 것은 런던의 디자인이 아니라 전통과 사람과 환경을 함께 생각한 바로 그 정신이니까요. 저자는 그 점을 혼동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싶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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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소비는 필요에 의해 탄생됩니다. 어떤 것도 이유 없이는 존재하지 않으며, 필요로 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사라지고 맙니다. 런던의 디자인 정신이 부럽고 탐이 났다면 그런 디자인을 필요로 하고 또 요구해야 합니다. 다른 곳이 아닌, 바로 내가 살고 있는 이 곳에서. 그런 디자인이 나올 수 있게 끝없이 응원하고 지속될 수 있게끔 항상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언젠가는 우리의 디자인도 백년 이백년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나의 아이와 그 아이의 아이들까지 일상 속에서 함께 공유할 수 있는─굳이 박물관이나 한옥마을을 찾아가야 하는 게 아닌자연스러운 삶의 일부가 되겠지요. 유행에 민감하고 탁월한 센스와 다이내믹한 변화라는 장점을 가지고 있는 한국의 디자인에 전통과 일상과 환경을 중시하는 런던의 정신이 덧입혀진다면 그 이상 근사한 것은 없을 거라는 생각마저 듭니다. 우리 것을 유지한 상태에서 앞으로 필요한 것, 추구해야 할 것을 알게 해주고 나아가 소망하게 해준 이 책이 참 고맙습니다. 



 
 
 
<예술/대중문화>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알라딘 신간평가단 10기로서 쓰는 마지막 기대 신간입니다. 굉장히 길었던 것도 같고, 너무 짧은 것도 같고... 만감이 교차하네요. 활동 기간 중 선정되었던 책들을 다시 되돌아보며, 그간 읽었던 책과는 조금씩 다른 관점에서 접근하기, 라는 기준으로 책을 선정해봤습니다. 



하나. 음악의 탄생│크리스티안 레만(지은이) 김희상(옮긴이)│마고북스│18,000원


어느 나라에서나 아주아주 먼 과거로 올라가면 마치 노래와 같은 음률로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특별히 노래를 따로 만들고 시를 지을 필요 없이, 일상 속 대화 자체가 운율을 지닌 노래였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딱딱해진 언어는 음악과 결별하였고, 음악은 따로 찾아 듣거나 특별한 시간과 장소에서나 부르는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음량 좋은 기기를 사서 감상하고, 잘 부르는 이들만이 당당하게 부를 수 있게 된 현실. 음악적 재능이 특출하지 못한 평범한 현대인은 혼자 낮게 허밍하는 것 외에는 부끄러움에 소리 높여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삭막한 일인지! 음악은 사람간의 유대감과 결속력을 높여주며, 엄청난 분노를 깎아주고 사랑을 북돋워줍니다. 단지 가수의 노래를 수동적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소리내어 부르고, 다 함께 부를 때 노래가 가진 힘과 파장은 더욱 커집니다. 한때 미디어에서 대중에게 감동을 주었던 합창 프로그램─ 노래를 잘해서가 아니라 그저 한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한 마음으로 노래를 부를 때 부르는 이도 듣는 이도 감동을 받게 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콘서트나 노래자랑 무대에서도 사람들은 단순히 듣기 좋은 노래보다 함께 부를 수 있는 노래를 더 많이 사랑하고 기억합니다. 그것은 음악과 함께 했던 태초의 기억을 몸은 아직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지금은 일상에서 분리된 음악을 다시 자연스럽게 몸에 배이게 하기 위해서는 음악과 함께 했던 처음으로 돌아가 오랜 시간 속에 퇴색된 기억을 되살리는 것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과 음악이 하나였던 기억을 되찾아주는 이 책이 좋은 길잡이가 되어줄 듯 합니다.



둘. 나를 세우는 옛 그림│손태호│아트북스│18,000원


색채가 강렬하고 구도가 꽉 짜인 서양화와 달리 동양화는 은은한 색과 시원스러운 구도가 일견 화려한 맛은 덜하지만 한없이 들여보다보게 되면서 마음 또한 편해지곤 합니다. 일상은 물론이고 인생과 철학까지 아름다운 시와 곁들여 마음을 다스렸던 우리 조상들의 옛 그림. 잔잔하게 스며들어 삶의 지침이 되어줄 듯한 조용한 명상이 우리의 옛 그림에는 담겨있는 듯 합니다. 하지만 서양식 구도와 감상에 지나치게 익숙해진 나머지 동양화 특유의 그림맛을 제대로 음미하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서양화는 역사와 인물은 물론이고 수많은 관점에서 들여다보는 시도가 숱한데 왜 정작 우리 그림에 대한 관심은 이리도 부족했던가 반성이 듭니다. 이렇게 말하는 저도 동양화는 물론이요 우리의 옛 그림에 대한 소양이 턱없이 부족하여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 책의 발견이 무척이나 고맙고 반갑습니다. 삶을 채우며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으로써 옛그림을 감상하는 '옛 그림 수신론'의 가르침을 꼭 한 번 받고 싶습니다.



