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세상. 인공지능 기계가 주인인 세계라니. 인간은 그들에 의해 통제 관리 되며 끝없이 꿈을 꾼다. 그리고 그 꿈이 진짜라고 믿는다. 계속 꿈을 꿀 것인가. 깨어날 것인가. 파란약과 빨간약의 선택이다.


해커 네오를 연기하는 키아누 리브스의 창백한 얼굴은 오묘하다. 검은 머리의 아름다운 이 남자가 아닌 네오는 상상할 수도 없다. 로렌스 피시번이 연기한 모피어스 역시 그렇다. 둘은 다르지만 잘생겼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아름답고 멋진 사람은 트리니티다. 네오의 순수함과 약함과 대비되는 그녀의 강함은 소름이 돋을 정도다


회색의 디스토피아, 낡은 함선, 누더기옷의 현실 너머에는 원하는 대로 말하는 대로 만들어지는 신셰계 매트릭스가 있다. 다시 보는 매트릭스는 볼수록 놀랍다. 어떻게 이런 영화가 그 시절에 가능했을까. 다시 봐도 경이롭다. 보여주는 움직이는 예술의 극치다.


길을 아는 것보다 그 길을 걷는다는 게 더 중요하다는 모피어스의 통찰력처럼, 네오는 길을 모른다고 말하지만 그 길을 걷는 인간이 되어간다매트릭스4편이 만들어진다는 소식을 듣고 전편들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2020년 마지막은 매트릭스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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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오후, 산책을 다녀오다.

먼저 뜨거운 물을 끓여 마신다. 겨울 바람에 언 몸이 녹는다.

차갑게 식은 카레를 데우고, 잘 익은 김장 김치를 썬다.

허기 졌던 몸과 마음이 포만감에 부푼다.

 

영화, 벌새는 이미 내용을 알고 보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내내 가슴을 후려치는 묵직한 아픔을 느꼈다. 묻어 둔 기억과 영화의 내용이 겹쳐지며 공감 백 배였다. 저 때의 내 모습은 사실 영화보다 더 슬프고 아팠다. 은희는 부모가 있고 중산층의 부유한 가정이지만, 난 부모의 부재와 가난, 그리고 혹독한 사춘기를 지나왔다. 그 시절을 딱 한 단어로 표현하면 어둡고 긴 터널이었다. 사는 건 다 그래 라고 말할 수 있지만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절을 정말 오랜만에 영화를 통해 바라보는 경험은 특별하고 신비했다.

 

마지막 장면에서 은희는 경주로 수학여행을 떠난다. 동복이 하복으로 바뀐 햇살 가득한 날, 구김 없이 웃는 아이들의 모습은 그렇게 모습일 뿐, 그들은 각자의 전쟁을 치르고 있을 터였다. 누군 가는 죽고 누군 가는 살아남았다. 죽음은 죽은 자의 몫이다. 기억은 점점 희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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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크리스마스
폴 오스터 외 지음, 알베르토 망구엘 엮음, 김석희 옮김 / 황금나침반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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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싱그러운 꽃놀이에 눈을 원하지 않듯
크리스마스 때 장미를 원하지 않습니다.
무엇이든 제 철에 나는 것이 좋습니다.
(세익피어, 사랑의 헛수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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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기의 다른 방법 - 모습들 눈빛시각예술선서 7
존 버거 지음, 장 모르 사진, 이희재 옮김 / 눈빛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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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된 순간과 지금 그것을 바라보는 순간 사이에는 심연이 가로놓여 있다.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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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순간 가장 원하는 것은 내가 나인 그대로 있는 것. 다른 누구도 무엇도 아닌 그냥 나. 어떤 불협화음에도 단단하게 흔들리지 않는 나무가 되는 것이다. 여름날의 푸르른 잎들을 모두 떨군 뜰 안의 감나무는 만지면 부서질 듯 앙상한 가지들이 제멋대로 뻗어 있다. 죽은 가지로 보이지만 그 안에 숨은 생명이 동면 중이다. 봄이 되면 연푸른 싹이 수줍게 움트고 잎이 되거나 꽃이 되고 열매까지 열린다.

나 또한 긴긴 겨울을 건너는 중일 뿐이다. 적당히 어둡고 우울하지만 이 또한 지나갈 계절이다.

 

어느 순간부터 자각하기 시작한 말에 관한 것들이 있다. 나쁜 말들이 있다. 말 속에 숨은 실수들은 또 얼마나 가지가지인지. 나이가 들어 반 백을 지나니 말 수를 줄여야겠노라 다짐했다. 타인의 말실수를 보고 나도 혹 저렇지 않을까 걱정되기 시작했다. 실수를 줄이려면 말을 덜 하는 수밖에 없다.

 

침묵은 수많은 자기 반성과 성찰의 여백이다. 침 튀는 수다가 주는 현기증에 어지러울 때 침묵은 더 빛난다. 깊은 산사에서 스님들이 왜 묵언 수행을 하려 하는지 알 듯도 하다.

 

우리 삶에서 의미는 순간적인 것이 아니다. 의미는 연결하는 데서 발견되며 전개 없이는 결코 존재할 수 없다. 줄거리 없이, 펼쳐짐 없이 의미란 있을 수 없다. 사실과 정보는 저절로 의미를 이루지 못한다. 사실을 컴퓨터에 집어넣어 계산을 위한 요소로 활용할 수는 있다. 그러나 컴퓨터에선 절대로 의미가 생겨나지 않는다. 우리가 어떤 사건에 의미를 부여할 때 그 의미는 알려지니 것에 대한 반응일 뿐 아니라 알려지지 않은 것에 대한 반응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의미와 수수께끼는 불가분의 것이며, 둘 다 시간의 흐름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확실성은 순간적일 수 있고, 의심은 지속을 필요로 하며, 의미는 이 둘로부터 생겨난다. 사진에 찍힌 순간은 보는 이가 그 순간 속으로 지속을 읽어 들일 수 있을 때 비로소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우리가 사진에서 의미를 찾아낼 때 우리는 이미 그 위에 과거와 현재를 덧붙이고 있는 것이다. p88

                                                          (말하기의 다른 방법/존 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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