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s://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알렙출판사의 서재 (알렙 서재) &gt; 저자 인터뷰</title><link>http://blog.aladin.co.kr/alephbook/category/40043708</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알렙출판사 alephbook.com</description><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Sat, 11 Apr 2026 21:11:27 +0900</lastBuildDate><image><title>알렙</title><url>http://image.aladdin.co.kr/Community/myface/pt_784967113724002.gif</url><link>http://blog.aladin.co.kr/alephbook/category/40043708</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알렙</description></image><item><author>알렙</author><category>저자 인터뷰</category><title>[인터뷰] 내 황홀한 옷의 기원, 백지영 작가 “흉터는 옷의 기원”</title><link>https://blog.aladin.co.kr/alephbook/12160923</link><pubDate>Mon, 23 Nov 2020 12:0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alephbook/12160923</guid><description><![CDATA[안녕하세요, 알렙 氏입니다. &lt;내 황홀한 옷의 기원&gt;의 백지영 작가 인터뷰가 채널예스에 실렸습니다. 알렙 氏가 묻고 작가가 답한 7문 7답(사실은 8문 8답) 형식으로 된 인터뷰는요, 아래에 원문이 링크돼 있습니다.<br><br>http://ch.yes24.com/Article/View/43372백지영 “알지? 흉터는 옷의 기원이라는 거” | YES24 채널예스의, 식, 주니까 옷부터 시작했어야 했는데 그때는 옷에 대한 생각이 안 나더라고요. 그런데 음식은 마침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어서 그렇게 음식, 옷, 집, 이렇게 순서가 되었네요.(2020.11.18)ch.yes24.com<br>백지영 “알지? 흉터는 옷의 기원이라는 거”<br>『내 황홀한 옷의 기원』백지영 저자의, 식, 주니까 옷부터 시작했어야 했는데 그때는 옷에 대한 생각이 안 나더라고요. 그런데 음식은 마침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어서 그렇게 음식, 옷, 집, 이렇게 순서가 되었네요.(2020.11.18)<br><br><br><br>백지영 씨가 새 소설&nbsp;『내 황홀한 옷의 기원』을 들고 독자를 찾아왔다. 그녀는 첫 작품집&nbsp;『피아노가 있는 방』을 통해&nbsp;“가장 가까운 이들에게 버림받은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내면을 집요하게 탐색”(고인환/평론가)하여, 이른바 ‘착한 소설’의 역습이라는 평을 받았다. 2018년에는 장편소설 『나의 노열 패밀리』을 통해 “가족소설의 문법을 바꾸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고 질주하는 사회, 그 속에 놓여 갈 길을 암중모색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서경석/평론가)를 썼다. 첫 번째 장편이 음식을 다루었다면, 이제 두 번째 장편은 인간의 기본 욕망 중 하나인 ‘옷’을 다룬다.<br>&nbsp;소개를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근황에 대해서도요.&nbsp;<br><br>어릴 때부터 글을 좀 쓴다는 소리를 들었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작가가 되는 꿈을 꾸게 되었어요. 작가도 여러 분야가 있겠지만 소설을 좋아해 소설을 쓰는 사람이 되었고요. 그래서 제 오랜 친구들은 어릴 때 꿈을 이룬 사람을 생전 처음 본다고 말할 정도예요. 그러고 보면 행운아라고도 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아직 소설가로서 갈 길이 먼 사람이네요.<br>근황을 말하자면&nbsp;『내 황홀한 옷의 기원』을 인쇄에 넘겼다는 말을 듣는 순간 어디선가 서늘한 바람이 온몸으로 달려들며 한기가 끼치더니, 그 후로 일주일 정도 몸살을 앓았어요. 그리고 지금은 현재 쓰고 있는 장편에 집중하려고 마음만 먹고 있고 첫 작품집 이후 문예지 등에 발표한 단편들이 책 한 권 분량이 돼 내년에는 단편집을 내야겠다고 역시 마음먹고 있습니다. &nbsp;<br><br>전작에서는 ‘음식’이라는 소재로 가족사회의 일면을 보여주셨고, 이번 작품에서는 ‘옷’을 소재로 다루셨어요. 인간의 기본 욕망 중에 의식주의 문제를 특별히 다루시는 이유나 계기가 있는지요?&nbsp;<br><br>이번 책의 '작가의 말'에서도 말했지만 첫 작품집을 낸 후 이제 장편을 써야겠다 생각했을 때 좀 막막하더라고요.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까, 어떤 이야기로 시작해야 하지.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막막할 때는 주로 자전적 이야기로 시작을 하는 것 같던데 저는 왠지 그러고 싶지는 않았어요. 제 이야기는 나중에 정말 쓸 게 없을 때 쓸 생각이거든요. 처음부터 제 이야기를 풀어버리면 나중엔 정말 쓸 게 없고 더 막막할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생각했죠. 인간에게 기본적으로 필요한 의, 식, 주부터 시작하자. 그러면 일단 세 권은 쓸 수 있잖아요.&nbsp;그렇다면 의, 식, 주니까 옷부터 시작했어야 했는데 그때는 옷에 대한 생각이 안 나더라고요. 그런데 음식은 마침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어서 그렇게 음식, 옷, 집, 이렇게 순서가 되었네요.&nbsp;<br><br>이번 소설은 대중들에게 매우 친숙한 매체인 영화판을 중심으로 서사가 짜였는데요. 영화배우인 현우와 영화감독인 그의 아버지의 이야기가 중심이고, 그 전경에 옷(의상)을 만드는 세 여자의 이야기가 깔려 있죠. 이렇게 구상하게 된 계기를 '작가 후기'에서 알게 되었는데요, 작가님께서 이 소설을 구상한 이유에 대해 직접 말씀해 주시면 좋겠네요.<br><br>중학교 때 우리 학교에는 유명한 에로영화 감독을 아빠로 둔 학생이 있었어요. 