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의 즐거움 (양장)
히로나카 헤이스케 지음, 방승양 옮김 / 김영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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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보다 많이 별로였다. 기대를 많이 했더랬다. 오래전부터 이 책을 봐야겠노라고 점 찍어두었고 정가 6천 9백원의 그다지 비싸지 않은 가격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책들을 구입하느라 번번히 순위에서 밀렸다. 그래서 이번에 마음먹고 왕창 지르면서 읽고 싶었던 책들의 상위 목록을 주문했던 것인데 나에게 참 많은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큰 법이라고 하지만.

  <학문의 즐거움>이라는 이 책은 수학의 노벨상이라고 불리우는 필드상을 받았다고 하는 일본의 유명한 수학자 히로나카 헤이스케가 저자이다. 최근 일간지 한국일보에서는 "나는 왜 공부를 하는가"라는 제목으로 매주 한명의 학자를 뽑아 글을 연재하고 있는데, 이 책은 마치 히로나카 헤이스케의 "나는 왜 공부를 하는가" 라고 할 수 있겠다. 즉 그 말은 '학문'일반의 즐거움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헤이크세 자신의 개인적인 학문의 즐거움을 논하고 있다는 것이고, 이는 곧 그의 자서전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학문의 즐거움>이라는 큰 제목 위에는 작은 글씨로 "즐겁게 공부하다 인생에도 도통해버린 어느 늦깍이 수학자의 인생이야기"라는 아주 적절한 긴 제목을 붙이고 있지만, 에... 나는 인터넷 주문을  하느라 이것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오프라인 서점에서 샀더라도 '학문의 즐거움'이라는 매력적인 제목 때문에 위에 적힌 작은 글씨 따위는 무시했을 것이다. 출판사가 일부러 상업적 술수를 쓴 것 같지는 않다. 다만 내가 제 꾀에 속아 넘어간 것일 뿐.

  잘 모르는 일본의 수학자의 "나는 왜 공부를 하는가" 따위에는 난 관심이 없소이다. 그래도 기왕 산거 끝까지 읽었지만 그는 매우 뜬 구름 잡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불교가 어쩌고 저쩌고 - 불교를 탓하는 것이 아니라 불교에서 말하는 인, 연 과 같은 약간은 뜬 구름 잡는 듯한 이야기를 현실세계의 '학문'을 논함에 있어 적용하고 있다는 말 - 하면서 구름 위에서 신선놀음하고 있는데 난 도통 그의 말에 마음이 울리질 않는다. 전혀 학문을 하고 싶다 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순전히 자기 자신을 위해 혹은 헤이스케 라는 수학자에게 관심있는 독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책이 아닌가 싶다. 제목만으로 현혹되지 말지어다.

  순수하게 '학문의 즐거움'을 읽고 자극을 받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적합하지 않다. 결코 자극도 신선함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단 헤이스케를 알고 그에게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재밌을지도 모르겠다.

 괜찮은 문구가 있어서 하나 소개.

  " '지혜의 깊이'는 공부를 통해서만이 비로소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공부를 하지 않은 사람의 두뇌는 인간 특유의 폭넓은 사고의 훈련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깊이 생각하는 힘, 즉 '지혜의 깊이'가 키워지지 않는다.
지혜에는 '넓이'가 있고, '깊이'가 있고, '힘'이 있다. '지혜의 힘'이란 결단력을 말한다."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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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수학계의 노벨상 수상자 히로나카 헤이스케의 "학문의 즐거움"
    from 風林火山 : 승부사의 이야기 2007-09-11 21:59 
    학문의 즐거움 히로나카 헤이스케 지음, 방승양 옮김/김영사 전반적인 리뷰 知之者不如好之者요, 好之者不如樂之者니라. 아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 2005년 9월 13일에 읽고 나서 떠오르는 구절이었다. 論語의 옹야편에 나오는 문구로 모르는 이가 없을 구절이다. 사실 배움의 끝은 없기 때문에 앎 자체에 집중을 하면 그것은 집착이 될 수 있는 것이고 물 흐르듯이 배움 그 자체를 즐기라는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
 
 
이리스 2005-09-01 2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이거 좀 부풀려져서 평가되었다는 느낌도 들고.. 여하튼 이 리뷰에 동감하는 바임돠. 고로, 추천 한 방 꾸욱~

마늘빵 2005-09-01 2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보셨나요? 이 책?
 
