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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밤, 불꺼진 거실에서 쇼파에 누워 홀로 이 슬픈 영화를 보고 있던 나는, 2003년 이후 또 눈물을 흘려야했다. 슬픈영화라는 걸 알면서도, 그때 눈물 와락 쏟아냈다는 걸 알면서도, 또 영화를 봤다. 슬프디 슬픈 뻔한 멜로라는걸 알면서도 말이다. 영화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건 흔해빠진 슬픈 멜로의 방식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멜로 영화 감독들은 여전히 사랑하는 이를 하나씩 죽인다. 관객은 다 예상했으면서, 다 알고 있으면서도, 슬퍼하고 감동하고 눈물 흘린다.

  "나를 슬프게 하는 것은 세상 마지막 순간이 아니라 나로 인해 눈물지을 당신입니다."

  학교 동아리 신입생과 동아리 회장으로 만난, 인하(박해일)와 희재(정진영). 우리의 만남은 처음이 아닙니다. 지하철에서 나는 당신의 모습을 봤습니다. 당신의 뒤에 서 있었습니다. 무서워하지도 않고 바득바득 할 말 다 하는 당신의 모습을 봤습니다. 그리고 지하철 자판기에서 동전이 떨어져 굴렀을 때 난 그 동전을 주워 당신에게 건네줬습니다. 기억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때 바람이 불며 당신의 머리결이 흩날렸고 당신에게서 국화꽃 향기가 났습니다. 사랑합니다.



* 헌책방에서 책꽂이 사이로 사랑하는 그녀를 바라보는 인하의 모습, 그리고 책을 읽으며, 음악을 들으며, 감상에 빠져있는 희재.

  동아리 엠티날 물에 빠진 희재를 건져넨 인하는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다. 그리고 깨어난 그녀를 향해 사랑고백을 한다. 사랑합니다. 아니다 그것은 열정일 뿐이다. 시간이 지나면 깨닫게 될 거다 라며 거절하던 희재. 인하는 희재의 입술에 키스를 하고, 희재는 털털 털어버린다. 시간이 흘러 희재는 동아리 선배와 결혼을, 인하는 군입대를. 하지만 곧 교통사고로 희재는 부모님과 남편을 잃고, 자신 또한 세번의 수술을 통해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겨우 살아남았다. 인하는 라디오피디가 되었고, 매주 목요일 자신의 사연을 가명으로 내보낸다.



* 인하의 오랜 기다림과 희재의 외면이 끝나고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결혼한다. 이제 불행 끝 행복 시작이면 좋으련만...



* 암을 숨기는 그녀, 사실을 알지만 모른척 하는 그. 희재는 아이 낳으면 귀찮은 일은 다 인하씨보고 하라한다. 빨래도 하고, 기저귀 갈고, 분유 만들고, 글자  숫자 가르치고. 하지만 인하는 안다. 그녀가 할 수 없기에 그에게 시키는 것이란 걸. 나무야 사랑해. 바다야 사랑해. 하늘아 사랑해. 엄마 사랑해. 아빠 사랑해.  

  그때의 사랑은 시간이 지나서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열정이 아니었습니다. 세월이 한참 흐른 지금도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제 선배가 아닌 아내로 불러봤으면 좋겠습니다. 결혼을 했지만 희재는 임신한 상태에서 암을 앓고 있었다. 아이를 살리자. 그리고 내가 죽자. 나는 어차피 죽을 몸.

  오랜 기다림 끝내 찾아온 사랑의 결말은 너무나 슬프다. 그토록 이 사람만을 바라봤고 이제서야 우리에게 행복이 오려하는데, 세상은 너무나 무심하다. 어떻게 그런 시련을 겪고 일어선 그녀에게 이제는 목숨마저 앗아갈 수 있단 말이냐. 희재는 인하에게 병을 숨기고, 인하는 알고 있으면서 모른 척 하고. 정말이지 못봐줄 두 사람이다. 서로의 사랑이 다칠까봐 조심스러워하는 두 사람의 모습은, 너무나 슬프다.

  나, 머잖아 당신을 떠나, 나 머잖아 죽는대, 하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자존심이 상해서 도저히 못하겠습니다. 그의 슬픔이 무서워서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나는 그를 떠날 수 없는데, 내 사랑이 그렇게 약해 보이는 건 너무나 싫기 때문입니다. 그가 나 때문에 절망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 1999. 11. 9 희재의 일기장 중에서 -

  희재는 인하가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사연을 보내지만 한동안 인하는 알아채지 못했다. 그 우울하고 슬픈 편지의 주인공이 자신의 아내, 희재라는 사실을. 그걸 알고 절망하던 그의 모습, 차 옆에 쭈그리고 앉아 두 손 얼굴 감싸며 울고 있는 그의 모습은...