어느 날 그 감독이 학부형 자격으로 초빙돼 우리 교실에서 강의를 하게 되었고요. 제게는 아직도 재미있고 신기한 경험으로 기억되지만, 중학교 교실에서 에로영화 감독이 강단에 선다는 게 어울리는 일은 아니잖아요. 더구나 그때는 지금보다 더 엄격한 분위기였는데 말이에요. 그런데 그 교실의 모습이 마치 그 사회를 상징하는 한 장면 같더라고요. 1980년대가 그렇잖아요. 정치적으로 암울했고 사회는 엄격한 분위기였으나 그럼에도 한편에서는 에로영화가 성행하고.<br>그래서 그 교실을 아버지의 시대로 설정하고 그런 아버지의 시대에 반감을 갖고 있는 소년을 생각하게 되었죠. 아버지의 시대에 반감을 가진 소년, 그래서 아버지보다 깨끗하게 살고 아버지를 뛰어넘으려는 욕망을 가진 남자. 하지만 전시대를 뛰어넘는 일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정치 같은 걸 예로 들어도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새 시대를 만들겠다 다짐하지만 막상 권력을 잡으면 전시대의 잘못을 답습하고요.&nbsp;<br><br>말하자면, 아버지가 만들려 했던 영화와 자신이 출연했던 영화가 묘하게 일치했다는 &nbsp;모티프에다, “부정하거나 초극하려 했지만 결국 부모 세대와 자신이 연관되어 있음을 깨닫게 되는” 주제의식을 더한 거군요? 그런데, 작품에서는 초반부터 배우 정현우가 엽기적인 흉터를 남긴 사고를 당한 것에서 출발해요. 이유가 궁금하네요.<br><br>아버지의 시대는 부정하거나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닌, 마치 흉터 같은 것이 아닐까 싶었어요. 지울래야 지울 수 없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차라리 얼굴의 흉터처럼 내 몸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일 때 오히려 전시대의 극복이 쉬워지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요. 그런데 옷에 대한 책을 읽다가 흉터가 옷의 기원이라는 인류학자들의 주장을 알게 됐고, 그렇게 옷과 흉터를 매칭할 수 있었어요.<br><br>독자의 흥미와 긴장도를 위해서, 추리소설이나 미스터리 소설에서 쓰는 기법을 적절히 섞으셨는데요. 그러다 보니 작품의 말미에 가면 전체 소설의 얼개가 확 그려집니다. 전에 쓰셨던 작품들과는 다르게 이렇게 장르소설의 요소를 넣은 이유가 있으신지요?<br><br>솔직히 추리소설 기법을 쓰겠다 생각했던 건 아니에요. 주인공 정현우라는 캐릭터가 우선 영화배우니까 외모적으로도 아름답게 그려야 했고, 그리고 그를 사랑하는 여인들도 아름답고요. 하지만 어느 날 문득 그렇게 아름다운 남자를 사랑하는 아주 볼품없는 여자가 떠올랐어요. 너무 볼품없어서 사랑을 표현하기는커녕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도 없는 여자. 그런 여자가 아름다운 남자를 사랑하는 방법은 뭐가 있을까. 그런 방법이 있기는 할까. 만약 있어도 정상적인 방법은 아니지 않을까. 그래서 그런 여자가 하는 사랑은 엽기적일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생각하게 됐지요. 그런데 그런 여자를 만들고 보니 정현우라는 인물과 또 다르게 제게는 매력이 있고 애정이 가는 캐릭터였어요. 그래서 그 인물을 돋보이게 하고 보다 중요한 인물로 만들려다 보니 엽기적인 방법으로 사랑을 하게 되었고 그렇게 스릴러적 요소가 가미된 것 같아요.&nbsp;<br><br>“흉터는 옷의 기원이다.”라는 명제도 그렇고, 또 소설의 장마다 ‘패션, 옷’ 관련한 디자이너들의 코멘트를 발췌하여 넣으셨어요. 소설에는 옷을 만드는 여자들이 나오고, 각각에 스토리가 있습니다. 작가께서 생각하시는, ‘옷’이란 어떤 것인가요? 그리고 각각의 옷 만드는 여자들을 통해서 드러내고자 했던 ‘옷’에 대한 생각은요?<br><br>저는 솔직히 패션이나 옷에 관해서 정말 1도 모르는 사람이에요. 옷을 신경 써서 입어본 적도 없고 관심을 가져본 적도 없고요. 오히려 옷에 관해 관심이 많은 여자들이 신기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별로 안 좋게 보이기도 했던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이 작품을 준비하면서 패션에 관한 여러 책도 읽고 영화도 보고 디자이너들의 자서전이나 그들에 관한 자료를 보면서 옷을 만드는 것도 소설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음악을 만드는 것과 다르지 않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전에는 그저 옷을 사치품이나 소비재같이 인식했다면 이제는 창작품이나 &nbsp;예술품으로 인식하게 되었다고 할까요. 그래서 제 나름대로 이 작품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옷을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인식하게 그렸고, 저 또한 이제 그렇게 옷에 대한 생각이 조금 달라진 것 같아요.<br><br>혹시 이 작품을 쓸 때에, 염두에 두셨거나 영향을 받은 작품이 있는가요? 아니면, 작가님의 소설이 독자에게 어떻게 읽혔으면 좋겠습니까? 그리고 이 작품에 이어서 앞으로 어떤 주제와 방향으로 작품을 쓰실 것인지요?<br><br>원래 패션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어떤 브랜드에서 나오는 옷은 다 한 사람이 만드는 줄 알았어요. 하지만 이 작품을 준비하면서 관련된 책을 읽고 자료를 조사하다 보니 하나의 브랜드에도 여러 디자이너들이 옷을 만들더라고요. 그래서 숨어서 옷을 만드는 캐릭터를 만들 수 있었고 그렇게 스릴러적 요소를 가미할 수도 있었어요. 이 작품을 준비하면서 새삼 여러 분야 다양한 책을 읽는 게 소설을 쓰는 데도 많은 도움이 되겠구나 다시 한번 느꼈어요.&nbsp;이 작품은 정현우가 주인공인 이야기지만 실제 주인공은 이름 없는 여자거든요. 작품을 읽으신 분들이 이름 없는 여자에게 연민과 애정 등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nbsp;<br>지금 쓰는 작품은 집이 소재예요. 어려서부터 셋방살이 설움을 너무 많이 겪어서 집에 한이 맺힌 싱글녀 하우스푸어가 주인공인 이야기죠. 그런데 그녀가 집을 끝까지 지키는 게 맞는지 아니면 집을 포기하고 여러 사람들이 원하는 일을 하는 게 맞는지 갈림길에 있네요. 그녀가 어떤 길을 선택하게 될지 저도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독자들의 공감을 얻는 선택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nbsp;<br><br>앞으로 백지영의 작품을 읽고, 백지영 소설의 팬이 될 독자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br><br>저는 세련된 문체를 갖고 있지도 않고 지식이 차고 넘쳐 많은 정보를 줄 수 있는 작가는 아니에요. 