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딜 가든 라일락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밤에 만나는 라일락은 연보랏빛의 소우주다. 봄밤의 고즈넉하고 살랑거리는 바람을 타고 흔들리는 꽃잎을 보노라면 인간세상의 근심과 걱정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라일락의 깊고 진한 향에 취한 탓이다. 하나의 계절이 가고 또 다른 계절을 준비하려고 피었다 지기를 반복하는 거대한 생명들의 향연을 아낌없이 즐기는 밤이다.

 

봄의 밤은 나의 곁을 함께 걷는 그 사람의 상처를 살피고 보듬어 주는 시간이다. 그리하여 내 숨겨둔 상처가 저절로 치유되는 등가교환이 이루어진다. 더이상 삶의 불확실성 앞에서 울지 말기를, 낙관은 할 수 없어도 닥치지 않은 미래 때문에 두려워 도망가지 않기를 기도한다.

 

겨울 지나 봄이 오고, 곧 여름이 밀려들 것이다. 낯설지 않다. 혹서에 묵은 상처가 덫나 붓고 열이 날 수도 있다. 염증을 치료하는 고통에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통증을 외면하거나 놀라 주저앉지 않을 것이다. 상처는 칼로 째고 약을 바른 뒤, 천천히 기다리면 낫는다는 것을 경험으로 배웠다.

 

수없는 봄의 밤을 지나왔다. 이제 여리여리하던 마음은 돌처럼 단단해졌다. 경험과 시간은 무기가 되었고 이기적인 고집은 배려하고 살피는 이타성을 습득했다. 어떤 날, 어떤 계절, 시간이라도 견디고 버틸 준비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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