  저렇게 슬픈 사랑은 말고, 저렇게 아름다운 사랑은 하고 싶다 라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영화다. 인하와 희재의 사랑이 슬프기에 아름다운 것은 아니므로. 만약 슬프기에 아름답다면 그것은 너무나 가혹하다. 차라리 그렇다면 아름다운 사랑을 하지 않으련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사랑은 슬프기에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너무나 간절하고 진실되기에 아름다운 것이다.  한 사람의 오랜 기다림 끝에, 그리고 만신창이가 된 자신을 보살펴준 그 사람에 대한 보답으로서 맺어진 사랑, 애써 그의 사랑을 외면해왔지만 이제는 안다. 그가 나를 너무나 사랑한다는 것을. 이만큼 나를 사랑해줄 사람은 없다는 것을. 두 사람의 사랑은 '슬프기에'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진실되기에' 아름다운 것이다. 진실된 사랑을 하고 싶다.

  나는 몇년전에 비해 진실되지 못한 듯 하다. 불과 5년전까지만 해도 난 한 사람만을 사랑했고 그녀가 아니면 안될 것 같았다. 한 곳만 바라보는 사랑, 내 모든 마음을 다 줄 수 있는 사랑이었다. 하지만 지금 난 그렇지 못한 듯 하다. 왜 그럴까. 그래서 그런 내 자신이 싫을 때도 있다. 내가 나 자신이 이해되지 않을 때도 있다. 괴롭고 슬프다. 진실되고 솔직하고 순수하지 못한 나를 발견할 때.

  "나를 슬프게 하는 것은 세상 마지막 순간이 아니라 나로 인해 눈물지을 당신입니다."

  사랑하는 상대에 대한 배려가 무엇인지, 상대를 사랑하는 것이 어떤것인지 제대로 보여준 영화였다. 간밤에 홀로 청승맞게 눈물 뚝뚝 흘리며 내가 지금 뭐하는거야 나 싸이코 같아, 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뭐 어때. 감동적인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리는 건 당연한거 아니야? 오히려 그러지 못하는게 더 이상한거지. 나중에 시간이 또 한참 흐른 뒤에 다시 보고 싶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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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 자서전
체 게바라 지음, 박지민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4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처음 그를 접한 것은, 혁명가로서의 그가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한 외국 록밴드의 우상으로서였다. 지금은 해체한 Rage against the machine 이라는 유명한 뉴메틀 밴드가 있었다. 이 밴드의 보컬 잭 드라 로차 와 기타리스트 탐 모렐로는 체 게바라를 사랑했고, 공연 때면 그의 커다란 사진을 배경으로 삼곤 했다. 그들은 '기계에 대한 분노'라는 그들의 밴드명과도 같이 자본주의가 낳은 병폐들에 대해 음악으로서 분노를 표출했다. 미 제국주의에 대해, 자본주의에 대해, 그들은 분노했다. 그리고 전 세계 젊은이들은 그들의 음악을 듣고 열광했다. 심지어 미국의 젊은이들까지도. 현재 활동하고 있는 미국을 가장 심하게 비판하는 미국인으로 '노엄 촘스키'를 꼽곤 한다. 그의 미 제국주의에 대한 분석과 경멸, 분노는 정말이지 '췩오'다. 미국을 비판하는 지성인으로 촘스키가 있었다면 불과 몇년전만 해도, 미국을 비판하는 뮤지션으로는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이 있었다. 탐 모렐로, 하버드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국회의원 보좌관으로도 일했던 그가 때려치고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고자 밴드를 조직했다.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을 통해 접하게 된 '체 게바라' 라는 이름. 아니 그가 누군데 이렇게 많은 이들이 숭배하고 열광을 하는거지?! 라는 의문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 그래서 그를 뒷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쿠바의 유명한 혁명가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리고 2000년 3월, <체 게바라 평전>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체에 대한 나의 의문을 충분히 해소해주었다. 이후 체 게바라 열풍이 불면서 젊은이들은 너나 나나 그의 사진이 인쇄된 티셔츠를 입고 다녔고, 평전은 베스트셀러에 안착했다. 아니 도대체 왜 이런 열풍이 부는거지? 솔직히 이해가 안됐다. 그를 알게 되고 그를 좋아하게 되었지만 이와 같은 과잉 숭배 현상은 당황스러웠다. 나 같은 이들이 많아진건가? 그 뒤로 그에 관한 책이 물밀듯 쏟아진 것은 당연지사. 왜냐면 흥행코드였으므로. 내면 왠만큼 수익은 보장된다. 그러니 일단 내고보자.