그런 작품들을 보면 부럽고 존경스럽기는 하지만 또 내가 그런 스타일의 작품을 쓰고 싶지는 않아요. 그래서 나는 어떤 소설을 쓰고 싶은가 내 자신에게 물어보면 쉽고, 재미있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답이 들려요. 저는 우선 쉽게 읽히는 소설을 썼으면 좋겠고 재미와 감동을 주는 작품을 쓰는 작가가 됐으면 좋겠어요. 아직은 많이 노력해야겠지만요.&nbsp;그리고 또 하나 독자들이 제 소설에 나오는 캐릭터에 연민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왠지 마음이 짠해 돌아보게 되고 생각하게 하는. 그래서 살다가 문득 한번쯤 떠올리게 되는. 그런 캐릭터가 나오는 쉽고 재미있고 감동도 있는 작품. 그런 작품을 쓸 수 있도록 더 많이 노력할 생각이니 앞으로 많은 관심 부탁드리겠습니다.&nbsp;<br><br><br><br>*백지영<br><br><br>1973년 서울에서 태어나 세종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7년 강원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곰탕」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2011년 서울문화재단 창작지원금을 수혜했으며, 세종대에서 문학과 영화 등을 강의했다. 작품집으로 「피아노가 있는 방」이 있다.&nbsp;<br><br>네이버책에서 보기&nbsp;:&nbsp;https://bit.ly/2I8I0TH<br>&nbsp;<br><br>알라딘&nbsp;:&nbsp;https://bit.ly/2TXnRD2<br><br><br>]]></description></item><item><author>알렙</author><category>저자 인터뷰</category><title>[어셈블리 자료 1] 마이클 하트 인터뷰</title><link>https://blog.aladin.co.kr/alephbook/11648584</link><pubDate>Tue, 14 Apr 2020 12:1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alephbook/11648584</guid><description><![CDATA[&nbsp; &nbsp;<br>안녕하세요,&nbsp;알렙 씨입니다.<br>오늘은 몇 회에 걸쳐&nbsp;&lt;어셈블리&gt;&nbsp;관련 해외 자료를 공유할까 합니다.&nbsp;이 자료들은, assembly가&nbsp;2017년에 출판된 이후,&nbsp;마이클 하트와 안토니오 네그리가 공동으로 혹은 각각 진행했던 각종 글과 영상들입니다.<br>&nbsp;<br>먼저, &lt;어셈블리&gt;(2017,&nbsp;한국판&nbsp;2020)&nbsp;출간 이후 마이클 하트가&nbsp;MFU(media for us)와 나눈 인터뷰입니다.<br>&nbsp;<br>Michael Hardt on Leaderless Movements and Organizing The Multitude,<br>&nbsp;<br>https://mediaforus.org/interviews/hardt<br>&nbsp;<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0/0414/pimg_7849671132513579.jpg</url><link>https://blog.aladin.co.kr/alephbook/11648584</link></image></item><item><author>알렙</author><category>저자 인터뷰</category><title>『사진 인문학』 저자 인터뷰 “사진의 뜻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title><link>https://blog.aladin.co.kr/alephbook/7346629</link><pubDate>Fri, 23 Jan 2015 11:4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alephbook/7346629</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777946X&TPaperId=734662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5192/43/coveroff/899777946x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 <br><br><br><br><br><br><br><br><br><br><br><br><br>“사진의 뜻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3년 만에 『사진 인문학』 집필 출간한 사진비평가 이광수와의 인터뷰<br>&nbsp;역사학자이자 사진 비평가인 이광수 교수가 『사진 인문학』을 들고 독자를 찾아왔다. 사진과 사진 비평의 세계에 매혹된 인문학자가 사진의 기술이 아니라 사진의 뜻을 찾아 인문학적 사유를 펼쳐 보인다. 무려 3년이 넘는 동안 월간 『사진 예술』에 연재를 해왔던 이 글은, 후반기에는 사진가들과 직접 소통하는 방식으로 쓰였다 한다. 저자의 글을 직접 편집 출간 작업을 했던 편집자가 독자를 대신하여 몇 가지 질문을 드려 보았다.<br><br><br><br>&nbsp;『사진 인문학』이라는, 어찌 보면 쉽고 어찌 보면 까다로운 주제를 들고, 독자에게 찾아왔습니다. 그동안 역사학자 그리고 시민운동가로서 책도 여러 권 내셨는데요. 이번에는 사진 비평가 내지 사진 인문학자의 책으로는 처음입니다. 사진가로서 그리고 사진 비평가로서 어떻게 이 세계에 접하게 되었는지요?<br><br><br>제가 본격적으로 사진을 찍기 시작한 것은 10년 전쯤의 일입니다. 2002년 미군이 아프가니스탄 공습을 한 직후 제가 공동 대표로 있는 아시아평화인권연대에서는 아프간 난민을 긴급 구호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을 방문했죠. 몇 차례 다녀온 뒤에, 우리는 후원회원에게 사진전 겸 보고회를 열었는데요, 글쎄, 제가 찍은 사진을 보니 죄다 흔들려 건질 수 있는 게 한 장도 없었습니다. 세상에,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소중한 데를 다닐 텐데, 사진을 좀 배우라는 주위의 성화에 못 이겨 사진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죠.&nbsp;<br><br><br>그렇다면, 아마추어 사진가 아니면 하이 아마추어 사진가로서, 사진 창작 활동이나 예술 사진 등을 찍으면 그저 즐기는 일이 될 텐데, 왜 이렇게 인문학적으로 또 비평적으로 무겁게 접근하셨나요?