셋. 근대회화의 혁명│게오르크 슈미트(지은이) 김윤수(옮긴이)│창비(창작과비평사)│16,000원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라파엘로 같은 이들의 작품은 누가 봐도 대단하다고 절로 고개를 끄덕입니다. 반면, 현대미술은 때때로 보는 이로 하여금 난색을 표하게 합니다. 발상과 기술과 시간과 노동이 (비전문가가 겉으로 보기에)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에 공감을 하기 위해서는 납득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현대미술은 호불호가 꽤 심하게 갈리는 편입니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19세기 중엽부터 유럽의 회화는 일반대중이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방향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즉, 저자의 말에 따르자면 그 이전의 명화들은 '대중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기에 인정을 받았으나 그 후는 그렇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사실 여기에는 회화의 역사를 대중이 얼마나 인식하고 있느냐의 문제도 포함될 것입니다. 시대가 흐름에 따라 사람들의 의식 또한 변화해왔음은 물론이고, 물질적으로도 수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자아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고, 자유로워졌으며, 그림을 대체할 수단이 생겼습니다. 그러한 변화의 물꼬가 집중되어 이전과는 다른 변화를 갖게 된 것이 근대회화- 그리고 지금으로 이어지는 모던아트인 셈이죠. 즉, 현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변화점이 시작된 근대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서두에서 밝힌 바와 같이 저 역시 현대미술의 난해함 때문에 접근하지 못하는 부류인지라, 그 뿌리가 된 근대회화를 가장 잘 이해시켜주고 또한 스스로 그림을 즐길 능력까지 심어준다는 추천을 받은 이 책이 솔깃해집니다.



넷. 무서운 그림으로 인간을 읽다│나카노 교코(지은이) 이연식(옮긴이)│이봄│14,000원


10기 활동을 하면서 명화에 관련된 책을 세 권 읽었습니다. 물론 수많은 명화를 제대로 이해하고자 한다면 훨씬 많은 수의 책을 접해도 부족하겠지만, 연달아 읽은 세 권의 책이 모두 명화에 대한 새로운 감상법을 제시해준 덕분에 지금도 뭔가 색다른 관점으로 접근을 시도한 책을 보면 어쩔 수 없이 호기심이 동합니다. 이 책 역시 그러한 호기심이 마음을 이끈 경우입니다. 사진처럼 정교한 그림을 그렸지만, 그것을 창조해내는 이가 사람이었기에 감정이 실릴 수 밖에 없는 법. 서양화는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시대의 자화상을 담고 있기에 수많은 진실을 그 안에 머금고 있습니다. 저자는 그 안에서도 7가지 '공포'를 선별했습니다. 하지만 더 마음에 드는 것은 단순히 특이한 흥밋거리를 늘어놓고 끝내는 것이 아닌, 마지막장 '구원'을 통해 독자들을 하나의 메시지로 이끄는 구성입니다. 무엇보다, 지식없이 감성만으로 명화를 접했을 때는 기술에 감탄할 수는 있어도 그 속의 진실을 캐치하기엔 부족하다는 저자의 서문이 뼈 아프게 와닿았습니다. 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감성만으로 대하는 것이 올바른 접근법이라고 생각해왔던 저한테는 정말 가시같은 말이었습니다. 이제 슬슬 감성 뿐 아니라 지식을 곁들여 보는 명화가 얼마나 다채롭고 풍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지 깨달아가는 터이니, 이 책이라면 그런 제게 또 하나의 새로운 길을 밝혀줄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다섯. 다케시의 낙서 입문│기타노 다케시(지은이) 이연식(옮긴이)│세미콜론│15,000원