  <먼 저편>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카스트로의 쿠바> <체 게바라, 인간의 존엄을 묻다> <체 게바라와 쿠바혁명> <체의 마지막 일기> <체 게바라 핸드북> <체 게바라가 살아 한국에 온다면> <체 - 한 혁명가의 초상> 심지어 <소설 체 게바라>까지. 엄청나다. 한 사람에 대해 이렇게나 많은 책들이 나올 수 있다는 건, 마르크스 이후 처음이 아닐까 싶다.

 지금 소개하는  <체 게바라 자서전>은 체 게바라 흥행시기에 맞춰 나온 기획상품은 아니다. 출판일이 2005년 겨울이니 적어도 시기에 맞춰 팔아먹기 위해 나온 책은 아니다. 내가 그에 관한 책을 접하는 건 2000년에 읽은 <체 게바라 평전> 과 더불어 이 책이 두번째다. 앞서 읽은 책은 평전이었고, 이 책은 자서전이란 이름으로 나왔다. 평전과 자서전은 어떻게 다른가?

  '평전'이라는 것은 비평을 겸한 전기를 말한다. '자서전'은 자기가 쓴 자기의 전기를 말한다. 어떤 한 인물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공통적이지만 이야기의 화자가 다른 것이다. 평전은 남이 그 사람의 이야기를, 자서전은 내가 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체 게바라는 살아생전 자서전을 남기지 않았다. 그가 남긴 수많은 편지글과 칼럼, 시는 존재하지만 자서전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그런데 어떻게 자서전이 출간될 수가 있는가. 말이 자서전이지 후대의 사람들이 그가 남긴 이런저런 글들을 모아 만들어 짜깁기해 낸 책이 자서전이다. 비폭력 불복종 운동으로 유명한 간디의 경우도 자서전을 쓰지 않았지만 <간디 자서전>이라는 책이 있듯이 말이다.  '20세기 가장 완전한 인간의 삶'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는 체 게바라의 자서전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1928년 6월 14일에 태어나 1967년 10월 9일의 날짜로 생을 마감한 이 젊은 혁명가 체 게바라. 그가 죽음을 맞이했을 때의 그의 나이는 39살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한창 사회생활을 할 나이다. 돈 좀 모아 인생을 즐길 나이다. 하지만 그 나이에 그는 일찌감치 생을 마감했다. 아르헨티나 인이면서 쿠바 혁명가로 이름을 날린 체 게바라. 그는 아르헨티나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의대를 다니던 대학생이었다. 친구와 함께 떠난 여행길에 삶의 전환기를 맞이한다. 본래 계획은 쿠바, 콜롬비아, 베네수엘라를 거쳐 다시 아르헨티나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행길에 보게 된 부조리한 사건들. 그는 과테말라 혁명에 참가했다 멕시코로 망명, 그곳에서 현재의 쿠바 국가 평의회 의장 피델 카스트로를 만나게 된다. 그를 만난 뒤, 그의 제안으로 쿠바의 혁명 선두주자로 나선다. 쿠바혁명은 성공했고, 그는 그곳에서 젊은 나이에 중앙은행 총재와 산업부 장관을 역임했다. 고생한 만큼 명예도 누렸다. 하지만 그에게 그것은 명예가 아니었다. 혁명을 완성시키기 위한 뒷작업일 뿐. 그는 혁명이 자리잡았다고 생각할 즈음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다시 혁명길에 오른다. 쿠바의 혁명이 목표가 아니라, 그는 라틴 아메리카의 혁명, 나아가 세계의 혁명을 꿈꾸었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에 불가능한 꿈을 지니자." 그는 가슴 속에 불가능한 세계 혁명의 꿈을 지닌 채, 리얼리스트가 되어 혁명길에 오른다. 세계혁명의 꿈은 정말 꿈에 불과했다. 볼리비아에서 그는 미국의 지원을 받은 볼리비아 정부군에 사살당한다. 포로는 사살할 수 없다는 제네바 협정을 깨면서 그는 볼리비아 정부에 의해 죽었다. 그의 유해는 불과 10년도 안된 시기, 1997년에 비로소 쿠바로 오게 된다.