<br><br><br>네. 그것은 제가 학자였기 때문에 천성적으로 그렇게 되었나 봅니다. 사진을 본격적으로 공부하다 보니, 개념적으로 정리하고 싶었고, 또 개념을 정리하다 보니, 그 개념만으로는 부족하다 싶어, 실제 사진가들과 교류하고 소통하면서, 사진의 본성을 들여다보고 파헤치고자 한 것이죠. 무엇보다도 사진은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단순히 보는 대상을 넘어 읽는 대상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라는 사실 때문이지요.<br><br><br><br>이번 책은 3년여 동안 『사진 예술』에 연재하였다고 하셨습니다. 특히, 우리 시대의 사진가들과 소통한 대목이 독특한데요. 모두 24명의 하이 아마추어 수준의 작가들이죠?<br><br><br>네. 처음에는 인문학의 개념이나 원리를 사진 비평에 끌어오는 방식이었는데요. 나중에는 지금 활동하고 있는 사진 작가들을 더 들여다보고 싶었죠. 그래서, 사진가들에게 사진 작품과 함께 작업 노트를 보내달라고 청한 것이고요. 그 작업 노트를 통해서도 사진가들의 “뜻”을 읽으려고 시도해 본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진가들의 작품에는 “뜻”이 담겨 있는데, 그 “뜻”은 인문학에서 말하는 어떠한 관점과 연결 지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작업이나 활동을 사진가들과 함께 한 것이죠.<br><br><br>그러면, “사진”을 가지고 인문학을 할 수 있는 이유에 대해 여쭤 봐도 될까요?<br><br><br>사진은 인문학의 보고다라고 썼지만, 회화(그림)에 비하면 고유의 미학 담론이나 인식론이 양적으로도 질적으로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사진이 다른 예술 형식이나 표현 양식에 비해 인문학적 사유의 지평을 넓히는 데에, 결코 뒤지는 장르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진은 역사도 되고 과학도 되고 예술도 될 수 있기 때문이죠. 무엇보다 사진에 대한 감상평은 객관적이다 말할 수 없습니다. 사유할 수 있다는 것이죠. 사유의 헤맴, 그것이 인문학과 맞닿아 있습니다.&nbsp;<br><br><br><br><br>편집자인 제가 정리해 보려다, 잘 안 되었던 것이 하나 있습니다. 언어도단일지 모르지만, “좋은 사진”과 “나쁜 사진”은 엄연히 구분되지 않을까요?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그러한 구분이 타당하지 않다고 하십니다.&nbsp;<br><br><br>멋진 사진, 좋은 사진이란 도대체 누가 규정한 것이고, 그렇게 규정하는 근거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스스로 질문을 던져보았습니다. 역사학자로서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경계선에서 인간과 사회에 대해 평생 고민해 온 학자가 던지는 질문에 명쾌하게 대답해 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죠. 제 나름의 답은 이렇습니다.&nbsp;<br>사진 언어는 비논리적이기 때문에 사진가가 자신이 갖는 생각을 사진으로 재현하기도 어렵지만 독자가 그것을 읽어내기도 어렵습니다. 사진 언어는 그 특성상 논리의 문법을 가지고 의미를 제시한다기보다는 보는 사람만의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데 적합하죠. 그 감성은 사람마다 다르고 그것도 때와 장소 혹은 분위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한 장의 사진을 볼 때 독자 개인의 생뚱맞은 느낌이 사진가의 의도와 다르다고 해서 그것이 잘못되었다거나 열등한 느낌이라고 평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좋은 사진과 나쁜 사진으로 나눌 수는 없다는 겁니다. 좀 더 쉽게 말씀 드리자면, 흔히들 흔들린 사진이나 구도가 틀어진 사진은 ‘나쁜 사진“이라고들 하는데, 그 사진으로 흔들리는 대상이나 어긋난 대상을 말하고자 한다면 그 맥락에서는 ’좋은 사진”이 된다는 겁니다.<br><br><br>혹시 이 책을 쓰면서, 선생님의 책이 어떻게 읽혔으면 좋겠습니까? 혹은 이 책을 읽을 독자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br><br><br>사진은 하나의 도구에 불과합니다. 그 도구로 소통도 하고, 사유도 하고, 인문학도 할 수 있습니다. 사회에 팽배한 어떤 구조의 신화에 끌려 다니면서 사진을 숭배하기 보다는 사진으로 자기 자신의 사유 세계의 지평이 더욱 넓어지고 풍부해졌으면 하는 겁니다. 그러려면, 책에 쓴 내용이긴 한데요, 독자는 작가의 의도에는 맞춰 가되 그만의 해석에 끌려 다녀서는 안 됩니다. 또 독자가 끌려 다니지 않아야 하는 존재로 작가만 있는 게 아니죠. 비평가도 있고, 기획자도 있으며, 큐레이터도 있습니다. 그들이 해줄 수 있는 것은 고작 기호학적 해석이나 맥락에 따른 해석뿐이죠. 그들이 가진 느낌이 교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사진으로 생각 읽기의 첫 걸음입니다.&nbsp;<br><br><br>(감사합니다.)<br>이광수<br>부산외국어대 교수. 역사학자(인도사). 사진비평가. 이른바 ‘운동’이 가장 치열했던 시기인 1983년부터 1989년까지 인도로 유학을 간 것에 대한 부채의식으로 시민운동가의 길에 접어들었다. ‘아시아평화인권연대’ 공동 대표, ‘만원의 연대’ 운영위원장을 맡았고, 결국 문제는 정치에 있다고 생각하여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정의당 등 진보 정당 당원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nbsp;<br>‘아시아평화인권연대’에서 활동하던 중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후 몇 차례 그곳을 방문하게 되었고, 그 소중한 경험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사진을 본격적으로 찍게 되었다. 또, 인도 근대사 연구 중 사진도 중요한 사료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본격적으로 사진 이론을 공부하여 사진 비평의 길로 들어섰고, 2011년부터 현재까지 월간 《사진예술》에 사진을 통한 인문학 탐구에 대한 글을 연재하고 있다.&nbsp;<br>저술로는 인도사에 관한 것으로 『슬픈 붓다』, 『역사는 핵무기보다 무섭다』 등의 지은 책이 있고, 『침묵의 이면에 감추어진 역사: 인도-파키스탄 분단으로부터 듣는 여러 목소리』, 『성스러운 암소 신화』 등의 옮긴 책이 있다.