학문의 즐거움 (양장)
히로나카 헤이스케 지음, 방승양 옮김 / 김영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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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의 깊이'는 공부를 통해서만이 비로소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공부를 하지 않은 사람의 두뇌는 인간 특유의 폭넓은 사고의 훈련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깊이 생각하는 힘, 즉 '지혜의 깊이'가 키워지지 않는다.
지혜에는 '넓이'가 있고, '깊이'가 있고, '힘'이 있다. '지혜의 힘'이란 결단력을 말한다. -50쪽

"천재란 연구 대상인 문제와 자기 자신이라는 그 두 가지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일체가 되는 사람이다." (어느 물리학자)-139쪽

"사는 것은 배우는 것이며, 배움에는 기쁨이 있다. 사는 것은 또한 무언가를 창조해 나가는 것이며, 창조에는 배우는 단계에서 맛볼 수 없는 큰 기쁨이 있다."-143쪽

학생과의 관계에서 자주 경험하는 일인데, 일본 학생은 'WHY'라든가 'HOW'라고 질문하느 경우가 매우 많다. 말할 것도 없이 'WHY'라는 것은 '왜'라는 것인데, 이것은 '진리'를 물어 보고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해 미국 학생은 'WHAT'이라는 형태의 질문을 많이 한다. "그것은 도대체 무엇이냐?"라는 식으로 물어본다. 이것은 '사실'을 묻는 것이다.
요컨대 일본 학생은 사실의 배후에 있는 진리를 구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WHY'라고 묻는 것이 사실만으로 만족할 수 없기 때문이라면 나름대로 훌륭한 질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정보를 진리로 착각할 때도 있고, 사실을 모르면서 진리라는 말을 혼동하여 자기 만족에 빠지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2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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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달 2005-09-01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책 정말 읽고 싶었는데 읽으셨군요 ~

마늘빵 2005-09-01 1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많이 실망했어요. 별로. 서평은 이따 집에가서... ^^

마늘빵 2005-09-01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걍 너무 뜬구름 잡는 야기만 하고 불교랑 어쩌구 하면서. 흠. 그리구 그냥 자기 살아온 야기에요. 너무나 개인적인 한 수학자의 자서전이라 일반적인 '학문'의 즐거움을 찾으려는 분은 별로 마음에 안드실듯.
 
코끼리에 관한 짧은 우화 - 반 룬 전집 2
헨드릭 빌렘 반 룬 지음, 김흥숙 옮김 / 서해문집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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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헨드릭 빌렘 반 룬. 그는 지금 이 세상에 없지만 그가 생전에 썼던 책들이 다시금 주목받고 있는 이유는 그것이 담고 있는 메세지가 유효하기 때문일터. 반룬 전집 중에서 제 2권 <코끼리에 관한 짧은 우화>를 봤다. 사실 반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가 쓴 <관용>이라는 책인데, 미리 찍어놓은 이 책은 아직도 구입하지 않고 되려 재밌어 보이는 제목의 <코끼리에 관한 짧은 우화>를 먼저 읽게 되었다.

  아프리카의 젊은 동물들이 서구사람들의 문명을 부러워하는 등의 분위기가 형성되자 아프리카에서는 현자인 지둠-지둠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그로부터 받은 답변은 "화상 입은 아이는 불을 무서워한다. 젊은이는 경험을 통해 배워야 한다. 궁금한 자가 직접 찾아 나서게 하라." 누굴 보낼 것인가를 고민 중 냉철한 기린을 통해 코끼리가 좋겠다는 답변을 얻어 젊은 코끼리인 존 경은 영국을 통해 미국으로 떠난다. 서구사회의 가장 전형적인 국가로 미국을 지목한 것. 그곳에서 바라본 미국사회는 너무나도 화려하고 발달되어 있었다. 당연히 우리가 배워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찾아온 두 손님. 강아지와 고양이에 의해 뒷면의 숨겨진 진실을 알게 되고 이어 누군가에게 납치당하는 코끼리.

  책의 두께는 210페이지 가량으로 두껍지도 얇지도 않지만 안의 내용은 별로 없어서 출퇴근길에 다 읽을 수 있다. 한쪽은 짧은 글, 한쪽은 재미난 그림으로 구성되어 나이 어린 아이들이 봐도 재밌을 듯. 그림이란게 매우 단순하고 대충 그려졌지만 각각의 줄거리에 시기적절하게 떨어져 맞음으로써 시너지 효과를 낸다. 줄거리 파악도 쉽고 머리 속으로 만화식으로 그림을 상상하며 읽을 수도 있다.