  <체 게바라 자서전>은 그가 남겨놓은 수많은 글들을 정리해서 묶어놓은 책이다. 어떻게 보면 그의 편지글과 칼럼과 인터뷰와 시들을 짜깁기해 낸 자료집에 불과하지만 이렇게라도 그를 접할 수 있는건 다행인지도 모른다. 자서전은 애초 없었다. 그가 남긴 글 묶음이 자서전을 대신할 뿐이다. 친구에게 쓴 편지, 어머니에게 쓴 편지, 이모에게, 죽어간 동료에게 쓴 편지, 그리고 혁명을 역설한 글, 기자와의 인터뷰가 실려있다. 생생한 그의 친필 편지 사진도 실려있다. 사진도 있다. 그는 혁명가이기 전에 사진작가이기도 했다. 사진작가로 먹고 살았고, 사진찍기를 좋아했다.  자서전의 제 역할을 해주지는 못하지만 그의 수많은 자료를 한데 묶어놨다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책이다.

  어쩌면 체 게바라는 실제에 비해 지나치게 숭배받는지도 모른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왜 미국의 젊은이들 조차도 체 게바라에 열광하는가. 그것은 마르크스가 죽은지 오래된 지금에서도 마르크스가 주목받는 이유에서 공통점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맑시즘을 토대로한 舊 소련의 혁명은 실패했다. 그리고 체 게바라의 쿠바의 혁명은 성공했지만 라틴 아메리카의 혁명, 세계의 혁명은 실패했다. 혁명은 모두 실패했지만 마르크스와 체 게바라, 두 사람은 현실에서 직접 행동하며 자신이 꿈꾸는 혁명을 이뤄보려 노력했다. 실천하는 지식인으로서의 삶을 보여주었다. 혁명의 성공여부를 떠나, 그들이 옳고 그름을 떠나, 그들은 생각하는 바를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열정과 이상을 보여주었다. 그것이 그들이 주목받는 이유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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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6-01-27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 누가했게요?

마태우스 2006-01-27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를 본받는 건 어렵겠지요. 그를 좋아하는 것만으로 소임을 다했다고 생각하면 안될까요.......................

마늘빵 2006-01-27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정답 : 부리.
 
체 게바라 자서전
체 게바라 지음, 박지민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4년 12월
구판절판


"나는 글쓰기가 구체적인 문제에 접근하는 하나의 방식이며, 자신의 감수성으로 인해 삶에 대해 취하는 태도라고 믿습니다." -13쪽

"내가 사진 하나를 제기하며 밤에 찍은 거라고 말하면 당신은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나에게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당신이 내 글에 찍혀 있는 풍경을 모르는 상태라면 내가 말하는 진실에 대해 다른 대안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124쪽

어머니가 권하시는 적당한 자기중심주의는 노골적이고 줏대없는 개인주의입니다. 저는 그와 같은 20세기의 미덕을 제 안에서 없애기 위해 무척 노력해왔습니다. 제가 의미하는 것은 제가 모르는 겁쟁이 유형이라기보다는 방종한 사람입니다. 오해나 다른 이유로 자신의 힘을 자각하면서 생겨나는 자기만족으로 이웃에 무관심한 사람 말입니다.
이전에 훈련을 하던 때도 그리고 감옥에 갇힌 요즘도 저는 자신을 다른 무장한 동지들과 완전히 동일시합니다. 예전에는 어리석다거나 최소한 이상하다고 느꼈던 말이 생각납니다. '나'라는 생각이 '우리'라는 생각에 자리를 모두 내줄 정도로 투사집단 구성원들이 서로를 완전히 동일시하는 것에 관련한 것이지요. 그것은 공산주의 원칙이었습니다. 이론적인 과장인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우리'를 위해 '나'를 거부하는 이 느낌은 정말 아름다웠으며, 여전히 아름답습니다.
위대한 발명이나 예술 작품들이 온순함 또는 '적당한 자기중심주의'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생각하시면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위대한 일에는 열정이 필요하며 그리고 대담성도 상당한 정도 필요합니다. 이런 자질은 인간으로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1956년 7월 15일, 멕시코에서의 편지 '위대한 일에는 열정이 필요하다' 中)-168쪽

"만물의 척도인 인간으로서의 나는 여기에 내가 본 것들을 나만의 언어로 풀어갈 것이며, 또 나만의 입을 통해 이야기할 것이다."-2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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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으로 보는 마르크스
조너선 울프 지음, 김경수 옮김 / 책과함께 / 2005년 11월
평점 :
품절


 

  입대 한 뒤 자대배치 받기 바로 전이었다. 궁금증에 대해서 질문하고 답변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그때 난 이런 질문을 던졌다. "책은 마음대로 볼 수 있나요? 듣기로는 고참들이 책 못보게 한다고 하던데..." 상대는 대답했다. "그럼 되고말고. 다 되니까 걱정마라." 그래서 내가 추가질문을 던졌다. "마르크스 책도 되나요?" (한참 뜸을 들이더니, "...... ...... 왜 하필 마르크스를 보려고 하지?" 군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는 나는 실제로 보지도 않을 거면서 반공주의 교육의 선두가 되었던 군대에 일부러 이런 질문을 던졌다. 재밌잖아. 반응도 궁금하고. 나 싸이코냐고? 흠. 약간 그런가봐.