&nbsp;<br>사진에 관한 논문으로는 「영국 사진가 사무엘 본의 세계관과 그의 사진에 대한 맥락적 해석」, 「기억에 대한 담론을 통한 ‘5·18’의 사진 재현: 사진가 노순택의 『망각기계』를 중심으로」가 있으며, 저술로는 지은 책으로 『붓다와 카메라』(근간, 눈빛출판사)와 옮긴 책으로 『사진으로 제국 찍기』(근간, 그린비)가 있다. &nbsp;]]></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5192/43/cover150/899777946x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51924376</link></image></item><item><author>알렙</author><category>저자 인터뷰</category><title>&amp;lt;열여덟을 위한 논리 개그 캠프&amp;gt; 에필로그</title><link>https://blog.aladin.co.kr/alephbook/7321579</link><pubDate>Wed, 07 Jan 2015 11:5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alephbook/7321579</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7779451&TPaperId=732157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4974/75/coveroff/8997779451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br><br>망각에 갇힌 코미디 철학의 작은 역사<br>&nbsp;아리스토텔레스는 드라마 비평 책이자 서양 최초의 예술철학 책인 『시학』에서 비극과 코미디(희극)를 다음과 같이 구분합니다. 그러나 이 책은 주로 비극만 다루고 있기 때문에 어떤 해석자들은 『코미디에 관한 시학』이 그 후속편으로 존재했었지만 소실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래도 비극을 다루면서도 간간히 코미디를 언급하기 때문에 코미디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비극은 ‘탁월한 사람들의 행동’을 모방하는 것인 반면에 코미디는 ‘열악한 사람들의 행동’을 모방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고대 그리스의 귀족주의적인 세계관에 비추어보면, 비극의 주인공은 신화적인 위대한 영웅이거나 도덕적 뛰어난 여주인공인 반면에 코미디의 주인공은 평범한 시민들이 됩니다.아리스토텔레스에게 비극적 모방의 대상이 “연민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영웅의 행위나 운명인 반면에, 코미디적인 모방의 대상은 “모든 잘못이 아니라 추악(醜惡)의 종류인 우스꽝스러움”입니다. 그는 이 우스꽝스러움을 “고통스럽지도 않고 파괴적이지 않은 실수의 종류”로 정의합니다. 이런 이유로 비극은 “연민과 공포를 통해 감정의 카타르시스(정화)”를 성취하는 반면에, 어떤 해석자들에게 의하면 코미디는 동료 인간의 실수에 관해서 나쁜 의도의 선망하는 감정이나 질투심으로부터의 카타르시스를 일으킨다고 합니다.&nbsp;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은 플라톤의 코미디 비판에 대한 일종의 반박으로 볼 수 있어요. 플라톤이 『필레보스』에서 선망하는 자, 즉 ‘심술궂은 시기’를 하는 자는 “그의 이웃들의 나쁜 일들에 대해 즐거워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지요.반면에, 헤겔은 “코믹한 것이란 자신의 행동을 모순으로 가져와 그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주체성”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주체성(주관성)은 객체성(객관성)에 대립합니다. 객체성이란 전통적인 사회 규범과 인간관계의 윤리를 의미합니다. 주체성이란 이런 전통 규범과 윤리에 대해 회의하는 개인을 말합니다.&nbsp;다시 말해 주체성이란 데카르트가 제시한 코기토(cogito), 즉 생각하는 나를 말합니다. 모든 것을 의심해도 결국 의심하는 나는 확실히 존재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체성입니다. 그래서 주체성은 우선 자신을 규정할 주어진 내용이 없습니다. 근대의 주체성이란 전근대의 공동체성을 해체하고 그 토대가 되는 종교와 도덕을 의심하는 합리적 개인을 뜻하는 것이죠.헤겔은 웃음에 관한 논의보다는 극으로 제도화된 코미디를 철학적으로 분석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예술 철학)은 주로 비극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헤겔의 예술철학으로 유명한 『미학 강의』에서 코미디는 모든 예술의 종결(완성)입니다.&nbsp;헤겔이 보기에, 그리스 비극은 객체적인 인륜성의 실체와 필연성을 기초로 삼고 드라마 인물의 개성과 그 사적인 삶의 깊이를 발전시키지 않았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습니다. 반면에 코미디는 주체적 인격성을 부조리와 그 부조리의 해소를 상세하게 서술하면서 완성시킵니다. 다시 말해 코미디는 비극이 끝난 지점을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즉 절대적으로 화해된 유쾌한 마음이 그것입니다.&nbsp;코미디는 ‘모순의 즐거운 화해’를 추구합니다. 다시 말해서 주체적인 만족이 핵심이 된다는 뜻입니다. 주인공이 추구한 행위의 결과가 좋지 않고 비극적이라도 마음의 평화를 잃지 않는다는 자기 확신이 핵심인 것이지요. 이것이 아리스토파네스가 대표하는 옛 그리스 코미디의 특징입니다.코미디의 주인공은 우선 그 자체로 우스운 면이 있어요. 그는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 진지하지 않아요. 그래서 코미디의 주인공들은 더 고등하고 보편적인 관심을 갖지 않기에 실질적인 문제에서 이해관계의 갈등을 겪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현실과 모습에 전혀 의문도 품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코미디의 주인공들은 대개 낮은 지위의 사람들입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진지하지 않기 때문에 거꾸로 결과의 희비극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이렇게 절대적인 자유정신과 사적인 평온함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합니다.