  결국 이 책에 주는 메세지는 문명사회에 대한 비판이다. 그건 이미 코끼리가 미국으로 떠난 때부터 예감했던 바다. 하지만 결과를 알고 봤음에도 불구하고 재밌다. 코끼리를 도와주는 사람들 조차도 문명사회의 그것으로부터 벗어나지는 못한다. 그를 괴롭히는 사람들은 당연한 거고.

  존 경은 온갖 고초를 겪고 아프리카로 돌아온 뒤 4개월에 걸쳐 보고서를 작성하는데 보고서 전문은 다음과 같다.

  "인간의 문명은 훌륭하고 장대하며 화려하고 놀랍다. 여러 가지 면에서 그것은 정신이 단순한 무생물 위에 이룬 가장 위대한 승리이다. 삶의 현실적인 면에 관한 한 거의 모든 면에서 그것은 측량 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의 방식보다 우월하다. 그러나 깊이 연구한 끝에 나는 인간의 방식에 무언가가 결핍되어 있으며, 그들의 영광스러운 승리 한복판에 조만간 비참하고 수치스러운 패배를 가져올 재앙의 요소가 있다는 유감스러운 결론에 도달했다. 안됐지만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것만은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즉 우리 동물들은 우리의 백인 이웃들을 흉내내선 안된다는 것이다. 인간이 오래 전에 잊어버린 무언가를 우리들은 아직 알고 있다. 그건 진실하고 도리에 맞는 삶은 존재의 궁극적 실체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을 때만 실현 가능하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인간은 자연의 기본 질서에 순응하기를 거부한다. 그 결과 인간은 파멸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보고서를 낭독한 뒤 마지막에 남은 늙은 고릴라 한마리가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쉬고 "구사일생이야!"라고 외치는 대목은 인간문명에 대한 비판에 쐬기를 박아준다.

  뻔하디 뻔한 이야기, 뻔하디 뻔한 결말이지만 부담없이 쉽게 재밌게 읽은 한편의 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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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에 관한 짧은 우화 - 반 룬 전집 2
헨드릭 빌렘 반 룬 지음, 김흥숙 옮김 / 서해문집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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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상 입은 아이는 불을 무서워한다. 젊은이는 경험을 통해 배워야 한다. 궁금한 자가 직접 찾아 나서게 하라."(지둠-지둠의 답변)-24쪽

"인간의 문명은 훌륭하고 장대하며 화려하고 놀랍다. 여러 가지 면에서 그것은 정신이 단순한 무생물 위에 이룬 가장 위대한 승리이다. 삶의 현실적인 면에 관한 한 거의 모든 면에서 그것은 측량 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의 방식보다 우월하다. 그러나 깊이 연구한 끝에 나는 인간의 방식에 무언가가 결핍되어 있으며, 그들의 영광스러운 승리 한복판에 조만간 비참하고 수치스러운 패배를 가져올 재앙의 요소가 있다는 유감스러운 결론에 도달했다. 안됐지만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것만은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즉 우리 동물들은 우리의 백인 이웃들을 흉내내선 안된다는 것이다. 인간이 오래 전에 잊어버린 무언가를 우리들은 아직 알고 있다. 그건 진실하고 도리에 맞는 삶은 존재의 궁극적 실체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을 때만 실현 가능하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인간은 자연의 기본 질서에 순응하기를 거부한다. 그 결과 인간은 파멸하게 되어 있다."(존 경의 보고문)-196쪽

"제 결의문은 이겁니다. 단지 이것뿐이빈다. 즉 우리 코끼리들은 영원히 코끼리로 남아 있기로 결의합시다." (존 경의 결의문)-200쪽

"우리의 세계에는 영원히 변치 않을 오래된 가치, 사랑, 관용을 지닌 것들이 이리도 많은데, 왜 결코 풀리지도 않을 그런 문제들에 대해 신경을 쓴다지? 아내에 대한 사랑과 존경, 친구와의 우정, 우리의 아이들이 훌륭한 후계자가 되도록 키우는 즐겁고 감사한 일, 태양이 먼 바다로부터 다시 떠오르는 이른 아침의 아름다움, 보람 있게 보낸 하루의 끝에서 어둠이 언덕과 골짜기에 내려앉을 때, 우리의 수많은 실수와 실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존재의 영원한 실체에 충실했음을 느낄 때, 그때 우리를 찾아오는 만족감."-204쪽