으음 미안합니다, 기타노 다케시씨를 잘 알지 못하는 지라 처음 이 제목을 접했을 땐 일본 화가가 쓴 책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냥 지나치려고 했는데 멈춰서길 잘했군요. 이 책이 마음에 꽂혔던 것은 저자의 서문 중 다음 문장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그림을 그리기 전에 이미지가 떠오르는 쪽인데, 손이 그걸 못 따라간다. 사람 얼굴이나 손가락을 잘 못 그리니까, 이걸 어떻게 어물어물 넘겨 볼까 궁리한다. 왼손과 오른손을 거꾸로 그려서 아차 한 적도 있는데, 그래도 모양은 재미있었다. 이런 식으로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게 재미있다고나 할까. 때로 내가 봐도 어처구니 없을 정도다. 지금 내가 그리는 그림은, 아이들이 피아노를 배우는 과정에 비유하자면 아직 '바이엘'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소나티네' 근처까지 갈 수 있으려나? 내 몸과 마음을 휘둘러서 그림을 그리는 일이 어떤 식으로 진화해 갈지, 나 스스로도 궁금하달까?" 이 얼마나 명쾌한지! 사람들은 연필을 쥐기도 전부터 명작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립니다. 새하얀 백지를 눈 앞에 두고 그것이 저절로 황금빛의 찬란한 것으로 둔갑되길 갈망합니다. 어설프게 손대면 망쳐버릴까 두려워하면서. 그래서 '시작조차' 하지 못하는 겁니다. 기타노 다케시의 경우처럼 그냥 마음이 내켜서, 닥치는 대로 그리다보니, 그래서 재미를 느끼다보니 여기까지 올 수 있다는 경우를 간과하기 때문에.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얼마나 해낼 수 있느냐>가 아니라 <그것을 하는 동안 행복하느냐>라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게임을 시작할 때 아무런 아이템도 없는 레벨1에서 차근차근 퀘스트를 수행하며 고렙까지 올라가듯이, 사먹는 게 지겨워 대충 시작한 자취밥이 어느샌가 그럴 듯한 가정식 수준으로 발달하듯, 또는 예뻐지고 싶어서 한 개 두 개 모으던 화장품들이 전문가 수준으로 갖춰지듯이 말이죠. 행복하면 오래 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러다보면 장인이 되는 것이요, 그렇지 않더라도 스스로는 흡족해할 수 있는 준전문가가 되는 것이죠. 세상 모든 것이 그렇듯 그림 역시 대단한 취미가 아닌 그저 소소하게 일상 속에서 즐기며 자기치유 수단으로 가까이 두었으면 하고 언제나 바라고 있는 입장에서, 기타노 다케시씨의 이 책이 바로 사람들에게 좋은 롤모델이 되어주지 않을까 싶습니다.






알라딘 신간 평가단 10기로 활동하면서, 알라딘에서 전해주는 소식─선정된 책 소개, 그 책을 손에 받는 순간─이 매달 큰 행복이었습니다. 읽고 싶은 책을 고르고, 새 책을 선물 받고, 그것을 읽고, 감상을 쓰고, 책장에 꽂기까지 매순간 설레었습니다. 제가 골랐던 책이 선정되었을 때는 당연히 뛸 듯이 좋았지만 기대하지 않았던 책들이 주었던 기쁨이 의외로 더 컸던, 그래서 정말 뿌듯한 기간이었습니다^///^♥ 

좋은 기회를 주셨던 알라딘에 감사드리며, 다음번에 기회가 된다면 또 인연을 맺었으면 하고 소망해봅니다>w< 아직은 조금 이르지만, 기분 좋은 봄날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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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상처를 말하다 -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았던 예술가의 뒷모습 
심상용 지음 / 시공아트(시공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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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藝術 : art : the products of human creativity) :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창조하는 일에 목적을 두고 작품을 제작하는 모든 인간 활동과 그 산물을 통틀어 이르는 말,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창조하는 일에 목적을 두고 활동하다.>

<아름답다 : 즐거움과 기쁨을 줄 만큼 예쁘고 곱다, 감탄을 느끼게 하거나 감동을 줄 만큼 훌륭하고 갸륵하다.>


우리는 예술과 아름다움이라는 단어를 지나치게 편중시켜 제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신의 피조물에 불과한 것 같았던 인간이 창조해내는 모든 것, 그 모든 것이 아름다운 기적이고 예술이며, 또한 감동임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예술은 예술가만이 그것을 할 수 있다고 특권을 부여받은 활동이 아닙니다. 그 일을 해 낸 사람을 예술가라고 명명하는 것이죠. 즉, 말하자면 예술은 어떤 자격을 갖춘 사람만이 시도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순서가 뒤바뀐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람들은 '예술'과 '예술가'라는 단어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뭔가 평범하지 않은, 세계가 다른. 천재와 사이코를 한꺼번에 그 안에 응집시키며 정상적인 사회 범주에서─그 경도가 적든 크든─분리시키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 기준이 모호한 분리로 인해 얼마나 많은 예술가들이 빛과 어둠으로 사방이 둘러싸인 벽에 몇 번이고 사정없이 내동댕이쳐지는지는 정작 관심이 없습니다. 예술품과 그것을 만들어낸 예술가의 혼을 들여다보기보다는 그것이 자신을 우아하게 치장해내는 장식품으로서의 효용가치가 있는지에 집중합니다.