  내가 군대에 간 것이 2001년 12월이었고 제대한 것이 2004년 1월이었으니 세월이 많이 흐르진 않았다. 2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시대의 변화를 절감할 만큼의 세월은 아니다. '마르크스'라는 이름만으로도 주변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것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았다. 되려 1980년대에 마르크스를 이야기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웠을지도 모르겠다. 그때는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마르크스를 읽던 시절이었으니까. 나는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지만 마르크스는 이름만 들어봤다. 대학 강단에서는 마르크스를 다루지 않았다. 우리 학교만 그런건 아닌 듯 했다. 강단에선 독일철학과 그리스철학이 강세를 이루었고, 가끔 영미철학과 프랑스철학이 논의되기도 했다. 마르크스는 그가 철학사에 남긴 업적에 비해 너무나 지나친 홀대를 받고 있었다. 왜? 마르크스를 억압하던 1980년대 대학강단의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져오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그 하나일테고, 전공자가 많지 않다는 것도 하나일테지. 마르크스는 언제나 한편으로 뜨거운 감자였고, 한편으로 구석에 내던져진 못생긴 돌덩이였다.

  왜 그런데 지금도 마르크스를 이야기하는가? 마르크스의 인기를 실감하지 못하겠다고? 그런 분은 지금 바로 인터넷 서점으로 달려가서 검색 목록에 '마르크스'라고 쳐보시길. 엄청난 책들이 검색될 것이다. 또한 그 책들 중 다수는 판매량이 엄청날 것이다. 보통 3000부 이상 정도 찍히면 손해보지는 않는다고 들었다. 직접 책을 썼던 어떤 철학자로부터 들은 말. 마르크스라는 이름으로 낸 책들은 손해를 보기는커녕 오히려 돈벌이를 톡톡히 해주고 있다. 마르크스는 결코 실패하지 않는 흥행코드이다. 마르크스가 죽은지 한참 지났고 소련이 붕괴한지도 한참 흘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의 생애를 다룬 책들, 마르크스의 저작들이 계속해서 씌여지고, 번역되고 있다. 아니 도대체 왜? 실패한 혁명을 노래한 주인공인데.

  <한권으로 보는 마르크스>는 이 물음에 대해 대답해준다. 왜 지금도 맑스를 읽어야 하는가? 라는 영문원제를 달고 있는 이 책. 새로운 한글제목보다는 영어원제가 더 어울리지 않나 싶다. 마르크스의 사상과 생애를 소개한 책들은 널렸다. <자본론> <독일 이데올로기> <공산당 선언> 등의 책들이 새로이 번역되어 출간되었고, <마르크스 평전> 과 같은 책도 나왔다. 수많은 마르크스 서적이 나와있는데 이 책은 그 많은 책들 틈을 사이에서 어떤 가치를 지니는가? 왜 이 책을 읽어야 하는가? 마르크스를 접하기는 쉽지만 - 책이 널려있다는 점에서 - 마르크스를 읽기는 쉽지 않다. 대학 학부시절 마르크스에 관심은 있었지만 마르크스를 읽지 않은 건 어렵기 때문이다. 칸트나 헤겔도 어렵지만 마르크스도 어렵다. 아니 뭐 쉬운 철학자가 어디있겠냐만 그래도 어렵다. 누가 가르쳐주는 것도 아니고 혼자 읽어야 하는데 이걸 어떻게? 겁먹고 안읽었고 졸업했으며 세월이 꽤  흘렀다. 사실 지금도 마르크스는 내게 어렵다. 이 책은 나 같은 이들을 위한 책이다. 마르크스를 접하고 싶지만 어려워서 떨고 있는 이들을 위한 책. 마르크스의 생애와 사상에 대해 가장 간단하게 압축적으로 보여준 책이라는 생각이다.