그 모임은 오후 늦게야 끝났고 모든 동물들은 각자의 지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늙은 고릴라 하나는 서기 새가 존 경의 보고서를 묶어둔 나무 앞에 한참 머물면서 그것을 좀 더 잘 읽어보려 애쓰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는 생각에 잠긴 채 오른쪽 귀 뒤를 긁적이더니 짚 한 오라기를 집어들고 마음 속으로부터 나오는 듯한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는 매우 의기소침해 있었다. 그건 언젠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인간 사촌들과 닮은 걸 보고 기분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구사일생이로군, 구사일생이야! 아슬아슬하게!" 혼잣말을 하며 그는 조용히 카드 놀이를 하던 곳으로 돌아갔다. -2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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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책들의 도시 1
발터 뫼르스 지음, 두행숙 옮김 / 들녘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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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 정말 단숨에 읽어내려갔다. 예고없이 선물로 받은 <꿈꾸는 책들의 도시>. 수많은 서재지인들이 이 책을 읽고 서평을 올릴 때마다 당장 장바구니로 달려가 지르고픈 충동을 느꼈다. 당연히 내 손에 들어왔으니 가만 둘리가 있나. 마침 읽던 책을 다 읽고 새 책을 골라야 할 상황이었기에 망설임없이 이놈을 택했다.

  디 스태트 데어 트러이멘덴 뷔허. 맞나? 독일어를 배운지 오래되서 발음도 헷갈리는구나. 어쨌든 직독직해하여 번역해도 '꿈꾸는 책들의 도시'라는 제목이 뽑아져나온다. 우리나라에서 좀더 판매율을 높이기 위해 원본의 제목을 바꾸는 일이 많은데 - 대표적인게 얼마전까지 즐겁게 읽었던 알랭 드 보통 씨의 책들, kiss&tell 을 '키스하기 전에 하는 말들' 로 바꾸었었다. 다른 저서도 마찬가지 - 이 책은 굳이 그럴 필요를 못 느꼈나보다.

  발터 뫼르스라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작가의 이름. 그의 전적이 궁금하여 뒷조사를 해보니 이 책 말고도 이전에 번역된 책들이 좀 있다. <밤> <푸른곰 선장의 13 1/2의 삶>(전3권)이 그것. 제목이 어째 별로 구입하고픈 동기부여를 해주지 않는다. 책 표지도 마찬가지. (아래 참조)

 


 

 

 

 

 


  이 소설은 환타지다. 그러나 요즘 중고생들이 즐겨 읽는 그런 류의 환타지가 아닌 색다른 환타지다. 소재도, 서술방식도, 스토리도. 모든 것이 새롭다. 기발하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해냈을까 싶을 정도로 아주 단순하고 사소하고 일상적인 소재로부터 대단한 이야기들을 펼쳐낸다.

  <꿈꾸는 책들의 도시>의 중심소재는 당연히 '책'이다. 작가, 독자, 서점주인, 출판업자, 헌책방 아저씨, 책 중개인 등등 책과 어떻게든 관련된 직업이면 그들은 모두 이 책의 주인공이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 당신은 독자다. 서평을 쓰고 있는 나. 나도 독자이며 취미 서평가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이 책의 주인공이며 책을 읽기 전에 일단 그들은 흥분을 감추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어쩌면 발터 뫼르스의 <꿈꾸는 책들의 도시>의 판매량이 현시점에서 5만부를 돌파했다고 자랑하는 것 역시. 그 5만부라는 것은 이 책의 소재가 '책'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책을 말하는 책은 대개 비평서이거나 에세이였다. 예를 들자면 <탐서주의자의 책>과 같은. 하지만 이 책은 출판의 현 세태를 꼬집는 것도 아니고 책을 읽자고 사회분위기를 조장하는 그런 책도 아니다. 다만 책을 소재로 하여 즐거운 이야기를 해보자는 것 뿐.