대중은 예술가에게 기구한 삶을 바랍니다. 뭔가 굴곡이 많아야 저런 남다른 작품을 빚어낼 수 있다고 종용합니다. 그것은 마치 자신이 저런 예술품을 빚어내지 못하는 건 평탄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라는 변명을 내세운 질투 같습니다. 그리하여 더더욱 예술가의 삶을 외롭고 비참해지도록 내몰고, 그러한 삶을 살다 간 예술가를 발굴해 그의 사후에 아프도록 조명을 내리쬐며 이것이 진정한 예술이라고 칭송합니다. 아직 살아있는 예술가들에게 인정받고 싶다면 이런 삶을 살아야 한다는 암묵적인 강요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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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상처를 말하다>는 바로 그러한─대중이 화려한 조명을 비추며  칭송하는─예술가의 그림자를 봐야 한다고 말합니다. 예술가와 공명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대중이 던져댄 찬양과 비난의 양날의 화살로 인해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은 검붉은 피를 소리 없이 흘리고 있는 그 고통의 참된 이면을 봐야 한다고.


로뎅의 연인으로만 알려지다가 이제서야 그 불행한 인생사를 알라게 된 카미유 클로델, 세속적 삶에 타협하기 보다는 철저한 약자로서 고통의 길을 선택한 빈센트 반 고흐, 전쟁으로 아이를 잃은 슬픔을 담아냈던 케테 콜비츠, 자신의 삶을 확인하기 위해 그림을 그렸던 프리다 칼로, 시대와 유행의 맹목적 흐름에 벗어났다는 이유로 버림받은 권진규,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했던 영혼 백남준, 주어진 삶의 행복을 강제로 박탈당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았지만 앞으로 나아가자는 강인한 메시지를 보여주었던 이성자, 두려웠기에 완벽을 추구해야 했던 마크 로스코, 초라한 자신을 철저히 지운 채 허구의 인물로 각인시키고 사라진 앤디 워홀, 자신을 인형처럼 휘두르는 세상에 난도질당한 채 스러져간 장미셸 바스키아... 이 책에 실린 예술가들은 모두 안타깝고 기구한 삶을 살았고, 그 고통스러움을 예술로 쏟아낸 이들입니다. 그들의 작품은 현재 엄청난 가격에 호가되고 모두가 앞다투어 탐을 내고 있지만, 그들 중 이 예술품이 탄생된 진실된 배경─예술가의 삶과 정신과 영혼에 진실로 귀를 기울이는 자는 얼마나 될까요? 오히려 그들의 삶과는 위배되는 상품과 마케팅에 그들의 작품을 덕지덕지 개어바르며 상처입은 그들의 사후를 더욱 얼룩지게 만듭니다. 그리하여 진정한 그들의 모습은 더더욱 멀리, 아주 멀리 묻혀집니다. 생전 지독히도 외로웠던 그들은 사후에야 비로소 대중에게 둘러싸였지만 그 속에서조차 여전히 고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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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열 명의 예술가의 삶을 한 권의 책에 담았기에, 그들의 삶은 매우 짧고 담담하게 간추려 서술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삶을 아주 비좁은 문틈으로나마 엿보면서도 몇 번이나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이런 힘든 삶을 살아야 했다는 것에 한 번, 그 삶 속에서도 자신을 지탱해냈다는 것에 또 한 번. 그들의 작품은 그 슬픔과 고통이 빚어낸 빛이라기보다는, 그들의 생존법이었습니다. 침대에 누운 채 하루하루를 견디고 일상을 반복하는 치유의 통로로 공중에 고정된 캔버스에 자화상을 그리며 거듭 자신의 존재를 확인했던 프리다 칼로처럼, 붓질 한 번 더 하는 것이 아이들 옷 입혀 학교 보내고 밥 한 술 떠먹이는 것이라는 자기 최면으로 그림을 그리며 빼앗긴 애들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던 이성자처럼. 뜨거워지는 눈시울에 분노가 담기는 것은, 그들의 불행했던 삶은 그들을 외면했던 이들이 억지로 처박아 넣은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랬던 이들이 지금은 그들을 드높이 어울러 칭송하고 있는 아이러니한 현실.