  제 1장 서문, 2장 초기 저작들, 3장 계급 역사 그리고 자본, 4장 왜 여전히 마르크스를 읽어야 하는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참고문헌과 '깊이읽기'를 위한 안내'까지 총 5장으로 나누어져있다. 서문에서는 마르크스의 생애를 위주로, 그리고 한장씩 뒤로 넘어가며 그의 초기저작에서 후기저작으로, 또 경제, 정치, 종교, 소외 등의 그의 철학에 있어서 중요한 핵심개념들을 짚어가며 간단하게 살펴보고 있다. 쉽게 썼다고 하지만 내게는 여전히 어려울 수 밖에 없다. 난 아직도 그의 이런 개념들이 낯설게 느껴진다. 감히 이 책을 읽고 마르크스를 조금 알았어요, 라고는 말 못하겠다. 이 얇은 책 한권을 읽더라도 하나하나 짚고 넘어가야지, 그냥 소설책 읽듯 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해선 마르크스를 알 수 없다.  

  봉건제에서 자본주의, 그리고 자본주의에서 코뮤니즘으로 넘어오는 단계를 설정하고, 자본주의의 병폐를 지적한 마르크스. 자본주의와 공존했지만 맑시즘을 기초로 한 舊 소련사회는 미국의 자본주의에 졌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병폐는 분명 드러나고 있고, 이런 시점에서 마르크스는 주목받고 있다. 그의 지적이 모두 옳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 자본주의를 비판한 최초의 철학자이고 마지막 철학자였다는 점에서 그는 의미가 있다.

  "철학자들은 세계를 오직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해석해왔다. 문제는 그것을 변화시키는 일이다."

  (마르크스의 묘비명이자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의 글)

  많은 철학자들이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해서 여러가지 방식으로 해석을 해왔고, 또 그것이 철학이 해야하는 역할이었다. 하지만 대개는 해석으로 그쳤고, 철학은 현실에서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마르크스 또한 새로운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계를 해석했다. 그러나 그는 나아가 현실의 문제를 지적하고 변화시키려고 했다. 그는 실천한 철학자이다. 구름 둥둥 추상적인 이야기만 하는 철학자가 아니라 바로 이 땅의 현실 속에 잠재되어 있는 혹은 드러나고 있는 문제들을 지적하고, 그 해결방안을 모색한 철학자이다. 그래서 그는 철학자이면서도 정치학자, 경제학자로도 불리우는 것이다. 그가 건드리지 않은 분야는 없다. 종교, 정치, 경제, 사회, 사상 등 거대한 영역들을 하나 둘 점령해나갔다.

  왜 우리는 마르크스를 읽어야 하는가? 마르크스가 모두 옳았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저자는 마르크스를 이야기하며 마르크스의 사상과 생애를 소개하며 그를 비판하기도 한다. 마르크스에게 있어 부족한 점은 무엇이고, 어떤 점에서 그의 의견이 틀렸는가를 이야기한다. 결국 마르크스의 가장 거대한 이론들은 입증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사유 마저 폐기할 순 없다. 입증이 되지 않았다고 해서 폐기해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그가 옳았건 그르건 간에 그는 지금 이 시점에서도 검토해봐야할 철학자이다.

  "위대한 철학자들이 작품을 창조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오로지 자신들이 바로 진리를 발견했거나 발견 직전에 있다고 정열적으로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위대한 철학 작품의 중심부에는 언제나 진리를 향한 갈망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결과물의 가치는, 실제로  그 작품들이 이 목표를 성취했는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이를 논외로 하면, 진리보다 훨씬 더 흥미로운 것들이 많이 있다. 이런 방식으로 이해할 때, 마르크스의 저작들은 다른 어떤 것들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있다."(P142-143)

  그는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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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마개 2006-01-27 0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정말 한권으로 얼개가 그려지나요??
군대 얘기 하시니 저도 생각나는것..학교 다닐때 감방에 간 넘들이 책 넣어 달라고 해서 막스베버 책을 넣으면 짤립니다. '막스'가 들어가니까 같은 편인줄 알고...

미미달 2006-01-27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쪼오기 오타 있어요.
리뷰 잘 보고 갑니다. ㅎㅎ 어떻게 하면 이렇게 리뷰를 잘 쓸 수 있는건지...

마늘빵 2006-01-27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쥐님/ ㅋㅋㅋㅋ 막스 베버. 저도 첨에 멋모를땐 그 막스가 이 맑스랑 같은 줄 알았어요. 한권으로 얼개가 그려진다는건 좀 무리가 있는거 같구요. 중요 개념들을 짚고 넘어갈 순 있을거 같아요.
미달양 / 어디??? 알려줘야 고치지. 다시 읽어봐야하잖아. ㅡㅡ;;;;

마늘빵 2006-01-27 1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달양 / 오타 찾았어. 두개. '뜨거움 감자' -> '뜨거운 감자' , 'ㅇ 안았다' -> '않았다'
 

 

 

 

 