이러한 자유정신의 분위기 속에서 아리스토파네스는 아테네 도시국가의 신성한 신들과 동료 시민들을 풍자합니다. 특히 동료 시민들의 우스꽝스러움, 다시 말하면 대중적인 어리석음, 정치가들의 정신없음과 전쟁의 부조리함 등을 폭로하는 데에 주력합니다. 빚쟁이에게 빚 갚는 법을 가르치겠다고 제의하는 철학자 소크라테스, 지하세계로 내려와 비극 작가를 육성하겠다고 결심한 디오니소스 신 등, 이들은 모두 처음부터 바보에 불과합니다. 그러기에 자기 확신을 가지고 자신이 생각한 과업을 달성하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바보인 자신과 그가 생각한 과업은 모순을 이루게 됩니다. 그렇지만 자신이 무능해서 그 과업에 실패하더라도 자기 확신이 대단해서 절대로 마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nbsp;이런 점을 고려해서 헤겔은 아리스토파네스가 냉담하고 악의적인 조소(嘲笑)가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반대로 그는 아리스토파네스를 동료 시민의 안녕에 관심이 있는 가장 재능이 뛰어나며 가장 좋은 시민이라고 단정합니다. 반면에 앞에서 언급했듯이 플라톤은 이러한 아리스토파네스의 코미디를 심술궂은 시기심에 의한 쾌감이라고 비판했지요.근대 유럽의 코미디와 고대 그리스 코미디의 차이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근대 코미디는 관객들에게 사적인 이해관계와 성격들과 그와 연관된 일상적 부도덕함과 부조리함, 그리고 특이한 행동과 어리석음을 전부 제시합니다. 그래서 관객들은 그러한 음모에 담긴 온갖 모순을 보고 웃게 마련입니다. 이런 식으로 아리스토파네스적인 ‘영원한 화해로서의 솔직한 유쾌함’이 근대의 코미디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근대적인 음모의 코미디에서는 노골적인 악, 즉 교활하고 기만적인 자들의 음모, 사기, 비열함이 승리합니다. 음모에 의해 정직하지만 무기력한 어리석은 사람들이 늘 속임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근대 유럽의 코미디는 헤겔이 보기에 구토가 날 지경입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 유럽은 진정으로 코믹하고 진정으로 시적인 코미디의 유형을 발전시켰습니다. 그러한 코미디의 기조(基調)는 그 모든 실패와 불운에도 불구하고 좋은 유머의 정신을 보여줍니다. 좋은 유머 정신은 무관심의 확신적인 유쾌함, 그리고 기본적으로 행복한 광기와 어리석음, 마지막으로 개성의 풍부함과 대담함입니다. 이것을 헤겔은 “깊이 있고 성찰적인 유머”라고 부릅니다. 대표적으로 「한여름 밤의 꿈」과 같은 셰익스피어의 코미디 작품들이 있습니다.&nbsp;결론적으로 헤겔의 이러한 좋은 코미디의 발전과 더불어 미학의 철학적 탐구가 진정한 종결(완성)에 이른다고 봅니다. 코미디의 유머 속에서 자유로운 절대적 주체의 낭만주의 정신의 부정적인 면이 드러나기 때문이지요. 이런 점에서 코미디는 예술의 완결입니다.&nbsp;<br>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4974/75/cover150/8997779451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9747512</link></image></item><item><author>알렙</author><category>저자 인터뷰</category><title>스마트 시대에 흑백 텔레비전라니요?</title><link>https://blog.aladin.co.kr/alephbook/7307069</link><pubDate>Mon, 29 Dec 2014 14:2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alephbook/7307069</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7779427&TPaperId=730706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4702/18/coveroff/8997779427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 <br>&lt;흑백 테레비를 추억하다&gt; 저자와의 인터뷰<br><br>“김수한무 거북이와 두루미 삼천갑자 동방삭 치치카포 사리사리센타……”&nbsp;이 이름을 들을 때&nbsp;&lt;시크릿 가든&gt;의 현빈이 아니라 코미디언 서영춘이 생각난다면,&nbsp;당신은 흑백 테레비를 추억할 수 있는 세대다. TBC &lt;고전 유머극장&gt;에서 서영춘이&nbsp;‘서수한무~’를 부르며 숨넘어가는 장면에 배꼽을 잡은 기억이 있다면,&nbsp;이 책은 당신이 어릴 적 받고 행복해했던&nbsp;‘종합선물세트’가 될 것이다.&nbsp;알렙씨는 이번에&nbsp;‘아씨’에 울고&nbsp;‘쇼쇼쇼’에 웃던 그때 그 시절을 추억하는 책 한 권을 출판했다.&nbsp;저자는 정범준.&nbsp;어찌 보면 한국 방송사의 이면을 다룬 다큐멘터리로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지만,&nbsp;그보다는 저자의 추억과 감성이 물씬 돋아나는 시대물이 아닐까 싶었다.&nbsp;수많은 문명의 이기들이 생겨났다 사라졌다 하지만, TV라는 영상 매체는 우리 삶에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nbsp;우리 삶을 보듬고 드러내고 닦아주는 것이었다.&nbsp;편집자가 느낀 대로보다는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대로 쓰고자,&nbsp;저자와 미니 인터뷰를 해보았다.&nbsp;알렙씨&nbsp;:&nbsp;안녕하세요?&nbsp;작가님!&nbsp;이번에 내신 책은 스마트 시대에 컬러&nbsp;TV도 아니고 흑백 테레비 시대를 다루고 있어요.&nbsp;어떤 계기로 이 소재를 다뤄야겠다고 생각하셨는지요?정범준&nbsp;:&nbsp;작가가 되던 무렵에 써보고 싶은 소재가 세 개 있었는데 최동원,&nbsp;차범근, TBC였습니다.&nbsp;영웅이었음에도 저평가된 점,&nbsp;뭔가 아련한 점,&nbsp;그들과 함께 울고 웃었던 점 같은 게 셋을 관통하는 공통점 같았습니다.&nbsp;제 취향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nbsp;특히&nbsp;TBC는 책을 구상한 시점에만 해도 소생할 가능성이 없는 사라진 방송사여서 애틋함이 더했습니다.알렙씨&nbsp;:&nbsp;흑백 테레비는 어떤 아날로그적인 감성이나 옛 기억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킵니다.