그들이 위대했던 이유는 훌륭한 작품을 내놓을 만큼 범상치 않은 삶을 살았기 때문이 아니라, 남들은 견뎌내기 힘든 불행을 감내하면서 살아냈고, 그들이 쥐어짜낸 생명의 작품이 바로 그 증거이기 때문에 위대하고 감동적이며, 또 그렇기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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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아쉬웠던 점을 하나 꼽으라면 책에 실린 각 예술가들에 대한 설명이 부족했다는 점입니다. 이 책에는 설명이 필요없을 만큼 유명한─그러나 저자의 말에 따르자면 그 유명함은 허망한 참상─에 불과한 예술가들도 있는 반면, 미술에 관심이 없다면 생소한 작가들도 여럿 소개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가장 처음에 소개된 카미유 클로델처럼 삶의 단상을 보여주고, 작품을 소개하고, 현재 그가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 모두 알려준 다음에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외면해왔던 그들의 소외받은 이면을 가르쳐주는 구성이 계속되었으면 좋았으련만 그렇지 못해 따라가기 힘든 부분들이 있었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예술가의 경우에는 괜찮았지만 이 책에서 처음 알게 된 이들에게는 그들의 상처를 돌아보라는 저자의 말에 집중하는데 애를 먹어야 했습니다. 알지도 못하는 이에게 공감부터 할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요. 저자가 본인이 아는 만큼 독자도 마찬가지로 알고 있지는 않다는 걸 간과한 것 같습니다. 그들의 상처를 돌아보자는 저자의 열변은 훌륭했고 또 감사했지만, 그러한 감정적인 토로는 책을 읽은 후, 그들을 외롭게 만든 사회 공범자로서의 죄책감을 깨닫게 된 독자의 몫으로 남겨주었더라면 아쉬움이 다소 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껏 그 화려한 이면에 현혹되어 저 역시 들여다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예컨대 백남준이나 앤디 워홀 같은─그들의 진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준비를 갖추게 해 준 것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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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는 이야기 - 다큐멘터리 만화 시즌 1 다큐멘터리 만화 1 
최규석.최호철.이경석.박인하 외 지음 / 휴머니스트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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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를 바탕으로 하는 이야기가 판을 치는 세상입니다. 인류가 '허구'를 노래한 이래 너무 많은 세월이 축적되어 이제 더 이상 흥미를 끌 만한 새로운 이야깃거리가 없기 때문인지, 아니면 픽션보다 논픽션이 더 드라마틱하다 여겨질 만큼 세상사가 극적으로 돌아가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하지만 단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와 다큐멘터리는 엄연히 다릅니다. 전자는 상품이고 후자는 삶입니다. 상품은 효과적인 판매를 위해서라면 얼마간의 포장과 각색을 감수합니다. 하지만 삶은 역사이고 기록이며, 기억되어져야 할 유산입니다. 때문에 과장이나 왜곡을 최대한 배제한 채 가급적 사실 그대로 전달하는 것, 그것이 다큐멘터리의 본질이며 시작입니다.




이야기를 하는 데 있어서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면서 다수에게 가장 안전하게 전달할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 수단 중 으뜸은 텍스트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한정된 공간에 가장 많은 내용을 담을 수 있고, 이동이 간편하며, 그것을 취하기 위해 반드시 갖춰야 할 특별한 준비물이 없습니다. 비록 영화나 사진처럼 시각적인 임팩트가 강하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이러한 텍스트에 시각적 임팩트라는 날개가 붙는─단순히 글의 이해를 돕기 위한 보조수단이 아니라, 글과 그림이라는 효과적인 소통수단이 함께 어우러져 시너지 효과를 내는소통의 수단이 바로 만화입니다. 이 역시, 전통적인 수단종이, 그 중에서도 흑백에 의거한다면 대중을 대상으로 했을 때 가장 변형될 위험이 적고 가장 취하기 쉬운 커뮤니케이션의 일환입니다. <사람사는 이야기>는 바로 그 효과적인 도구를 이용해 우리 시대의 삶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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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실린 박인하 만화평론가는 말합니다. 다큐멘터리와 만화는 지사와 희극인처럼 어울리지 않는다, 본질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대중이 갖고 있는 첫 이미지는 그러하다고.