  비록 오래, 많은 상영관에 걸리진 못했지만 잠시나마 극장에 내걸렸던 애니메이션이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중심이 되고, 신인 애니메이션 감독들이 모여서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아니 애니메이션 제작에 왠 국가가 개입? 이라는 반응, 나 역시 처음에 그게 참 의아했고, 또 나 안에 잠재하고 있는 '국가'에 대한 거부감 또한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한 기관이 이 같은 애니메이션 제작에 뒷받침이 되고, 중심이 되었다는 사실이 슬프지는 않다. 그렇다고 그렇게 기뻐할 것도 없지만. 난 지금도 국가는 지나치게 각각의 국민들의 생활에, 또 문화에 개입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아니 '지나치게'라는 단어도 빼자. 그냥 국가는 국민 사생활이나 문화에 개입해서는 안된다. 그것이 타인을 해하지 않는 한.

  <별별이야기>는 차별에 대한 유쾌한 풍자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겪을 수 있는 차별에 관한 문제들을 이 안에 수록된 6개의 애니메이션은 때로는 감동적으로, 때로는 재밌게 그려내준다. 이 애니메이션은 2005년 전주 국제 영화제 월드 프리미어 상영, 2005년 밴쿠버 영화제 용호상 부문 초청, 2005년 자그레브 국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 경쟁부문에 초청되었다고 한다. 글쎄 애니메이션에 무슨 영화제가 유명한지 어떤 상이 최고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이 애니가 세계의 관심을 받았다는 말은 확실한 듯 하다.

    이 안에 너, 나, 우리의 이야기가 있다. <별별이야기>는 차별의 문제를 다룬다. 장애인 차별, 성차별, 외모지상주의, 왕따, 대학입시, 외국인 차별 등 흔히 우리가 주변에서 적어도 한번씩은 겪어나 봤을 법한 일들이다. 아직 관용의 사회라고 볼 수는 없지만 일단 우리 사회에는 관용을 이야기할 수 있는 풍토가 조성되어있고, 차별을 고쳐나가려는 노력이 보인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차별이 존재하며,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직접 겪는 일이 아니라 하여 무관심하게 수수방관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차별의 나의 문제가 아니라 너의 문제로 여기고 있는 것이 바로 문제점. <별별이야기>는 이야기한다. 여기에 나의 이야기, 당신의 이야기,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가 들어있음을.

 첫번째 애니. <낮잠>은 유진희 감독 작품, 작업방식은 2D. 뭔지 잘 몰랐지만 애니를 보고 나니 이해된다. 2D가 뭔지. TV동화 행복한 세상인가 하는 프로그램에서 보여지는 방식으로, 손으로 그린 만화에 연속성을 부여하는 방식. 간결하지만 깔끔하고 선이 이쁘다.

  <낮잠>은 장애인 차별에 대한 이야기다. 발이 없고, 두 다리의 길이가 짝짝이인, 게다가 한손은 손이 없고, 다른  한손은 셋째, 넷째 손가락이 없다. 수영장에서의 따가운 눈초리, 유치원에 다니지 못하는 서러움, 교통수단이용의 불편함 등 장애인이 겪는 일상의 차별에 대한 문제를 바로 라는 귀여운 여자아이의 꿈 속을 통해 그려낸다. "달콤한 낮잠 속에서 펼쳐지는 불편한 꿈"



* 자신의 뿔가지 잘라버린 염소와 어린 새끼양. 양과 다른 모습을 한 젖소, 닭, 오리, 돼지 등 한무더기가 농장에 온 뒤로 염소는 그들과 어울릴 수 있었다.

  두번째 애니. <동물농장>은 왕따 문제를 다루고 있다. 양들이 사는 농장에 단 한마리 염소가 있다. 염소는 양들과 어울리고 싶지만 번번히 매맞아 돌아온다. 혼자 밥먹고, 혼자 놀고, 혼자 자며 염소는 외로움을 겪는다. 양들과 다르게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배척당해야 하는 신세. 왕따다. 나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하여 왕따를 시키는 경우, 학교에서나 직장에서나 사회에서나 경험할 수 있는 이야기다. 머리가 덜 떨어졌다고 해서, 너무 이쁘다고 해서, 잘난척한다고 해서 등등 여러가지 이유로 왕따를 당한다. 물론 왕따당하는 사람에게도 문제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왕따는 너와 너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의 풍토 속에서 발생하는 문제다.