&nbsp;저자 본인에게 흑백 테레비는 어떤 이미지로,&nbsp;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말씀해 주세요.정범준&nbsp;:&nbsp;흑백 테레비는 단순히 옛날 물건이 아니라 옛 기억,&nbsp;옛 추억,&nbsp;옛 감정 그 자체가 아닐까요.누구에게나 유년의 추억과 감성은 소중하지요.&nbsp;개인적인 것이든 작가로서의 그것이든 제 취향과 감수성의&nbsp;8할을 만든 것이 흑백 테레비였습니다.&nbsp;굳이 한 이미지로 표현한다면 삶의 첫 기억 정도가 될까요.&nbsp;알렙씨&nbsp;:&nbsp;텔레비전과 시대상을 연결시키고 문화사적 측면도 드러내 보이는 것 같습니다.&nbsp;그렇지만 본격적인 연구는 아니고,&nbsp;또 그렇게 딱딱하게 쓰고 있지 않죠.&nbsp;논픽션임에도 객관적인 기록과 함께,&nbsp;개인적인 감상을 더 많이 가미한 이유는 뭔지요?정범준&nbsp;:&nbsp;말하기와 보여주기가 있다면 제 스타일은&nbsp;‘보여주기’입니다.&nbsp;내가 이런 걸 보고 왔는데 재밌더라,&nbsp;내가 해설해 줄 테니 직접 보시라,&nbsp;이런 거죠.&nbsp;이런 기조를 유지하면서 더러 제 감상이나 의견을 약간씩 삽입하는데 책의 양념 역할도 하는 것 같고,&nbsp;뭔가 작가로서의&nbsp;‘특권’&nbsp;같아서 그럴 때마다 즐겁습니다.&nbsp;편집자&nbsp;:&nbsp;끝으로,&nbsp;이 책이 독자에게 무엇을 선물할 수 있을 것 같은지요?&nbsp;반대로 독자는 이 책을 통해 무엇을 느끼고 얻어갈 수 있을까요?&nbsp;독자에게 드리고 싶은 말도 곁들여주세요.정범준&nbsp;:&nbsp;어떤 아련함을 떠올려 주신다면 성공이겠고 기쁘겠습니다.&nbsp;네.&nbsp;그저 잘 읽어봐주시기를!<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4702/18/cover150/8997779427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7021836</link></image></item><item><author>알렙</author><category>저자 인터뷰</category><title>&amp;lt;욕망 자본론&amp;gt; 저자와의 만남</title><link>https://blog.aladin.co.kr/alephbook/7307065</link><pubDate>Mon, 29 Dec 2014 14:2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alephbook/7307065</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7779419&TPaperId=730706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4558/12/coveroff/8997779419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미니 인터뷰 <br>  &nbsp;    &nbsp;  <br><br><br><br><br><br><br>편집자   안녕하세요. 선생님. 2013년 『녹색은 적색의 미래다』(알렙)를 내신 이후로, 선생님께서는 몇 권의 책을 더 내셨지요? 20010년 박사학위 논문이 통과된 이후로, 공저 포함하여 벌써 15번째 저서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특별히 이 책이 선생님의 저작 중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궁금하네요.   &nbsp;  신승철  이 책은 박사학위 논문에서의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점을 갖습니다. 그간 욕망자본론과 관련되어 여러 가지 단상과 아이디어를 블로그나 발표 글에 실어 왔지만, 이렇게 일관된 맥락 하에서 한 권의 책으로 나오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사실 저의 욕망자본론은 펠릭스 가타리의 욕망가치라는 개념을 더 발전시킨 내용입니다. 좀 더 논의를 전개하고 구체화하면서 지금 여기의 한국사회에 맞게 쓸 필요가 있었습니다. 저의 지적 여정 속에서 맑스주의자들에게 가장 많이 질문을 받아 왔습니다. 그들 입장에서는 맑스의 가치론에 대해서 대대적인 수정을 가한다는 것을 매우 불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소수자의 시각에서 다시 자본론을 검토한다는 입장에서 밑그림을 그리면서 이 책을 구체화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2010년 박사논문을 쓸 때, 욕망자본론이라는 개념의 구도를 그려내고 몹시 흥분했지만, 그간 기회와 시간이 없어 구체화할 수 없었습니다. 늘 빚진 기분이었죠. 이제야 빚을 털어버린 느낌이 듭니다. 이 책이 갖는 독특한 위상은 맑스주의의 개념지도와 주류경제학의 논의를 벗어나서 대안사회를 꿈꾸고 사유한 책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책 역시도 배치라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생각에 대해서 동의하게 되는군요.   &nbsp;  편집자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 모음집이 사실은 어려운 경제철학 책이에요. 특별히 이런 형식을 갖춘 이유가 있나요?   &nbsp;  신승철  사실, 개념과 논증이 난무하는 철학 책이란, 공허하거나 현학적이기 쉬워요. 사실 철학은 답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참신하고 신선한 문제제기를 던지는 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내에게 편지를 보낸 이유는, 아내와 저는 철학공방 &lt;별난&gt;이라는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공동체를 같이 하고 있기 때문이죠. 또, 우리 둘을 포함하여  문래동 예술가와 활동가들과 함께 생태문화협동조합 달공을 만들어가고 있기도 해요. &lt;욕망 자본론&gt;은 공동체 경제, 생태 경제가 어떻게 가능한가를 탐문하는 것이기도 해서, 우리 둘 사이의 관계망에서 싹트는 욕망과 생태적 지혜에 기반해서 써내려갔습니다. 피케티 교수의 &lt;21세기 자본&gt;처럼 실증 자료와 도표, 예시는 없지만, 너와 나 사이의 관계망이 주는 생태적 지혜, 집단지성, 공통의 아이디어 등에 기반해서 문제의식을 풀어내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런 실험적인 형식은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관계망에서 산출되는 생각의 경로를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nbsp;  편집자  편집자가 여러 번 읽어보아도, 이 책의 내용을 숙지하기는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따지고 보면, 책 전체를 통해서 일관되게 몇 가지 명제와 주장을 하고 계시죠. 