실제로도 사람들은 '만화적이다', '만화 같다'라는 말을 곧잘 합니다. 그 이면에는 '우스꽝스러운,실제하지 않는 과장된 것'이라는 인식이 짙게 깔려있습니다. '만화는 재미있는 것/오락적인 것'이라고 입모아 말하며 그 반작용으로 진지함과 진실성의 결여를 만화의 필수 요건으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이는 만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탓입니다. 혹은 만화가 지니고 있는 수많은 성격 중 일부를 만화 그 자체로 섣불리 규정지어버린 데서 빚어진 오류입니다. 유머 안에 해학과 풍자등의 다양한 요소가 골고루 들어있는 것을 간과하고 단지 해학만을 유머의 본질로 착각하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그래서인지 <사람 사는 이야기>에서는 만화평론가 박인하씨의 힘을 빌어 만화로 표현해내는 다큐멘터리가 어떤 효과를 지니는지, 다큐멘터리를 만화로 그려내야 하는 이유의 정당성을 독자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애씁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소통이지 수단이 아닙니다. 굳이 골치 아프게 학습하고, 어렵게 생각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 만화로까지 골치 아픈 다큐멘터리를 봐야하지, 가 아니라 다큐멘터리를 부담없는 만화로 접하자는 것 뿐입니다. 픽션보다 다큐멘터리가, 재미있는 만화보다 진지한 만화가 상대적으로 손이 덜 가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만화로 그린 다큐멘터리─라는 한 마디가 후자만 있을 때보다는 접근이 쉽지 않은가요? 단순한 CEO보다는 희극적인 퍼포먼스로 사원들에게 이벤트를 열어주는 CEO─박인하씨의 표현을 빌자면 단순 지사보다는 희극인의 모습으로 분장한 지사─가 보다 친근하게 느껴지듯이 말입니다. 


사실 다큐멘터리라는 용어에 얽매여 묵직하게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 책은 마치 뷔페처럼 다양한 이야기를 한데 묶어 들려줍니다. 매일같이 타고 다니면서 불편한 점을 손쉽게 흉보곤 했지만 그 이면은 알려고 하지 않았던 버스 운수업체의 속사정, 재개발로 인해 법적으로 합당하다는 이유만으로 부당한 피해를 받는 사람들, 그저 '용역 깡패'로 묶어 괄시하지만 원치 않게 그 안에 속할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사정, 너무나 흔하게 널려 있어 그 이름조차 궁금해하지 않았던 거리의 나무와 꼬물꼬물 움직이는 동물에 비해 그 생명의 존중을 받지 못하는 식물 이야기, 우리의 역사와 인물에 대한 새삼스러운 조명, 제일교포의 시선으로 바라본 한국의 모습까지... 책의 제목 그대로, 그저 <사람 사는 이야기>, 내 이웃이 사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평소 식사시간에, 휴식시간에 나누는 세상 사는 이야기. 거창할 것도 없고, 멀리 지구촌 어딘가의 이야기도 아닙니다. 그저 우리가 발 디디고 살아가고 있는 이 대한민국, 그 안의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주변─손을 뻗으면 바로 닿는 정도의 작은 영역이 아니라 보다 넓은 우리의 사회─에 관심을 갖는 것, 그 뿐이라고 은근하게 속삭이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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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우리 조상들은 후손들을 위해 아주 사소한 것도 기록으로 남겨주었습니다. 비록 그 중 많은 것이 역사 속에서 소실되었고, 또한 그 과정에서 우리는 그러한 기록의 정신을 많이 잃었지만요. 


과거에 비해 이러한 삶의 향기를 물씬 풍기는 기록들이 현저히 적어진 한국 현대사회에서 이런 책이 나온다는 것 자체가 무척이나 반갑습니다. 책의 본문에 나오듯이, 역사학자가 아니더라도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으로서 적어도 우리가 보았던 것들을 남겨줘야 하는 것, 기억을 공유하는 이들의 어떤 채무감으로서 그것을 대신 해주어 정말 반갑고 고마울 따름입니다.


시즌 1이라 이 책에 실린 이야기의 대부분이 그 다음회를 기약해야 한다는 점이 다소 아쉽습니다만, 그 점을 차치해도 좋을 만큼 이야기 하나하나가 모두 재미있습니다. 지원을 받아 나오는 책이니만큼 이대로 불발되지 않고 시리즈가 죽 이어지기를 바라며, 기회가 되신다면 꼭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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