  책들의 도시. 부흐하임에서 벌어지는 환상모험담. 위대한 작가 단첼로트가 타계하고 그의 제자 힐데군스트 폰 미텐메츠라는 어려운 이름의 독일공룡은 그로부터 받은 작자미상의 뛰어난 원고를 하나 받아들고 모험을 떠난다. 부흐하임으로.  그러나 그곳에서 만나 이 원고를 보여준 이들은 하나같이 모두 놀라고 질질짜고 웃고 하다가 마지막엔 절대 이 책을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말라고 한다. 그리고 당장 이곳을 떠나라고. 아니 도대체 이 원고와 관련해 어떤 일이 벌어졌길래. 하지만 힐데군스트는 떠나지 않고 오히려 이곳에 남아 원고의 저자를 찾아나서는데.

  일반 환타지에서 신비의 검을 찾아 떠나는 대신 이 책에서는 신비의 원고 주인을 찾아 떠난다. 도중에는 지하에서 활동하는 위험한 책 사냥꾼과 책으로 가장한 온갖 벌레들과 괴물이 도사리고 있고, 그를 음해하려는 자들로 넘쳐난다. 마치 이 마을의 모든 이들이 그의 존재를 달가와하지 않는 듯 한데.

  이야기도 흥미진진하지만 이 환타지의 또다른 맛은 책과 관련된 자들이 내뱉는 대화 속에 의미심장한 문장들이다.

  예를 들면, 작가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한다.

  "저희 같은 직업에서는 좋은 문학과 나쁜 문학을 인식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정말로 좋은 문학은 당대에 제대로 인정받기가 드물지요. 최고의 작가들은 가난하게 살다 죽습니다. 조악한 작가들이 돈을 벌지요. 항상 그래왔습니다. 다음 시대에 가서야 비로소 인정받을 작가의 재능이 저 같은 에이전트에게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그때쯤 가서는 저도 이미 죽어 없을 텐데요. 제게 필요한 것은 하찮더라도 상공을 거두는 작가들입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문장은 수많은 서재폐인들을 지칭하는 듯 하다. 후훗. 물론 그들은 아무 책이나 집어들고 장바구니에 넣지는 않지만 말이다. 눈에 띄는 족족 맘에 드는 책들을 가만 두지 못하는 사람들.

 "상관없다! 중요한건 책이야! 사자! 사자! 나는 큰 바구니를 집어 들고 서가에서 책들을 마구 끄집어냈다. 제목이나 저자 이름은 물론, 가격이나 책의 상태를 볼 것도 가릴 것도 없이 하찮은 책들을 마구 쓸어 담았다. 비싼 초판본이건 값싼 덤핑 책들이건 나한테는 제기랄, 상관없었다. 그 책들이 내게 흥미 있는 분야든 아니든, 그것들을 구입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든 없든 상관없었다. 책들을 갖고 싶은 억제할 수 없는 뜨거운 갈증이 나를 사로잡아 오직 한 가지만 나를 진정시킬 수 있었다. 바로 책을 사는 것, 사는 것, 사는 것이었다."

  이 책의 재미는 저자의 기발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흥미진진한 이야기 서술과 더불어 바로 이런 다시 한번 곱씹어보며 음미할 만한 대사들을 툭툭 내던지는 그들 사이의 대화에 있다. 등장인물들은 그들의 가운데책을 놓고 서로 눈알을 붉히고 싸우기도 하지만 서로가 합의볼 수 있는 변치 않는 점이 있다면 그들 모두가 책을 좋아한다는 사실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든다. 나 역시 책을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서 책을 놓고 펼쳐지는 이 환타지 소설을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구나.

 

  "부흐링 족은 원래 어디에서 왔습니까?" 

  "그러니까 아주 자세히는 우리도 모릅니다. 추측하건대, 알 속에서 병아리가 자라듯이 우리도 책 속에서 생겨 자란 것 같습니다. 지하묘지 아주 깊은 곳에서 잠자고 있는 아주 오래되고 파손되기 쉬우며 해독 불가능한 룬문자들로 쓰인 책들 속에서요. 어느 때가 되면 책은 마치 알껍데기처럼 깨집니다. 그러면 도롱뇽처럼 작은 부흐링 족 하나가 그 속에서 미끄러져 나오지요. 그는 가죽 동굴까지 찾아옵니다. 그것은 본능입니다. 아마도."

 

  난 또 하나의 부흐링이 되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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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da78 2005-08-28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제 생각에 아프락사스님은 알에서 깨고 나오는 걸 좋아하시는군요. ^^;
*진지한 리뷰에 죄송합니다. ^^;;

2005-08-28 23: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늘빵 2005-08-29 0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판다님 / ^^ㅋ 아 그런가봅니다. ㅎㅎㅎ
속삭이신님 / 넵! ^^