저자께서 직접 본인의 명제와 주장을 서너 가지로 정리해 주실 수 있나요?   &nbsp;  신승철  자본주의는 화석연료고갈, 기후변화, 생물대량멸종 등 장기비상시대로 이미 접어 들어간 상황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기존의 성장 위주의 경제정책이 아니라, 발전노선에 주목하게 만드는데요, 저는 발전노선에서 욕망가치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소수자에게 기본소득을 주는 것이 욕망가치 입장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사회적 경제에서의 자본의 욕망화와 욕망의 자본화라는 색다른 국면을 어떻게 사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습니다. &lt;자본론&gt;의 공백인 욕망가치 영역을 통해서 통합된 세계자본주의에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어떻게 초래해야 할지를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쉽게 말해서 노동을 하지 않으면서 욕망을 가진 소수자들은 그저 수혜적 돌봄의 대상이 아니라, 색다른 관계망을 창발함으로써 보이지 않게 이 사회를 풍부하게 만들면서 기여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그것입니다. 그것이 욕망가치론의 핵심적인 명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저의 문제의식을 좀 더 간략히 정리하자면, “자본주의 경제는 소수자와 비노동 민중의 욕망가치의 생산성과 창조성에 기반하는 ‘발전전략’, ‘기본소득’, ‘사회적 경제’로 이행하고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nbsp;  편집자  요즘 ‘기본소득’이나 ‘부유세’ 등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책에서 보니, 신승철 선생님께서는 상당히 오래전에 ‘사회보장소득’이란 개념을 얘기하셨더군요. 욕망가치와 기본소득에 대해 연관성을 좀 깊게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nbsp;  신승철           우리가 소수자를 말할 때, 사회적 약자나 양적 소수, 피해자로 보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은 공동체와 사회를 풍부하게 만들 수 있는 특이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본이 공동체적 관계망의 시너지효과와 집단지성, 생태적 지혜에 주목하는 현 단계의 첨단기술사회에서 소수자가 관계성좌를 풍부하게 만듦으로써 기계를 산출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매우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역할을 보이지 않게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계에게 전기를 주듯이 소수자에게 기본소득을 보장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할 수 없겠지요. 제가 2000년 초반에 접근했던 사회보장소득의 문제의식은 비노동 민중의 삶과 욕망을 보장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그러한 문제의식을 10여 년 동안의 지적 여정을 거쳐 이제야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nbsp;  편집자   욕망에는 자본주의적 욕망이 있고 생명 에너지인 욕망이 있다고 하셨는데, 사랑과 욕망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을 조금 말씀해 주세요.  &nbsp;  신승철        기존 생태주의자들은 ‘욕망=자본주의적 욕망’이라는 공식 속에서 금욕이나 절욕을 주장해 왔습니다. 그러나 생명에너지로서의 욕망은 공동체의 활력과 생명에너지로 흐르기 때문에 지나친 금욕주의는 공동체를 폐색시킬 위험을 노정합니다. 저는 욕망에 대한 자주관리의 행동을 공동체에서 감행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펠릭스 가타리의 ‘욕망의 미시정치’라는 개념도 이를 설명하는 개념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여기서 사랑과 욕망은 미래를 향한 문제제기입니다. 우리는 질문을 던지면서 미래를 향해서 탈영토화를 감행하고 있는 진행형적 과정에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과 욕망의 순환과 재생의 흐름에 입각한 대안적인 경제 질서를 생각하는 것은 색다른 미래를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nbsp;  편집자   짧은 인터뷰지만, 끝으로 독자에게 해주실 말씀은요?  &nbsp;  신승철      욕망자본론은 미래진행형적인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철학자가 의미화하는 모델이나 답이 아니라, 참신한 문제의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색다른 문제의식에 접속하여 상상력을 극대화하고, 독특한 욕망을 유통시킬 때 독자 역시도 아주 색다른 생각의 경로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의 미에서 이 책은 대안 경제 모델이라는 답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대신 각자가 갖고 있는  욕망을 통해서 ‘네가 무엇을 원하는지?’라는 질문을 던지도록 만들어주고 대안 경제를 스스로 사유할 수 있도록 인도합니다.   &nbsp;  ]]></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4558/12/cover150/8997779419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5581265</link></image></item></channel></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