  세번째 애니. <그 여자네 집>. 결혼한 가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들. 남편은 씻고 밥먹고 설거지도 안하고 옷도 안걸어놓고 직장에 나가고 들어와서는 아기와 아내에겐 관심없고 또 밥먹고 양말 아무데나 벗어던지고 신문보다 말고 쇼파에 누워 티비보고 한다. 아주 흔한 모습이다. 아내는 청소하고 빨래하고 밥하고 애보고 직장다니고 정신이 없다. 열받은 아내, 어느날 쇼파에서 남편이 자고 있는 사이 진공청소기로 집안의 모든 것을 다 싹쓸어버린다. 심지어 남편까지도. 똑같이 직장에 다니지만 아내는 집안일까지 도맡아한다. <그 여자네 집>은 흔히 맞벌이 부부 집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차별을 보여준다.

  네번째 애니. <육다골대녀> 한자로 풀이하면, 고기 육, 많은 다, 뼈 골, 큰 대, 여자 녀. 즉 살이 많이 찐 체구있는 여자를 말한다. 여성에 대한 차별을 노래한다. 대대로 물려받은 못생긴 모양새. 죄다 집적되어 나한테 떨어졌다. 철사같은 곱슬머리, 큰 머리통, 엄청난 덩치, 돼지같은 살덩이, 짧은 목, 짧은 키, 게다가 성질도 더럽다. 이런 여성이 이 사회에 발붙일 곳은... 없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소개팅을 나가도, 회사 면접을 가도 환영받지 못한다. 외모지상주의가 되어버린 이 시대, 여자들은 다이어트하고 요가하고 몸매가꾸며, 남자들도 운동해 너도나도 몸짱만들고 심지어 이제 성형도 한다. 못된 건 용서해도 못 생긴건 용서못한다는 풍조. 문제있다. 이 애니는 바로 그런 풍조를 꼬집는다.

  다섯번째 애니. <자전거 여행> 장애인 차별을 이야기한다. 아무도 타지 않은 자전거 한대가 산길을 달리고, 골목길을 달린다. 자전거는 길을 움직을 때마다 기억을 더듬는다. 연인이 행복한 모습은 사라지고, 공장에서 혼나고 있는 메하르가 보인다. 네팔노동자. 몇달 째 임금이 체불되었고 일만 죽어라 했다. 사장은 도망갔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불법체류감시간이 들어온다.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가끔 가다 외국인 연인을 본다. 얼굴 하얀 유럽이나 미국의 연인이 아닌, 필리핀인지 말레이시아인지 네팔인지 어딘지 모를 외모를 한 젊은 두 연인. 그들도 우리의 다르지 않다. 동남아 출신의 노동자라고 하여 과거 미국인들이 원주민 다루듯 때리고 짓밟고 사기쳐도 되는 것 아니다. 그들도 사람이고, 슬픔과 기쁨을 느끼고, 사랑하고, 행복을 원한다.



* 아직 대학에 가지 못해 사람의 모습으로 변하지 못한 수많은 고딩들, 그들의 자화상이다.

  여섯번째 애니. <사람이 되어라>. 유명한 만화가 박재동씨의 작품이다. 각기 다른 동물얼굴을 하고 있는 고딩들. 학교에서, 집에서 사람이 되라고 말한다. 심지어 급훈이 '대학가서 사람되라'다. 대학을 위해 오로지 공부하고 내달려야한다. 왜? 사람이 되기 위해. 대학을 나와야 사람이 된단다. 대학 안나오면 지금 하고 있는 동물의 모습으로 평생을 살아야 한다. 사람의 얼굴을 갖추기 위해 우리는 대학에 가야한단다. 대학 못가면 사람도 아니란 말씀. 우리나라 고등학교의 입시교육풍토를 꼬집는다. 무조건 대학가라고 닥달하는 부모님과 선생님. 오로지 목표는 좋.은. 대.학. 여기에 우리의 꿈과 희망, 목표는 없다. 일단 대학이다. 모든 교육이 대학입학을 향해 있는 지금의 현실을 풍자한다.

   여섯편의 애니메이션. 각기 다른 주제를 가지고 있고, 각기 다른 제작방식으로 만들어졌다. 10분에서 15분가량의 짧은 애니메이션 안에 각 작품의 감독들은 압축적으로 주제를 풀어냈다. 때로는 감동을 주면서, 때로는 해학과 풍자로. 있는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기만 하는 방식으로. 현실에 직접적인 비판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것은 가장 절실하게 차별을 이야기하는 방식이다. 차별이라는 것은, 지금 우리가 당하고 있는 것일수도 있고, 우리가 타인에게 가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때로는 가해자의 모습으로, 때로는 피해자의 모습으로 우리는 각각의 애니메이션 속에서 자신을 발견한다. 그리고 친구를, 우리를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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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1-26 23: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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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1-26 23: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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